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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삼국시대 택견은 국방·전투기능 향상을 위하여 무인의 필수 무술이었으며, 나라를 지키는 무사단에서 수련하였다. 고구려 선배(仙輩)와 신라 화랑(花郞)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고구려 선배는 태조왕 때의 무사단으로 국방기능 강화를 위하여 택견을 수련하였으며, 이는 무용총 널방[玄室] 천장에 2명의 무사가 택견으로 맞겨루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화랑은 국가발전을 위한 기본무예로 택견을 수련하였는데, 그때의 택견모습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동조금강역사상의 공격·방어자세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전통이 더욱 체계화되었다. 국방과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택견이 무예로서 가치가 인정되고 수준이 높아졌으며, 더욱 조직화·일반화되었다. 《고려사》에는 택견이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로 기록되어 있으며, 택견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의종 때 이의민(李義旼)이 수박을 잘하여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였다거나, 최충헌(崔忠獻)이 중방(重房)의 힘센 자로 하여금 수박희를 시켜 이긴 자에게 교위(校尉)나 대정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택견이 관(官)에서 무예적 가치를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경기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예 수준도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라고 하였다. 택견은 고려 말 화약 발명과 새로운 무기 등장으로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자 무예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민속경기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에는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내기를 한 자는 각각 곤장이 일백이며, 유숙시킨 주인이나 노름밑천을 대준 자 또한 곤장 일백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백성들 사이에 택견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과 택견이 놀이나 경기로 행해졌음을 말하는 기록이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의 정치적·국방적 상황으로 나라에서 택견에 능한 사람들 을 뽑는 등 무예로서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10년(태종 10) <의흥부(義興府)에서 군사를 뽑는 데 수박희를 시켜 세 사람을 이긴 사람에게 방패군(防牌軍)을 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제도가 정비되고 나라가 안정되면서 무풍(武風)이 차츰 쇠퇴하여 갔으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은 뒤 무예가 다시 중시되었다. 훈련도감의 설치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무예교과서를 만드는 등 무예를 장려하였으므로 택견이 무예로서나 민속경기로서 활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4) 일제강점기
택견이 민속경기 성격을 갖는 한편 동족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적 스포츠로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보이자 일제는 이를 정책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택견을 가라테[空手]라 부르게 하였으며, 가라테를 보급시켜 택견 말살을 꾀하였다. 그러나 의식있는 사범들에 의하여 택견은 비밀리에 전승되었다.
(5) 광복이후
광복과 함께 택견은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몇몇 지도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택견 진흥을 위하여 청도관·지도관·송무관·창무관·무덕관 등 도장을 차려 후배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전통적으로 불리던 <태껸> 대신 소리가 비슷한 한자, <태권>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택견의 성격도 무예로서의 의미보다는 경기로서의 의미가 강하게 되었다. 1961년 9월 대한태수도협회가 결성된 뒤 본격적으로 경기화되었고, 62년 대한체육회 산하경기단체로 승인, 63년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65년 대한태권도협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71년 국기(國技)로 인정받았다. 73년 서울에서 제 1 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하였다. 86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 88년·92년 올림픽대회에서는 시범종목에 이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세계적 스포츠로서 세계 각국에 태권도 사범이 파견되어 민간외교는 물론 국위선양에 이바지하고 있다.
태권도의 역사
1950년대 말에도 우리나라에서 체계화된 우리무술이 존재하지 않았고,무술이라면 당수도(가라테).유도외에 소수의 중국권법등이 있었다. 당수도, 즉 공수도는
일제시대에 한반도의 일본도장에서 수련한 이들과 일본에서 귀국후 도장을 연 이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기록으로 보면 한국최초의 도장은
광복되기 두달전에 문을 연 '당수도 청도관'이다. 청도관은 초대 관장 이원국씨에 의해 세워졌고 6.25후 손덕성씨에 의해 재건되었다.손덕성씨는
그후 최홍희씨와의 마찰에 의해 도미하였고 엄운규씨가 그 뒤를 이어 청도관 관장이 되었다. 필자가 왜 태권도 역사를 다루면서 한국 공수도의 계보를
따라가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태권도의 역사를 다루자면 당수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앞에서와 같이 2대 '당수도 청도관'의 관장이 된 손덕성씨는 도미하여 미국에 태권도를 널리 전파한 분이시고, 엄운규씨는 후에 WTF(세계
태권도 연맹)의 부총재를 연임하셨던 분이다.
청도관에 이어 용산에 '철도국 도장'이 생겼다.관장은 황기로 3년뒤에
당수도 도장인 '무덕관'을 개관하였고, 청도관과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황 기 관장은 1960에 홀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사단법인 수박도회라는 협회를 만들었으나 1961년 5.16군사 정변이후,모든 관이 태수도 협회로 통합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후의 한국 민간 도장은 청도관,무덕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등 5대 문파가 있었다.이 오대 문파의 관장
중 실종된 전장섭,윤병인을 제외하고,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2대 관장 손덕성.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 바 관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여기에다 한국 전쟁 후 만들어진 군대 도장 오도관의 초대 관장
최홍희와 역시 오도관 관장을 역임한 남태희도 포함된다. 한국 태권도의 뿌리들이 모두 미국에 옮겨져 있는 셈이다.'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이
호성]
광복후 민간의 5대 문파에 이어 1954년 강원도 용대리에 국군 사상 처음으로 '오도관'이란 군 무도관이
창설되었다. 관장은 보병 제29사단 사단장이었던 최홍희씨와 사범은 남태희 중위였다.이 최홍희 관장은 '국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국군 태권도를 보급시켰고, 북한계 ITF 태권도를 설립한 인물로 초기 태권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한계
WTF태권도에서 최홍희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소외되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경력과 친북 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도관이 창설되었고, 그해 5월 용대리와 가까운 속초에서 제1군단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오도관 1.2기생 50여 명이 당수도
시범을 보인 것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술을 매우 좋하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30분 동안의 시범을 줄곧 서서 관람했으며,특히 남태희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박살 내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시범이 끝나자 이승만은 최홍희를 돌아보며 "저게 예로부터
전해 오던 우리 태껸이야 태껸!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했다. 이 한마디로 태권도라는 말을 확정시키고,미래의 태권도 발전에
전기가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최홍희씨는 남태희와 함께 태권도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명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이형근 합참 의장.조경규 국회 부의장.한창완 정치 신문사
사장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태권도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런데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에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 후 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몇
달후 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림으로써 명칭은 확정되었다. 바로 이 날이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대 태권도의 세력은 전쟁 이후의 안보 의식과 1960년대의 군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5.16전까지만 해도 태권도는 무도로 간주되어 경기 중심의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국가 최고 회의
의장은 모든 경기 단체를 대한 체육회 산하에 들어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태권도도 역시 대한 체육회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62년 민간 무도의 주류였던 5대 문파 관장과 군대의 오도관 관장이 모여 태권도 단체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미 자유당
정권때 최홍희의 주장으로 태권도란 말이 확정되어 있었으나 그때 그는 해외에 나가 있었고 상황이 이미 달라져 있어서 태수도 협회로 결정을 보았고,
이때 모인 관장들은 모두 7단으로 높였다.이 태수도 협회는 대한 공수도 협회.대한 태권도 협회(회장 최홍희)에 이어 세 번째로 조직된 무도
협회였다. 이처럼 태수도라 이름을 바꾼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민간 도장과 군 도장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대사로 가있던
최홍희씨가 다시 돌아와 태수도 협회를 맡으면서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었고 이 명칭은 두 번다시 변하지 않게
되었다.
최홍희에게 있어서 5.16은 악연이었다. 군실세로서 잘나가던 그가 해외로 나돌기 시작한 것도 박정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협회를 만들었고 태권도를 전파하는데 열성적이었다. 태권도 친선 사절단의 단장으로 유럽이나
중동을 돌고 온 그는 1966년 3월22일 태권도 협회가 구성된 9개국의 협회를 규합해 국제 태권도 연맹(ITF)를 만들었다. 그는 해외에
태권도를 더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했다. 1967년 그가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가라데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던 최영의(교쿠신
가라데의 창시자)를 만났다. 그가 일본 시민이 되기 위해 귀화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영의를 만나 귀화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며
고국에서 다시 만나 비밀리에 태권도와 가라데를 태권도로 통합시키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복부터 통일하기로 하고 샘플까지 마련했는데,
귀국하기전 술자리에서 최홍희를 비판하는 모처의 의견을 듣고 심하게 동요한후 모든걸 백지화한채 일본으로 돌아가 귀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후 그는 1970년 최홍희는 태권도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오른팔인 남태희와 함께 2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를 떠돌았다. 이때 세계 각국에 태권도 협회를 만들었으며, 1972년 남태희와 함께 다시
32개국을 돌면서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로 망명해 버린다. 1980년 그는 아들 중화와 15명의 시범단을 데리고 북한에 갔고 매년 한명씩 태권도
사범을 보낸다. 1983년 그는 다시 방북하였고 의형제였던 최덕신과 함께 다시 친북과 반정부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북한과 공산권국가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했으나 국내의 태권도 인들은 해외에서 반정부 발언을 서슴치 않으며 친북활동을 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는 현재
아직도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칭 ITF총재로 태권도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태권도는 4.19이후 문교부가 주도한 통합 회의를 통해 대한 태수도 협회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뀌었다고
하였다.그러나 비록 혁명 정부의 문교부가 무도 통합을 시도했고 전국 체전에 참가하는 등 경기 단체로서 계파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였으나,계파는
존재했고 내부사정은 복잡했다. 그러던 것이 1967년 지도관의 이종우 관장이 계파 통합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리고 1971년 이르러 현재 WTF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운용씨가 대한 태권도협회 회장이 되면서 실질적 문파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윽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태권도에서 계파를 찾기가 힘들어졌으며 오늘날에 이르는 태권도의 모습이 갖추어 졌다.
(출처 : '태권도의 역사' - 네이버 지식iN)
태권도의 초창기 도장들
"우리 태권도의 역사"를 비롯한 태권도 역사책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 태권도 기간도장
1.청도관
2.조선연무관
3.무덕관
4.YMCA권법부(창무관)
5.송무관
6.오도관
7.강덕원
8.한무관
9.정도관
* 태권도 기간도장 (基幹道場:母體館)
1946년 2월 27일 이원국(李元國. 당시35세)에 의해 최초의 태권도 도장인 '청도관(靑濤館)'이 세워진 이후로,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태권도협회로 이어지는 태권도의 통합은 1973년 40여개로 난립되던 군소 도장(관)을 9개로 정비하면서 정리된다.
1977년 8월 1일에 태권도총본관이 탄생하면서 대한태권도협회 산하 중앙 본관들이자 기간도장(基幹道場:母體館)들이던 9대 관을 아라비아 숫자로 개칭하는 등 통합이 가시화 되는데, 결국 1978년 8월 5일에 총본관이 폐쇄되고, 이어 동년 10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 공문에 의해 각 관을 폐쇄하게되고 태권도계는 통합되기에 이른다다.
태권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초기 9대 기간도장(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바로 태권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 現代史'(강원식.이경명 공저/보경문화사.1999)에서 발췌한 것과 다른 자료를 재정리한 것이다.
1. 청 도 관( 靑 濤 館 )
청도관(靑濤館)'은 태권도 최초의 도장으로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전수를 시작한 시기는 1946년 2월 27일부터라는게 정설이다.
당수도(唐手道) 청도관은 글자 그대로 '푸른 파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청년기상과 활동력을 상징으로 삼았다.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李元國)은 19세 때인 1926년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중.고교를 거친 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진학하는데, 이때 일본 공수도(空手)의 본관(本館)인 '송도관(松濤館.쇼토칸)'에 입문하여 공수도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船越)'선생으로부터 가라데를 전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송무관(松武館)'의 창설자인 '노병직(盧秉直)'관장과 함께 가라데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도관 출신으로는, 유응준.손덕성.엄운규.현종명.민운식.한인숙.정영택.강서종,백준기.우종림.남태희.고재천.곽근식.김석규.한차교.조성일.이사만.이준구.김봉식등이 있다.
청도관 분관(分館)으로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울 서대문구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과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 등이 있다.
1대 관장은 이원국(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밀항), 2대 관장은 손덕성, 3대는 엄운규이다.
2. 조 선 연 무 관 (朝鮮硏武館.지도관 )
'지도관(智道館)'은 1946년 3월 3일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청소년 시절 유도(柔道)를 수련했던 전상섭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배웠는데, 1943년 귀국후 서울 소공동에 위치했던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치게 된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전상섭은 지체없이 '조선연무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한다.
한국전쟁시 전상섭이 행방불명되면서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는데, 당시 지도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명칭을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다.
지도관 출신으로는, 배영기.이종우.김복남.박현정.이수진.정진영.이교윤.이병로,홍창진.박영근 등이 있는데, 지도관은 특히 다른 관에 비해 대련(對練:겨루기)을
중시해 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완.조점선.황대진.최영렬 등이다.
지도관의 대표적인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韓武館)'이며, 초대관장은 전상섭, 2대 윤쾌병, 3대 이종우 등이다.
3. 무 덕 관 ( 武 德 館 )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
琦)'에 의해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황기 관장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 그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주장
하지만 황기 관장의 무력(武歷)을 방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수련생은 관번 1번인 김운창을 비롯, 홍종수.최희석.유화영.남삼현.김인석,
이복성.황진태.원용법.정창영.이강익 등으로 모두 철도국 직원들이었다.
1955년 서울시 중구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는
그해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신설하고 한중(韓中)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
를 개최했다.
1960년 무덕관은 53년에 설립한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대한수박도회(大韓手博道會)'로 개칭한다.
무덕관은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돼 황기를 제명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고 뒤이어 홍종수, 오세준이 이었다.
무덕관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4. Y M C A 권 법 부 ( 창 무 관 )
창무관(彰武館)은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며 조선연무관에서 전상섭과 함께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尹炳仁)에 의해 1946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 YMCA권법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어린 시절 만주에서 '주안파'를 익힌 윤병인 관장은 해방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라데를 배웠는데, 무술의 경지가 높아 5단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일본인을 제치고 대학내 가라데부 주장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윤병인은 자신의 중국 무술을 보고 한눈에 매료된 가라데 창시자인 '도야마 간켄'과 서로의 무술을 교류하며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자와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명명(命名)한 것으로,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다.
YMCA권법부 출신으로는 이남석.김선구.홍정표.박철희.박기태.김주갑.송석주. 이주호.김순배 등이 있다.
한편 2대 관장인 이남석, 3대 관장을 지낸 김순배와 뜻이 맞지 않았던 홍정표.박철희는 창무관을 떠나 1956년 서울 신설동에 '강덕원(講德院)'을 개관했다
5. 송 무 관 ( 松 武 館 )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盧秉直)에 의해 개성에서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일본 유학생 시절, 송도관(松濤館;쇼토칸)의 후나고시 선생 밑에서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송무관을 창설한 계기였다고 한다.
노병직 관장은 수련생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대(※주먹단련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도했는데, 4급 이상이면 꼭 실전 대련을 시켰고,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엔 모서수련(冒署修練)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무관은 이회순.이영섭.김홍빈.한상민.송태학.이희진.조규창.홍영찬.강원식 등 많은 사람들을 배출했지만 기간도장 중 관세가 가장 미약했다.
초대 관장 노병직에 이어 2대 이영섭, 3대는 강원식이다
6. 오 도 관 ( 吾 道 館 )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기 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는데, 1953년에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과 만나게된다.
오도관에는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한차교.우종림.고재천.김석규.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도 손덕성.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였다고 한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관장직을 맡았다.(당시 최홍희는 명예관장) 1955년 '태권도'란 명칭을 창안해낸 최홍희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내어 본격적으로 전군(全軍)에 태권도를 보급하기에 이른다. 특히 오도관은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민간도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현종명.곽병오(작고).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았다.
7. 강덕원 (講德院)
강덕원은 한국전쟁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와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 '강(講)'에 큰 '덕(德)'자를
써서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50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현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훗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 정화.이정후.이강희.한정일.김병수.지승원.임복진 등이다.
강덕원은 서울 창신동-청진동-서대문-서울운동장-서대문로터리 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이 3대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 정착하였고 현재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8. 한무관 (韓武館)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당시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던 한국체육관
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허락을 얻어 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백명 이
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도관 관장이던 이종우와 갈등이 증폭
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지도를 중지하게 된다. 그 후로 이교윤은 서울 종로구 창
신동 강문고등학교 뒷편 공터에 한무관 간판을 내걸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
데 이 것이 한무관이 생기게 된 발판이었다고 한다.
1969년에는 중앙도장을 서울 왕십리에 개관한다.
9. 정도관 (正道館)
정도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청도관 출신인 이용우(현 국기원 심사위원)에 의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중앙본관이 개관되었다. 정도관은 모체관인 청도관과 이렇다 할 마찰없이 관을 개설했다는게 여느 신흥관의 파생과정과 다른 점이다.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라는 관훈의 정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차원, 목포, 김제 등지에 지관을 개관하며 관세를 확장해나갔다.
정도관의 초창기 수련생으로는 장용갑.김재기.김기동.오부웅.주계문.박태현 등이고, 그 뒤를 이어 박경선.심명구.김명환.김학근.전영근.전선용.이종오 등이 있다.
(출처 : '태권도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 네이버 지식iN)
태권도 역사의 시초를 대략 정리하자면,
50년전, 공수도(=당수, 가라테) 등을 수련하던 분들이 모여서 태권도를 창설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태권도의 역사는 사실 꽤 짧죠)
그렇기에 태권도가 일본의 공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공수도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무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도(柔道), 검도(劍道)와는 달리 태권도(跆拳道)와 합기도(合氣道)를 우리나라에서 기원한 걸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跆拳道와 合氣道는 그 기원을 각각 오키나와의 맨손 무예인 오키나와테(沖手)와 일본의 실전 고무도(實戰 古武道)인 유술(柔術)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태권도의 기원인 오키나와테(沖手)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명의 유신중 일부가 유구국(오키나와의 옛 지명, 홍길동이 마지막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략 400여 년 전까지는 일본과 무관한 독립국이었고, 나중에 일본에게 침략 당해 식민지가 되었다.)에 망명하여 중국의 남권(주로 손을 사용하는 권법으로 이소룡이 어릴 때 배웠다는 영춘권, 홍금보가 배운 홍가권등이 유명하다. 실존 인물인 황비홍도 홍가권의 대가였다. 하지만 영화 속 황비홍인 이연걸은 북파(발을 많이 사용) 소림권을 배운 배우이기에 영화상의 황비홍은 발차기를 잘하는 것이다.)을 전수하였고, 그 후 일본이 실시한 오키나와섬의 원주민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무기의 소지를 엄격히 금지하는 식민 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오키나와 특유의 맨손 격투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오키나와테는 손을 주로 쓰는 무예인 것이다.
이 무예가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일본 본토에 전해졌지만, 일본인이 식민지의 무예라고 경원시하여 크게 보급이 되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구제국 일본군의 정식 무예 과목은 劍道와 柔道였었다. 그러다가 1930 ~ 40년대에 송도관등의 유파를 이루며 일본 본토에 서서히 정착을 하였고, 이름이 空手(일본식 발음은 카라테, 뜻은 빈손 정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에서 온 맨손 무예니까)로 바뀌었다. 이 때 우리나라 사람인 최홍희씨(우리나라 국방군 시절의 장군이었다, 최영의씨가 아니다.)가 일본 유학 중에 카라테의 한 유파인 송도관에서 이 무도를 배워 와서 한국군에게 보급하였다.
(그 사이에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간추리자면(이 내용은 퍼온 것을 요약한 것 임.) 한국 최초 태권도(?)도장은 이원국씨 관장으로 당수도 청도관 인데. 6.25이후 손덕성씨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이 당수도가 카라테이다. 그 이후 엄운규씨가 그 뒤를 이었는데. 손덕성씨는 이후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하였고 엄운규씨는 지금 우리나라 태권도인 WTF태권도 부총재를 연임했었다(흔히들 북한 태권도 라고 하는 것은 ITF태권도임.). 광복 이후로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70년대 초에 필자도 여기서 수련한 적이 있다.), 창무관, 송무관 이렇게 해서 5대 큰 문파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1954년 '오도관' 이라는 군대 무도관이 생겼고, 그 곳의 관장이 최홍희씨 이다.(당시 29사단 사단장) 그리고 1군단 창설식에서 그 오도관 50여명이 무술시범을 펼치는데, 물론 그건 가라데 였고, 이승만이 그걸 보고 '태껸이구만' 이라고 한 사건(?)은 좀 유명하다. 그 한마디로 탄력 받은 최홍희 사단장은 사범 남태희 중위와 바로 태권도(跆拳의 이름을 발음해 보라, 택껸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왜 이렇게 명명했는지를 생각해 보라)라는 이름을 만들었지만, 일단 이 대한민국 최초의 통합무술의 이름이 중요하긴 하기에 명칭 위원회를 구성. 손덕성 청도관 관장, 이형근 합참 의장, 한창완 정치 신문사 사장.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만장일치로 채택. 이후 박통이 모든 운동하는 사람들을 대한체육회로 통합했는데. 앞서 말한 5대 문파 관장 + 군대 오도관 요렇게 해서 태권도 단체를 만들어 대한 체육회 산하로 들어 갔다. 그러나 이때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최홍희 씨는 외국에 가있고, 다른 관장들과 최홍희 씨와 갈등도 있고 해서 이왕 새로 만드는 김에 '태수도 협회'라는 이름으로 협회가 생겨버렸다. 대한공수도 협회, 태권도 협회, 태수도 협회. 우리나라엔 이렇게 협회가 세 개가 되었으나 가르치는 무술은 실상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홍희씨가 돌아와 태수도 협회까지 맡아서 통폐합해서, 역시 자신이 아끼는 이름 '태권도 협회'가 된다. 1965년 서독에서 태권도 시범단이 갔는데. 김현두 문교부 과장에게 최홍희 협회장이 앞에 국기를 붙여 '국기 태권도' 라고 한 것이 우리가 아는 국기 태권도의 유례이다.)
이상과 같이 당시에 공수, 당수라고 불리던 이름이 跆拳道(이 때 태(跆)는 뛰다, 밟다 등의 의미를 가진 무용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로 바뀌어 정착되고 박정희 정권에서 國技로 선정되면서 국가적인 지원 하에 60 ~ 70년대에 전국적으로 보급 된 것이다. 기술은 처음 들어 왔을 때 손기술 위주였던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유전자에 맞게 발기술 위주로 변형되어 지금에 이른 것 이다(품새도 새로 창편 되었는데 70년대에는 저급자 품새가 팔쾌 1 ~ 8장이었는데, 요사이는 태극 1 ~ 8장으로 바뀌었다. 고급자형인 고려 이후는 이름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내용도 변하였는지는 모르겠다.). 현재는 태권도가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고 하니 격투술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자질은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합기도는 일본 전국시대 때부터 전승되던 유술(柔術)(무척 실전적이고, 잔인하였다는데, 전쟁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 400년 이상을 발전시켰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_^)에서 파생 된 것인데, 1800년대말 ~ 1900년대 초에 던지는 기술과 굳히는 기술 위주로 정리하여 보급된 것이 유도(柔道)이고, 반면 식지성평(植芝盛平)이 대동류 유술을 관절기를 위주로 정리하고 동양철학을 가미하여 새로운 체계로 만들어 보급된 것이 合氣道(일본 발음으로는 合이 ‘아이’, 氣가 그냥 ‘기’로 발음되어 “아이기도”라고 발음 한다. 우리가 한자 合氣를 그냥 ‘합기’라고 발음하듯, 일본인들은 ‘아이기’라고 발음하는 것이다.)이다.
그것을 역시 한국인인 최용술씨가 일본에서 배워 와서 인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보급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합기도 역시 일본에서 발전된 손기술에 우리나라 특유의 발기술이 가미되어 온 것이다. 마치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우리만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발전시킨 것 같이 말이다.
여기서 태권도와 합기도가 일본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격투술이든 뭐든 끝에 道를 붙이기 좋아하여 다도(茶道), 무사도(武士道) 등등으로 명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끝에 藝자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도예(陶藝),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무예 서적과 거기에 수록된 24반 무예(武藝)등등...또 중국인은 術자나 法자를 붙이기 좋아한다. 태극권법, 당랑권법, 궁술, 검술 등등 말이다.
武藝圖譜通志 24般 武藝가 한, 중, 일 짬봉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먼저 임란 때 선조의 명으로 이여송의 명나라 원병(이들은 중국의 절강성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이들이 전수한 무예를 절병기예(浙兵技藝)라 한다.)과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도입된 “곤방(棍棒), 등패(藤牌), 낭선(狼선), 장창(長槍), 당파(鐺鈀), 쌍수도(雙手刀)”의 6技, 영조 때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면서 증입된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교전(倭劍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권법(拳法), 편(鞭), 곤(棍)”의 12技를 합한 18技, 여기까지를 18般 武藝(중국의 18般 武藝와는 구성 및 내용체계가 전혀 다르다.)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정조 원년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의 4技를 더하고, 정조 14년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면서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의 2技를 더하여 24般 武藝로 정립한 것 임. 이중 처음 6技는 말할 것도 없고, “죽장창(竹長槍), 예도(銳刀), 권법(拳法), 제독검(提督劍)”등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왜검교전(倭劍交戰)”은 당연히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다. 여기에 어디 태권, 합기라는 명칭의 무예가 있는가? 맨손 무예인 拳法(명칭에서 보듯 중국 것이다.)조차도 태조장권 13세를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어쨌든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태권도와 합기도의 명칭은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기법 역시 어디에도 전승되어 오지 않은 것이다. 혹자는 비전(秘傳)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 경우도 실제로 전승되고 있었다면 보통은 명칭이나 기법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고려조의 수박희를 보라. 명맥이 끊어졌지만 역사서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하물며 현재까지 전해진다고 한다면 어느 기록에든 당연히 언급이 있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편집한 武藝書인 武藝圖譜通志에서조차 언급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씨조선 500여 년간 문치 정책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무예가 발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때문에 임란, 호란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나마 전해지던 무예의 맥이 대부분 끊어졌다. 우리가 무예로 알고 있는 택견은 유희로 변형되었기에 민간에서 수련을 할 수 있었고, 명맥이 유지되어 현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택견의 경우는 발로서 상대의 상투를 먼저 차거나, 넘어뜨리는 내기 유희로 변하여, 조선조 말에는 정부에서 금지를 할 정도로 성행 했었다.) 씨름 역시 고구려 시대의 솔각법(率角法)이 민속놀이의 내기 유희로 변형되어 오늘까지 명맥이 유지된 다른 예이다.
그런데 태권도와 합기도가 왜 우리나라에서 기원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추측컨데 보급될 당시의 일본에 대한 우리의 국민 정서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에서 온 문화는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일본에서 온 문화는 많은 저항감을 갖고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태권도나 합기도가 어디서 왔던 우리가 우리 문화와 우리 체질에 맞게 변형시켜 우리 문화의 일부로 흡수한 우리의 일부인 것이다. 일본에서 들어 왔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카라테의 경우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외래문화를 자기들에게 맞게 변형 발전시키고 세계에 보급중인 일본의 문화인 것이다. 태권도 역시 우리가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보급시키고 있는 우리의 문화이며, 수백 년 후에는 우리 고유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태권도는 일제강점기 이후 생겨납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무예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명맥을 유지한 것이 택견입니다. 비록 지금은 세 단체로 분리되었지만... 참고로 가장 원형보존이 잘 된 곳이 결련택견회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무술 10년 이상 했던 사람들이 석달 연수받고 가르치고 없던 품새만들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지요.
어쨌든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무술은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람들 저변에 널리 퍼졌고 위력도 상당한 택견은 중점적으로 탄압을 받았죠. 그래서 우리나라 무예는 사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일제가 그런 이유가 택견꾼이 맨손으로 일본순사를 죽일 정도여서인데 일설로는 택견의 달인인 김구선생이 일본인을 맨손으로 죽인 이후라고도 합니다. 또한 일본은 한번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근래까지도 독립하자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인 일본의 오키나와. 가라데는 이 오키나와에서 나왔는데 오키나와 독립지사들이 테라는 무술로 일본군을 맨손을 죽이곤 했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무술이 사라진 후 해방이 되었는데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예가 있어야 한다는 논의사 있었죠. 그래서 일제시대때 무술을 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술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때는 가라데를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가라데가 중심이 되었죠. 가끔 기록다큐등에서 태권도 초기 모습이 나올 때 가라데와 상당히 유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최홍희라는 장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나중에 최홍희는 월북을 하죠. 복한에 태권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최홍희가 월북을 하지 않았다면 북한에는 태권도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태권도란 이름은 택견에서 나왔고요. 태권도의 원형을 택견이라느니 택견이 옛날 태권도라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름만 받았을 뿐입니다. 택견이라는 순 우리말을 비슷한 한자를 찾아 쓴 것이 태권이죠. 2천년 역사도 완전 뻥. 구라. 거짓이고요.
하지만 그 후 태권도는 나름대로 발전을 합니다. 태권도 자체는 해방 후 발생했더라도 우리나라의 무예정신과 특유의 기술은 수천년전 것이 맞거든요. 그래서 발차기가 발달하고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라데를 완전히 눌러버렸죠. 특히 태권도의 경우 겨루기 중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스포츠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던 겁니다. 딱히 스포츠화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동쪽 만주주변 한민족의 부족국가에서는 영고, 무천, 동맹 등으로 불리운 제례 에서 하늘을 숭상하는 가무, 유희오락을 통해 부족 단합과 많은 수확을 기원했다.
이런 큰 잔치 중의 가무, 유희는 자연스럽게 경쟁 의식을 갖게 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전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처럼 경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부족의 방어와 세력확대를 위해서는 전투능력향상을 도모해야 했으며, 자연스럽게 숭천제례의 신체활동은 투기를 중심으로 경기화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태권도는 이런 가운데 한민족 고유의 투기형태로 생성되었다.
.태권도 역사
태 권 도 (跆 拳 道) -
0. 名稱 : 1955년 4월 11일 이승만대통령에 決定
이전 : 당수도, 공수도, 拳法
최홍희가 跆拳道라는 말을 만들고 1954년12월19일 명칭위원회를 구성(손덕성 청도관장, 이형근 合參議長, 조경규 國會副議長, 한창환 정치신문사장 등 참석) 통과하여 국회부의장이 대통령의 裁可를 받자고 하여 李大統領이 親筆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림
● 6대문파 (館)
0. 청도관 (1944.9): 최초의 현대식 도장
初代館長 - 이원국 (日本 주오대학법과 시절 쇼토칸가라테수련:키친 후나코시로부터 사사)
2대 - 손덕성
3대 - 엄운규
0. 무덕관 (1945년 11월)
初代館長 - 황기 (京畿商高 졸 - 1935년 남만주철도국입사 - 中國武術고수 양진국에 사사 - 광복후 조선철도국 근무 - 1956년 무예도보통지 수박희 심취 연구 - 1960년 수박도회 등록 - 1961년 모든관이 태수도 協會로 통합되자 이를 반대함:카라데는 교본을 보고 배움)
0. 지도관 (1946.3)-초기에는 연무관, 6.25당시 지도관으로 개정
初代館長 - 전장섭 (동양척식대 재학중 미아게 조준과 도야마간겐에게 공수도 사사, 방위군 장교)
2대 - 윤쾌병 (주오대 병리학재학중 가라테 수련, 1949년 서울대 수의과 전문대 敎授)
3대 - 이종우
0. 창무관 (1946년)
初代館長 - 윤병인 (中國武術인 주안파 Chu Anfa 수련, 니혼대시절 토야마 칸겐에게(슈토칸 가라데) 가라테 수련)
2대 - 이남석 (유도원로인 강낙원에 가라테 사사, 창무관에서 윤병인에 주안파무술 사사, 체신청 근무, 1961년 태수도협회 사무국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WTF 기술심의 위원장, 1987년 김순배에게 창무관 인계)
0. 송무관 (1946년)
初代館長 - 노병직 (日本大學시절 소도칸 가라테 창시자인 기친후나코시에사사)
0. 오도관 (1954년) : 軍武道館
初代館長 - 최홍희 (보병 29사단장): 일본 중아대 가라데부(쇼토칸 가라데) - 1966년3월22일 세계태권도연맹(ITF)창설 - 1980년 아들중화와 함께 시범단을 데리고 방북함- 198년 2차방북
초대사범 - 남태희 (육군 중위)
※ 1959년 大韓跆拳道協會 창설
1971년 김운용이 大韓跆拳道協會 會長이되면서 문파의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짐
※ 국기태권도 :
- 1962년5월 6개도장이 協會를 결성했으나 태권도라는 이름이 통일되지 않아 跆手道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채명신이 맡고 2대회장에 박종태가 맡았으나, 최홍희가 태권도협회로 개칭함
- 1965년 서독대사였던 최덕신이 태권도시범단의 방문을 주선하자, 최홍희가 5명을 선발하고 사절단의 이름을 묻는 김현두 문교부장관에기 국기 라는 이름을 붙이도록하여 국기 태권도가 탄생하고 박정희대통령이 자주사용함
-1972년 가라데에서 사용하는 태극형을 8개로 만들어 사용함
창설모체가된 관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수박희나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한 사람들도 있긴하지만 영향을 줬다고는 보기힘들군요 어쨌든 가라데도장 관장들이었으니..
초기에 태권도의 모태가 택견이란 말이 나온데대한 것은 처음 최홍희장군이 시범단을 만들어 이대통령에게 시범을보였을때 멋도모르는 이대통령이 "거 택견이구만." 이라고 한 한마디에 태권도의 뿌리가 택견이 되버렸다는 얘기가 있는 데 사실인지는 모를겠군요..
그리고 초기에 태권도 협회를 결성했을때 민족무예라해서 택견을 할줄 아는 사람들을 대거 끌어들였다고도 하더군요 아마도 명분때문이 아니었을까하지만 속내는 알수없고.. 하지만,택견하는 사람들도 오래붙어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나와 태견협회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1.고대의 태권도
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운동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그 활동을 통해서 성장 발달한다. 이러한 신체 활동은 옛부터 있고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고구려의 '선배'와 택견
고구려는 원래 주위의 적과의 투쟁 과정에서 성장 · 발전한 관계로 신라나 백제보다 기력이 있고 호전적인 국민이었다.고구려는 초기에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2세기경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강력한 무사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강성과 중앙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창설된 것으로 풀이된다.'선배'가 된 자는 각각 무리를 지어 한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글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치 않았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선배'만은 출신의 미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인물된 사람이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이로써 고구려에서는 문과 대등한 무의 위치를 엿볼 수 있고, 오히려 무예를 중요시 하는 진취적인 상무정신이 더욱 두드러져 있음을 불 수 있다.무(武)를 중시한 고구려에서 무예의 근간인 택견이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 신라의 화랑과 택견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신라는 건국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이 없어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침입 등 세력팽창과 영토확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무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신라의 무예라면 먼저 화랑도의 수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제도를 모방하여 당 12년에 이르러 풍류도, 풍월도란 민간청년 단체를 재정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랑도는 무사도의 용맹과 충(忠), 효(孝)를 기초로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였으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격도야와 심신단련에 힘써 국가를 이어 갈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김춘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국선화랑은 진흥대왕이 곧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닮아온 것이며 시수두 단전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며 수박(手搏), 격검(擊劍), 기마(騎馬), 덕견이,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경기를 하며 원근산수에 탐험하여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한곳에서 숙실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 성곽이나 도로수축 등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일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거싱 선배와 같다 "하였다.
또한 팔관회교에는 "진흥왕 12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귀화한 혜량을 숭통으로 팔관회를 만들었는데 불교의 팔제(八齊)보다는 민간 신앙의 제천 대회에 가깝고 군사적, 가무적, 수련적 기느을 가진 화랑이 참서했다"고 하였다.금강 역사상은 경주박물관에 있는 동조인 금강역사상을 보면 공격과방어의 뚜렷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석굴암 금강역사상의주먹모양은 현재의 바른 주먹(正拳)과 같고 그 밑의 손모양 역시 현재의 편 주먹과 같으며 동조금강역사상을 보면 발을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어 현재의 태권도와 상당히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여기서 특기 할 것은 수삽이란 용어와 덕견이(택건이)가 같이 나타남을 보아 지금까지 체계가 불분명하던 태권이 신라로 넘어오면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분화되었다고 추축된다.
수박이란 손기술의 명칭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이나 상류층에 치중된 기술이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 수련으로 실시되었고, 일반 평민들은 몸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었으므로 위력이 강한 발을 중심으로 술(術)을 발전시켰다.이는 '태견'이란 말이 이두(吏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후일 이말이 탁견(托肩)이란 글자로 표기되었음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 고구려의 택견의 신라 전승
택견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되어 있으며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가 있다.
첫째, 어원으로 볼 때 화랑은 선랑(仙郞)이라고도 앴으며 선랑의 '선'은 음이요, '랑'은 선인(仙人),선배의 사람이라는 뜻을 취한 이두문으로 선배의 배와 같으며 화랑의 연원사를 선사라 함을 보아도 선랑, 화랑, 선배(선인)가 다 같은 청년 무사단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둘째, 화랑과는 선배의 조직과 상하 구분이 같다.
세째, 신수두 경기세서 선배가 택견을 하였듯이 팔관회나 한가위같은 모임에서 화랑이 겨룬 경이에 택견(수박, 덕견디, 택건이)이 포함되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2세기경에는 옛부터 내려오던 투기가 택견으로 채계화되어 선배를 무예의 기본으로 행하고, 4세시부터는 태학과 경당에서 채계적인 무예를 교육함으로써 더욱 발전하여 무용총 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되었다고 한다.또, 택견은 신라에 전해져 더욱 발전하였으며 손기술과 발기술이 나누어져 조직적으로 체계를이루었다고 한다.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조각이나 불상에 있는 인물의 동작에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다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2.중세의 태권도
삼국시대에 기본동작, 손기술 그리고 발기술로 분화 발전된 택견은 고려시대에 들어솨서도 계승, 발전되었다.특히 고려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457년간 존속하면서 우리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는 삼국을 거친 택견이 기초 단계를 넘어서 무예적가치를 인정 받아 벼슬과 직결될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으며 기술과 위력도 인명을 살상할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수련 형태 또한 오병수박회라 하여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집단대견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는 사회가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을 필요로 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재(武才)만 있으면 군사로서 특별 채용될 수 있었다.의종은 이의민이 수박을 잘 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든지, 최충헌이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설하고 중방의 힘샌지로 하여금 수박회를 가지고 이긴자에게 교위(校尉)난 대정의벼슬을 주었다거나 변안렬이 임견미, 염홍방 등과 수박을 하여 이긴 결과로 밀직부사에서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함은 직위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수박만 잘 하면 벼슬을 얻거나 승진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며 택견의 승부로 벼슬을 주거나 진급을 시켰다함은 승부를 가리는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이 있었음을 뜻한다고 할 때 태권의 경기화 내지 스포츠로서의 기반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수박의 위력에 관해 이의민과 두 경승이 자리를 같이 하여 서로 힘 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가둥을 치니 거까개라 움직였고 두 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했으며, 이의민이 맨손으로 사람의 척추를 쳐서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도 격파와 같은 단련을 통해 택견의 위력이 인명을 살상할 수있을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달해 있음을 말해준다. 또 의종이 벼현원으로 행차 도중에 오문전에 이르러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회를 하도록 하였다하였으니 이는 단체대련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면 그 대상이 문신과 무신인 점으로 보아 대신모두가 수박회를 할 정도로 필수 무술이었음을 알수 있으니 왕이 거동할 때는 항상 수박회를 전문으로 개설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는 와이 수박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군인들이 모구 수박회를 해아여 잘 하면 특진을 시캘만큼 중요시 여긴 무술 종목이었다.
이런한 기록으로 보아 수박회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고 군사는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며 왕이 직접 관람할만큼 스포츠적 성격을 띄었고 벼슬과 직결될만큼 무인의필수 미술이 되었다. 전신에서 나오는 위력도 대단하여 사람을 죽이고 벽을 뚫을 만큼 고도의 기술을지녔고 이렇게 발전해온 수박은 고려말에 이르러 화약이 발명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기 시작해싸. 그리하여 무재또는 무예적인 비중이 줄어드는 바념 민속경기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여 갔다.
신채호 선생은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오고 있다하였고 고려사에는 수박으로 돈이나 물건을 내기한 자는 각각 곤장이 일백이라 하였다. 송도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은 고려의서울인 송도에서 민속으로 수박경기가 비롯되었음을 말해주며 백성들이 수박으로 돈아니 물건을 내기하고 있어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함은 많은 백성들이 이를 민속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3.근세의 태권도
초기에는 무예를 중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으나 화약 발명에 따른 새로운 무리의 사용도가 높아지고 군대조직이 정비되자 태권과 같은 맨손무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더구나 유겨의 이념을 국시로 삼고, 배불숭유의 정책을 새항함에 따라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인 행사가 폐지된 후 무예의 진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나라의기틀이 잡혀 안정을 찾게되고 군대 조직이 정비되면서 화약의 발명과 새로운 무기의 사용으로 수밧회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으며 위정자들은 문치와당쟁에 휘말리고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은 겪은 조선은 치욕의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군제를 재정비하고 창, 활, 검 등의 고대적 무기 외에 화포, 재통, 창술, 택견등 무에를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두고 5부 의장정을 뽑아 무에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관 또는 속오군이란 것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정조때 이르러서는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무과를 두어 평수 군사훈련과 무예수련을 장려하었으며 이덕무, 박제가 등을 시켜 무예도 보통지란 무예서를 만들었다. 이 무예도보퉁지 제 4권에 권법이란 이름으로 태권의 품세와 동작을 싣고 있는데 이때 기효신서, 무편, 내가권법 등 중국 서적을 참고한 관계로 중국의용어를 그대로 빌어 쓴 단점을 가지고 있다.
무예보통지의 권법총도를 보면 다음의 순서로 진행된다.
탐마세,요란주세,현각허이세,순란주세,칠성권세.,고사평세,도삽세,일삽보세,요단편세,복허세,하삽세,당두포세,기고세,고사평세,도삽세,일삽보세,요단편세,오화전신세,안시측신세,과호세,상회립,현각허이세,구류세,안시측신세,과호세,상호세,현각허이세,구류세,안사측신세,과호세,상회립,북호세,금나세,금나세,복호세,도월,포가세,점주세,갑,을 상부이와 같은 탐마세로부터 점주세까지의동작을 두사람이 행아여 수련하게 되어 있다. 이를 보면 현재의품새나 약속겨루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동작들을 오늘날의 태권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그 이우는 현재의태권도는 과학적으로 훨씬 발전된 경기이기 때문이다.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일분의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체육 운동이 조직화되자, 그들은 우리의 운동회나 민숙놀이까지도 탄압하였다. 이때 택견도 예외는 아니어서 금지외었으나, 사범들에 의해 비밀히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당시 탁견을 배워 민속경기에 참여한 송덕기옹의증언에 의하면 그당시 경기방법은 '동리 간에 십사오 명의 선수를 선발하여 이긴 사람은 그대로 다른 사람과 계속 싸우는 식의 승발전이었다'고 하며, 미긴 동리에서는 승전의 영웅과 같은 환대와 대접을 며칠 동안이나 선수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송 옹에 의함녀 그에게 택견을 가르친 사람은 임호(林虎)라는 사람으로 택견기술이 뛰어나 "짚단을 타고 담장을 뛰어 넘으며 수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날으는 범과 같았고, 사방의 적을 양손으로 어르고 왼발 바른발로 차 넘기는 기술이 번개치듯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용어는 다음과 같다.
품: 서루 맞서 겨루기를 준비하는 자세
굼실: 품이 움직이는 것
굼실굼실: 품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것
안쫑다리: 상대의 발을 안으로 따지 거는 것
박장다기: 상대의 발을 밖으로 딴지 거는 것
낚시걸이: 발목을 꼬부려서 상대의 뒤축을 걸어 넘기는 것
무릎걸이: 유도용어에 배대뒷치기
발등걸이: 발등으로 차기
곧은발질: 발등으로 차기
곁치기: 안으로 옆차기
두 발 당상: 두 발 뛰어 차기 날차기: 손집고 몸을 돌려 따재주 넘으며 발로 상대 얼굴차기
칼잽이: 아금손으로 상대 목치기
이마재기: 상대 이마를 장칼바닥으로 치기
낙함: 장칼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턱걸이: 장칼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깍끔다리: 상대의 정강이 후려차기
위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에 행해지던 민속경기로서의 동리간 택견 시합방법과 택견의 기술내용ㅇ르 짐잘할 수 있다. '품''굼실굼실'을 빼 14개 기술 중 차기가 5, 손기술4, 딴지걸고 뒤척걸어 넘기기3, 재주넘으며 차기1. 상대의온몸 넘기기1로서 발기술이 네일 많고 다음은 손기술이 많으며 잡아넘기는 기술이 그 다음이고 특이하게 재주넘으며 차는 기술까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 옛 택견의 원형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같이 택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제의 주재소(파출소)에 수차례 불려다니며 감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4.현재의 태권도
해방과 더불어 민족문화와 전통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정리가 되어김에 따라 옛부터 내려오던 민속경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옛부터 '태껸'을 수련하던 분들이 나타났고 그 중 송덕기같은 사람은 전 대통령인 이승만의 생일날 우리의 태권도(태견)시범을 보여 한국 태껸과 가라데의 다른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 전문인들에 의해 태권도장이 개설되었고 그 후 6· 25동란까지 초보적 발전단계를 거치다 6· 25후에 시국의 안정과 더불어 점차로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점차 수련생이 늘고 도잔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자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그 후 1961년 9월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 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65년 8월 5일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2년 6월 20일 대한체육대회의 경기단체로 대한태권도협회가 가입승인을 받았으며 1963년 10월 24일 제 44회 전국체육대회에는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참가한 후 1964년 9월 3ㅇ리 제 45회 전국체욕대회부터는 정식경기종목이 되었다.
그 당시 체급은 플라이(fly)급 부터 헤비급(heavy)꺼자 7체급의 개인전을 실시하였고 기술의 정도에 따라 중기부(1~2단)와 구기부(3단이상)로 구분하였다.
1966년부터는 대통경기쟁탈 전국단체대항태권도대회가 1968년부터는 주한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 1970년부터는 전국국민학교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와 함꼐 여자부 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또한 1963년부터 협회의 종별선수권대회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부를 1974년부터 대학태권도연맹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정식수련종목으로 선정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응용, 실전에서 적을 제압함으로써 한국 군인과 태권도는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발전되어 온 태권도는 점차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래에 이르러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부의 국민 체력 향상 정책과 체육인구의 저변 확대에 발맞추러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태권도 기술의 우월성은 물론 심신수련, 인격도야, 체력향상이라는 목적이 높이 평가되어 1971년에는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태권도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학업에 전념하는 우리의 학생들까지 실시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국내에 200년만의 수련생과 50여만의 유단자를 배출하였고 해외에 수많은 사범을 파견하여 지도하고 있어 민간 외교와 국위 선양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고 1973년 5월 28일에는 새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고 회원국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또 1973년에는 제1회 세계선수권대외를 창설하여 매 2년마다 대회를 열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태권도가 미국체육회(A.A.U)과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에 1976년에는 국제군인체육회(C.I.S.M)에서도 정식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 1979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의 김운용총재가 세계비올림필 종목 연합회의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 IOC의 정식 승인 단체가 되는 동시 태권도 종목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1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게임에서는 태권도가 9개의 메달을 획득, 한국이 종합 2위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아시아 제2의 스포츠 강국이 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태권도는 누가 시작한게아니라 옛날사람들이 그냥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운동을하다가 여러가기 기술을 구사하다가 우연히 여러 동작들을 알게되서 그냥 그기 이어져오다가 2000년전에 그기술들은 한대모아서 이름을 붙인것입니다
2000년 전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시된 고유의 전통 무술로, 오늘날 세계스포츠가 된 격투경기이다. 태권도는 이제 세계화된 국제적으로 공인된 스포츠로 2004년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전신운동으로서 상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맨손과 맨발로 인체의 관절을 무기화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무도이다.
또한 수련을 통하여 심신단련을 꾀하고 강인한 체력과 굳은 의지로 정확한 판단력과 자신력을 길러 강자에게 강(强)하고 약자에게 유(柔)하며, 예절바른 태도로 자신의 덕(德)을 닦는 행동 철학이다. 태권도의 정신은 수련으로 얻어지는 기술의 소산(所産)이다.
1. 역사
1) 고구려시대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한민족문화의 여명기로서 독창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태권도의 가장 오래된 실증(實證)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풍속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고구려가 도읍으로 정했던 국내성(國內城 3∼209)과 환도성(丸都城 209∼427)이 위치했던 지금의 중국 땅인 둥베이[東北:滿洲] 퉁화성 지안현 퉁거우[通化省輯安縣通溝] 지방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고분 중 하나인 무용총(舞踊塚) 널방[玄室]의 천장지송부(天障持送部)에 두 사나이가 서로 마주 서서 겨루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또 삼실총(三室塚:퉁거우 지방에서 발굴된 고분)의 삼실 동벽과 서벽에 품세의 자세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황해도 지방의 고분인 동수묘(冬壽墓:황해 안악군 유설리에서 발굴된 고분)는 요동(遼東)에서 고구려로 귀순한 연(燕)의 장군묘로서 357년에 봉분(封墳)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앞방[前室] 동벽에 태권도 겨루기의 자세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태권도가 많은 고구려인들에 의해 수련되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2) 신라와 백제
태권도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로 들어가 상충적대(相衝敵對)하게 되자, 자연히 무예진흥을 서두르게 되었고, 특히 진홍왕(24대:534∼576) 때 편제를 개편하여 범국가적인 청소년 수양단체가 되었던 화랑(花郞)들의 무예수업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의 무예는 화랑도의 수련기술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그들은 학문을 닦는 한편 신체를 단련하고 무술의 하나로서 수박(手搏)을 행하였다. 그들은 유 ·불 ·선(儒 ·佛 ·仙)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고, 그 중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에 부조(浮彫)된 금강역사 보살상이 태권도의 막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석가모니의 호위장으로 역사(力士)를 표현한 것이나, 이 상(像)으로 인하여 당시 화랑들에게 미친 태권도의 영향이 대단히 컸을 것으로 본다.
또 그런가 하면, 고려 고종 때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에 나오는 신라 무술의 대목에서 탁견술(托肩術)을 기술한 것이 있는데, 그 중 비각술(飛脚術)의 신비한 기술을 묘사한 시구(詩句)가 있다. 태권도의 옛말인 ‘태껸’도 이 탁견에서 유래한다.
백제에서는 태껸, 즉 태권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나 유적을 볼 수 없으나, 《제왕운기》에 의하면 백제의 무술로 수벽타(手擘打)의 오묘한 기술을 묘사한 시구가 전해지고있다.
3) 고려시대
고구려 ·신라 때 어느 정도 틀을 갖춘 태껸이 더욱 체계화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무인들의 사회에서 무술연마의 일환으로 독특한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실은 여러 사실(史實)에 의해 알 수 있다. 고려사에서는 태권도를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라고 기록했으며, 무예로 권장했기 때문에 그 수준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에서도 수박희를 잘하는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는 기록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의종(毅宗)은 이의민(李義旼)의 수박희를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올려 주었고, 그 밖에 두경승(杜景升) ·최충헌(崔忠獻) 등이 수박희를 매우 잘함으로써 많은 일화를 남겼다.
4) 조선시대
태권도는 무인들의 사회에서 주로 돋보였던 고려시대의 수박희와는 달리 조선시대에서 일반화되어 대중의 수련과 겨루기 등 일반 백성들의 생활영역에까지 크게 파고들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권21, 권32, 《단종실록(端宗實錄)》 권14 <속악유희(俗樂遊戱)> 탁견(托肩)의 조(條)에 의하면 수박을 잘하는 사람을 특채할 정도로 수박희가 보편화되었고, 나라에서도 그 실기를 높이 평가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충청 은진현(恩津縣) 경계에 있는 작지(鵲旨) 마을에서는 해마다 백중날(음력 7월 15일)이면 근방 충청과 전라 두 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를 겨룬다 하였다. 이 때는 수박희가 이미 무예의 영역에서 벗어나 스포츠로까지 확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조 의흥부(兵曹義興府)에서 수박희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防牌軍)으로 뽑되 세 사람을 이긴 자를 채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라에서 수박희로 시험을 보아 군사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방 향리(鄕吏)의 관노(官奴)들이 모여 수박희의 경기를 가졌다고도 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는 정조(正祖) 14년 왕명에 의해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 두 사람이 출간했는데, 이 서지(書誌)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병법서로서 권4 첫머리에 권법이라는 이름으로 태권도의 동작이 실려 있다.
2. 국기로서의 태권도
여러 문헌을 통해 태권도는 2000년 전인 삼국시대부터 이미 행해졌음이 입증되었고, 한국의 국기로서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내용이 담긴 무예적 스포츠이다. 중국 권법은 1500년 전 소림사(少林寺)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가라테[空手:唐手]는 500년 전 오키나와[沖繩]에서 시작되었음을 볼 때, 태권도는 동양무술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무술임을 확증할 수 있다.
한민족의 얼과 생활 속에 맥맥이 이어내려온 태권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침체되는 듯하다가 끝내 일본의 침략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일본의 속박에서도 민족적 기개를 꺾이지 않고 독립운동의 수단이나 민족적 울분을 태권도의 수련으로 승화한 사실은 비일비재하다.
8·15광복과 더불어 비전(秘傳)되어 오던 태권도는 소수의 이 방면 지도자들에 의해 태권도의 재건과 진흥을 위해 각각 도장을 차려 후배 육성에 임하였는데, 청도관(靑濤館)·지도관(智道館)·송무관(松武館)·창무관(彰武館)·무덕관(武德館) 등이었으며, 이때부터 태권도의 저변확대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61년 9월 16일 태권도의 국내 통합체로서 KTA(Korea Taekwondo Association: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 무도에서 스포츠화하였으며 경기화의 서장을 열게 되었다.
1962년 6월 20일 KSC(Korea Sports Council:대한체육회)에 경기단체로 가맹하였고, 1962년 11월 11일 제1회 전국승단심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63년 10월 4일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 정식종목이 되었다. 1966년 10월 28일 제1회 대통령 하사기쟁탈 전국단체대항 태권도대회가 개최되었고, 1967년 11월 30일 제정 품세를 심의공포하였으며, 1971년 3월 15일 태권도 계간지를 발간하였다.
1972년 4월 4일 제1기 지도자 교육을 개최하였고, 그해 11월 30일 국기원을 건립(초대원장 김운용)하였으며, 12월 1일 태권도교본(품세편)을 발간하였다. 1973년 5월 25일 서울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1973년 5월 28일 WTF(The World Taekwondo Federation:세계태권도연맹)를 창립(초대총재 김운용)하였으며, 1974년 10월 18일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1975년 10월 5일 ISF(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국제경기연맹)에 WTF가 가맹하였고, 1976년 4월 9일 국제군인선수권대회에서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였으며, 1978년 10월 5일 각 관을 폐쇄하고 KTA 중심으로 단일화하였다. 1980년 7월 17일, 모스크바(Moskva)에서 열린 제83차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 정기총회에서 WTF를 공식승인하였으며, 1980년 11월 1일 서울 국제군인선수권대회에서 태권도경기를 개최하였다.
1981년 7월 24일 미국 산타클라라(Santa Clara)에서 제1회 월드컵태권도대회가 개최되었고, 1983년 8월 13일 팬암게임에서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였다.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하였고,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경기대회에서 시범종목으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 제27회 시드니(Sydney) 올림픽경기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분류
격투기 타깃
- 올림픽 채택여부
Y (2012년 기준)
대표적인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투기 스포츠이자 대한민국의 국기이다. 태권도는 아무런 무기 없이 언제 어디서나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 또는 방어하는 무도로 신체 단련을 위한 목적과 함께 정신적 무장을 통한 올바른 인간화를 중요시하는 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신체운동으로서 태권도는 어린이의 성장발육, 청장년과 노인의 체력 증진, 여성의 건강과 미용 증진에 큰 효과를 준다. 태권도의 기술 체계와 운동 형태는 신체의 각 분절을 좌우 균형 있게 구사하도록 짜여 있어, 인체 관절의 유연성이 고르게 발달하도록 한다. 그리고 문명 발달에 따라 가중되는 정신적 장해,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도움을 준다. 맨몸 투기로서 태권도는 맨손과 맨발로 상대방을 타격하는 기술 체계를 갖는다. 특히 다른 무술과 뚜렷하게 차이를 갖는 것은 위력적이고 다양한 발 기술이다. 발 기술이야말로 태권도가 세계 최강의 투기라 말할 수 있고 태권도가 차별성 있는 종목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태권도는 어떤 무기의 사용도 없이 인체를 사용하지만 일편필승의 가공할 공격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는 방어를 우선하는 기술 습득 원리를 강조한다. 이는 평화와 공정성을 존중하는 태권도의 정신적 기반에서 비롯한다. 이를 통해 태권도는 배우는 이가 수련의 목적을 결코 남을 공격해서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고결한 태도에 두도록 만든다.
교육적 수단으로서의 태권도는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가치관과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재료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자아완성에의 의지를 실천하도록 안내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 태권도 수련자는 평화 지향적인 기술 체득 원리를 이해하며 빈번하고 반복적인 예절 교육을 통해 자칫 빠지기 쉬운 자기 중심적 삶을 뛰어넘어 인간 생활에의 광범위한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 생활에서의 덕목들이 교육으로서 태권도가 추구하는 바이며 바로 이점이 태권도의 무도적 가치관이다.
스포츠로서 태권도는 다양한 형태의 국제 대회를 갖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스포츠 종목이 되었으며 특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서 채택된 것은 이를 명확히 해주는 결정타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과 뒤에는 태권도 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및 경기 규칙 개발, 보호 용구 개발 등에 노력한 덕분이며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스포츠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역사
고대 한반도의 부족국가들에게는 제례 의식으로서 가무, 유희 등이 존재했는데 이와 같은 몸짓들이 대결 구도로 잡히면서 축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본다. 즉 원시적인 형태의 스포츠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술이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무술과 진전 제례 행사로서의 목적이 융합되면서 한민족 고유의 무술 태권도의 원형이 갖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태권도에 관한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는 많은 편이다. 특히 고대의 고분 벽화나 불상, 서적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분 벽화 중의 하나로, AD 209~AD 427년,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재 만주 집안현 통구에 있는 무용총 현실 벽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벽화에는 두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손·발로 상대를 공격할 듯한 자세를 보여 오늘날의 태권도 경기 동작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나 분황파 9층석탑의 인왕상 등의 몸 동작은 태권도의 품과 유사하다. 또한, 백제의 경우,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 조정에서의 백제의 대좌평 지적을 초청해 일본 건아들과 상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선진문화권인 백제인들이 맨손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고려에 와서는 삼국시대에 행해지던 택견(태권도)이 체계화된 무예로서 무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고려사』에 보면 태권도가 '수박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을 여러 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하므로 의종 임금은 이를 사랑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임금이 화비궁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고려시대의 수박희(태권도)는 무예로서뿐만 아니라 스포츠로서 제 삼자가 관람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서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근세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와 비슷하게 무인들 사이에 수박희(태권도)가 계속 성행했다. 더욱이 대중화된 경기가 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하게 되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지 마을에서 양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서 승부를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수박희는 무예로서만이 아니라 스포츠로서도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태종실록』권 19에 보면 "병조의 의홍부에서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 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군사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록 하고 구경했다."(『태종실록』권32)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박희는 실전에서도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서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지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 후 잊힌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 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하에 전 세계로 진출한 태권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태권도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경기방법
경기 중에는 손기술과 발기술을 공히 사용할 수 있으며 유효 타격 부위에 명중하면 점수를 얻게 된다. 손기술은 바른 주먹의 인지와 중지의 앞부분을 이용한 공격이어야 유효하며 발기술의 경우는 복숭아뼈 이하의 발부위를 이용한 공격이어야 한다. 경기 시간의 경우, 남녀 공히 3분 3회전, 회전 간 휴식시간은 1분이 주어진다. 경기의 시작과 종료는 매 회전마다 주심의 "시작!" 선언으로 개시되며, "그만!" 선언으로 종료한다.
경기 진행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가. 선수는 주심의 "차렷", "경례"에 따라 감독관을 향해 입례한다.
나. 선수는 주심의 "좌우향우"에 따라 마주보고 "경례"에 따라 입례한다.
다. 주심의 "준비", "시작"에 따라 경기를 개시한다.
라. 선수는 마지막 회전이 끝나면 지정된 위치에서 마주보고 주심의 "차렷", "경례"에 따라 입례한 후 바로 서서 판정을 기다린다.
마. 주심은 경기결과에 따라 승자의 손을 들어 선언한다.
단, 부상으로 인해 승자가 선수위치에 서 있지 못할 경우 주심은 자신의 승자쪽 손을 들어 선언한다.
바. 선수퇴장
시설
경기장은 12m×12m넓이의 정방형으로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또한 수평이어야 하며, 바닥은 탄력성 있는 매틀을 사용해야 한다. 단, 필요에 따라 경기장은 높이 50m∼60m의 경기대로 조정, 설치할 수 있으며, 이 때는 안전도를 고려하여 사방 1m 이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30˚ 이내의 경사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12m×12m넓이의 경기장 정 중앙부에 8m×8m넓이의 정방형 지역을 경기지역이라 하고 그 외곽 지역을 경계지역이라 한다.
용구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협회가 공인한 도복 및 보호 용구를 착용해야 한다. 보호 용구에는 몸통 보호대, 허리 보호대, 샅보대, 팔·다리 보호대를 착용하여야하며, 샅보대 및 팔·다리 보호대는 도복 안에 착용해야 한다. 또한 협회의 태권도 경기 용품은 공인 규격에 합당한 것으로 공인 등록 업체의 제품을 사용해야 하며 몸통 보호대의 득점 부위는 각각 청·홍색으로 구분해서 표시해야 한다. 또한, 머리 보호대도 각각 청·홍색으로 표시해야 한다.
ㆍ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태권도 메달 수 : 8개
ㆍ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태권도 종목
· 남자 : 58kg급, 68kg급, 80kg급, 80kg 이상급
· 여자 : 49kg급, 57kg급, 67kg급, 67kg 이상급
태권도 라는 공식 명칭이 생긴 것은
1963년 경 이고요
그 당시도 그들끼리 태수도 라는 말도 통용 되었구요
지금도 나이 60 넘으신 분들 기억 속에는
唐手 라는 이름이 아련히 그러나 분명히 기억 되고 있습니다
실제 초기 태권도의 품세 중엔 중국 무술을 그데로 딴 安三 이라는 동작도 버젓이 교본에 있었구요
태권도 라 함은
시대를 잘탄 정치적인 격투기 하는 무리들이 만든 이름 단체 이고요
태권도 초기 창시자 라 할수있는 최 홍* 라는 인물은 그후 반한 인사로 낙인 찍혓고요
화랑이니 고구려 시대 부터 어쩌고 하는건
말그데로 말 뿐인 주장 이고요
역사적 합리적 근거 전혀 없습니다
쉽게 보면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는 아름답고 절묘한 곡선 입니다
태극 문양이나 한복이나 무량수전 배흘림...... 등 등 ............
태권도의 동작은 모두 직선적이고 전진적 이며 공격적 입니다
간단히 씨름이나 택견에 비교하면 배다른 형제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우리 문화 성격 과는 전혀 안맞습니다
(씨름만 해도 몽고씨름 터키씨름 일본씨름 민족 마다 문화적 차이마다 성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
태권도는 그냥 격투기의 한 종목 일 뿐
우리 문화, 정신 , 역사 ,,,,,,,,,,,,,,,이런것 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님에게 과제 내준 그 분 한테 꺼꾸로 물어 보세요
아무 역사적 근거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답이 아닌 무작정 그렇다 라는 설 이외의 답 은 없을겁니다
태권도 이름에 대한 유래는 최홍희의 여러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조금씩 과장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저작물에서 최초 기록과 그 후의 기록을 참고로 할 수 있게 여기 옮겨본다.
최홍희의 최초의 저서 『태권도 교본』(1959)에 따르면,
"연(然)이나 사(史)적 술(術)적 견지에 부합하는 명칭을 선택함에는 적지 않은 애로와 암운이 가로막혀 있던 차, 마침내 보병 29사단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는 영예를 갖게 되었다. 늠름한 용사들의 믿음직하고 씩씩한 연무를 본 이 대통령이 '택견이 좋아, 남북통일에 이것이 필요해!' 하시면서 절찬하셨다. 이 말에서 힌트를 얻고 필자는 본격적인 연구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면서 널리 불리고 있는 '태권', 이자(二字ㆍ두 글자)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어 1955년에 개최된 사도(斯道ㆍ각각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그 방면의 도나 기예-필자) 명칭제정위원회에 다른 명칭과 함께 상정되었던바 태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여기에 연월일(해와 달과 날) 밝히지 않고 있음-필자)최홍희의 『태권도지침』(1966)에 보이는 대목을 보자.
"1945년 광복을 계기로 정칭(正稱ㆍ바른 명칭)을 찾고자 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중 드디어 1955년 사계에 조예 있는 인사와 사학자로 구성된 명칭제정회의에서 제의된 여러 가지 명칭 중 저자가 제안한 '태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금일의 태권도로 된 것이다.
이 명칭이 채택된 이유는 첫째, 고래로부터 내려오던 '택견'이라는 이름과 연결시킬 수 있었고, 둘째, 손보다 발을 더 많이 쓰는 무도의 성격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명칭제정 회의 일자는 중요하며 그것은 태권도 명칭의 진정성과 깊이 연계되기 때문이다.
최홍희는 1955년 4월 11일로 여러 저서에서 밝히고 있으나, 조사결과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이경명(2002)에 의해 밝혀졌다.최홍희의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관련 사진이란 즉 '명칭제정위'의 사진인데, 그 사진에 적힌 기록은 '4288(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로 명시돼 있다.
최홍희가 말하는, 여러 문헌에 기록된 1955년 4월 11일은 사실이 아니고 특히 4월 11일은 가공의 날짜이다. 그가 명칭제정 일자를 숨기고 있는 이유는 여러 기록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홍희의 『태권도 교서』(1973)에 보이는 '태권' 유래 설명;
"발만 쓰던 택견과 주로 손의 기술에만 의존하던 가라테를 종합 연구하여 오늘과 같이 체중에 구애됨이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킨 다음,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짓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로 단일화하게 되었다.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55년 4월 11일은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는 최홍희의 『태권도교서』(1973 : 507)에 기록돼 있는 회의 내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회의내용 사례 1>
최 장군 : "태권" 태拳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역사적인 견지에서 설명했다.
유하청 : 나는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권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무도에 관한 명칭을 제정하는 데는 국가원수의 승인을 얻는 것이 퍽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석자 전원 : 만장일치로 찬성.<회의내용 사례 2>
최 장군 : 태권도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역사적 견지에서 설명하였다.
유 사장 :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명칭을 개정하고 공포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만치 즉석에서 결정한다기보다 이에 대한 사적 고찰과 학리적 연구가 필요하니 일단 이에 대해 유명한 사학가들에게 의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의 사적 고찰을 마치고 각자의 다른 명칭이 있으면 제출하여 몇 개의 명칭을 첨부해서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어 공포함이 좋겠습니다.
조 부의장 : 결의 사항으로 사적 증거와 학적 자료 수집을 위해 3인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금년(1955년도를 지칭) 12월 31일까지 완료하여 각 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통지한 다음 이 통지를 받은 위원은 일주일 안으로 그에 대한 해답과 각하의 재가를 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태권도백과사전 1』, 평양 : 1990, 247쪽).제2차 명칭위원회가 소집되었고, 거기서도 '태권'이 채택되어, 경무대에 결과보고가 올라갔다. 여전히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었다. 최홍희는 경무대 비서실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회의에 참가한 손덕성, 이형근, 조경규 씨등 3명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표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 날(1956. 1. 30 지칭-필자)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는 바람에 면담은 취소되었다.
몇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렸다. 1955년 4월 11일, 이 날이 바로 태권도 명칭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태권도 휘호가 내린 날로 기록하고 있음-필자)최홍희는 1955년 4월 11일을 명칭제정위원회 회의날짜라고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책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 휘호가 내린 날이라 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창헌류 기술체계가 완성된 날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와 같이 최홍희의 저작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름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956년 1월 30일 3인(소위원회)이 직접 경무대를 방문, 면담을 요청한 날짜는 특무대장의 저격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최홍희는 경무대와의 접촉 시도를 포기하고 군에서 독자적으로 '태권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보급하게 된다.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은 1956년 1월 30일에 발생했고, 그 역사적 사건은 다음해인 1957년 9월 22일 허태영 등 범인 4명(신초식, 송용고, 이유희)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태권도의 어제와 오늘』, 2002).
이 중대한 사건의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휘호를 내렸다는 것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최홍희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았다면, 그 역사적 자료가 신문보도를 통해 공개됐을 것이다.태권도타임스(미국에서 간행되고 있음)와 인터뷰에서 최홍희는 "나는 이 대통령의 경호관 곽영주, 경무대 서장 서정학 씨에게 접근, 그들에게 태권도는 새로운 무술이고 옛 무술인 택견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새로운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승인을 받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나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permission)을 받았다"고 말했다. 라는 것도 최홍희가 스스로 태권도 역사를 날조한 것에 불과하다(『태권도의 어제와 오늘』, 2002 : 42).
최홍희가 태권도 명칭 제정에 기여한 공로는 물론 그의 삶이 바로 태권도이었듯 태권도의 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에 어느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의 일생은 무인(武人)이었으면서도, 태권도사에서 지울 수 없는 '태권도' 명칭을 둘러싸고 그릇된 세 가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태권' 명칭제정을 위한 첫 모임은 '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였다는 것이 그 하나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ㆍ1875~1965) 대통령으로부터 '태권' 명칭의 재가와 '跆拳道'라는 휘호 내림 등 기록은 결코 사실적이지 않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문화 상징의 하나인 태권도 발상지의 기술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그것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이다.
위의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는 바로 최홍희의 여러 저서에 드러나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태권도 백과사전 1』(초판 1983, 수정재판 1987 : 246쪽)에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가진 청도관 고문회 때 찍은 기념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에 들어있는 자구는 "大韓唐手道 4288. 12. 19 靑濤館 第一會顧問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당시 신문기사를 오려 낸 것을 사진 옆에 함께 싣고 있다. 하지만 신문사 이름과 보도일자는 가위로 잘려 밝히지 않고 있다. 왜냐면 하나는, 모임 일자를 감추고자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문회에 참석한 11명의 명단 중 '고광래(본사 주관)'의 직함이 '본사 주간'으로 있는 신문에 게재된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어느 신문의 주간인지 알 수 없도록 했다. 필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사를 방문, 독자정보자료실에서 확인한 결과 아무런 당시의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1955년 4월 '밀가루 사건' 기사 관련으로 한 달간 정부로부터 정간조치를 당했다.
1955년 12월 19일이 1차 모임이고 2차 모임은 같은 해 12월 31일이고 그 날에 명칭 승인을 받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하기 위해하여 일을 3인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다음해 즉 1956년 1월에 두 차례 방문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태껸'을 고집하였다고 하며, 최종적으로 방문하고자 한 날 새벽에 김창룡 특무 대장의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다음의 대목에서 더욱 사실적인 진상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명칭 위원회에 참석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명칭 승인을 받기 위해 경무대에 갔던 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덕성은, 그날 김창룡 특무 대장의 암살로 면담이 취소되었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 재가 관련 김창룡 암살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그때 그런 일이 있긴 있었는데‥‥' 하고 여운을 남기면서, 명칭 제정 문제는 자신의 자서전에 적힌 그대로라고 일축했다(『한국무술 미 대륙 정복하다』 (한국학술정보[주], 2007 : 92쪽).
태권도 명칭 관련 기록이 국기원『태권도교본』(2005 : 48)에 보인다. 즉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그 후 1961년 9월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65년 8월 5일 다시 대한 태권도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1954년은 1955년을 왜곡한 기록이다. 『태권도 교본』(국기원, 2005)에서마저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기술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과연 뭘까? 그 까닭은 최홍희가 ITF(국제태권도연맹)을 결성하여 해외로 옮겨 WTF(세계태권도연맹)의 세계화, 즉 올림픽채택 등 노력에 반기를 든 것에 최홍희가 말하는 1955년 태권도 명칭의 작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라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961년 태수도(跆手道) 이름으로 결성된 대한태수도협회는 최홍희가 주축이 돼 1959년 9월 결성된 대한태권도협회(회장 최홍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한태수도협회가 결성하게 된 동기는 5. 16 군사혁명(1961)을 기점으로 유사단체 일원화를 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 사회단체 재등록 명령'에 따른 결과였다.
그해 문교부는 유사단체 통합을 서둘러 1961년 7월 12일자 공문으로 대한수박도회, 대한태권도회, 공수도 창무관, 공수도 송무관, 강덕원 무도회, 한무관 중앙도장 등의 대표들을 소집시켜 통합회의를 수차례 주선했으나 각 관의 이해관계가 얽혀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몇 차례의 통합회의를 거쳐 명칭을 '태수도'로 정하고 협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태수도계보는 8대 관에 3대 산맥이 있었다.
태권도, 당수도, 공수도, 수박도, 태견도 등 손과 발을 쓰는 무도라는 뜻은 같지만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통칭 태수도의 국내인구는 118만을 헤아릴 정도, 이 가운데 유단자만도 족히 20만을 넘었다. 분규악화의 실마리가 된 것은 바로 수박도의 비타협성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1년 유사단체 통합원칙을 좇는 타율적인 제약과 단합으로써 새로운 개척의 길을 찾으려는 자율적인 노력으로 이들 여러 단체가 통합에 합의, 태권의 '태'자와 당수ㆍ수박의 '수'자를 모아 태수도라고 이름을 정하고 체육회에 가맹했으나 출범 몇 개월 만에 수박도가 탈퇴, 대한태수도협회는 말하자면 3분의 2 집행부로 난파를 피하여 그대로 운항을 계속하였다. 수박도의 탈퇴 명분은 이념이 맞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걸며, 수박도는 어디까지나 연무에 불과한 것이므로 경기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 내용인즉 항상 통합에서 야기되는 자리안배와 주도권 장악이라는 문제가 있었고 또한 수박도 대표인 황기는 종심제 심사위원직을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대한수박도회라는 간판 아래로 돌아간 것이다.이로써 황기를 보스로 하는 무덕관파와 윤쾌병을 미는 지도관일부세력은 떨어져나갔으나 대한태수도협회는 지도관대표 이종우 창무관대표 이남석 청도관대표 엄운규의 굳은 결속으로 오도관의 명칭에 대한 이의 등을 늘려나갔다. 이렇게 4년 동안 밖으로는 탈퇴한 수박도에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번번이 국제교류를 가져 위세를 보이고 안으로는 협회회장인 최홍희가 오도관 세력만으로 태권도를 독립시키겠다고 고집했다.
최홍희는 1965년 3월에 떠나기로 되었던 구(歐)ㆍ아(阿) 사절단의 이름을 태수도냐 태권도냐는 명칭문제로 지도관계와 오도관계가 맞섰다. 이미 깨어진 꿈이긴 하지만 구ㆍ아사절단의 이름도 최홍희의 고집으로 이사회를 소집했으나 1차에 폐기, 2차에 3분의 2미달, 3차 회의에 들어가 거수투표로 겨우 가결, 정족수를 넘어 결국 3차의 강행 끝에 태권도로 굳어졌다.
이 총회의 합법성이 결여되었다고 하여 조사, 수습에 나선 대한체육회도 양파의 단합조정을 서로 해보지도 않고 통합협상 당시의 약속이었으니 어쨌든 지켜야한다는 명분론을 들고 나와 경솔하게 태권도로 통일토록 지시했다(주간 한국, 1965년 8월 22일자).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태권도라는 공식적인 이름의 유래는 1965년 8월 5일 대한태수도협회 이사회에서 결의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이게 태권도의 이름의 유래래요.
첫댓글 읽다가 시간 다가겄다
와우~
진짜 많이 올렸다!!
잘했네^^
굿점!!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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