冶父 小名은 悉達이요 長號는 釋迦라 度人無數하사 攝伏群邪로다 若言他是佛하면 自己는 却成魔니 只把一枝無孔笛하야 爲君吹起太平歌로다
說宜 世與出世가 是俱化儀니라 雖然如是나 妙相은 無形이요 眞名은 非字니 形之與名을 甚處에 得來요 不因江招月이면 爭知應萬般이라오
應萬般이여 多少人天이 言下에 知歸하고 多少魔群이 廻邪返正고 此是拔亂返正하야 致得太平이어니와 須知有本太平하야사 始得이니 若將報化云是佛인댄 自己天眞은 竟何物고 君看四十九年迹하라 太虛空裏에 生閃電이로다
君看四十九年說하라 權將黃葉止兒啼로다 唯有一處가 也大難忘하니 黃葉葉底無孔笛으로 吹起吾家劫外歌로다 劫外歌여 歌何事오 歌詠人人本太平이로다 怎生是本太平고 人人脚下헤 淸風拂이요 箇箇面前에 明月白이로다
야부 어릴 때 이름은 싣달타이고 커서이름은 석가라. 수많은 사람을 재도하시고 삿된 무리를 거두어 항복받으셨도다.
만약 저를 부처라 하면 자기는 도리어 魔가 되리니 다만 한 대의 無孔笛(피리)을 잡아서 그대를 위해 太平歌를 부르리라.
설의 세간과 출세간이 모두 교화하는 儀式이니 비록 이와 같으나 妙相은 형상이 없음이요. 참된 이름은 글자가 아니니, 형상과 이름을 어느 곳에서 얻어 올 것인가. 江을 인하여 달을 불러오지 않으면 어찌 온갖 곳에 응함을 알 것인가. 온갖 곳에 응함이여, 많은 사람과 天人이 言下에서 돌아갈 줄 알고 많은 마군이 삿됨을 돌이켜 바름[正]에 돌아갔도다. 이것은 어지러움을 뽑아버리고 바른 것에 돌아가서 태평을 이루거니와, 모름지기 본래 태평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옳은 것이니라.
만약 보신 화신을 가리켜 ㅂ처님이라 하면 自己의 天眞(佛性)은 무슨 물건인가.
그대는 四十九년의 자취를 보아라. 큰 허공 속에서 번개불이 번쩍하는 소식이로다.
그대는 四十九년의 설함을 보아라. 방편으로 黃葉(經)을 가지고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함이로다. 오직 한 곳이 크게 잊기 어려우니 황엽과 무공적(法音)으로 내집의 劫外歌를 불러 일으키도다.
겁 밖의노래여! 무엇을 노래하는가. 사람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태평가를 부름이로다.
무엇이 본래의 태평한 것인가. 사람사람의 발아래(그자리)에 淸風이 불며 사람사람의 면전에 달이 밝음이로다.
冶父 在여 說宜 主中主여 長年을 不出戶로다 又寂然不動이로다 又獨坐庵中寂無事로다
야부 在여 설의 주인 가운데 주인이여, 긴 세월동안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또한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또 홀로 암자에 앉아 고요히 일이 없음이로다.
冶父 客來須看이니 也不得放過하고 隨後便打니라
說宜 若一向坐在家舍則途中事가 闕이요 一向行在途中則家裏事疏니 要須在家舍而不虧途中事하고 在途中而不昧家裏事하야사 始得다 所以로 道호대 妙喜가 豈容無着問이리오마는 漚和론 爭負絶流機아하시니라
又客來云云은 感而遂通이요 不得云云은 隨緣無着이니라 又客來云云은 若遇客來어든 須善待요 不得云云은 是客이 稍有賊氣在니 知有賊氣어든 須打殺니라
야부 客이 오면 자세히 살필지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뒤를 따라가서 문득 쳐야하느니라. 설의 만약 한결같이 집에 앉아만 있으면 途中의일이 잘못되고 또 한결같이 도중에만 있으면 家裏事(집안일)가소홀해짐이니, 모름지기 家事에 있으면서 途中일을 잊지 말고, 도중에 있으면서 가사를 소홀하지 않아야 비로소 옳도다.
그러므로 이르되 妙喜(문수보살)가 어찌 無着 선사의 질문을 용납하리오마는 방편으로 絶流機(대근기)를 저버리겠는가 하였다. 또 '객이 오면'이라 한 것은 느껴서 마침내 통하는 것이요, '그냥 지나치지 말라.'한 것은 인연을 따라 집착하지 않음이라.
또 '객이 오면'이라 한 것은 만약 客이 오면 모름지기 잘 대접할 것이요, '그냥 지나치지 말라'함은 이 客은 조금 도적기가 있으니 도적기가 있음을 알면 쳐줄일 것이니라.(자기 본심을 지키고 있다가 번뇌가 일면 사정없이 쳐없애라는 뜻)
冶父 獨坐一爐香하야 金文을 誦兩行이로다 可憐車馬客이여 門外에 任他忙이로다
說宜 家裏事와 途中事를 一道俱行이니 常在途中하야 而昧於家裏事가 是可憐也로다 又獨坐云云은 寂照不二하야 體用如如요 可憐云云은 未了底人이 坐在聲色裏하야 三德彼岸에 相去大遠하니 是可憐也로다 又翛然獨坐眼惺惺하니 任他客賊門外忙이로다
야부 홀로 한 향로 옆에 앉아서 경전(金文) 두어 줄을 외우도다 가련하다. 車馬의 客이여. 문밖에서 그의 분망함에 맡기도다.
설의 집안일과 도중일을 한 길로 함께 해야 하는데, 항상 도중에 있어서 가사일에 어두운 것이 가련하다 함이로다.
또 '홀로 한 향로'라는 것은 寂과 照가 둘이 아니어서 體와 用이 如如함이요, '가련하다'함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聲色(바깥 境界) 속에 앉아 있어서 三德(법신, 해탈, 반야)의 저 언덕에서 서로의 거리가 너무 먼 것이가련하다 함이로다.
또 소연히 홀로 앉아 눈이 성성하니 저 객적이 문밖에서 분망함을 그대로 내버려 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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