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의 죽음준비교육
칼 베커(Carl Becker)교수
이끄는 말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가족에 둘러싸여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한국의 해방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러한 모습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인구는 대거 대도시로 이동했으며 조부모들은 더 이상 그들의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낯익은 환경에서 천천히 거닐어야할 노인들에게 대도시는 너무 빠르고 급격하게 변한다.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은 대도시의 효율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들이 늙고, 병들고, 혹은 죽음이 임박할 때, 효율성을 중시 여기는 현대인들은 그들을 감옥 같은 병실로 보내버린다. 그곳에서 노인들은 더 이상 빠르게 진행되는 업무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대도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늙고 병든다는 것을 잊게 해준다. 아이들은 조부모를 돌보거나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분명한 현실인 “죽음”이 TV, 비디오게임, 혹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상 환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시의 삶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기가 쉽다.
외로움, 소외감, 단절감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자살이나 살인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전통적 문화 내에서보다 대도시에서 자살, 살인 비율이 높다. 우리는 윤리적 이론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자살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더 깊은 감성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의 교육은 사실 수학이나 과학, 언어 따위에 치중하면서 감성, 두려움, 고통, 희망 따위에 대한 관심은 잃어간다. 현대의 교육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즉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잃거나, 우리 자신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종교나 가족 중심적인 삶이 그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으나 요즈음에는 종교를 공부하거나 죽음에 관해 심각히 논의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십여 년 전에 David Leviton이라는 학자가 “죽음준비교육”을 해야만 하는 이유의 목록을 발표한 적이 있다
(Slide 1).
일단 Leviton이 제시한 이유들은“개념적(conceptual)” 혹은“치유적 (therapeutic)"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는데 ”개념적이다”라는 것은 문화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치유적이다” 라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 논의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살을 예방하게 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Leviton의 모든 이유들에 동의하지만 그가 고려하지 않은 몇 가지에 대해 나는 더 논의하려 한다
(Slide 2).
특히 현대인들은 전통사회에서는 생각지 않았던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죽음에 관련하여, 개인의 권리나 책임감 등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한 교과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동시에 현대인들은 정부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더 잘 보호해 주기를 바라면서 봉급의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낸다
(Slide 3).
따라서 삶과 죽음에 관한 우리의 결정들은 개인적인 이슈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책과도 관계된다.
(Slide 4).
세 번째로, 소외되고 비 개인화 된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이나 비탄의 정신적 측면의 중요성으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심각히 생각 할 줄 아는 상담요원의 필요성을 낳았다.
그래서 가족 내에서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의 차원에서도 죽음준비교육은 중요한 의미를 띈다.
오늘 발표에서 나는 죽음준비교육의 다섯 가지 단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Slide 5)
(1) 초등학교의 죽음준비교육
(2) 중, 고등학교의 죽음준비교육
(3) 대학의 죽음준비교육
(4) 평생교육으로서 죽음준비교육
(5) 전문가를 위한 죽음준비교육
(1) 초등학교의 죽음준비교육 (Slide 6)
많은 연구가 어린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초등학교 시기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책, 영화, 뉴스를 통해 죽음에 관해 알게 되면서, 자신들이 곧 죽게 되거나 잠에서 깨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부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이 없게 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한 아이들은 그처럼 걱정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점을 확인 받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어린아이들은 여러 종류의 사고가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교통사고, 가정 내 화재, 유독 물질 사고, 익사 사고 등의 상황에서 어떻게 죽음을 모면하는가에 대해 배운다. 또한 때로는 죽음이나 생명이 단축될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우리를 도우려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목숨을 의존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사현장, 광산, 어업, 군대, 제3세계의
농업 등과 같이 위험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하철을 사용하고 다리, 전력에너지와, 다른 자원, 국가 안보, 열대 음식 따위를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다.
이러한 것은 삶의 귀중함을 더욱 생각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와 안전,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 생명을 이미 바쳤거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빚을 졌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아이들은 또한 우리의 삶이 소, 돼지, 닭, 오리처럼 인간을 위해 사육되고 도살되어 식용으로 소비되는 가축에 의존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학교들은 아이들로 하여 닭이나 오리를 죽이거나 해부하게 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교들은 아이들을 도살장에 데리고 가 동물들이 도살되는 장면을 지켜보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효과적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인간의 삶이 동물의 희생에 의존하기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동물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기도 하는데, 그들이 과잉반응을 하거나 고기섭취를 거부할 때 부모는 걱정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아이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도살이 자연스럽고, 간단하고, 심지어는 신나는 일이며, 그래서 도살이 별로 끔찍한 일이 아니라면 살인도 별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단지 동물이 어떻게 도축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취지를 가진 이 방법은 아이들에게 삶과 죽음의 무게를 가르치기에 좋은 방식은 아닌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생물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정서적 사실”로 중요하다.
인간의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동물의 죽음이 아니라 실패, 상심, 이혼, 상처 등에 따르는 상실감이다.
죽음이 끼치는 정서적, 심리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아이들에게는 인간 생명의 비 대체성, 죽음으로 인해 오는 깊은 상실감 등을 보여줄 수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영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죽음을 너무 피상적으로 다루는 비디오게임이나, 영화, 만화책 등에 대하여 균형의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어떤 실패, 동급생 폭력, 외로움을 경험한 후에, 어떤 아이들은 자살을 생각한다. 반면 점점 많은 수의 초등생들이 자살, 사고, 혹은 다른 연유로 해서 부모를 잃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자살은 나쁜 것이야” 혹은 “죽음은 끔찍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이들은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고 배워야하며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초등학교에서의 죽음준비교육 역할의 중요성이다.
어떤 학교들은 학생이나 학생 부모의 사망 시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특별 수업을 계획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도 보여주듯이 죽음준비교육은 다른 과목에 덧붙여지는 별개의 단원으로서가 아니라 역사, 생물학, 문학, 사회 과목의 교육 등에 스며있는 것이다.
(2) 중, 고등학교의 죽음준비교육(Slide 7)
중, 고등학교에서의 죽음준비교육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미국의 학생들이 중학교에 갈 무렵이면 스스로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물론 음주, 흡연, 마약,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채 오토바이 타기, 미혼모 등의 문제는 법에 저촉됨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등학생들이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은 바로 중, 고등학교 시절에 죽고 사는 것에 밀접한 운전교육, 건강교육, 성교육을 받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이를 만들려면 언제 성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피임하는지 에 대하여 이제는 선택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고 배운다.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성에 관계된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부모가 섭취하는 술, 담배나 다른 유해 물질로부터 태아를 보호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고 배운다. 우리는 새로 태어날 아이가 건강한지, 결함이 있는지를 미리 알아보고 임신을 유지할지, 유산시킬지를 결정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또한,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현대인은 전에는 생각지 않았던 많은 의학적 선택을 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질병의 이름과 진단에 대해, 그리고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해 알 권리와 책임이 있다.
그래야지만 혼수상태가 오래되어, 회복의 가망성이 없을 때 기계의 도움으로나마 생명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힘겨운 의학적 치료의 노력 없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고 싶은지 등에 관해 미리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장기간의 값비싼 치료를 원하는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결정해야 하며, 장기 기증을 원하는지, 죽은 뒤 의료진에 의한 시체부검을 허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저축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값비싼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의료보험에 가입해 둠으로써 노후에 대비한다.
죽음에 관련된 새로운 의학 기술은 우리가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가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선택에 직면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정들은 문화, 종교, 경제여건, 개개인의 경험이나 또 다른 여러 요인에 근거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될 때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 결정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결정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고등학교의 죽음준비교육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이다.
(3) 대학의 죽음준비교육 (Slide 8)
“생사학”의 시작은 부분적으로 Emile Durkheim에서 찾아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이 분야의 유명한 개척자들은 프랑스의 Philip Aries, 영국의 Geoffrey Gore, 그리고 미국의 Ernest Becker였다.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여러 대학들이 생사학에 관련된 교수들을 임용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프로그램 중에 유명한 것이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의 John Morgan교수, 미네소타 대학의 Robert Fulton 교수(그는 이후 Lacrosse의 위스콘신 대학으로 옮겼다.), 그리고 애리조나대학의 Robert Kastenbaum과 Robert Wrenn교수들의 프로그램들이다. Mt. Ida College나 Ojai의 World University같은 몇몇대학에서는 전 세계에서 인터넷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생사학 관련 온라인 강좌들을 제공한다.
현재 열 개가 넘는 미국의 대학들이 주요한 생사학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백여 개의 대학에서 지도, 위로 상담을 제공하며, 수백 개의 대학이 비 전공 학부 생들에게 교양교육 내지 입문 수준의 강의들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종종 이러한 강의들이 최고 인기 강의 서열에 오르기도 하는데 대학생들이 삶, 죽음, 사후세계의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위의 강좌들의 내용을 짧은 시간 안에 요약하기는 무리이지만, 이러한 대학 강좌들은 죽음과 죽음의 과정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윤리적, 정책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어떤 대학은 다음에 소개하는 각각의 주제에 학기 전체를 할애하기도 하고 또 다른 대학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생사학 강의는 “죽음의 사회학”을 포함한다 (Slide 9).
사회의 도시화와 비인간화로 인하여 예기치 못한 질병, 사고, 폭력, 자살, 범죄, 심지어는 테러에 의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위험 요인이 증가했다. 한편 현대의 의학기술은 환자가 원하는 이상으로 죽음을 연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령화, 말기환자 돌보기, 죽음의 여러 형태의 변화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잘 말해주며,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우리자신에게 던져진다.
선사 시대 이래로, 죽음은 종교와 문화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생사학 관련 강의들은 예술, 시, 희곡, 최근에는 대중매체, 영화, 심지어 컴퓨터게임까지 들면서 죽음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태도를 논의한다.
물론 종교나 철학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은 붓다,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인물이나 혹은 다른 순교자들의 유명한 죽음과 가르침을 다루기도 한다. 죽음을 조망하면서, 이러한 강좌들은 학생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들의 가치관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인간다운 죽음인지 하는 건강한 죽음(Good Death)의 개념을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Soros 재단은 이 주제와 관련해 여러 대학에 연구비를 지원해준 바 있다.)
종교와 죽음을 다루는 강의들은 종교적 신념이나 의식이 죽는 사람과 상실을 경험한 가족 양쪽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죽어 가는 사람과 상실을 경험한 가족이 이미 고인이 된 친지를 ‘보거나’ 혹은 ‘만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많은 미국의 대학들은 이러한 영혼이나 귀신과의 “만남”을 광증이나 어처구니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의미 있는 영적 경험으로 다루고 있다.
죽음 관련 강좌들의 또 다른 측면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인명적 손실뿐 아니라 경제적 손실도 고려한다 (Slide 11).
예를 들어 살인이나 자살을 다루는 폭력적인 TV나 비디오게임이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소개하기도하고 건강교육, 교내상담 등에의 작은 투자가 훗날에 발생할 지도 모르는 정신적, 재정적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강좌들은 또한 국가가 유독 물질, 테러, 사고 등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일에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를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정부가 사망률 축소나 생명 연장의 노력에 지출하는 비용과 비교해 사망 확인세를 얼마나 거두어들이는지를 따져 보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금전적인 것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는데, 영혼, 사랑, 생명 따위는 경제적 변수가 아니다
(Slide 12). 동시에 투표권 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얼마만큼의 돈을 지출해야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한다. 매일 우리의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여 어떤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자동차의 에어백이나 고가도로에 수조 원의 세금을 사용해야하나? 안전한 식품, 공기, 물을 얻기 위해 수조 원의 세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오염된 음식과, 공기, 물로 인해 발생하는 때아닌 질병이나 죽음을 감수할 것인가? 살인자들을 감옥에 수용하기 위해 수조 원의 세금을 쓸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사형에 처할 것인가? 사람들을 어떤 종류의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얼마나 의료비를 지출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좀더 명확히 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게 한다. 우리는 민주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 우리의 세금을 사용할 수 있는 정책과 정치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시민의 손에 달려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이슈들 외에, 또한 우리 각자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개인적 도덕적 결정사항들이 있다 (Slide 13). 몇몇 고등학교가 이러한 내용을 이미 가르치기도 하나 많은 학생들은 대학의 생사학 강의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접하는 정보는 더 이상 의례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의 암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만약 몸이 매우 상하는 병이나 사고를 당한다면, 더 이상 사고하거나 의사소통하지 못하게 된 후에도 현대 의학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육체에 어떠한 조치가 취해지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미리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학에서 “뇌사”의 개념은 박동하고 있는 온기 있는 심장을, 간을, 폐를 한 환자로부터 절개해 내 다른 환자에게 주는 것에 사용된다. 우리는 모두 따뜻하고 제대로 기능 하는 우리의 심장과 간을 기증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질문들은 대학생들의 높은 관심을 끄는데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4) 평생교육으로서 죽음준비교육 (Slide 14)
요즈음 미국의 10대나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이러한 종류의 과목을 공부할 기회를 갖지만, 20년에서 5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들은 성인 교육 강좌에 인기 있는 메뉴가 되었다. 대학이나 전문 대학이 있는 미국의 도시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종종 젊은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다. 몇몇 죽음관련 강의들은 시민의 편의를 위해 야간에 제공되기도 하고, 다른 대학들은 은퇴자나 노인들이 적은 수업료를 내고도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런 강의가 제공되지 않는 소도시의 경우 성인을 위한 죽음준비교육은 종종 교회나, 문화 센터, YMCA, 혹은 지역 워크샵 program 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그러한 성인교육 강좌들은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을 포함한다. 게다가 이미 삶과 죽음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노인들의 관심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호스피스를 선택하는가, 자리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치매 노인을 어떻게 집에서 돌보는가, 어떻게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모나 배우자의 죽음을 준비하는가 등에 관한 워크숍 프로그램들이 있다. 어떤 워크숍 프로그램은 장례식과 장례절차에 관심을 갖는 반면, 다른 몇몇은 자녀에게 땅이나 재산을 상속할 때 유언이나 재산 처리문제를 돕는 법적 절차에 관해 논의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입원, 죽음, 유언 검증 등 거의 모든 부분이 법적 절차와 서류 과정을 거친다.
이런 절차를 잘 아는지 여부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남기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느냐 아니면 정부에게 재산을 거의 빼앗긴 채 착잡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느냐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노인들은 서로를 돌보는 일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지키는 것에도 깊은 관심이 있다.
(5) 전문가를 위한 죽음준비교육
전문가를 위한 죽음준비교육은 의료업 종사자와 상담 분야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다. 많은 의과 대학들이 죽음과 죽어 가는 과정에 관련된 강좌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앞에서 주목했듯이 수백 개의 대학들이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과 비탄을 겪은 가족들을 위한 심리 상담 강의를 제공한다. 그 각각의 영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에서 가족을 잃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가족의 진료를 맡았던 의사나 병원 측에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의사나 병원들은 병과 싸우는 것에 대해서만 배웠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관한 것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사들은 죽어 가는 사람의 호흡을 연장하려고 온갖 의학 기술을 총동원한다. 그들은 환자의 목을 절개하여 온갖 튜브와 기계장치로 연결하거나 회복의 희망이 없을 때조차도 고통스러운 약품으로 환자의 몸을 가득 채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제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일종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치료 성패에 관계없이 그러한 생명연장시술이 의사와 병원에 적지 않은 경제적 이윤을 갖다 주기 때문이다). 환자나 그의 가족들은 그러한 치료가 아무런 효과도 없고, 강압적이며, 비인간적인 절차로 인해 종종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개하고, 힘겨워한다.
‘고객만족’을 도모하기 위해 많은 의과 대학들이 죽음과 죽음의 과정에 대해 의사들을 다르게 교육하기 시작했다 (Slide 15).
많은 의대생들이 치유 가능한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 효과 있는 치료와 그렇지 못한 치료를 구분하는 것을 배운다. 그들은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다. 동시에 환자가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그들을 보살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의과대학에서는 특히 말기환자들의 경우 진심으로 “잘 대해주는 것”이 어쩌면 “잘 치료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강조한다.
다음으로 장차 의사가 될 학생들은 불치병에 대해 환자나 그의 가족들과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힘겨움을 덜어줄 수 있는 입원 진료, 자택 진료, 호스피스 등 가능한 선택의 범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운다. 환자들의 바램, 결정, 경제적 여건을 존중하여 의사는 환자와 가족이 가장 만족할만한 적절한 장소를 찾아 권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의학교육은 ‘생명연장우선’의 가치관에서 환자 “삶의 질의 향상”의 가치관으로, 또는 QOL(Quality Of Life) 가치관에서 사망당시의 장소, 방법, 심리상태에 대한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QOD(Quality Of Death) 가치관으로 옮겨가고 있다.
전문가를 위한 죽음준비교육의 또 다른 영역은 심리학과 종교적 상담이다. 죽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다양한 심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죽어 가는 환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충격, 우울증, 병세의 악화나 그 외 과정 중에 나타나는 문제를 경감시켜 주는 데에 카운셀링이 매우 유용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Slide 16)
우리는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면 내가 여기에 왜 있는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 상황을 통해 무엇을 배울까?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임종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자신들이 한 일들을 평가하며,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전통적인 종교 문화에서 한 사람의 삶은 토지를 돌보거나 가업을 대물림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는 연결고리로서 의미를 가졌다. 죽음의 경험은 죽은 사람이 천국에서 조상과 해후한다는 친숙한 종교적 묘사와 함께 차분히 이해되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은 토지나, 가업, 혹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종교적 신념마저도 버렸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가족과 마을의 전통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그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과거의 의미와 미래의 방향을 찾으려 할 때 더욱 난감해지는 것이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종종 죽음이 두렵다고 말한다. 죽음에 직면한 많은 현대인들에게 삶의 무상함, 공허함, 만물의 소멸성에 대한 두려움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통적인 종교적 신앙을 유지해온 연장자들조차도 기계화된 병원 환경에서 죽어갈 경우에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말기환자를 상담하는 카운셀러의 첫 번째 임무는 책에 적혀있는 답변이 아니라, 시간을 내주고, 공감을 표시해주고, 귀를 기울여 말을 들어주고, 환자가 무엇을 표현하든지 긍정해줌으로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려는 태도이다.
동시에 말기환자를 돌보는 가족, 간병인, 간호사는 종종 정신적 고통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그들에게 이런저런 요청이 쉼 없이 계속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들 또한 말기환자에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자신들의 일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확인받을 수 있는 상담이 필요하다.
유가족 상담은 “이별을 준비하는 슬픔(anticipatory grief)"과 ”떠나보낸 후의 슬픔(post-mortem grief)"을 동시에 다루면서, 간병인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미국 병원 가운데 몇몇에서는 간병인과, 친구, 사제, 상담요원을 초대하여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함께 이야기 나누고, 먹고, 노래하고, 울고, 기도하게 하는 “다과모임(tea-parties)"을 통한 “이별을 대비하는 상담”을 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임은 환자가 죽기 전까지 한 달에 한번쯤 이루어지고, 환자가 죽은 후에도 몇 달간 계속된다. 병원들은 시간을 마련해 이러한 “다과모임”을 준비하는 것이 간병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더 이러한 모임은 정신적 고통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사고, 병, 우울증에 걸리는 비율을 줄이기도 한다.
간호사나 의사처럼 매일 죽어 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대하는 전문 의료인은 마음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환자와 가족 개개의 심리적 욕구와 가치관에 세세히 귀 기울여 그들의 신뢰와 협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면, 마음을 세심하게 쓰면 쓸수록 환자가 죽을 때마다 매 번 더한 슬픔과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이 매 환자를 이같이 깊이 염려하다 보면, 환자가 죽었을 때 반복되고 계속되는 상실감으로 인해 쉽게 병이 나거나 지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매일 죽음을 다루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특별히 상담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후세계를 믿는 종교적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신부나 목사와의 대화를 통해 힘을 얻기도 한다. 종교적 신앙심이 없는 사람도 이해심을 갖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의사나 간호사뿐만 아니라, 장의사, 신부, 경찰 같은 전문 요원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들과 일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그들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전문 요원도 기초적인 상담기술을 필요로 한다. 가끔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기운과 긍정적인 태도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죽음은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겠으나, 상냥하게 들어주는 것이 우울증과 상실의 고통을 경감해 주거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병원과 호스피스들은 성공적인 운영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특히 말기 환자나 호스피스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의학 기술보다 다정히 돌보아 주는 것이 더 절실히 요구되며, 이런 경우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자원봉사자들은 전문적인 훈련과 자격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담이 요하게 될지 모르는 다양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은 병원의 직위 체계에서 맨 밑에 놓여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환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능력이 부족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환자가 죽은 후에 잘하지 못했다거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나무랄지도 모른다. 자원봉사자가 겪게 되는 첫 번째 죽음은 매우 힘겨울 수도 있다. 따라서 호스피스나 말기환자 병동에서 자원봉사자들에게 상황을 설명 해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것도 또한 전문가들이 지원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죽음이나 죽음의 과정에 따르는 다양한 형태의 상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몇몇 대학, 신학교, 전문학교에서 이러한 필요를 충족 시켜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AAGC(미국의 슬픔치유 카운셀링 아카데미, the American Academy of Grief Counseling) 부터 ADEC(죽음준비교육과 카운슬링 협회, the Association for Death Education and Counseling)에 이르기까지 전문 기관들은 이 분야의 숙련된 전문요원에게 수료증을 수여한다. 그러한 증서는 상담요원 전체의 수준을 높여주고, 그러한 상담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넓혀주기도 한다.
30년 전 하와이에서 대학원생으로서 생사학을 연구하겠다는 제안을 내가 처음 했을 때, 교수 한 분이 이 주제는 “지나가는 유행(a passing fad)” 이니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죽음의 문제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었다. 요즈음 생사학과 죽음준비교육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이 분야에 열성적인 다양한 잡지, 출판사, 단체의 활동에 반영된다. Omega, Death Education, Mortality, Journal of Near-Death Studies와 같은 잡지들은 죽음과 죽음의 과정을 주로 다룬다. 게다가 상담, 간호, 의학, 종교를 다루는 잡지도 점차 많은 공간을 죽음관련 이슈들에 할애한다. Baywood, Hemisphere, Charles Press와 같은 출판사들도 이러한 주제에 주안점을 두며, 주요 대학들과 일반 상업적인 출판사도 관련 분야의 책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찾았다. “죽음과 죽음의 과정”이란 말은 이제 많은 책을 소개하는 키워드가 되었고, 많은 서점들의 분류표 문구가 되었다. 미국 대부분의 소도시에 호스피스가 있으며, 말기환자 간병, 죽음의 과정, 유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에 연계된 많은 자원봉사 단체가 있다. 인터넷도 또한 이들 주제에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 결론
나는 한국의 죽음준비교육이나 생사학이 미국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전통 문화와 필요에 기초한 또 다른 죽음준비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나는 경제적, 사회적인 이슈를 주로 다루었다. 우리는 이제 분명히 죽음준비교육과 상담에 기울이는 투자가 장기적으로 의료, 범죄, 종업원의 생산성에 있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죽음준비교육과 상담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수요는 책이나 잡지에서 뿐 아니라 교육적 프로그램을 위해서도 좋은 시장을 창출해냈다. 이러한 비용 효율과 시장 수요는 분명히 행정관리나 정책수립자들로 하여금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과 죽음의 과정에 관해 연구하는 진정한 이유는 원이나 달러로 환산되는 세금의 절감비용이나, 교실 내 폭력 감소, 종업원의 생산성 증가 등에 의해 가늠되지는 않는다.
더 깊은 이유는 바로 우리도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죽게 된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있다. 마음의 평화, 삶의 소중함, 삶을 반추하고 죽음준비로부터 연유하는 만족감 등의 정신적 가치는 시간이나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평화롭고, 의미 있으며,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인증서(seal of approval)"같은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삶을 영위했어도 최후로 보낸 며칠 혹은 몇 달이 외롭고 비참하다면, 전체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죽음을 앞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시간이 공허하고 쓸모 없다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고,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는가 등에 대해 우리가 친절히 얘기 나눈다면, 그들이 남겨진 마지막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Slide 17).
많은 이들이 아직 자신들의 방을 정리하지 못했고 남겨둔 일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은 있으나 체력이 없어 남겨둔 일이 있다면, 집에 가서 각각의 물건들을 사진 찍어, 병원에 가져와 보여주고, 그 물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봄으로써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아직 유언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유언은 가족에게 재산을 남긴다는 것뿐 아니라 친지나 친구에게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친구에게 남겨진 만년필, 가야금, 바둑판은 그 물건들을 남겨준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내포하기 때문에 상점에서 구매한 같은 물건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도 죽기 전에 감사, 사과, 오해를 푸는 편지를 쓰거나 대필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자원봉사자나 상담요원들이 이 부분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온 식구가 임종을 맞는 사람의 머리맡에 둘러앉아, 마지막 말을 조심히 기억하고 마지막 바램을 존중하여 귀 기울이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고, 자식들은 다들 멀리서 바쁘게 일하고 있어서,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자식들을 불러 모은다는 것이 더 어렵게 됐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 마지막 말과 바람을 비디오에 담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친구나 가족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수 주 동안 할 말을 준비하고 연습하기도 한다. 그들은 멋진 모자에 화장을 하고 촬영을 즐긴다. 그러한 기록물들은 후대를 위해 보존되는 가족 이야기로서 매우 귀중한 물건이 된다.
임종이 가까워질 때 어떤 사람들은 떠나기 전 한번 더 옛 친구를 만나고, 오래된 영화를 보고, 옛 노래를 불러보기를 원한다. 자원봉사자들이나 상담요원들이 그러한 일에 도움이 되어 죽어 가는 이의 얼굴에 미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례식 때 어떤 음악이 연주되고, 어떤 문구가 읽혀지기고, 위령비에는 어떤 꽃과 사진이 놓이기를 원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작은 소망들에 대해 미리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떠난 후에도 자신들이 원했던 방식으로 기억되고 간직될 것임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암의 경우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며, 뇌졸중에서와 같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분명히 일어날 사건임을 알면서 그에 대해 준비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삶에 더 큰 의미를 보태고 보다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실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지나간 삶으로부터 의미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라고 말해야만 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거야.” 내지는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어.”라고 말할 수 있게 우리 스스로를 준비해야한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우리 삶의 매 순간을 귀중하게 한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오늘의 이 장소에 다시 모이지 못할 것이다. 오늘 여기 서울에서의 교류와 협력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매 순간을 최대화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 세상에서의 시간들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공부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에 대한 준비이면서 또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깊이 있고,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죽음준비교육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삶의 교육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준비 교육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의 짧은 논문이 앞으로 있을 교육적인 프로그램 기획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여러분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데에 작은 영감과 느낌이 되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