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
전호석
파란시선 0129
2023년 7월 2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85쪽
ISBN 979-11-91897-58-6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면 알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스콜]은 전호석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학림」, 「반투명」, 「행신」 등 6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전호석 시인은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9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스콜]을 썼다.
“전호석 시인이 표상하는 주체는 “불붙은 도화선처럼 해롱거렸고 끄트머리에 무엇이 달려 있을지도” 모르는 채 “부글부글” 끓고 있다(「수류탄」). 언제 터질지 모를 내면의 “균열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지더라도(「앞선 일행」) 그것이 환멸을 예비하는 데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전호석 시인은 끓는점에 도달한 주체에게 “참을 수 없어지면” “침묵 비슷한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선성(善性)」). 천성이 선한 시인은 세계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기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택한다. “정면으로 마주치지 말 것/터진 마음을 추스를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아무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돌보고자 한다(「방울」).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생명 없는 백색 표면들, 빛나는 검은 구멍들, 공허와 권태를 지닌 거대한 판으로서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실패를 무릅쓰고 세계가 요구하는 것에 저항하는, 잉여적 존재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 사람”은 그 무엇도 아닌 사람이자 잉여적 존재이지만, 세계의 균열을 체현하며 틈새를 확장하는 부정태로서의 주체를 긍정하는 기제이다. 전호석 시인의 “아무 사람”이 왜소화된 주체의 비애나 환멸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흐르는 것들은 흐르고 내리는 것들은 내”린다. 그것은 현상일 따름이다. 현상을 응시하는 본질로서의 “나는 있다”. ‘나’는 침범되지 않고 훼손되지 않는다. “몸에 가득한 실금”이 “나를 괴롭히는 일”은 “이해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서 불안을 야기할지언정 주체를 붕괴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부정적 현상은 주체를 단단하게 하고 “온몸에서 열매가 맺히”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며 “다음 장면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럼으로써 전호석 시인의 ‘나’는 무엇에든 고착되지 않는 “아무 사람”이 되어 매 순간 유동하는 주체로 무한히 확장할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lecture」)
또한 확장 가능성은 주체의 내면에 한정되기보다는 타자를 향한 구체적 행위를 타진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모바일」) “다음 장면”을 생성하는 수행이야말로 전호석 시인이 희구하는 주체의 양태일 것이다. 비록 갈 곳 없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며 길 가장자리에서 얼룩 같은 구멍으로 존재하는 외롭고 쓸쓸한 ‘나’이더라도 “나는 당신을 책임지기로/당신은 나에게 책임져지기로 하”는 관계 맺음의 다짐은 ‘나’를 다른 위치, 다른 가능성의 자리에 서게 한다(「애연」). 그런 점에서 “아무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서 주체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주체임이 분명하다. 그 가능성을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존재의 취약함을 버텨 내는 일일 것이다. 전호석 시인이 형상화한 주체의 왜소함이 그러한 버팀을 가능성으로 전유하기 위해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곤경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버텨 내어 그 응축된 힘으로 몸을 움직여 “공간과 풍경을 자”르며(「모바일」) 나아가려는 도약에의 의지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윤리인지도 모르겠다.” (이상 이병국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전호석 시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아무 사람”처럼 나온다. “아무 사람”은 말 그대로 아무나 될 수 있는 사람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도 들어가는데, 때로는 시의 화자조차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이 세계를 돌아다닌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화자에게 발화자로서의 권위가 충분할 리 없다. 미약한 권위의 발화자에게 이 세계는 사실상 구경꾼으로서의 지위밖에 허락하지 않는다(“사실/구경이 취미입니다 제 일이 아닌/ 파국들”). 혹은 관망자나 방관자의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이 아무래도 대충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데 이상하게 아프게 들린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이의 고백이 나 한 사람이나 너 한 사람의 고백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삼 “아무 사람”의 고백으로 들리는 그 말이 거창할 리도 유창할 리도 없지만, 그럼에도 “내리는 형태로 찍힌 눈송이들”처럼 정돈되지 않은 그 말이 이상하게 반갑다. “사는 일은 어렵”고 “지폐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많고 많은 달변가의 말보다 “쌓인 무가지”처럼 무용하게 “펄럭”이는 말이 귀에 와서 콕콕 박히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 말은 ‘아무 사람의 말’이면서 바로 ‘나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전호석의 시가 독자에게 기대하는 말도 어쩌면 그와 같은 말일 것이다.
―김언(시인)
•― 시인의 말
사람이 떠난 하얀 담장 빛 받아 눈부시다
이미 죽은 사람들과 유명무실한 존재들
웅덩이가 넓어지고 덩굴이 담장을 덮어 간다
나는 한적한 사관이고 버섯이 자라나는 그늘에 갇혀 있다
•― 저자 소개
전호석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9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스콜]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학림 – 11
capital – 14
팔판동 – 16
특수효과 보고서 – 18
피사체 – 20
답신이 없어서 – 22
잔다리로 – 24
낡고 푸른 – 26
진찰 – 28
반투명 – 30
공장 – 32
셀룰러 – 34
소풍 – 38
선성(善性) – 40
제2부
제웅 – 45
치아 – 46
회랑 세계 염탐 – 48
젖은 회색 주술 – 50
감시 망각 처벌 – 52
거짓 정오 액체 – 54
옷깃 사건 나비 – 56
파티션 – 58
가상 물질 운전 – 60
제3부
중앙도서관 – 65
동묘 앞 – 68
역(力) – 70
라이브러리 – 73
풍향계 – 76
cardhouse – 78
조류학 – 80
유충 – 82
다음 날 아무도 없는 폭포 – 84
끓, – 86
전체주의 – 88
발전기 – 90
쥐 – 92
뭐야? – 94
책과 동전 – 96
torso – 98
몸의 바다 – 100
라이브러리언 – 102
헤어진 다음 날 – 104
아나톨리아 해안 – 106
또한 왈츠 – 109
제4부
샤프심과 콘크리트…… – 117
팔면영롱 – 124
제5부
수류탄 – 131
스콜 – 132
레터박스 – 134
앞선 일행 – 136
필기체 – 138
직사광선 – 140
모바일 – 142
방울 – 144
긴 터널 – 146
애연 – 148
소극 – 150
몸, 몸뿐 – 151
행신 – 154
lecture – 156
패턴 – 158
두드러기 – 160
커피믹스 커피 – 162
antiaging – 164
무기성(無記性) – 166
해설 이병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모든 것 – 168
•― 시집 속의 시 세 편
학림
이 거리에는 동상이 참 많습니다
검은 몸 위에 빗물 자국이 가득한데요
나무들이 자라나는 동안
동상은 동상이고
낡는 것과 자라는 것 사이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벤치
죽은 나무로 만든 기호 위에서
사람들 이야기를 훔쳐 들었는데요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듣고
우는 사람의 하소연 같은 것들에 귀 기울여 보았습니다
분수 앞에서 고민하고
새파란 잎이 떨어져 있습니다
구름이 박힌 하늘은
움직이고 있을까요 무엇이
낡아 가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자라나게 하나요
나는 시간이 많고
괘종시계와 손목시계의 일 초는 같아요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오늘은 잘 보였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기다리기
각질이 떨어지고
마음 한곳에 사라지지 않는 겨울을 두고
눈사람을 만들고 녹였습니다
눈사람과 동상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거
둘 다 찰나일까요
가르침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강박합니다
어깨에 묻은 새똥을 모르고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쉽게 말하고
사는 일은 어렵네요
지폐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데
세계는 풍요롭고
동상은 번들거려요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낱알들을 눈이라고 불러 봅니다
내 몸을 조각하는
내 몸
당신은 혼돈이 아닙니다
위태롭지도 않습니다
음영은 어디에나 있고
입체를 느끼게 하고
나는 특별하다고 믿는 정신이 당신을 뻔하게 만들고
신기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어 보려고 ■
반투명
집으로 가기 전 마지막 휴게소
마른세수
뽕짝 음악
물때 낀 유리창
너머 밥 먹는 사람들
나는 강물 흐르는 것을 본다
붉은 하늘 가장자리
덜 붉은 하늘
자꾸 비켜서는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훑으면
한없이 멀어진 사람들
송사리를 건져 내는 왜가리의 눈
가죽 가방과 노트
선물하기 좋은 물건들을 고르는 동안
박각시나방이 꽃들을 배회하고 ■
행신
자꾸만 연말이 되고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종을 다시, 다시 치고 저번에도 왔던 길인데, 먹었던 밥인데, 만났던 사람들과 또 만난다
우리 참 오래 봤군, 그렇군, 그렇군, 그렇군……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만난다, 실패해서 만난다
내일 당장 뭐가 필요할까
다 마신 술병을 치우다 보면
없으면 죽는 거, 못 참는 게 있지 않아?
월계수 잎……
고기와 함께 끓는
돌아가는 길은 많고 달고 귀찮다
뭔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지만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 하늘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잎을 따며 생각해 보면 나는
포대가 내용물도 없이 홀로 서 있는 꼴이라고
풀썩 쓰러지면, 납작해지는
그리고 눈 같은 것에 뒤덮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아주 멀리 떠나도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사람은 그렇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 혼자 숨차니까
당신 앞에 멈춰 몰래 운다
괴물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내 목을 가지기 위해 내 뒤에서 언제나 기다린다
눈을 채워 두면
얼마나 버틸 것 같은데?
친구가 술을 따라 주며 묻는다 쉼표와 말줄임표가, 낙엽이 너무 많다 이런 삶을…… 잎을 태우며
나는 인정하기로 한다, 한다, 한다…… 모든 혐의를
근원을
이를테면 재즈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