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은, 청산 및 옥천의 전략 가치 (교통로)
464년 이후로 백제와 신라의 교류는 충주를 경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교류를 했을까? 추정하기 위해 산성이 길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아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 시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충주와 가까이 축성된 산성을 알아보면.
백제는 개로왕(469년) 15년 10월에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목책을 설치합니다. 주12) 백제사자료역주집에서 문안식 교수는 쌍현성과 청목령을 경기도 북쪽인 장단과 개성쪽으로 주13) 보고 있습니다.
신라는 자비마립간 11년(468년)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하고, 9월에 15세이상 하슬라 사람으로 징발하여 니하에 성을 쌓았다. 주14) 여기서 실직은 삼척을 하슬라는 강릉, 니하는 원산만 부근설과 강릉부근 설이 있다 주15) 고 하는데 충주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자비마립간 13년(470년) 삼년산성(삼년이란 공사를 시작한지 삼년만에 끝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을 쌓았다. 주16) 삼년산성은 보은에 위치하여, 쌍현성이나 청목령 목책과 니하성과 같이 고구려의 침략을 대비하여 축성한 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년산성은 충주와 가까워 위례성 충주 상주 경주의 교통로를 위례성 보은 상주 경주의 교통로로 대체할 수 있는 위치이고,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고구려의 공격으로부터 교통로를 보호하기 의미와 스파이 승려 도림의 목적은 위례성 주변의 방위를 허술하게 하면서 백제의 재정을 고갈시키기 위해 고구려의 침략 경로를 위례성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오인시켜 다른 곳에 방어시설을 만들게 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도성이 아닌 변경에 신라땅도 아닌 백제 땅에 신라가 삼년동안 많은 재정을 사용하면서 삼국시대의 최고의 삼년산성을 쌓은 것은 스파이 도림의 농간이 있었던 것 같고 이로 인해 도림은 개로왕의 신임을 더 얻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가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은 것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보나 장기적인 백제의 견제라기보다는 백제와 같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때 만들어진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의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의 요구나 승인 하에 쌓은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486년 신라는 일선지방의 장정 3천을 징발하여 보은의 삼년산성과 현 옥천군 청산(성)의 굴산성을 개축합니다 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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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년 신라가 왜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했나를 알아보기 위해 보은과 청산(성)지역과 옥천이 486년 전후에 백제와 신라입장에서 어떠한 전략적인 가치가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대왕이 한성 위례성 점령 및 백제 개로왕이 피살 된 후 백제 문주왕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상황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군사적 협력이 절실했던 시기로 백제와 신라와의 교류하는 교통로는 지도01에서 보듯이 공주(공산성), 보은(삼년산성), 상주로 연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도 01. 공주상주간 지도
이 길은 ‘백제산성을 통해 본 황산벌전투의 현장’ 논문에서 서정석 교수는 660년 신라군의 백제공격 출발지로 삼년산성(보은)으로 보면서 삼년산성이 신라에서 백제로 올 때 반드시 걸쳐야 할 길목이라고 보았고, 삼년산성이 백제와 신라 교통로의 길목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660년) 9월 28일 ‘백제 멸망 후 새로이 웅진도독이 된 당나라 장수 왕문도가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을 만난 것으로 이때 무열왕은 사비에서 백제의 항복을 받고 삼년산성으로 가서 당황제의 조서를 왕문도로부터 받았다’는 기록 주18) 은 신라 무열왕이 부여, 연산, 대전, 옥천, 삼년산성, 상주를 통해 신라로 갔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삼국사기 신라 헌덕왕 14년(822년)에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주 19) 헌덕왕 14년 김헌창이 웅진성(지금의 공주)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위공, 제릉, 장웅이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삼년산성을 제압한 후 웅진에 이르렀고, 삼년산성은 김헌창이 그의 장군을 보내 요로(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는 기사에서 상주 삼년산성, 공주의 중요한 길목(요로)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공주, 보은,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 상에 있는 보은은 그 시기 백제와 신라의 중요 교통로로서 전략적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럼 현재 옥천군 청산,청산면의 옛 지명인 굴산현에 있었던 굴산성(지금의 옥천군 청성면 소재)은 교통로 상의 어떤 가치가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지도 01를 보면 공주에서 상주를 가려면 보은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 공주에서 굴산성이 있었던 옥천군의 청산를 경유하여 상주로 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옥천(관산성)에서 상주 갈 때, 굴산성이 있는 청산를 경유하는 것이 빠른 길이고 보은을 거쳐가는 것은 우회,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는 백제가 신라 경주를 갈 때 무슨 이유에서 바로 보은으로 가지 못하고 옥천(관산성)으로 우회를 하여야 할 때, 굴산성(옥천군 청산,청성면)이 상주로 빨리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인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공주에서 보은으로 바로 못가고 옥천 쪽으로 우회 한 것은 이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보다 강한 세력이 방해를 했기 때문이며, 백제와 신라보다 강한 세력을 고구려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481년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 북쪽 변경으로 쳐들었을 때 백제와 가야, 신라가 같이 방어를 하고 니하까지 추격 격파합니다. 주20) 또 484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 변경 침입으로 신라와 백제 군사가 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 대파한 주21) 것을 볼 때 나제동맹기간 중인 486년에 신라의 삼년산성과 굴산성의 개축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개축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진을 백제와 같이 막고, 서로의 교류를 위한 교통로 확보를 위해 백제의 요구 또는 승인이나 아니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주12) 三國史記 25 百濟本紀 3, 蓋鹵王 十五年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주13) 백제사자료역주집-한국편1, 2008,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도서출판 아디람, 122쪽
주14) 三國史記 3 新羅本紀 3, 慈悲麻立干 十一三 春高句麗 與靺鞨 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泥河一名泥川](AC 468)
주15) 강릉시 실록자료집 2002, 강릉문화원 33쪽
주16) 三國史記 新羅本紀 3, 慈悲麻立干 十三年, 築 三年山城 [三年者 自興役始終 三年訖功 故名之]
주17) 三國史記 新羅本紀 3, 炤知麻立干 八年 春正月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 三年 屈山 二城
三國史記 卷第三十四 雜志第三 地理一 三年郡 本 三年山郡 景德王 改名 今 保齡郡 領縣二 淸川縣 本 薩買縣 景德王 改名 今因之 耆山縣 本 屈縣 景德王 改名 今 靑山縣
주18) 三國史記 新羅本紀 5 太宗武烈王 七年 九月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주19) 三國史記 新羅本紀 10 興德王 十四年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黃山}>,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주20) 三國史記 3 新羅本紀 3 炤知麻立干 三年 三月 高句麗 與 靺鞨 入北邊 取 狐鳴 等七城 又進軍於 彌秩夫 我軍與 百濟 加耶 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 泥河 西 斬首千餘級
삼국사기 3권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 3월, 481년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및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그들을 니하 서쪽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주21) 三國史記 3 新羅本紀 3 炤知麻立干 六年 秋七月 高句麗 侵北邊 我軍與 百濟 合擊於 母山城 下 大破之 소지마립간 6년 가을 7월, 484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와 백제 군사가 모산성 아래에서 함께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