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19명의 아들들
적자 8명
서자 11명
세종대왕은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지만,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8남 2녀 등 많은 자녀의 삶은 대체로 비극적이고 불행했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계유정난)과 형제들의 이른 요절이 겹치며 비극적인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11명의 서자를 두었습니다
1. 조기 요절 (대부분 40세 이전에 사망
태종의 아들들(양녕, 효령, 세종)은 대체로 장수했으나, 세종의 아들들은 수양대군(세조)과 임영대군을 제외하면 대부분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습니다.
광평대군(5남): 20세의 나이로 천연두(창진)로 요절했습니다.
평원대군(7남): 역시 20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2. 형제간의 참극 (계유정난)
안평대군(3남): 당대 최고의 명필이자 시, 서, 화에 능했으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으로 인해 조카 단종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강화도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금성대군(6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조카인 단종을 복위시키려다(단종복위운동)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3. 문종의 요절과 어린 단종의 비극
문종(장남): 세종을 닮아 학문을 사랑했으나 몸이 약했고, 세종 사후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단종(손자):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살해당하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4. 수양대군의 잔혹사
세조(수양대군, 2남): 아버지 세종이 가장 사랑했던 자식 중 하나였으나, 세종 사후 형제인 안평대군,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을 차례로 죽이거나 유배하며 권력을 잡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종의 아들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성군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정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권력 싸움의 희생양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습니다.
세종대왕의 적자 8명
적1남
문종, 이향(李珦)
적2남
세조, 이유(李瑈)
세조의 친필
적3남
안평대군 이용(1418 ~ 1453년)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1418년(태종 18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이다. 1428년(세종 10년)에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열두 살인 이듬해에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화를 좋아했으며 시, 서, 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 못지않게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으며, 유명한 서화를 많이 수집, 소장하고 교류하는 문화예술인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또한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여 한때는 그의 서풍이 조선팔도를 휩쓸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그의 진필로는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다. 금석문으로는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신도비〉, 과천의 〈임영대군묘표〉등이 있다.
이렇듯 문사 기질이 강한 그였지만 함경도에 6진이 신설되었을 때는 직접 나아가 야인을 토벌하기도 하였고, 황보인, 김종서 등의 문신들과 뜻을 같이해 수양대군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을 장악하는 등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나서기도 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으로 옮겨진 후에 사사되었다. 향년 36세였다. 1747년(영조 23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다.
부인 영일 정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적4남
임영대군 이구(1420 ~ 1469년)
임영대군 이구는 1420년(세종 2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헌지(獻之)다. 아홉 살 되던 1428년에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다. 천성이 활달하고 무예를 즐겼던 그는 일찍부터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1년에 궁궐 안으로 여자를 남장시켜 들여오다가 문지기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회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42년에 원윤이 되면서 관작이 회복되었다.
세종은 무예에 능한 그에게 1445년에 총통 제작의 감독을 맡겼고 1450년에는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크게 신임을 얻고 영화를 누리다가 예종 1년에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부인은 의령 남씨 남지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전주 최씨 최승녕의 딸이다. 두 부인에게서 5남 2녀를 얻었다.
적5남
광평대군 이여(1425 ~ 1444년)
광평대군 이여(李璵)는 1425년(세종 7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환지(煥之)다. 여덟 살에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열두 살이던 1436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던 그는 《효경》, 《소학》, 사서삼경, 《좌전》 등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에는 태조의 일곱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째 소생인 이방번(무안대군)의 봉사손이 되어 후사를 이었다.
이듬해에는 새로 개척한 북방 6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해 한양에 경재소를 두었을 때 종친으로서 그 일을 맡아 주관했다. 자태가 뛰어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던 그는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종 26년의 일이었다. 시호는 장의(章懿)다.
부인은 평산 신씨 신자수의 딸이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적6남
금성대군 이유(1426 ~ 1457년)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1426년(세종 8년)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3년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열두 살 되던 해에 전주 최씨 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효심과 충성심이 지극하였던 그는 세종과 문종의 뜻을 받들어 끝까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려 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임금을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자 수양대군에 반대하며 더욱더 단종을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2년 뒤인 1455년, 마지막 남은 임금의 측근과 종친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의 모함을 받고 삭녕에 유배당한다. 이후에도 광주, 순흥 등지로 여러 유배지를 전전하였다.
성삼문, 박팽년 등이 일으킨 단종복위 사건의 실패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당하자, 금성대군은 유배지인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또다시 단종복위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거사를 앞두고 관노의 고발로 체포되어 역모죄로 처형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금성대군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안동 옥사에 갇혔을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알몸으로 도망하였다. 모든 관원들이 총동원되어 안동부를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참만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것없구나. 내가 도망할 사람 같으냐?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시다.” 하고는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단종 임금께 네 번 절하고 죽음을 받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791년(정조 15년)에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을 비롯한 6인의 종친)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부인은 참찬 최사강의 딸이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적7남
평원대군 이임(1427 ~ 1445년)
평원대군 이임(李林)은 1427년(세종 9년)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진지(珍之)다. 여덟 살에 평원대군에 진봉되었고 열한 살인 1437년에 남양 홍씨 홍이용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여 시, 서, 예에 능숙하였으나 1445년 열아홉 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세종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나 급병으로 요절하여 세종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였다 한다. 그의 죽음은 세종의 지병인 소갈증을 악화시키는 한편 세종이 불교에 호의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식이 없었으므로 훗날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이현이 그의 봉사손이 되었다.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적8남
영응대군 이염(1434 ~ 1467년)
영응대군 이염(李琰)은 1434년(세종 16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원래 1441년에 영흥대군에 봉해졌으나 1443년에 역양대군으로 개봉되고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최종 개봉되었다.
소헌왕후 소생 중에 막내였기에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는데, 1450년에 세종의 승하도 그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이루어진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서, 화에 능하고 음률에도 뛰어났으며 1463년(세조 9년)에는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시호는 경효(敬孝)다.
부인은 둘인데, 첫 부인은 해주 정씨 정충경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여산 송씨 송복원의 딸이다. 송씨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세종의 서자 11명
서1남(서장자)
화의군 이영(李瓔)으로, 영빈 강씨 소생이다. 세조의 즉위에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며, 성종 연간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죽기 전인 성종 20년(1489년)에 자신의 서자를 선원록에 올려달라고 상소한 기록이 있다. 부인은 밀양 박씨 박중손의 딸이다. 박씨에게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고, 첩에게서 서자 3남을 얻었다.
서2남
계양군 이증(李增)으로, 신빈 김씨 소생이다. 세조의 정변을 도와 좌익공신이 되었다. 1464년(세조 10년)에 죽었다. 부인은 청주 한씨 한확의 딸이며 3남 3녀를 낳았다.
서3남
의창군 이공(李珙)으로, 신빈 김씨 소생이다. 세조의 반정에 적극 협조하였기에 세조가 매우 아꼈다. 1460년 2월에 술병으로 죽으니, 세조가 많은 부조를 하였다. 부인은 연안 김씨 김수의 딸이며, 1남 2녀를 낳았다.
서4남
한남군 이어(李圄)인데, 혜빈 양씨 소생이다. 혜빈 양씨가 단종을 보호하려고 애쓰다가 세조에게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했을 때, 그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부인은 안동 권씨 권격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서5남
밀성군 이침(李琛)으로, 신빈 김씨 소생이다. 세조의 정변에 동조하여 익대좌리공신이 되었다. 부인은 여흥 민씨 민승서의 딸이며, 4남 2녀를 낳았다.
서6남
수춘군 이현(李玹)으로, 혜빈 양씨 소생이다. 안평대군과 친했으며, 혜빈 양씨와 함께 단종을 보호하려다 수양대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어 1455년에 죽었다. 부인은 영일 정씨 정자제의 딸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삭발하고 출가하였으나 성종 9년에 왕명으로 환속하였다. 딸 하나를 낳았다.
서7남
익현군 이관(李瓘)으로, 신빈 김씨 소생이다. 세조의 정변에 호응하여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주색을 즐겨 자주 창기를 불러들여 폭음을 했는데, 이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1464년 5월에 죽었다. 그가 죽자, 세조는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많은 부조를 하였다. 부인은 평양 조씨 조철산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서8남
영풍군 이전(李鐫)으로, 혜빈 양씨 소생이다. 혜빈 양씨가 세조와 대립한 일로 연좌되어 형들과 함께 유배되어 죽었다. 부인은 순천 박씨 박팽년의 딸이다. 그녀는 1녀를 낳았다.
서9남
영해군 이당(李塘)으로, 신빈 김씨 소생이다. 초명은 장이었다가 당으로 바뀌었다. 성종 9년(1478년)에 43세를 일기로 죽었다. 부인은 평산 신씨 신윤동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서10남
담양군 이거(李鉅)인데, 신빈 김씨 소생이다. 1450년 3월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서11남
최근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왕자들의 태를 묻은 성주군의 세종대왕자 태실을 조사한 결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번째 아들인 '이당'의 태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실에 기록되기로는 1442년 7월 24일(음력)생으로 기록되었으며, 1446년 이전[26]에 요절하여 봉군되지 못해 기록에도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442년 7월 24일자에는 기사가 없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보에도 이당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
▣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저자 : 박영규
출판사 : 웅진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