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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9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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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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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위에서 말한 바로는 조사의 교[祖敎]와 설명이 같으므로 마음이 있으면 모두가 성불하게 될 터인데 지금 현재 보이는 중생들은 어찌하여 성불하지 않았는가. |
[답] 만약 중생의 눈으로 보면 다만 중생 세계가 남아 있는 것만 보일 뿐이거니와, 만약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부처의 경계를 아는지라 바깥이 없다. |
그러므로 무명의 망령된 바람이 마음 바다에 치는지라 동요하기 쉽고, 본각(本覺)의 참된 성품이 오랜 꿈에 잠자는지라 깨어나기 어려운 줄 알 것이다. |
이 때문에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너의 심령(心靈)은 모두가 명료하다고 하였으니, 잠시라도 어려운 일이 없되 미혹된 이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모름은, 마치 아름다운 옥이 진흙에 빠져서 스스로 비싼 값을 감추는 것과 같고 마치 순금이 조약돌과 섞여서 쓸쓸하게 빛을 숨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 너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5욕(欲)을 얻어서 마음대로 하게 하려고 아무 해 아무 날에 값을 칠 수가 없는 귀중한 보주를 너의 옷 속에다 매어두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데도 너는 모르고 애쓰고 근심하며 고통하고 살아가니 매우 어리석구나. 너는 이제 이 보주로 필요한 것을 바꾸어라. 언제나 뜻대로 모자라는 바가 없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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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과 같다. |
그러므로 본각은 언제나 성취되어 있고 옷 속의 구슬은 잃지 않은 것임을 알지니, 만약 원돈(圓頓)의 교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곧장 제 마음을 알겠는가. |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각(覺)은 이룩되어 있기 때문에, 보살은 법박(法縛)과도 함께하지 않고 법탈(法脫)도 구하지 아니하며 생사도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사랑하지 아니하며 계율 지님도 공경하지 않고 무너뜨림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오래 익힌 이도 존중하지 않고 배우지 못한 이도 업신여기지 않는 줄 알지니, 왜냐 하면 모두가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온갖 중생은 모두가 본각이 성취되었음을 알겠다. |
불각(不覺)이기 때문에 물들음을 따르는 각[隨染之覺]으로 오인하여 훌륭하고 하열함의 경계를 보고 기쁘고 싫어함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허망한 윤회를 따라 단박에 참된 각을 미혹했을 뿐이다. 그러나 각으로 인하여 불각이 있으니 만약 진실이 없으면 허망이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연기가 없으면 불이 피지 않는 것과 같다. |
또 각은 불각을 의지하는데 마치 그릇을 따르는 금이 그릇을 기다려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현상은 능히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
그런 까닭에 진실 하나만도 성립되지 않고 허망 하나만도 이룩되지 않는다. 단독의 진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함은 부처의 과위는 남[生]이 없기 때문이요, 단독의 허망만으로는 이룩되지 않는다 함은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
선덕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온갖 중생의 금빛 세계의/때 없이 깨끗한 지혜는 파괴 없다/보배 구슬이 본래 이 옷 속에 있는데도/오랜 가난으로 [문]밖에만 있으려 하네./ 청정한 보배 수레 네 거리에 서 있자/문수는 인도하고 보현이 붙들며/씩씩한 하얀 소 아주 힘이 세어서/한 생각에 두루 유람하여 진퇴가 없네./ 이와 같은 보배 수레에 들려 하지 아니하고/애씀만을 즐기면서 [문]앞에 서 있으며/제 몸 속에 언제나 있음을 모르고서/위로 돌려보내며 못 미친다고만 하네”라고 함과 같다. |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일체지(一切智)를 구하고자 하면/속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룰지니/깨끗하고 미묘한 마음으로써/보리의 행을 닦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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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혀야 한다”라고 했으며, 또 게송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좋고 기름진 밭에/심게 되면 반드시 무성하게 자라듯/이와 같아서 깨끗한 마음자리 /모든 부처의 법 출생시킨다”고 했다. |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중에서 한 부처님도 이 마음을 믿지 않고 성불한 이 없고, 스물여덟의 조사 안에서 한 조사도 이 성품을 보지 않고 조사가 된 이 없는 줄 알 것이다. |
지금 들으면서도 조사와 부처가 되지 못한 이는 모두가 믿음이 미치지 못하고 소견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만을 배우면서 그 마음을 비추지 아니할 뿐이요 그 이해만을 고집하면서 그 법에 깊이 들지 아니할 뿐이다. 왜냐 하면 믿음이 바로 도(道)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믿음은 바로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했으니 보는 그대로요 의심할 것이 없다. |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괴로움을 보고는 진리의 익힘도 없애거늘, 하물며 현행(現行)하는 마음 밖의 경계이겠느냐”라고 했으니, 종경(宗鏡)에 들어야만 비로소 앞의 잘못을 깨치고 마음 빛이 꿰뚫릴 때 남은 흠도 저절로 다한다. |
화엄의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생각마다 언제나 부처가 있어서 정각을 이루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 정각을 이루셨기 때문이니라. 자기 마음에서처럼 온갖 중생들의 마음 역시 그러하여 모두가 여래가 있고 등정각을 이루며, 넓고 크고 두루하여 곳마다 있지 아니함이 없고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면서 쉼이 없느니라”고 했다. |
부사의 방편법문에 들어가는 데에 옛 해석에 이르기를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서 성불한 것에 둘이 있다. 첫째는 중생의 몸과 마음이 바로 부처가 증득할 바이기 때문이니, 부처는 중생의 체성을 증득하고 중생의 작용을 쓴다. 둘째는 전체가 그대로 부처의 보리 성품이기 때문에 한 성품이어서 다름이 없고, 이는 곧 다른 결과가 나에게 있는 원인이니 나의 원인으로 다른 결과를 이룩한다. 그러므로 부사의 방편법문에 드는 것이라 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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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뜻을 얻지 못한 이는 중생의 생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것 또한 불가하며 설령 부처의 생각을 지었다 하여도 역시 불가하며 즉함[卽] 또한 불가하고 즉하지 않음 역시 불가한 것이니, 깨끗한 지혜 눈으로 모든 망정을 취함이 없어야 한다. |
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이 앎에 의지하여 깊숙한 데마다 다하지 아니함이 없게 한다”고 했으며,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25유(有)에 나[我]가 있다면 스스로 진실한 이름의 나[我]이니, 이른바 온갖 법의 체성의 진실이다”라고 했다. |
일체 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어서 부처의 원인이 되므로 ‘불성이 있다’고 이름하는데, 마치 온갖 빛깔 속에는 공(空)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정에게만 여래의 바른 성품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법 가운데도 모두가 안락함의 성품이 있다. |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육안으로 보면 진실마다 범속되지 아니함이 없고, 법눈으로 보면 범속마다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다. |
또 이르기를 “법신이 다섯 갈래를 헤매므로 중생이라 한다”고 했다. 법신이 바로 진여일 뿐이나 다섯 갈래를 헤매면 곧 이것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므로 중생이라 한다. 이것은 차별되는 이치이다. |
또 수연(隨緣)이 곧 불변(不變)이기 때문에 차별을 빼앗아 체성이 공(空)하게 하면 끝[末]이 숨으며, 체성이 공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불변을 빼앗아 수연하게 하므로 근본이 고요하다. 온전한 근본의 끝이 되기 때문에 근본이 이내 숨고, 온전한 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끝이 이내 없어진다. |
이것은 진여가 인연을 따라 중생이 되는 것이나 일찍이 참된 체성을 잃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중생이 아니게 하며, 중생의 체성은 공하여 곧 법신일 때에도 일찍이 중생이 없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쌍으로 끊어졌고 두 가지가 벌써 서로 끊어졌다면 진실과 허망이 평등하여 다를 만한 것이 없다. |
그러므로 이르기를 “인연을 따르나 있게 되는 법신이 아니어서 언제나 현상을 달리하면서 성립되지 아니하고, 고요히 사라지나 없게 되는 중생이 아니어서 언제나 진실을 달리하면서 드러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알라. 번뇌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번뇌이다”라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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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는 승천왕(勝天王)에게 말씀하셨다. |
‘마치 값으로 칠 수 없는 여의보주가 장식으로 갈고 닦아서 산뜻하여 사랑할 만하고 바탕이 뚜렷하며 아주 깨끗하여 흐림이 없는 것을 흙탕에 떨어뜨려 오랜 세월이 지났었는데 어떤 사람이 주워서 수호하며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법의 성품도 그러하여 비록 번뇌에 있다 하더라도 물들게 되지 않다가 뒷날에 다시 드러나느니라. |
천왕아,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중생의 제 성품이 청정하나 객진번뇌에 가리워져서 제 성품에 들지 못하는 것을 모두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는 용맹스레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여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이 그 번뇌를 없앤다 함을 말하고, 온갖 중생들은 모두 성품의 깨끗함이 있으므로 그들을 못났다고 여기지도 않고 존중해야 하며 그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 법대로 공경해야겠다>고 하고, 보살마하살은 이내 반야를 내느니라.’” |
『사나대비처태경(闍那大悲處胎經)』에서 이르기를 “악마와 범왕과 제석궁의 여인들이 모두 몸을 버리지도 않고 몸을 받지도 아니함은 모두가 현재의 몸에서 성불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게송에서 말하기를 “법 성품은 마치 큰 바다가/잘잘못이 있음을 말하지 아니하듯/범부거나 성현이거나/평등하여 높거나 낮음이 없나니/마음에 있는 때가 소멸되기만 하면/증득하기 손바닥을 뒤치는 것 같네”라고 했다. |
『화수경(華手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견의(堅意)야, 걸림 없는 끝[無礙際]이라 함은 곧 끝없는 끝[無邊際]이며, 끝없는 끝이라 함은 바로 온갖 중생들의 성품이니, 이것을 끝의 문[際門]이라 하느니라. 이 끝의 문에 들면 천억의 법장(法藏)을 연설할 수 있으며, 이 법장이란 바로 장(藏)이 아니니라. 견의야, 여래의 뭇 법장 중에는 연설한 바 법이 있지만 모두가 이 끝을 말하느니라. 또 색장(色藏)과 수장(受藏)ㆍ상장(想藏)ㆍ행장(行藏)ㆍ식장(識藏)이 있지만 이 장은 장이 아니며, 스스로 장에 있지 않으면 이것을 모든 장이라 하는데 아자(阿字)의 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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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느니라.’” |
해석하여 보자. 아자(阿字)라 함은, 곧 남이 없음[無生]의 뜻이다. 만약 마음에 남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 얻을 만한 법이 없는 것이니, 이 유식(唯識)을 깨쳐야 비로소 도의 첫 문에 든다. |
그런 까닭에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를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으면 중생이라 하느니라. 중생이란 곧 법신의 뜻이니, 마치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서의 말과 같으니라. 사리불아, 곧 이 법신은 항하 모래보다 더한 한량없는 번뇌가 얽혀서 끝없는 때로부터 세간의 생사 파도를 따르면서 가고 오고 나고 없어졌으므로, 중생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
이러므로 만약 ‘중생이 곧 법신’이라 하면 심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라. |
그러므로 선덕이 『대열반경』의 말씀을 인용하기를 “‘어떤 사람이 연뿌리의 오라기로 수미산을 매단다면, 생각하거나 말로 할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은 한 생각 동안에 나고 죽음을 헤아리는 것도 불가사의하니라’”고 했다. |
지금 밝힌 원만한 도리는 환히 알기 어려우므로, 우러러 믿을 따름이다. 만일 생사에 불가사의의 도리가 있음을 듣고서 우러러 믿을 수가 없다면, 한 마음이 곧 여래장이기 때문에 원만한 뜻이 아니다. |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몇의 중생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
문수가 말하였다. |
‘중생계의 수는 여래계와 같나이다.’ |
‘중생계는 넓은가, 좁은가.’ |
‘불계의 넓고 좁음과 같나이다.’ |
‘온갖 중생들은 어느 계(界)에 매어 있는가.’ |
‘여래의 매임과 같아서 중생 또한 그러하나이다.’ |
‘중생계는 어디에 머무르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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