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머니즘(humanism)
휴머니즘은 14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확산된 철학 및 문학운동으로 근대문화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다. 그
것은 또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모든 만물의 척도로 삼으
며,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한계나 인간의 관심을 주제로 하는 철학이다.
먼저 역사적 의미에 있어서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측면이며, 그
러한 측면을 통하여 르세상스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과 역사의 세계 안으로 재
통합하려 했으며 인간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키케로와 바로의 시대에 인간의 교육을 의미하였던 h-
umanitas로부터 그리고 희랍인들이 paideia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여기서 paideia란 교양과목들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인간에게 있어 고유
한 도구들이요 영역들이라고 생각하였던 자들이 주장하는 교육이다. 휴머니스
트들은 주장하기를 고전적인 학문을 통하여 고전적 시대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
었으나 중세에 잃어버린 한 정신의 '재생'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정
신은 자유의 정신으로서 인간이 합리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연과 역사와 관련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자연과 역사를 인간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옛날로의 회귀'로서의 휴머니즘은 지나간 과거의 단순한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발휘하였던, 그러나 중세에 상실
해버린(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자질과 능력의 부흥과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었다. 그러한 회귀를 이야기하면서 휴머니스트들은 중세의 유산을 거부하였으
며 그 대신에 고전시대의 유산을 선택하였다. 그들이 인문학-시.수사학.역사.
윤리학.정치학-에 부여하였던 영예는 이러한 분야들만이 인간을 그렇게 교육할
수 있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신념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1. 자유: 자유의 고양은 실제로 휴머니스트들의 주요 주제들 가운데 하나
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했던 자유는 인간이 자연과 사회 안에서 행사할 수
있고 행사해야만 하는 자유였다. 중세의 근본적인 제도들-제국, 교회, 봉건제
도-은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고 털끝만큼도 수정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의 수
호장치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열망할 수 있
는 모든 정신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은(빵으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인간
이 속해 있는 질서, 즉 우주적 질서의 해석자요 수호자인 성직계급으로부터 파
생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작용하였다. 자율을 위해 싸웠고 또 투쟁하고
있었던 도시들이나 공동체들, 또한 전통적인 계급제도가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던 도시들이나 공동체들에서 싹튼
휴머니즘은 인간의 삶을 세계 안에 자율적인 방식으로 투사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였다. 지안노초 마네티(1396-1459년), 마르실리오 피치노(1433-
99년),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94년)는 자유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인간의 세
계를 형성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며, 세계를 완전하게 개선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누구보다도 피코는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에서
신이 직접 말하는 식의 단어들로 인간에 대한 이러한 신앙을 표현하였다.
"아담아 나는 너에게 예정된 위치나 특수한 모습이나 어떤 특별한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네가 네 스스로의 결정과 선택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피조물들의 한계는 나의 규정된 법
안에 수록되어 있다. 너는 내가 너에게 부여해준 자유의 힘으로써 어떤 장애에
도 위축되지 말고 너 자신의 본성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네가 세상에 있는 것
을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너를 세상의 중심에 두었다. 자유
롭고 주권적인 장인과도 같이 네가 스스로 선택하게 될 모습으로 너 자신을 형
성하고 빚어낼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천상적 존재로 만들지도 않았고 지상적 존
재로도 만들지 않았으며 죽을 운명의 존재로도 영원불멸하는 존재로도 만들지
않았다."
그 이후 프랑스 휴머니스트 샤를 부이에(카를로스 보빌루스, 1475-1553년
경)는 자신의 저서 [De Sapiente]에서 동일한 주제를 취급하였다. 그 책에서
그는 이야기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프로메테우스에 비교되며 지혜는 인간에게
그의 본성을 완전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고 하였다. 오늘날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하
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에 영향을 받은 사변과 만나게 된다. 그런
데 이러한 신뢰는 그 다음 세기에 휴머니즘이 이탈리아 밖으로 진행되어 나갔을
때 미셸 드 몽테뉴(1533-92년), 피에르 샤롱(1541-1603년), 프랜치스코 산체스(
1552-81년)의 활동 가운데서 이루어진 회의론적 발전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하
지만 이러한 신뢰는 중세의 정신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휴머니즘의 교리를 형
성하였다.
2. 자연주의: 만일 자연주의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확신을 의미한다
면-자연이 인간의 영역이며,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양상들은(그의 몸, 그의
욕구, 그의 감각) 인간에게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
질 수 없고 자연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휴머니즘 안에서 자연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영혼을 그 자유하는 능력 때문에 드높
였지만, 그들은 몸과 몸에 스며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휴머니스트들간에
널리 퍼져 있던 쾌락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중세의 금욕주의에 대한 반감은 분
명히 인간의 자연적 측면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보여준다. 로렌초 발라(1407
-57년)의 [De Voluptate]는 이러한 평가를 수록한 중요한 기록이다. 대화의 명
제는 쾌락이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선이라는 것, 즉 인간의 행위의 유일한 목
적이라는 것이다. 도시들을 치리하는 법은 효용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이 효용
은 다시 쾌락을 만들어낸다. 모든 정부는 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 덕이란
쾌락의 계산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쾌락, 또는 적어도 효용성은 삶의 욕
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시도하는 의학.법률학.시학.웅변술 등과 같은 학문의 목
적이다. 발라는 [De Professione Religiosorum]에서 수도원 생활의 종교적 우
월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생애는 수도원에 속한 자들
만이 추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계급의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사람들이 뒤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발라와
더불어 콜루치오 살루타티(1331-1406년), 지아노초 마네티, 포지오 브라치올리
니(1380-1459년) 등은 금욕주의와 금욕주의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수도원 생활에
반대하는 토론을 수행하였다.
휴머니스트들은 도덕적 삶에 있어서의 쾌락의 위치를 인정하고 중세에는
불경스러운 철학자로 취급되었던 에피쿠로스를 옹호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에
피쿠로스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스승이었으며 인간을 인간의 진
정한 본성 가운데서 이해했던 철학자였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자연성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인식하였고 따라서 명상적 삶보다는 행동적 삶의 우위성을, 자연학이나 형이상
학보다는 도덕철학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년)
는 [Isagogicon Moralis Disciplinae]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말하자면
도덕철학은 우리의 영역이다. 도덕철학을 거부하고 자연학에 몰두하는 자들은
생소한 일에 자기자신을 내어주고 그들 자신들의 문제는 등한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주장되는 것처럼 이 말은 휴머니스트들이 자연에 대한 탐구를
멀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중세철학이 부당하게 소홀히 해
왔던 인간의 삶의 한 측면을 주장하는 것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마테오 팔미
에리(1406-75년)의 논문 [Della vita civile]아 바르톨로메오 데 사치(1421-81
년)의 [De Optime Cive]는 동일한 관념을 표현해준다. 브루니는 실제로 아리스
토텔레스의 [Nicomachean Ethics]와 [Politics]를 번역하였으며 경제학에 대한
그의 저서들을 번역하였다. 모든 휴머니스트들은 '도덕적' 아리스토텔레스, 즉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선과 악을 서술했고 시민사회의 조건과 형태들을 논
의하였던 고대의 지혜의 대가를 중세의 전통을 낳은 '자연학자'요 '형이상학자'
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대립시키려는 경향을 가졌다. 그들은 '도덕적' 아리스토
텔레스가 돈의 가치를 인정하여 개인의 복지나 사회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으
로 생각했다고 믿었으며, 돈을 천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했던 중세 금
욕주의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휴머니즘은 그렇게 하여 마키아벨리(여러 방면
에서 휴머니스트였다)의 저작에 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저작은 정치 세계에서
모든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전제를 제거하였으며 정치활동의 한계는 정치의
영역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어떤 편견없이 여러가지 상
황에 있어서 정치적 인간에게 제공된 선택의 기회들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3. 역사적 관심: 휴머니즘의 표어였던 '예날로의 회귀'는 휴머니즘의 가
장 중요한 열매, 즉 사건들의 역사적 관점이라는 열매를 낳게 하였다. 중세는
대부분 고전문화를 알고 그것을 이용하였으나 그것과 동화되고 그것을 당대의
것으로 맏들어서 이용하였다. 중세의 저자들은 사실, 인물, 교리 등을 상세하
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저술하고 있는 강론의 세
계 가운데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위해서만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였다. 그
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리학과 연대기는 무용한 것이었다. 휴머니즘은 최초로
역사사료적 거리에 대한 관점을 분명하게 하였다.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
텔레스주의자들은 르네상스에서 서로 다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
통적 관심은 진정한 플라톤과 진정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발견하는 것, 즉 중세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퇴락하거나 채색되지 않은 그 창시자들의 진정한 교리를 발
견하는 것이었다. 문헌학적 연구는 휴머니즘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었다. 고전적 웅변에 대한 옹호는 중세기에 행해진 변형에 반대
하고 고전시대의 진정한 언어에 대한 옹호였다. 따라서 고전적 웅변의 원형을
재흥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문서의 왜곡과 거짓된 추정의 발견, 본문을
찾아내고 사본들을 연구하고 대조함으로써 본문의 확실한 형태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요구, 과거의 저술가들이나 철학자들의 인격을 그들 자신들의 세계에서 이
해하려는 시도 등은 모두 역사성에 대한 휴머니즘의 근본적인 관심을 나타내주
는 것이었다. 확실히 결과적으로 볼 때 휴머니즘은 역사적 회복이라는 그 과제
를 부분적으로만 불완전하게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과제는 결코 완결되지 않
고 있으며, 역사편찬 노력이 계속 요구되고 있다. 휴머니스트들은 이 과제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 과제를 주도하였고 그 과제를 근대문화에
유산으로 남겨주는 역할을 하였다.
시간적으로 볼 때 역사적 관점의 발견은 공간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 미술
에 있어서의 원근법의 발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대상물들 서로간
의 거리와 관찰자와의 거리를 인식하는 능력이며 따라서 그 대상물들을 그것들
이 실재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를 구별하여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었
다. 삶의 여러 측면들을 이루는 독창적이고 자율적인 중심으로서의 인간의 인
격의 중요성은 이러한 관점에서 결정된다. 현대세계가 인간의 인격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성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태도의 결과인 것이다.
4. 종교: 금욕주의와 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휴머니
즘은 반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가
치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신, 섭리, 영혼, 영혼의 불멸
성, 영혼의 자유 등과 같은 전통적인 문제들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
들은 흔히 중세의 전통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과 상당히 동일한 형태의 결론을
냈다. 하지만 휴머니즘의 상황에서 이러한 논의들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의들은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주도권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
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도권을 지닌 능력은 종교적인 영역
에서도 옹호되었다. 왜냐하면 휴머니스트들의 종교적 논의들은 두가지 원리적
주제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공공적 기능, 종교적 관용이 그
것이었다.
종교의 공공적 기능은 천상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 사이의 일치에 기초하여
인식되었다. 천상의 도시는 사람의 시민생활의 규범이며 이상이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천상의 도시를 인식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그
특성들을 지상의 도시에서 실현하고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지아노초
마네티는 그의 [De Dignitate et Excellentia Hominis]에서 성경 안에 있는 초
월적 행복에 대한 선언 뿐만 아니라 지상의 행복에 대한 선언도 발견하였음을
이야기했다. 마네티에 따르면 종교란 인간의 행위의 가치에 대한 신뢰이며, 그
행위의 성공 그리고 인간이 내세에 얻게될 보상에 대한 신뢰였다. 로렌초 발라
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마네티에게 있어서 종교의 근본
적인 기능은 시민생활의 활동, 정치활동 등 안에서 사람을 지지해주는 것이었
다.
휴머니즘의 종교적 견해에는 관용의 정신이 깊이 스며 있었다. 16-17세기
에 있었던 종교전쟁의 결과로 긍정되기에 이른 관용의 개념은 서로 다른 다양한
종교적 고백들이 하나로 환원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 대신에 휴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관용의 태도는
인류의 모든 종교적 신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 따라서 보편적 종교적
평화가 가능하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더 나가서 휴머니스트들에 따
르면 종교적 평화는 철학과 종교 사이에 본질적인 일치를 의미한다. 레오나르
도 브루니는 물었다. "사도 바울은 플라톤이 가르친 것 이상을 가르치는가?"
교회 교부들에 대하여 모든 휴머니스트들이 공유하고 있던 관점에 따르면 기독
교는 단순히 고대철학이 발전시켜놓은 지혜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철학을 지지하고 인도했던 이성은 말씀 안에 성육신한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
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마실르리오 피치노의 [De Christiana Religione](1474
년)에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한편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세게의 모든 종교들과 모든 철학들을 조화시키
는 재생적 평화를 주장한 가장 영감있는 선포자요 예언자였다. [인간의 존엄성
에 대한 연설](원래는 '평화의 찬가'라고 불리었다)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
레스주의 사이에 일치를 나타냄으로써, 이 두 교리들과 다른 고대철학, 비법,
주술, 교부학, 스콜라주의 사이의 일치를 표현함으로써, 전체 철학의 세계와 기
독교와 종교적 계시 사이의 일치를 나타냄으로써 보편적 평화의 기초를 마련하
자고 제안하였다. 피코와 더불어 많은 휴머니스트들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신앙
의 다양성은 단일한 근원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하나의 원초적 계시에서 비롯
된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신앙들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 방식으로 부분적인 것
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근원에로의 회귀'는 인류의 행복한 조상들의 종
교적 평화에로의 회귀 그리고 신학적 증오와 불관용의 종식에로의 회귀일 것이
었다. 후에 16세기의 초엽에 종교적 관용은 네덜란드의 휴머니스트 데시데리우
스 에라스무스(1466-1536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년; 그의 유명한
Utopia에서)에 의해서 근대적이고 강력한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5. 과학: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근대과학이 탄생하는데 기여한 조건들 가
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옛날로의 회귀'는 여러 세기들 동안 등한시 되
어 왔던 교리드리과 본문들을 부흥시켰다. 즉 파타고라스의 태양중심설, 아르
키메데스,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그밖의 고대 자연학자들의 저작 등이 부흥되었
다. 레오나르도.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등이 주장한 명제는 휴머니스트들에 의
해서 부흥된 플라톤주의와 피타고라스주의로부터 나왔다. 즉 자연은 수학적으
로 기록되며 다라서 자연을 이해하려면 수학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책'을 실험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맹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
스의 권위에 대한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
며, 자연을 자신의 지배영역으로 삼으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연이 인간
에게 제공해준 도구들, 즉 감각들을 가지고 자연에 의문을 가지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등의 확신이 재확인되었다.
이러한 두가지 조건들은 모두 휴머니스트들의 활동에서 실현되었다. 14세
기 스콜라학자들(오캄, 뷔리당, 작센의 알베르, 오레스메의 니콜라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몇가지 점들에 반대하여 퍼부었던
비평(오늘날 근대과학의 조상들로서 올바르게 인정되고 있는 비평들)은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이러한 과학의 기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비평
들은 14세기와 15세기에 휴머니즘을 발생시킨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반동
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과학을 연관시키지 않았
다. 반면에 그들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선에서 최초의 분리를 이루었
다. 이 결정적인 분리는 휴머니즘에 의해서 완수되었다.
16세기에 이러한 분리는 전통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던 아리스텔레스의
영역, 즉 논리학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 독일의 루돌프 아그리콜라(1442-85
년)가 그러했듯이 이탈리아인 마리오 니촐리오(1498-1576년), 프랑스인 피에르
라무스(1515-72년), 스페인인 후안 루이스 비베스(1492-1540년)는 아리스토텔레
스 논리학의 형식주의와 인위적 성격을 비판하였으며, 이 모든 사람들은 자연적
경험의 요구에 합당한 그리고 일상언어의 형식에 가까운 논리를 요구하였다.
'휴머니즘'이란 다음과 같은 교리들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왔다.
(1) 공산주의에 있어 휴머니즘은 사유재산제도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인간의 자기소외를 종식시키려는 것이다.
(2) 실용주의에 있어 이것은 그 인간중심적 견해 때문에 프로타고라스가
말했듯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다.
(3) 인격주의(또한 유심론이라고도 함)에 있어 이것은 인간이 영원한 진리
를 명상할 수 있는 것 또는 일반적으로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4) 실존주의에 있어 이것은 '인간의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의 우주 이외
에 다른 우주는 없다'고 단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