題 : 還苕川居 / 초천에 돌아 와
忽 己 到 鄕 里 (홀기도향리) 어느 사이 고향에 이르러 보니
門 前 春 水 流 (문전춘수류) 문 앞에는 봄물이 흘러 내리네
欣 然 臨 藥 塢 (흔연임약오) 기쁜 맘으로 약초밭에 이르니
依 舊 見 漁 舟 (의구견어주) 고깃 배들 옛 모습 그대로라네
花 煖 林 廬 靜 (화난임려정) 꽃들 만발 숲속의 집 고요한데
松 垂 野 徑 幽 (송수야경유) 소나무 들 길에 그윽히 드리네
南 遊 數 千 里 (남유수천리) 수 천리 남녘 하늘 유람했어도
何 處 得 玆 丘 (하처득자구) 어디 에서 이런 언덕을 얻으리
< 어 휘>
苕 川 : 소내, 지은 이의 고향
欣 然 : 기쁘게
藥 塢 : 약초 밭
花 煖 : 꽃이 한창 피어남
南 遊 : 남쪽지방에서의 유배생활 (경상도 장기, 전라도 나주, 강진 등지
에서의 오랜 생활)을 의미한다. 선생께서는 전라도에서만 무려 18년
간의 유배생활을 하였음.
<지은 이>
정약용(丁若鏞, 1762 ∼1836),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 (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이다.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공은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 (一表
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공은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
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 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 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공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 났다.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高祖)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공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공의 생애를 몇 단계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면,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공은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 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 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 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遺書)를 공부하게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공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
까지를 들 수 있다. 공이 진사시에 합격,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 大學≫과 ≪중용 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 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 사간
(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
(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공은 이벽(李檗)·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공은 입교 후에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부터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공은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은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공의 강진 유배기에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에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성리학적 사상 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공은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공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經集)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공은 이 시기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 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
전서 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공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 왕조 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 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의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 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공은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集大成)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知性)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오늘 소개한 시는 5언 율시 형식으로,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하여 그 깊은 감회를 피력한 내용이다.
공의 한시 작품은 숫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질적으로도 그 수준이 높은 詩들을 창작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