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년도 : 2022년
제41회 수상자 : 서금복
수상 작품집 :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
대표 작품 : 나도 낙엽인 것을
나도 낙엽인 것을
말이 많은 것보다 적은 편이 좋긴 하나 말수가 아주 적은 며느리와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말을 거는 쪽은 언제나 내 쪽이고, 저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는 물방울 같은 단답형이다.
설혹 말이 많다고 지청구를 듣는다 해도 가슴 속 말을 시원하게 나누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500명이 넘는 카톡 친구를 훑어봤지만, 딱히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A들은 지금 직장에 있을 것이고, B들은 교회로, 성당으로 나가 있을 것이다. 또 C들은 지금 동네에 있는 낮은 산에서, D들은 어느 문화센터에서 자신의 나이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창밖을 보니 벚꽃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진다. ‘와르르 와르르’ 봄바람과 수다를 떨다가 웃음을 날린다. 결국, 혼자서 전동차를 타고 말았다. 수다스러운 봄바람은 두물머리까지 따라왔다.
-시댁 식구가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세상이래.
봄바람이 말을 걸었다.
-그런 거 보면 시댁 식구와 함께 사는 우리 며느리는 착하지.
꽃잎이 흩날리는 강변을 걸으며 봄바람에게 쌀쌀하게 대답했다.
-입덧하다 보니 친정엄마가 보고 싶었겠지. 그래서 더 말수가 없었을 거야.
바람이 또 며느리를 감싼다.
-그래, 나도 신랑보다 엄마가 더 좋았던 신혼 시절이 있었어. 특히 입덧할 땐.
봄바람과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 보니 ‘고등어가 먹고 싶다’는 며느리의 힘없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도 오늘 아침에 몇 번을 물어봐서 간신히 얻어낸 대답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전동차에 올랐다. 바깥 풍경이 오전보다는 맑아 보였다.
전철역 부근 식당 앞에 생선 트럭이 보였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영화 장면처럼.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나온 트럭 주인은 뜻밖에도 내가 아는 남자였다. 얼굴이 좋아졌다며 말을 거니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좋아지긴요, 요즘 여친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팍삭 늙은 걸요.” 너무나 쉽게 나오는 ‘여친’이라는 단어에 그를 빤히 쳐다보니 그가 말을 이어간다. 자기도 아내에게 미안한 줄은 알지만 평생 생선 장수하며 처음 빠진 사랑이라 어쩔 수 없단다. 몇 개월 동안은 참 좋았는데, 얼마 전부터 그녀가 배신을 때렸다며 그는 생선 팔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연애담만 들려 줄 태세다. 안 되겠다 싶어서 고등어 좋은 걸로 얼른 달라고 하니 그는 마지못해 고등어에 소금을 뿌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여친이 왜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머리숱도 없는 그런 영감태기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다 ‘오늘은 그녀가 그 영감과 어디에서 나오는 걸 목격해서 지금 내정신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내가 봐도 제정신은 아닌 건 같았다. 기껏해야 자기에게 생선 몇 번 산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보면. 고등어 값을 치르고 자리를 뜨려 하자 그가 황급히 휴대전화기를 꺼내더니 오늘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라고 했다. 됐다고 하면서도 슬쩍 보니 변심한 애인에게 매달리는 불쌍한 남자와 그런 남자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여자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행인들이 우리를 힐끔거린다. ‘이미 마음 떠난 여자에게는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상책’이라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 그를 못 본 척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집으로 오는 굴다리에서 갑자기 오탁번 시인의「굴비」라는 시가 떠올랐다. 굴비를 살 돈 없는 가난한 계집은 굴비 장수가 내건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라는 말과 바꾼 굴비를 밥상에 올린다. 굴비를 맛있게 먹은 계집의 사내는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했는데 며칠 후 또 굴비가 상에 오른다.
(앞부분 생략) -또 웬 굴비여? /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 (뒷부분 생략)
시 속의 어리석은 계집은 자기의 사내에게 굴비를 먹이려고 그랬다지만 저 생선 장수의 여자 친구는 무엇 때문에 그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길거리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자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생선 장수. 푼수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그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긴 오늘 아침, 나만 해도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두물머리까지 다녀오지 않았는가.
말할 입은 많고 들어줄 귀가 없는 세상. 신신당부해도 언제 터뜨릴지 몰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기 어려운 외로운 세상. 그 세상 속에 나는 과연 입보다 귀를 얼마큼 열었을까. 귀에 담은 남의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입 안에 가두었는가. 그런 면에서 보면 내 며느리는 입보다 귀를 열고 사는 사람이다. 타국으로 시집와서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나눌 친구도 많지 않을 텐데….
얼른 집에 가서 고등어조림이라도 해줘야겠다고 바삐 걷는데 두물머리까지 따라왔던 봄바람은 어느새 생선 장수에 대해 떠드는지 꽃잎들이 아침보다 더 크게 ‘와르르 와르르’ 웃는다. 바람에게 숱하게 들었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옮기지 않아서인지 꽃잎들의 웃음소리가 말갛다.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소감
웃으면서 눈물지을 수 있는 수필을 쓰겠습니다
며칠 동안 새벽잠을 설쳤지요. 새로운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가 과연 누구를 가르칠 만한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등단 25년이 되건만 자신감을 잃고 있을 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통보가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습니다.
나의 첫사랑 ‘수필’은 한동안 자기를 뒷전에 둔 나를 내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었죠. 그뿐만 아니라 제게 강의할 용기도 주었고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인연의 다리도 놓아주었습니다.
우선 강의실에서 만나 저와 함께 수필의 길을 걷게 된 ‘참좋은문학회’ 여러분과 기쁨을 나눕니다. 폭염과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도 글을 가져오지 않으면 제가 난처해할까 봐 밤새워 쓴 글을 갖고 오는 여러분! 또 합평회를 할 때마다 자기 의견은 공손히 말하고 타인의 의견은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여러분이야말로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이지요.
저와 수강생 여러분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신 한국수필가협회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필집에 실린 49편을 분석해보니 10년 동안 『한국수필』에 발표한 글이 11편이더군요. 발표할 지면이 부족한 현실에서 이 정도면 공평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수필 말고도 동시와 시를 쓴다고, ‘한 우물이라도 제대로 파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저는 서정을 중요시하는 ‘시’와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설’의 특징을 잘 받아들여 유쾌한 가운데에서도 눈물지을 수 있는 수필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재주로 쓰는 수필이 아닌, 진솔한 삶만이 써낼 수 있는 수필을 쓰도록 힘쓰겠습니다. 이것이 부족하지만 격려차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제게 용기 주신 여러분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수필집이 나오기까지 몇 차례의 가본(假本)을 만들며 예쁘게 편집하고 멋진 표지를 만들어 준 김은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결과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여러분이 계신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오늘, 그래서 더욱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서금복
『문학공간』 수필(1997), 『아동문학연구』 동시(2001), 『시와시학』 시 당선(2007).
수상 :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과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외.
저서 : 동시집 『파일 찾기』 외 3권, 수필집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 외 2권, 시집 『세상의 모든 금복이를 위한 기도』 .
현재 중랑문인협회 고문, 편지마을 회장, 한국동시문학회 부회장, 『한국수필』 편집차장.
심사평
심시위원 : 지연희 · 장호병(글) · 최원현.
2022년 제41회 한국수필문학상 최종심에는 5권의 작품집이 올라왔다.
그중 김용대 수필집 『나도 낙엽인 것을』 서금복 수필집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을 수상 작품집으로 선정한다. 수필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이 상의 권위는 내로라하는 수상자들의 면면과 문학적 성취에서 온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필가들이 알러지를 느끼는 말은 신변잡기이다. 미학적 장치가 결여된, 사실의 전사에 머무는 글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일상에 불과한 개별성일수록 좋은 소재가 된다. strange & unexpected 해석으로 보편성을 끌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작품세계를 계량화하여 우열을 정하기는 쉽지 않다. 심사에 임하는 부담감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어금지금한 작품세계를 두고 최종 수상 작품집을 뽑느라 심사자들의 고심이 컸다. 축조 심의와 토론을 거쳐 지연희 최원현 장호병 심사위원은 앞의 두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수상자들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선에 들지 못한 작가분들께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서금복 작가의 수필에서는 체온이 느껴진다.
수필은 시의 서정과 소설의 서사를 아우르면서 객관화할 수 있는 해석을 바탕으로 자아를 세계화한다.
삶과 수필쓰기는 맞닿아 있다. 재주가 아니라 진정성을 담아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삶과 글쓰기에서 작가도 독자도 행복하고 나아가 향기와 위로도 나눌 수 있다.
「그 남자의 이사」에서 작가는 주말 주택에 세든 남자가 종내에는 아무것도 갖고 떠나지 못함을 그렸다. “46년 동안 이 세상에 세 들었던 남자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 그런데 그의 이삿짐에 합류하지 못한 것은 ······ 애면글면 사 모았던 땅들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 그들 중에는 수필가도, 글 한 줄도 발표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은 온몸으로 수필을 쓰는, 아직도 구상 중의 사람들일 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조명한 삶에서 나를 궁구하는 작업이 행간에 녹아 있다.
두 작품집에서 문학성을 담보하기 위한 창작 방법은 달랐으나, 공히 사적 주관을 객관화함으로써 미학적 완성을 꾀한 열정과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문학적 성과를 치하하며 한국 수필문학의 지평을 더욱 드넓혀 주기를 주문한다.
첫댓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