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간계[헤겔]
List der Vernunft 理性的狡计
이성의 간계(奸計)는 이성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간계를 통해서 자기 목적을 실현한다는 헤겔 논리학과 역사철학의 개념이다.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목적이 실현되는 논리적 과정을 이성의 간계로 설명했으며, [역사철학강의]에서 목적을 향한 역사의 행정을 이성의 간계로 분석했다.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는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목적론(teleology, 目的論)은 모든 인간의 행위, 발생한 사건, 자연 현상에는 목적이 있다는 철학적 입장이고, 목적론적 역사는 정해진 목적에 따라서 역사가 전개된다는 역사철학의 관점이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를 최종목적인 자유를 향해서 전진하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보았다. 이런 목적론적 역사에는 결정론의 성격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 것인가? 헤겔은 결정되어 있는 역사의 목적을 전제하면서 한편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기의식을 인정했다.
역사가 미리 결정된 목적을 향한 전진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율성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헤겔의 답이 이성의 간계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는 인류사를, 이성에 내재한 절대정신이 완전한 자유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으로 본다. 헤겔에게 이성은 절대정신 또는 신의 섭리다.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최종목적을 실행한다. 그런데 이 도구로서의 이성은 최종목적인 완전한 자유를 이루는 과정에서 간계 또는 예지를 행사한다. 다소 부정적인 간계(List)는 의인화된 이성이 (자신은 직접 개입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을 매개 삼아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독일어 List에는 술수, 책략, 간지(奸智)라는 뜻도 있지만 여성적 현명함, 지혜, 예지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헤겔은 List를 부정적 의미인 술수나 간교한 계략으로 쓴 것이 아니다.
헤겔은 논리학과 역사철학에서 이성을 의인화하면서 (인간의 시점을 투사하여) 의인화된 이성이 간교한 계략으로 인간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뜻으로 썼다. 그러니까 도구로 이용당한 인간의 입장에서 이성을 간교하다고 말한 것이다. 논리학과 역사철학에서 이성은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념이자 개념이다. 그리고 자유를 향한 인류의 보편사로서의 목적 역시 관념이자 개념이다. 실제로 헤겔이 말한 역사의 목적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다. 이미 진행된 역사를 반성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역사에 최종목적이 있다고 규정했을 뿐이다. 헤겔이 말한 것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에 내재한 역사철학의 원리다. 실제 역사는 전쟁, 갈등, 모순, 재난, 희생, 반목, 증오, 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역사철학의 관념에서는 자유를 향한 보편의 역사가 가능하다. 그때 유한과 무한, 주관과 객관이 통일되는 인류 보편의 역사가 완성된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당위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향한 인류의 보편사가 되어야 한다. 인류의 보편사는 자체의 합목적성(Zweckmäßigkeit)과 필연성(notwendigkeit)을 바탕으로 최종목적인 자유를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신의 섭리와도 같은 절대정신의 안내에 따라서 최종목적을 완수하는 주체다. 그런데 이성은 관념이므로 직접 인간과 자연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은 합목적성, 필연성, 합리성의 원리만 제시한 다음 인간과 자연이 그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훗날 마르크스는 헤겔 역사철학 개념은 관념성과 종교적 환상으로 인하여 본질을 은폐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이성의 간계는 신의 뜻이 실현되는 방법을 역사철학에 잘못 적용한 개념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헤겔의 이성의 간계에서 신의 뜻인 신정론(theodicy), 관념론, 의인화를 제거한다면, 자유를 향한 인류보편사는 상당히 의미 있는 개념이다.
이성의 간계에서, 자유를 향한 목적지향의 이성과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 인간, 자연의 이성이 보편적이라면 세계 이성과 인간 이성의 합일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편의 역사와 보편의 이성을 전제로 한다면, 이성의 자기실현이 곧 역사의 전진이다. 헤겔은 인류보편사를 추동하는 특별한 존재를 세계사적 개인으로 명명했다. 헤겔이 말하는 세계사적 개인은 (나폴레옹과 같이) 시대정신에 따라 살면서 역사를 이끄는 위인이다. 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인류 역사가 전진한다. 한편 개별자인 개인은 자신의 의지, 감정, 상황에 따라서 살 뿐, 신이 설계한 목표를 인식하면서 살지 않는다. 세계사적 개인이나 민족사적 개인 역시 이성의 간계를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열정에 따라 살 뿐이다. 하지만 인류보편사에서 보면 인간은 이성이 설계한 자유를 향한 보편의 역사를 실천하는 존재들이다.★(김승환)
*참고문헌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Bamberg/Würzburg, 1807).
*참조 <개별자와 보편자>, <변증법>, <보편자>, <세계사적 개인[헤겔]>, <역사철학[헤겔]>, <의식[헤겔]>, <이성[헤겔]>, <자기부정[헤겔]>, <자기반정립[헤겔]>, <자유>, <자유의지>, <절대정신>, <지각[헤겔]>, <필연⦁우연>, <합목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