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
바람이 먼저 나를 불러 세운 날이 있었다. 길은 이른 겨울의 빛을 머금고 차분히 닿아 있었고, 그 위에 서 있는 나는 마치 오래된 이야기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고요했다. 가볍게 흔들리는 스카프의 자락 너머로 바람이 속삭였다. 무언가를 잊지 말라는 듯, 혹은 이제야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라도 있다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바람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내 곁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굴다가, 이따금 내 옷깃을 당기며 한 걸음 앞으로 내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낯선 길, 낯선 기온, 낯선 향기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은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 듯 편안했다. 바람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멀리 떠난 사람도 고향으로 데리고 돌아오고, 오래 묻어둔 기억도 다시 불러 세우는 힘이 있다.
걷다 보니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어릴 적 엄마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창문을 한 번 더 닫고, 나를 무릎 위에 앉혀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바람은 엄마의 마음을 자주 헤집어 놓았다.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의 엄마는 유난히 말이 많았고, 유난히 다정했다. 어린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엄마가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바람 속에는 말하지 못한 그리움이 실려 있었던 것 같다. 차밭 사이를 걷던 그날, 바람이 스쳤을 때 나는 그 향 속에서 엄마의 손 냄새를 느꼈다. 따뜻하고, 조금은 마른 풀내 같고, 오래도록 잊지 못한 포근함이 스며 있던 향. 순간 멀리서 엄마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다면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지금의 나를 어떤 말로 안아 주었을까. 바람은 대답 대신 스카프를 더 높이 들어 올려, 마치 엄마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나는 길 위에서 손을 내밀며 웃었다. 누구에게 보내는 인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인사는 분명 어떤 곳에는 닿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세상을 향한 인사였고, 나 자신을 향한 격려였고, 이미 떠나간 엄마에게 보내는 회답이었다. 바람은 그 인사를 받아들여 멀리 보내 주는 전령 같았다. 여행길에서 바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리가 미처 마음을 준비하지 못한 순간에 불어와, 묵혀 둔 감정의 뚜껑을 살짝 들어 올린다. 살면서 외면해 온 질문들,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 물음들을 바람은 교묘하게 꺼내 놓는다. 나는 그 모든 물음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들녘을 가르는 바람의 결이 너무 선명해서, 그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바람이 내게 말하는 듯했다. ‘흘러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야. 멈추어 서는 것이 더 슬픈 일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래도록 안고 있던 무게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지나온 계절들, 이별의 흔적, 떠나보낸 시간들까지 모두 바람의 호흡 속에서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삶은 늘 앞을 향해 흐르지만, 기억은 때때로 뒤돌아보아야만 이해되는 법이다. 바람은 그 둘 사이를 잇는 다리였다.
스카프가 크게 휘날릴 만큼 바람이 세차게 불던 순간, 나는 옷깃을 여미었다. 나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지나온 시간과 화해하며, 오고 있는 변화를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바라보는 얼굴. 그 표정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든 것이 아니라, 바람이 천천히 준비시킨 결과였다. 여행의 마지막 길목에서 바람은 잠시 멈춰 섰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조용히 흔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울림이 있었다. ‘안녕.그리고 다시.‘ 나는 알고 있다. 바람이 다시 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그리움이 내게 닿는 순간일 수도 있고, 내가 잊었던 용기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바람은 끝나지 않는 노래다. 누군가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삶을 다시 쓰게 하는 목소리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그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 스카프의 작은 떨림에서, 길의 먼지 날림 사이에서, 그리고 멀리 떠난 엄마의 빈자리를 지나가는 깊은 숨결 속에서. 그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바람이 건네는 모든 인사와, 바람이 남긴 모든 기억을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