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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lifeinbeauty.org
<정의로운 무역 행동주간 설교안>
적게 거둔자나 많이 거둔자나...
-만나경제-
성경말씀: 구약의 말씀 : 출애굽기 16:1-36 (요절: 출애굽기 16:18)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10:10
서신서의 말씀 : 고린도후서 8:15
찬 송: 305장, 307장
오늘은 “정의로운 무역”이라는 좀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교단이 가맹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2007년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한 주간을 “정의로운 무역 행동주간”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을 택해서 “정의로운 무역 행동주간”을 지키는 이유는 10월 16일이 ‘세계식량의 날’이고 10월 17일이 ‘국제빈곤퇴치의 날’이자 ‘빈곤반대궐기의 날’이고 10월 19부터 21일까지는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세계은행과 IMF의 합동연차회의’를 하는 등 경제와 관련된 중요한 국제행사가 이 주간에 열리기 때문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05년에도 무역정의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세계 약 82개국에서 1,000만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교회가 영국 국회의원을 상대로 세계무역을 정의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캠페인을 한 결과 당시 수상이던 토니 블레어는 자유무역을 막무가내로 주장했는데 의회는 가난한 나라에게 무조건 자유무역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의회 입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정의로운 무역 캠페인”은 우리 한국으로서는 아주 시기적절한 캠페인이고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국민적 관심사인 한미 FTA 비준건이 이번 국회에 상정되어 다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고 이번 아프카니스탄 인질사태에서 보았듯이 한국과 한국교회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에 좀 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기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캠페인은 한국에서는 대구가 주도를 해서 행합니다. 국채보상운동, 2.28 운동의 전통이 있는 대구, 특히 기독교인구가 타 지역에 비해 낮은 이 대구에서 이런 세계경제정의를 위한 기독교의 공헌이 시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세계교회가 왜 ‘무역’에다 ‘정의’를 연결해서 행동주간을 지키겠습니까? 그 이유는 현 세계의 경제가 정의롭지 않다는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하루에 세계에서 가난과 연관되어 죽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24,000 명입니다. 이 때문에 스위스교회는 몇 년전에 스위스 연방의회건물앞에 24,000 개의 촛불을 켜놓고 침국기도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전세계국민총소득(GNI)이 6,987$입니다. 세계인구 모두의 소득이 약 7,000$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인구 절반인 28억은 하루 2$ 이하로 삽니다. 또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1%의 부자들의 수입이 세계인구 57%의 수입과 맞먹습니다. 수치로 말씀드리면 세계최고 부자 500명의 총재산이 가장 가난한 사람 4억1천6백만명의 총재산보다도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의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제성장이 빈부의 격차를 점점 늘인다는 사실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화를 하면서 시장개방과 무역자유화를 추진해 왔는데 19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동안의 무역자유화의 결과가 경제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6%에서 2%로 감소되었고 개발도상국의 1인당 수입은 3%에서 1.5%로 감소되었습니다.
그러면 경제성장의 이익과 자유무역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거의 80%이상이 다국적 기업과 부자들에게 돌아갑니다. 100불정도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 80%이상은 다국적 기업과 부자들에게 돌아가고 1, 2%의 이득만이 가난한 자에게 돌아갑니다. 세계인구중 상위 부유층 20%와 하위 빈곤층 20%의 경제력 비율이 1960년에는 30:1이었는데 2002년에는 114:1로 벌어졌습니다. 약 4배 벌어진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국민총생산이 1004인데 유럽연합 소가 일년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액수가 평균 800$입니다.
이런 세계경제의 불평등에 대한 수치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시간관계상 세계경제현실을 세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요지는 세계의 경제가 이토록 심각하게 불공평하고 빈부의 편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세계무역’을 ‘정의’의 시각에서 보고 바로 잡는 캠페인을 하게 된 배경입니다.
세계 교회가 이렇게 경제문제에 뛰어드는 것은 경제가 인간공동체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경제란 영어로 ‘economy'라고 합니다.이 ‘이코노미’란 말은 ‘가정’이란 헬라어 ‘오이코스’(oikos)와 ‘법칙’이란 헬라어 '노무스‘(nomus)에서 왔습니다. ‘생태’라는 영어인 ‘에코로지’(ecololgy)도 바로 이 ‘오이코스’란 말에서 왔고 우리 교회가 말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즉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존재‘란 이 말도 바로 이 ‘오이코스’란 말에서 왔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지구를 포함한 창조세계전체를 ‘하나님의 오이코스’, 즉 ‘하나님의 가정’으로 봅니다. 세계란 가정, 경제, 생태, 즉 창조세계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모든 피조물의 삶을 꾸려가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주된 일입니다. 실제 ‘계약’, ‘신용’, ‘증권’ 등 많은 경제용어들도 다 신학적 용어에서 나왔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나 세계개혁교회연맹은 최근에 계속 세계대회를 통해서 ‘경제는 사회생활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라고 천명하고 전 세계 교회로 하여금 세계경제를 하나님의 정의위에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선교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하나님의 경제정의를 위해 헌신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추석직전에 발표된 보도에 따르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내년 4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초청으로 유엔을 방문해 연설하게 되는데 그 연설의 핵심메세지가 무엇인가 하면 “생태계 보호를 전 세계 카톨릭교도들의 ‘도덕적 의무’로 선언할 예정이란 것입니다. 칼빈은 경제를 하나님이 피조물을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교회가 경제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이 뿐 아니라 경제는 오늘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현안입니다. 경제가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가 평화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테러의 원인도 바로 경제적 불평등 때문입니다. 평화란 한자어는 평평할 평(平), 화할 화(和)인데 화(和)를 보면 벼 화(禾)자와 입 구(口)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平和)는 모든 사람의 입(口)에 곡식(禾)이 골고루 들어가는 것(平), 즉 경제정의를 가리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경제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경제학은 무엇인가? 오늘 읽은 세 말씀이 하나님의 경제학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구약의 말씀은 유명한 만나이야기입니다. 만나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민족이 애급의 종살이에서 나와서 해방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데 광야길 행진 3일도 못되어 ‘우리가 애급에 있을 때는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었는데 이제 이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다.“는 불평이 그들에게서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양식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사건이 바로 만나스토리입니다. 칼빈은 이 만나스토리를 두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은총으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경제의 모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경제학을 ‘만나경제’(Manna Economy)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학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경제로 자기 백성을 먹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경제는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는 보통 경제와 신앙을 물질적 문제와 영적인 문제로 구분하여 경제는 신앙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제는 신앙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많은 경제용어들이 신학용어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제 경제를 사람에게만 맡겨 놓지 말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일로 교회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만나경제에서는 경제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6:12에 보면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도록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란 신학적 선언입니다. 만나경제에서 먹거리는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만을 위한 양식으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주기도에서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꼭 하루분의 식량이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시장이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이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능력”도 아닌 하나님이 먹여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경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은 ‘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란 우리의 예배이고 신앙고백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그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배고프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만나경제에서는 중요한 경영원칙이 나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6:18에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 분배원칙입니다. 이 경제원칙은 사도바울에게서 다시 강조되었습니다(고후 8:15). 하나님의 경제원칙은 이처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 경제원칙입니다. 시장은 열려있습니다. 마음대로 만나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에서의 균등분배원칙이 아닙니다. 모두가 똑 같은 양으로 분배받은 것이 아닙니다. 식구수대로 분배되었습니다. 이 원칙은 사도행전에서도 다시 나오는데 사도행전 2:45에 보면 초대교회에 복음의 가치에 동조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의’란 말과 ‘필요에 따라’란 말입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눈 것입니다. 이것은 균등분배(equal distribution)가 아닌 공정분배(fair distribution)입니다. 바로 이 분배원칙이 자본주의도 넘어서고 공산주의도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의 경제원칙입니다.
네번째의 만나경제의 원칙은 ‘모두에게 넉넉한 경제’입니다. “많이 거둔자도 모자라지 않았고 적게 거둔자로 남지 않았다.”는 말은 각 사람이 가져간 양은 서로 달랐으나 모두가 만족한 경제라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경제성장을 이룩하지만 그 결정적 맹점이 무엇인가 하면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경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극심한 세계경제의 양극화 현실을 잠깐 보았듯이 지금 세계경제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남아돌아도 너무 남아돌고 세계인구 대다수에는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는 경제입니다. 이 경제구조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만나경제원칙은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10에는 “모두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수가 아닌 모두에게 풍성하고 넉넉한 경제, 그것이 하나님의 경제의 목적입니다.
만나경제의 다섯 번째 원칙은 경제에는 규제가 따라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각자에게 넉넉하고 모두가 다 만족하려면 그것을 분배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IMF나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등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시장은 자유해야 하고 시장은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장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의 시장에다가 신성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완전히 정의롭고 신성한 존재가 없습니다. 컴퓨터도 결국 사람이 조작하듯이 시장도 결국 사람에 의해 운영되고 조작됩니다. 사람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사람이 조작하는 시장이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시장에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이 시장에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했고 교회는 국가가 이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감독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국제투기꾼으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 (George Soros) 조차도 “시장은 정의의 기능을 갖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에 정의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부개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만나경제가 정의로운 경제가 되게 하는 여섯 번째 원칙은 ‘알맞음의 원칙’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16에 보면 한 사람당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거두도록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식구수대로 거두는 ‘알맞음의 경제’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원칙입니다. 진주에 유명한 도넛 가게가 있습니다. 어떤 노부부가 이 도넛집을 경영하는데 이 도넛이 얼마나 맛있는지 가게를 열자말자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부부는 하루에 딱 300개만 만들어서 파니까 오후 2,3시쯤에는 다 팔리고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그렇게 잘 팔리는데 많이 만들어서 지점도 내고 하면 많이 팔면 큰 부자가 될 것 아닙니까?” 했더니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300개만 팔면 우리 두 부부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도 도넛을 팔아야 먹고 사니 나는 이것만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만나경제’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나경제가 가한 일곱 번 째 원칙은 부의 축적을 금지하는 원칙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 19-20에는 하루분만의 양식을 거두고 그 다음날까지 남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나경제는 부의 축적을 금지했습니다. 많이 거둔 자의 양식은 썩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부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한된 자원 속에서 부의 편중된 축적은 다른 한쪽을 빈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공동의 삶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경영의 기본적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오늘의 경제는 엄청나게 잘못된 것입니다. 세계의 부의 편중이 얼마나 뒤틀려 있느냐 하면 세계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의 재산보다도 개인재산이 더 많은 부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나경제의 여덟 번째 원칙은 ‘약자보호우선의 원칙’입니다. 적게 거둔 자에게 규제가 없는대신 많이 거둔자에겐 잉여의 양식이 썪는 규제가 있었다는 의미는 경제의 우선권은 약자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약자보호원칙은 유엔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경제지표는 가난한 사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나경제의 원칙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지표는 GNP, 혹은 GDP 를 기준으로 하는데 만나경제는 가난한 자의 생명을 위한 양식의 보증이 경제지표였습니다. 유엔도 국민의 영양상태, 문맹퇴치율, 유아사망률, 사회 문화적 권리의 확보 등이 그 나라의 경제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만나경제의 아홉 번째 원칙은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조화입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은 개인도 살고 공동체도 사는 원칙이었습니다. 옛날에 신용협동조합은 “萬人은 一人을 위해 一人은 萬人을 위해”란 구호를 갖는데 이것도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설정의 방안이었습니다. 칼빈은 개인과 공동체를 조화하는 경제로 연대경제(solidairty economy)를 제창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서로를 생각하는 경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나경제의 마지막 원칙은 경제는 사랑과 은총위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1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만나를 보고 이게 뭐냐고 묻거든 이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제원칙은 사랑과 은총입니다. 이 은총의 경제원칙은 이사야 55:1에 이렇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먹고사는 것은 돈이 없어도 값이 없어도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경제, 은총의 경제입니다. 오늘의 경제는 무한경쟁과 무한이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경제원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경제원칙과는 정면으로 모순됩니다.
이 만나경제를 살펴보다 보니까 하나님의 경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경제의 분배 : 모두가 넉넉한 경제 (Economy of Enough for Everyone)
● 경제적 지표 : 가난한 자 우선의 경제 (God's preferential option of the poor)
● 경제적 역학 :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Solidairty Economy)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무역이 이 세상의 경제원칙, 무역원칙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역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무역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경제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무역이 되었든, 보호무역이 되었든 위에 열거한 하나님의 경제원칙에 의해서 정의로워야 합니다. 자유무역협정 이후에 2사람만 웃고 8사람이 울게 되면 그것은 정의로운 무역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말라위 상공산업부 샘 므파수(Sam Mpasu) 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장을 개방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국민이 이렇게 야위게 된 이유입니다. 자유무역이 하나님의 형상을 배가 등에 붙도록 여위게 해서는 좋은 무역이 아닙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자유무역이 경제정의를 심각하게 깨트린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공정무역은 대등한 조건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유무역은 이미 불평등한 조건에서 시작하므로 항상 강자에게 유리하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세계 FTA에서 보듯이 한미 FTA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더욱 큰 관심은 우리가 어떤 경제행위를 하든지 만나경제에서 열거된 하나님의 경제원칙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경제원칙에 순종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우리 모두 세계의 무역이 정의로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물이 모두가 풍성한 생명을 얻는 그런 아름다운 생명동산이 되도록 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일하십시다. 아멘.
작성 : 2007. 10. 1. 박성원 (영남신학대학교 석좌교수, WCC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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