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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83. [역경의 열매] 윤희상 <1-9> 교통사고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터널’
세상의 노래 부르며 교만하게 살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으로 주님 찬양
찬양사역자 윤희상 집사는 “트로트 가수로 화려한 인생을 살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났다”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강민석 선임기자나는 새벽에 통증으로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하나님 저를 이만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온 몸이 통증으로 쑤시지만 나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니 마음은 평안하기만 하다.
12년 전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심각하게 망가져 목 이하 부위를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다. 사고 당시 광대뼈와 콧대는 함몰됐고, 각막 파열과 경추 5∼6번 골절로 ‘척수장애 1급’ 진단을 받았다. 사지마비로 손과 발이 뒤틀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서기 힘들다. 밤에는 육체의 고통과 더 싸워야 한다. 낮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활동하면서 아픈 것을 자연스럽게 잊을 수 있지만 고요한 밤엔 통증이 더 크게 느껴진다. 통증은 당연하다는 듯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통증은 내 삶에 조금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항상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이후 육체·정신·영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이전 화려했던 때보다 더 행복하다.
나는 잘나가는 가수였다. 젊었을 때 멋 부리기 좋아하고 세상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줬다. 오랜 무명생활을 거쳐 2000년 초반 ‘카스바의 여인’이란 트로트 곡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많은 돈을 벌었고 유명해졌다. 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을 갖고 살아온 내가 가수로서 누릴 수 있는 정점을 찍었다. 그땐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교만하게 살았다.
그러나 화려한 순간은 잠깐이었다. 2004년 교통사고 후 세상을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며 피폐해진 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되돌아보니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축복의 통로였다.
노래하는 게 가장 즐거웠던 나는 사고 후 의학적으로 노래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남겨주셨다. 2011년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 평생 식물인간처럼 누워 살아야 하는데 간증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한 달에 두 차례씩 크고 작은 교회 등에서 찬양집회를 하는데 간증하고 찬양하다 보면 어느새 집회 장소는 눈물바다로 바뀐다. 나처럼 질병으로 지친 사람, 사업 실패로 피폐해진 사람, 돈은 많지만 마음이 외로운 사람 등이 나의 간증을 듣고 위로와 도전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 뒤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는 희망을 주는 찬양사역자가 되고 싶다. 2010년에 발표한 복음성가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의 마지막 구절은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이다. “살아도 죽어도 이 몸은 주님 것∼.”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 [역경의 열매] 윤희상 <1> 교통사고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터널'
* [역경의 열매] 윤희상 <2> 여섯 살부터 어머니가 부르던 유행가 따라 불러
* [역경의 열매] 윤희상 <3> 고교 졸업 앞두고 "가수 되겠다" 무작정 서울로
* [역경의 열매] 윤희상 <4> 밤마다 나이트클럽 전전 돈 탕진… 주먹질까지
* [역경의 열매] 윤희상 <5> 잇단 좌절 끝 '카스바의 여인' 가요 프로서 대박
* [역경의 열매] 윤희상 <6> 지방공연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지마비 '날벼락'
* [역경의 열매] 윤희상 <7> 재활치료 중 다시 노래 시작… 출연 요청 쇄도
* [역경의 열매] 윤희상 <8> 찬송가 깊은 뜻 깨달으면서 '눈물'로 찬양 불러
* [역경의 열매] 윤희상 <9·끝> "몸은 엉망이지만 찬양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
◇약력=△1955년 전남 완도 출생 △목포 영흥고 졸업 △1979년 ‘칠갑산’으로 가요계 데뷔, 트로트 곡 ‘카스바의 여인’(2000년) ‘텍사스 룸바’(2002년) ‘파티’(2007년) 발표 △복음성가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2010년),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1·2집’(2015년) 발표 △한국대중가요협회장 역임 △서울 광명그리스도의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윤희상 <2> 여섯 살부터 어머니가 부르던 유행가 따라 불러
당시엔 귀하던 라디오 들으며 배워… 동네 어른들 “노래 잘부른다” 칭찬
윤희상 집사는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해준 고향 어른들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 대표곡 ‘카스바의 여인’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윤 집사.1955년 전남 완도군 청산면에서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외로운 섬마을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농사하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업고 살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힘들었을 텐데 그땐 이 모든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우리 집은 비교적 형편이 나았다. 전남 목포시, 완도군 등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멋 내는 것을 좋아하고 흥이 많은 분이셨다. 지금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건 하나를 어깨에 이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그 물건은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처음 본 동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아이들은 집 앞까지 졸졸 따라왔다. 그때부터 라디오는 내 친구가 됐다.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노래를 좋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두 분은 노래를 잘 부르셨다. 특히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으셨다. 어머니가 창과 민요를 즐겨 불렀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노래를 하나씩 따라 불렀다. 어린 아이가 동요가 아닌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동네 어른들은 나만 보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면 고구마나 사탕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어른들이 “잘 한다”고 박수쳐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동네 어른들이 가수의 꿈을 심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청산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았다. 반에서 유일한 공무원 아들이라 주목을 받았다. 공부를 잘해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은 판사나 검사가 될 재목이라며 큰 기대를 하셨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엔 여전히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포로 이사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선 섬보다 도시가 낫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정에 말 못할 아픔도 있었다. 인물 좋고 성격이 호탕했던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당시 목포에 따로 살림을 차린 것이다. 화가 난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때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로 마음을 잡고 가정에 충실하셨다.
목포로 이사 온 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물자가 부족한 시골에서 살다 도시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전학 간 학교에선 친구들이 나를 ‘섬 놈’이라고 놀리며 왕따를 시켰다. 시골에서 순박한 친구들과 어울렸던 나는 이런 상황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친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못살게 굴고 때렸다. 처음엔 맞다가 이에 굴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매일 주먹질을 해 입술이 찢어지고 눈이 부어있는 날이 많았다.
나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하교 길에 짝사랑한 여학생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집을 지나갈 때면 여학생이 내 목소리를 듣도록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불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과 많이 싸우는 상황에서도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3> 고교 졸업 앞두고 “가수 되겠다” 무작정 서울로
학교 빼먹고 가수 되는 일에만 골몰… “성공 못하면 고향 돌아가지 않겠다”
운동하기 좋아했던 중학생 시절의 윤희상 집사(앞줄 오른쪽 네 번째). 학교 친구들과 태권도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나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목포로 이사 오기 전까지 모범생이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전학 온 초등학교에서 2년 동안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다보니 나는 방어를 하기 위해 싸움을 많이 했다. 한마디로 문제 학생이었다. 목포 유달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턴 아예 힘 센 친구들과 어울렸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기타를 들고 노래만 부르러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접고 다른 일을 하시면서 우리 집은 변화를 맞았다. 아버지는 당시 5년제였던 목포해양전문고등학교(목포해양대의 전신)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끔 실습용으로 배를 타셨다. 그런데 어차피 배를 탈 바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외항선을 타자고 결심하신 것이다. 외항선 회사로 아버지가 이직하면서 우리 집은 형편이 한결 나아졌다.
그뿐 아니었다. 외국에 가실 때마다 해외 제품들을 잔뜩 사 오셔서 다른 집에선 볼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 우리 집엔 많았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집에는 TV와 전화기 등이 없었다. 드라마를 보러 오거나 잠깐 전화하기 위해 우리 집에 오는 동네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애장품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온 기타와 야외전축이었다. 틈만 나면 기타와 야외전축을 갖고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목포 영흥고에 입학한 뒤에는 아예 노래학원에 등록했다. 더 이상 학교 수업이 의미가 없었다. 수업을 빼먹고 학원에서 노래 지도를 받거나 가수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공부는 안하고 놀러만 다닌다며 부모님에게 매도 많이 맞았다. 어머니께서 기타를 박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부모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학교에 등록금을 내지 않고 어머니 몰래 용돈으로 다 써버린 적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 “등록금이 안 들어왔으니 부모님에게 말씀드려라”라며 당부하셨다. 그 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에게 맞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여러 약국에서 산 수면제를 먹고 자살 소동을 일으켰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했다.
고교 2학년 땐 학교도 모르게 노래학원을 통해 목포RMB방송국(목포MBC 전신) 전속 가수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방송국에서 노래 부를 기회를 얻었다. 지금의 ‘전국노래자랑’ 같은 토요 프로그램 ‘직장대회 노래자랑’에 게스트로 나갔다. 그러나 내 분량이 통으로 편집돼 방송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방송에 나온다고 얼마나 자랑했는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목포에선 아무리 노래 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했다. ‘가수가 되려면 서울로 가서 정상적인 코스를 밟자.’ 머리 속은 오직 상경뿐이었다.
그리고 고교 졸업식을 앞두고 일을 저질렀다. 오로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가친척 한 명 없는 서울로 무작정 친구와 상경했다. 집안 금고에 있는 돈까지 챙겨서 말이다. 서울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4> 밤마다 나이트클럽 전전 돈 탕진… 주먹질까지
수년 허송세월하다 노래 받아 연습… ‘칠갑산’ 타이틀로 제1집 음반 발표
지인들과 그룹사운드를 조직해 음악 활동을 하던 때인 20대 중반의 윤희상 집사(뒷줄 왼쪽 두 번째).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왔지만 화려한 밤 문화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고고클럽’(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가수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 하고 서울에 온지 6개월 만에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낙향했다.
20세 가을 고향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는 한창 김장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오메 내 새끼”하며 고춧가루가 묻은 팔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왔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어머니 마음도 모르고 서울에서 산 좋은 옷에 김치 양념이 묻은 게 싫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고고클럽이 생각나고 명동에 있는 음악다방,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들의 모습들이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만 밀어주시면 꼭 훌륭한 가수가 되어 돌아올게요.”
당시 우리 집은 선창가에 상가 한 채와 안집 두 채를 갖고 있었다. 상가 한 채와 집 한 채를 팔아 나를 지원하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마지막 돈을 받아 상경할 때 어머니께서 기차역까지 배웅 나오셔서 손가락에 꼈던 금가락지를 빼주시며 “돈이 다 떨어지면 비상금으로 팔아 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금가락지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의 금가락지까지 팔아먹은 나는 더 이상 고향에 갈 면목이 없었다. 돈이 없어 수없이 굶었고 버스비가 없어 걸어 다녔다. 비가 오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했고 추운 겨울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집 굴뚝을 끌어안고 잔적이 많았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갈 수 없었던 것은 빈손으로 내려가기엔 너무나도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할 일 없이 뒷골목을 헤매다 폭력 사건에 휘말렸고 서울 강북성심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가수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졌다.
평소 친분 있던 가수 박건씨로부터 작곡가 임종수씨를 소개받아 청계천8가에 있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다 임씨와 콤비인 작사·작곡가 조은파씨를 소개 받고 그의 밑에서 가수 지망생 생활을 했다. 조씨가 기획실장으로 있는 대성음반 출장소에서 숙식을 했다. 난방이 안 되는 차가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잤다. 조씨는 나를 가수로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대성음반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건 아니었다.
당시 피아노로 레슨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다른 가수에게 녹음시킬 반주음악을 전달 받아 연습을 했다. 그때 받은 곡이 ‘칠갑산’ ‘오지 마세요’라는 두개의 신곡이었다. 그 곡을 가지고 1년 넘게 밤낮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나서야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한 가수가 녹음을 일찍 마쳐 30분이 남았다며 조씨가 나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권했다.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30분 만에 두 곡의 녹음을 거뜬히 끝낼 수 있었다. 녹음된 곡을 두 곳의 음반회사에 보냈고 모두 음반 제작을 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드디어 1979년 신곡 몇 곡을 추가해 대성음반에서 ‘칠갑산’을 타이틀로 한 1집을 발표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5> 잇단 좌절 끝 ‘카스바의 여인’ 가요 프로서 대박
노래 부르고 음반도 직접 제작한 ‘옥경이 메들리’ 100만장 판매 기염
1집 ‘칠갑산’ 등 3개의 앨범을 연속으로 실패한 윤희상 집사는 1990년 초반부터 직접 음반제작에 참여했다. 음반제작 사업을 시작한 윤 집사의 모습.많은 사람들에게 곡을 알리려면 그만큼 홍보가 뒷받침돼야 한다. 회사에서 받은 홍보비 등을 갖고 전국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1집 앨범을 알렸다. 그런데 타이틀곡 ‘칠갑산’을 홍보하던 중 대성음반 사장이 홍보곡을 ‘오지 마세요’로 바꾸고 디스코풍으로 다시 제작하라는 것이 아닌가. 허탈했다. 다른 회사에서 다시 음반을 낼까 고민했지만 작사·작곡가 조운파씨의 설득으로 홍보곡을 과감히 바꿨다.
홍보를 많이 하지 못한 1집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회사에서 받은 홍보비가 부족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끌어 써 수중에 돈이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무명가수로 밤무대를 다니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대성음반에서 연락이 와 두 번째 음반 ‘내 인생 다시 한 번’을 만들었다. 홍보 지원사격이 없었던 2집 역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84년 가수 나훈아씨를 만난 나는 그가 운영하는 술집의 영업부장으로 잠깐 일했다. 이후 대성음반에서 또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와 3집 ‘당신의 고독’을 만들었다. 그러나 3집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3개의 음반을 연속으로 실패해 궁여지책으로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했고 직접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여러 작곡가들에게 좋은 곡을 받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나훈아씨에게서 도움도 받았다.
90년 노래도 부르고 직접 음반을 제작한 앨범 ‘옥경이 메들리’를 발표했다. 영업만큼은 대성음반에 맡겨 인세를 받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 앨범은 나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히트를 쳤다. 100만장이 넘게 팔린 ‘대박’ 상품이었다. 이 앨범으로 받은 인세로 92년 ‘카스바의 여인’을 타이틀로 한 앨범을 다시 세상에 내놨다. 1년 동안 홍보를 했지만 크게 인기를 끌진 못했다.
이후 음반제작 사업에 본격 손을 대며 영업에도 참여했다. 지금까지 뿌린 눈물의 씨앗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94년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음반이 히트를 친 것이다. 갑자기 많은 돈을 벌어 음반제작에 재미를 느꼈고 레코드 회사와 녹음실도 차렸다. 사업이 잘 되니 세상의 쾌락에 빠져 가수의 꿈도, 고생했던 시절도 모두 잊어버렸다.
어느 날 가수들로부터 92년 발표된 ‘카스바의 여인’을 리메이크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수 송대관씨는 나에게 2번이나 요청했고, 한 인기가수는 내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곡을 사용해 음반까지 냈다. 다른 가수는 2억원에 그 곡을 팔라고 제의했다.
그러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다시 가수의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리메이크된 ‘칠갑산’은 원곡보다 더 유명해진 터였다. ‘카스바의 여인’마저 다른 가수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을 직접 부르기로 결심한 나는 99년부터 공격적인 홍보 활동에 들어갔다. 이 곡은 MBC 주말드라마 ‘남의 속도 모르고’의 OST 중 하나로 삽입됐고, 이듬해부턴 라디오와 TV 등에서 방송을 탔다. 그리고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2000년 후반부터 이 곡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고 이듬해 대박을 터트렸다. ‘카스바의 여인’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연속 5주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나는 ‘카스바의 여인’으로 부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가수로서 최고의 정점을 찍은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6> 지방공연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지마비 ‘날벼락’
영원히 노래 부를 수 없다는 절망에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죽음만 생각
2004년 10월 29일 대형 트럭과 추돌 사고 직후의 윤희상 집사 자동차 모습. 이 사고로 윤 집사는 척수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내 인생의 히트곡 ‘카스바의 여인’으로 오랜 시간 무명가수로 보낸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가수의 꿈을 이루고 세상의 명예도 얻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다른 가수들보다 빨리 히트곡을 늘려야겠다는 끝없는 조급증에 더 바쁘게만 보냈다. 트로트계 4인방에 들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심도 있어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많은 행사와 밤무대, 공연장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카스바의 여인’ 이후 발표한 ‘텍사스 룸바’도 많은 인기를 얻었고 신곡을 홍보하며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2004년 10월 29일 오후 5시42분.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4.5t 트럭과 추돌사고로 차는 전복됐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매니저 없이 직접 차를 몰고 목포로 가던 길이었다.
몸을 많이 다쳐 전남대병원,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과 강남성모병원까지 세 군데를 거쳐야 했다.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갑자기 참아낼 수 없는 고통에 눈을 뜬 것이다. 이제껏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만한 고통은 이전과 이후에도 없었다.
정신을 되찾고서야 앞니 6개가 빠졌다는 걸 알았다. 전국노래자랑, 목포가요제 등 TV 녹화를 앞두고 있던 나는 하루빨리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방송 출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일어나려는 순간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사고로 광대뼈 함몰, 각막 파열, 콧대 함몰, 이빨 빠짐, 갈비뼈 골절, 폐 손상을 입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목뼈가 부러져 ‘경추 5∼6번 사지마비 척수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눈이 썩어 오른쪽 눈을 빼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내가 도저히 그 수술은 할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해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겼다. 3∼4번의 수술 끝에 다행히 0.4의 시력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노래를 영원히 부를 수 없고 사지마비로 평생 침대에 누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머리 속엔 오로지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까운 후배를 통해 제초체를 얻어 자살하려 했지만 누가 그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자살마저 내 힘으로 할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병동이 부족해 암병동으로 옮겨졌다. 암 환자들과 같이 생활하던 어느 날, 옛 친구가 목사님을 모시고 문병을 왔다. 친구는 성경책을 선물로 주며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다시는 병원에 오지 말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오히려 같은 병동에 있던 암 환자들이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들이 목사님께 기도 받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럴까’라며 비웃었다.
같은 병실에는 성격이 거친 암 환자가 있었다. 그의 친동생이 목회자였다. 동생은 형의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형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영접했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떠나게 됐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가 부럽기만 했다. 죽을 수도 없었던 나는 계속 어떻게 죽을까에 대한 방법만 연구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7> 재활치료 중 다시 노래 시작… 출연 요청 쇄도
무리한 일정에 ‘욕창’ 생겨 활동 중단… 생활비 벌던 아내까지 사기에 당해
윤희상 집사는 교통사고 후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지만 꾸준한 재활운동을 통해 스스로 휠체어를 밀 수 있게 됐다. 윤 집사 부부가 지난해 미국여행 중에 찍은 사진.입원해있는 동안 많은 선·후배와 동료 가수, 지인들이 방문했다. 송해 선생님은 일주일에 3∼4번씩 오셔서 위로해주셨다. 치료비에 보태라며 위로금을 주신 나훈아·송대관 선배님, 그리고 동료 가수와 지인들께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강남성모병원에서 두 달을 보낸 나는 대책 없이 침대에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서울 국립재활원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나처럼 불의의 사고로 장애우가 된 이들이 많았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중심 잡는 법, 휠체어를 스스로 미는 방법 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산병원을 거쳐 삼육재활원으로 옮겨졌다. 마침 병실 옆에 누구나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죽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눈만 뜨면 운동을 했다.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자살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처음엔 중심 잡기도 힘들었지만 여러 가지 재활치료 운동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힘을 키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혼자서도 휠체어를 조금 밀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어느 날 기자들이 병원에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재활운동을 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가요 프로그램 등에서도 섭외가 들어왔다. 다시는 노래 할 수 없다는 의학적 진단을 받은 후여서 노래를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리허설에 일단 참석하고 노래가 안 되면 돌아오자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리허설에서 힘이 들긴 했지만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사고 전에 불렀던 음역대 그대로 말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래가 내 인생의 전부였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자 갑자기 죽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사고난지 11개월 만인 2005년 9월 29일 삼육재활원에서 퇴원했다.
이후 방송사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내가 무대에 오를 때면 대중으로부터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엉덩이 살점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허벅지 살도 떨어져 변기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누우면 오른쪽 살이 떨어지고, 왼쪽으로 누우면 왼쪽 살이 떨어졌다. 엉덩이 살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퇴원 이후 바쁘게 휠체어를 타고 공연하러 다닌 것이다. 병원에서 ‘욕창’ 판정을 받은 뒤 모든 것을 포기한 나는 사고 때보다 더 큰 절망에 빠졌다. 다시 죽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욕창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자 아내가 생활비를 벌겠다고 나갔다가 다단계 업체에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나마 몇 푼 있던 돈도 다 털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었던 아내는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살하려던 내가 우울해하는 아내를 도리어 위로해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결의에 찬 내 모습에 아내도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큰소리를 쳤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의지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아내 친구가 섬기는 교회를 찾았다.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서울 광명그리스도의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8> 찬송가 깊은 뜻 깨달으면서 ‘눈물’로 찬양 불러
“주님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노래뿐” 찬양사역·복음성가 제작에 나서
윤희상 집사는 주님을 만난 뒤 찬양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고 있다. 사진은 한 기독 방송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는 윤 집사 모습.아내와 서울 광명그리스도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특히 찬송가 가사가 내 마음을 깊이 울렸다. 노래를 했던 사람이라 가사 이해력이 좋았던 것이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찬송을 중단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통곡에 가까운 내 찬송에 다른 성도들도 흐느꼈다.
목사님의 설교도 들리기 시작했다. 말씀을 조금씩 이해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봤다. 이 넓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는 연로하신 부모님, 자기들 먹고 살기 바쁜 형제·자매들, 착하기만 한 아내밖에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 한몸 의지할 곳 없는 처절한 현실 앞에서 오로지 의지할 데라곤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뒤늦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찬양사역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로지 노래뿐이다.’ 그런 생각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갖고 있던 돈은 500만원뿐이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가수지망생 때 같이 노래했던 친구 허만생 목사님과 의논하면서 복음성가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당시 주일 오전 예배는 내가 섬기는 광명그리스도의교회에서 드리고 오후 예배는 친구 허 목사님이 경기도 남양주에서 개척한 성민교회에서 드렸다. 왕복 100㎞가 넘는 거리였다. 엉덩이에 생긴 욕창이 계속 악화됨에도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에 예배 드리러 가는 그 길이 힘들지 않았다. 사실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놓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 한 명 없는 현실에서 육체·정신적 고통으로 인생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럴 때마다 기도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며 ‘너는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희망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다.
복음성가 앨범을 제작하는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만큼 그렇게 기도했던 적도 없었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은혜의 찬양을 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은행 빚을 지면서까지 찬양앨범 만드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내게 지혜를 주셨다. 동료 가수들의 협조를 받아 2010년 ‘디스코 연가 1∼2집’을 먼저 발표하도록 이끌어주셨다.
그러나 앨범을 내놓고 여러 도매상에 연락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열악한 한 도매상만이 앨범 거래를 수락했다. 앨범을 푼 지 이틀 지났을 때 2000만원 상당의 재주문이 들어왔다. 간절한 기도 속에 떠오른 지혜로 발표한 이 앨범은 히트를 쳤고 이때 얻은 수익으로 나는 빚 없이 복음성가 앨범을 만들 수 있었다. 궁핍한 생활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도매상에 결제를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한 50대 아주머니가 나를 반갑게 알아보셨다. 갑자기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걸더니 나에게 핸드폰을 바꿔주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장으로 자신의 구역담당 목사님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3일 뒤 목사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는데 나를 예배 시간에 간증자로 세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주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는 당시 ‘간증’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더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윤희상 <9·끝> “몸은 엉망이지만 찬양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
5층 녹음실에 업힌 채 올라 다니면서 8개월만에 ‘나 같은 죄인…’ 앨범 제작
윤희상 집사는 2011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시작으로 교회 병원 교도소 등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찬양집회에 나선 윤 집사 부부의 모습.
하나님은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나를 2011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 시간에 간증자로 세우셨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익숙했지만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달랐다. 공연보다 더 떨렸다.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는 순간까지 계속 기도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니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주님을 전할 때면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멘으로 응답했다.
복음성가 앨범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를 발표한 뒤엔 더 바빠졌다. 간증 찬양집회를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소망이 하나 더 생겼다. 찬송가를 부를수록 찬송가로만 음반을 만들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한지 4년 만에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1·2집’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도 특별한 간증이 있다. 녹음실이 승강기가 없는 건물 5층에 있었는데 매번 연습할 때마다 업혀서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했다. 녹음실에 들어가면 이미 지쳐서 녹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잘못 살아온 지난날이 떠올라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다. 연약한 육신으로 일주일에 한 곡씩 녹음할 수밖에 없었다. 눈과 비를 맞으며 8개월의 시간을 거쳐 기도와 눈물로 만들어낸 앨범이다.
하나님을 만난 뒤 나는 분노와 원망이 아닌 참된 평강을 얻었고 매사에 감사할 조건을 찾으며 주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힘들어 하면서도 항상 웃음으로 대해준 아내가 고맙지만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미안해 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느낌이다.
하나님은 나의 고난을 통해 나처럼 고난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신다는 걸 깨달았다. 주님을 만나기 전 흘린 눈물은 원망과 분노, 한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주님 앞에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흘리는 눈물은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내가 당한 고난은 분명 죄악의 고난이었지만 주님 만난 후의 고난은 천성으로 가는 축복의 고난이라 믿는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죽기 위해 몸부림치며 운동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로 인해 휠체어를 밀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교통사고 후 눈이 썩어 빨리 눈을 빼야 한다는 의료진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안보여도 좋으니 눈만 빼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아내의 부탁에 4번의 수술을 거쳐 0.4의 시력으로 회복시켜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다시는 노래할 수 없다는 의학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남겨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 사건들을 보며 나는 주님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덤으로 주신 생명이기에 이제 주님만을 위해 이 몸을 드린다. 병석에서 벌레처럼 누워있던 나에게 사랑의 옷을 입혀주셨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버려진 나에게 권능의 옷을 입혀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이 몸은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그래도 나 같은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혹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나처럼 뒤늦게 매를 맞고 하나님을 만나지 마시고 지금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그 안에 모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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