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산리전투 승리와 평가
1) 승리의 요인과 승전 결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승승장구하며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일제는 한일병탄으로 조선을 삼키고 21개조 조약으로 중국의 정치를 좌우하였으며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시베리아간섭군까지 파견하여 국내외에 무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용정 3.13 만세시위 후에 만들어진 간도의 조선 무장독립군부대의 국내진공작전에 수시로 공략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동아 행보에 걸림돌이 되는 독립군들을 일거에 전멸시킬 계획으로 봉오동에 쳐들어갔으나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의 유인, 매복전에 걸려서 참패를 당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에서 패배당한 수치를 만회하고 조선 내 식민지 통치와 만주에서의 일본세력 불식에 방해물인 만주의 무장독립군부대를 제거하고자 한중수사반을 꾸리고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불령선인초토화계획❱으로 연변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자기들의 계획대로 무장독립군부대의 주력부대와 지도부를 궤멸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봉오동에서 보다 더한 참패를 당하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에 진행된 청산리전투는 실로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우리 무장독립군부대의 승리는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군인과 무기, 식량과 기타 장비가 일체 보급되는 일본 정규군 대부대를 식량과 무기뿐만 아니라 군인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재야 무장독립군 소부대가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재야 무장독립군연합부대는 일본 정규군을 이긴 자랑스러운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망국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선물로 남겨 주었다.
승리의 요인을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생명을 불고(不顧)하고 분용결투(噴湧決鬪)하는 군인들의 항일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을 압도함이요”라고 하였다. 이는 군인들의 생명을 건 전투의식과 의지, 즉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해서 일본군의 기운을 제압했다는 말이다. 무장독립군부대 군인들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이 승리의 요인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군인들의 태도와 자세가 전투의 승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임이 분명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독립을 열망하여 무장단체에 가입하고 자식을 군인으로 바치고 의연금을 내서 무기를 구입하도록 한 간도조선인들의 애국애족의 희생정신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간도 3.13만세시위도 없고, 무장독립운동단체도 없고,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식을 바치고 의연금을 내는 것으로 모자라서 전쟁 장비를 직접 실어 날라 주고 전쟁 중에도 밥을 해서 나르고 심산유곡에서 길잡이를 해주고 적의 정보를 정탐하는 일까지 맡아 주었다. 간도 조선인들이야 말로 청산리전투를 가능하도록 만든 자들이요, 끝내 승리할 수 있도록 생명을 걸고 무장독립부대를 지원한 사람들이다.
간도조선인들의 독립을 위한 헌신 위에 승리의 요인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것은 무장독립부대들의 연합이다. 당시 기독교 백그라운드를 가진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군, 의민단군, 한민회군은 10월 13일에 어랑촌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연합부대를 창설하였다. 모임 후에 광복단과 의군부가 어랑촌에 도착하여 연합부대에 들어왔다. 그들은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작전을 계획하고 함께 진격하며 함께 고난을 헤치며 어랑촌전투에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각 무장독립군부대의 연합 위에 승리의 요인을 한 가지 더하자면 홍범도연합부대의 철저한 지역요해와 식량 확보 및 마을주민과 협력관계를 꼽고 싶다. 홍범도부대는 한 달 전에 미리 들어와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영마루 요지에 본부를 두었으며 군사훈련을 시켰다. 안무의 국민회군도 9월 말에 들어와 홍범도부대와 함께 하였다. 그들은 10월 13일 모임에서 국민회(간도국민회)에 등록된 자들을 총 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하게 하였고,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하였으며, 정찰대를 조직하여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하여 아즈마지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승리의 원인은 훈련된 용감한 군인들, 헌신적으로 독립군과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용감한 주민들, 명예욕과 경쟁의식을 버린 무장독립군부대들의 아름다운 연합, 독립군 부대지도자들의 철저한 지역 요해와 작전 구상, 군수품 준비의 결과였다.
승전 결과에 대하여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4전의 격전에서 1천여 명의 적을 섬멸했으나 아군은 1명의 희생자도 없고 단지 5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하였다.³⁹ 이범석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일본의 사상자는 3,300명인 반면에 독립군부대는 전사 60며 명, 부상 90 여명, 실종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상해에서 나오는 잡지 ❰진단❱1920년 11월 14일자에는 일본군 전사자는 1,200명, 독립군 전사자는 200명으로 밝혀져 있다. ⁴⁰
황필항노인은 1920년 삼도구지방과 독립군부대 사이에서 통신연락을 했던 자로서 백운평계곡에서 일본군이 죽은 장병들의 머리를 세 마차나 실어 내렸다고 실증하였다. 또한 1920년에 19세였던 이형권노인은 어랑촌 전투 후 일본군이 죽은 장병들의 머리를 네 바퀴 달린 중국 마차 세대에 실어 투도구를 경유하여 용정으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이런 증인들의 회상을 참고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가 1,000명이라는 것은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다.⁴¹
그러나 일제는 역사보관서류에 청산리전투에서의 구체적인 패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의 기록을 축소하고 은폐하였다. 물론 우리 측의 기록도 그 신빙성을 재고해보아야 하겠지만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전사자의 숫자가 과장되었든 축소되었든 간에 일본군은 패배하였고 조선의 재야 무장독립부대들이 승리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8부에서 계속됨
2) 평가와 문제제기
청산리전투의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