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기원에 관해서는 영국의 금세공업자(goldsmith)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세 북이탈리아 도시들의 유대인 환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환전업을 하는 유대인에게는 튼튼한 금고가 있어서 사람들이 금을 비롯한 귀중품을 맡겼다. 이렇게 시작된 초기 은행을 보관은행이라 한다. 유대인 은행들은 고객이 맡긴 금의 순도와 무게를 감정하여 보관증을 발급하고 보관료를 받았다.
영국의 화폐 단위인 파운드는 본래 무게의 단위로써 1파운드=16온스=453.6그램=120.96돈에 해당한다. 은행들은 고객이 요구하면 금 보관증을 한 장이 아니라 1파운드짜리, 5파운드짜리, 10파운드짜리 등 소액으로 분할해서 발행했다. 이 보관증이 은행권이라 불리면서 금이나 은 대신 통용되어 돈 구실을 했다.
은행에서는 은행권을 제출하면 금으로 교환해 주었으나 사람들은 금을 은행에 보관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찾아가는 일이 드물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은행에 몰려와 은행권을 제출하고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에 은행들은 임의로 은행권을 발행하여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대부해주었다. 타인의 소유인 금을 밑천 삼아 돈 장사를 한 것이다. 남들이 맡겨둔 금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 것인 양 대부하고 이득을 취했으니 명백한 사기에 해당한다.
은행들은 더 많은 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맡기는 사람에게 보관료를 받는 대신 오히려 이자를 지급했다. 예치이자를 지급하더라도 대부를 늘림으로써 거두는 이익이 더 많았던 것이다. 물론 대부할 때는 충분한 담보를 확보했다. 이렇게 금 보관소가 본격적인 은행으로 탈바꿈했다.
은행업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예치한 금보다 더 많은 은행권을 발행해서 대부 금액을 늘렸다. 금 보유량을 초과하는 무담보 은행권을 얼마나 더 발행해도 괜찮을지는 은행업자도 몰랐다. 은행업자들의 탐욕으로 이런 식의 부실 은행권이 점점 늘어나 보유한 금의 수십배가 넘었지만 그 내막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고 은행이 파산하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12월에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는 루이 14세의 지원으로 군대를 이끌고 1689년 3월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아일랜드는 이 기회에 잉글랜드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제임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왕가의 본국인 스코틀랜드에서도 지지 세력이 봉기했다. 윌리엄 3세는 수년간 계속된 전쟁에서 제임스 2세를 물리쳤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으로 부르는 이때의 전쟁은 1697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막대한 전비로 재정난에 처한 윌리엄 3세는 의회가 증세에 동의하지 않자 유대인들에게 대부를 요청했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1. 120만 파운드를 조달해서 이를 자본금으로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을 설립한다.
2. 잉글랜드은행은 120만 파운드의 은행권을 발행하고 전액 왕실에 대부한다.
3. 이자는 년 8%로 정부가 지불한다.
4. 원금은 영원히 갚지 않는다.
1파운드는 16온스이고 오늘의 금 시세가 1온스에 미화 1,250불이므로 금 120만 파운드는 미화 240억불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윌리엄 3세는 예상치 못한 거액을 쓸 수있는데다가 원금을 영원히 갚지 않는다는 말에 솔깃하여 유대인의 제안을 수락했다. 세금을 추가로 거두지 않게 되자 의회도 동의했다.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은행의 주식을 공모한 결과 목표에 미달하는 80만 파운드가 조달되었다. 이것도 금 362 톤으로 오늘의 미화 160억 불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액이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초기 자본금이 금 64톤이었다. 금 80만 파운드를 자본금으로 해서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이 민영 주식회사로 설립되었다. 1,330명이 주주가 되었고 2천 파운드 이상을 투자한 14명은 이사가 되었다.
잉글랜드은행 본점과 웰링턴 장군 동상 - 시티 오브 런던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은행에서 차입한 80만 파운드의 은행권을 사용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이 언제든 금으로 교환해 준다는 것을 보증했다.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은행권이 화폐로 유통되었다. 잉글랜드은행은 80만 파운드의 금을 여전히 소유하면서 “영원히” 이자를 받게 되었다. 이자는 국왕 개인이 아니라 정부가 지불하므로 부도날 염려가 없었다.
정부가 은행에서 돈을 빌림으로써 화폐가 발행되고 화폐에 이자가 붙는 괴상한 제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국가의 공인화폐를 지정하고 발행하는 것은 국왕 또는 정부나 의회 등 국가의 권한인데 이 막강한 권한을 별 생각없이 은행에 양도했을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지불한 것이다. 영국의 국왕과 귀족들이 화폐와 금융의 속성에 무지함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은 화폐를 발행하는 막강한 권력을 손쉽게 장악하고 이자까지 챙겼다. 정부가 채무를 줄이면 통화량이 축소되거나 고갈되어 경제가 마비되므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되었다.
잉글랜드은행은 정부의 자금조달을 전담했다. 영국 정부는 똑같은 방식으로 잉글랜드은행에서 차입금을 끌어와 재정을 충당했고 국가의 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영국 정부에 대한 잉글랜드은행의 대출금 총액은 1694년 80만 파운드에서 1700년에 1,380만 파운드로 17배나 급증했다. 시중의 화폐도 그만큼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잉글랜드은행의 금보유량도 그만큼 증가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추측컨대 단기간에 그토록 대량의 금을 확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므로 금의 뒷받침 없이 은행권을 찍어냈을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될 당시만 해도 영국은 오랜 해적질로 단련된 해군만이 비교적 앞서있는 후진국이었다. 경제는 서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상태였고 자본 축적은 몹시 빈약했다. 유대인들에 의하여 야심차게 출발한 동인도회사는 국내 경제가 낙후된 탓에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가 기사회생했고 그 후에도 수입을 전문으로 해서 국가의 금과 은을 축내기만 했다. 인도나 중국과의 무역 수지는 1800년까지 압도적인 적자였다
17세기 초에 영국이 해외 진출을 시작한 이후 무역에서 흑자를 거둔 것은 노예무역이 유일하다. 1640년 교황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노예무역을 중단했고 다른 가톨릭 국가도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영국은 교황의 지시에 구애받지 않는 유대인을 앞세워 노예무역을 계속했다. 붙잡혀온 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 카리브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갔다. 1771년 영국의 노예무역선은 190척으로 연간 4만 7천 명을 운반했다.
노예무역에서 얻은 이익으로 동양무역에서 발생한 막대한 적자를 상쇄하고 대규모 자본을 축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은행 설립 후 1백년 만에 유럽 제일의 부국으로 성장하는데에 소요된 방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잉글랜드은행 설립 후 영국의 무역과 산업이 불꽃처럼 일어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창안한 사기적인 금융 수법 속에 그 비결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보면 모래성을 쌓은 셈인데 무너지지 않고 결국 성공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마술적인 금융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금본위제 하에서 은행이 금 보유량을 초과하여 은행권을 발행하는 행위는 명백한 사기다. 이런 사기 행각은 200년이 넘도록 비밀로 유지되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영국의 금본위제가 흔들리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자 금융계는 이것을 ‘신용창출’이라는 알쏭달쏭한 전문용어로 표현했다. 창출(創出)이란 글자 그대로 無에서 有를 만들어 내는 것이니 금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속이고 돈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제대로 표현한 셈이다. 이 수법이 오늘날에 와서는 은행의 지불준비금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1783년에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된 후 유대인 은행가들은 미국의 화폐발행권을 장악하여 잉글랜드은행 식 화폐제도를 미국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90년 전의 영국 왕실이나 귀족들과 달리 금융과 화폐의 본질을 간파한 제퍼슨 같은 지도자가 있어서 유대인들의 기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의 화폐발행권을 장악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은 1백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지속되어 1913년에 윌슨 대통령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소망하던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연방준비은행(FRB)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