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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2.28. 사순절 후 두 번째 주일 ]
2021년 2월 28일, 사순절 후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621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찬송 43장(즐겁게 안식할 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은 빌1:1-8(신약 318쪽)입니다.
제목: “옥중에서의 바울의 권면”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지 만 1년이 되어 갑니다. 작년 2월말에 우권사님 따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바로 다음 날인 2월 마지막 주일부터 비대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기억이 납니다. 비대면 예배가 1년 이상 계속되다 보니까, 가장 아쉽고 답답한 것은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빌립보서는 옥중에 매여 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보다 성도들과 교제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들을 사모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간절히 사랑하였습니다. 옥중에 매인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성도들과 교제하고 권면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또한 코로나 팬데믹 중에 있는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3절의 말씀을 함께 있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 옥중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1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옥중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1:7,13,14,17) 바울은 옥중에 매여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바울을 더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바울 일행의 복음 전파를 시기하고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후 12:7절에서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을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바울 몸에 있는 연약한 것을 가리킨다는 주석도 있지만, 바울이 이것을 ‘사탄의 사자들’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이것이 육체적인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사자들’이란 표현을 주로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육체의 가시’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계속 끈질기게 바울을 핍박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석이 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더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고후 12:9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더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계속하여 머물게 하려 함이라.
빌1:18절에서도 유대인들이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이나, 겉치레로, 즉 바울의 바른 복음을 비판하고, 또 성도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첨하면서 복음을 전해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괴로움을 상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바울의 참 복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바울의 복음 전도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주의자들과 로마의 지배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성도들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과 디모데가 2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마게도냐 지방에 처음으로 세운 교회입니다.(행16:12) 그들은 바울 일행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서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고,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첫 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빌립보교회는 환난과 많은 시련 속에서도 선교사역에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한 교회입니다.(고후 8:1,2) 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 차례 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빌 4:15,16) 또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여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돌보게 할 정도로 바울을 아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섬기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 교회로 보내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바울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빌 2:27-30)
저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 특히나 청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제가 합력하여 날마다 매일성경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성경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합니다. 또 청년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믿음을 견고하게 지켜 나가고 바라는 일들이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본문 6절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성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많은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대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강’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빌 4:2-9절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빌 4:5,6)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다 아시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인도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7)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바울은 단지 바울 자신에게 후원을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궁핍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 4:11,13절 말씀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복음 신앙이 ‘성장’하고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싹이 났다’ 고 말합니다.(빌 4:10) 이제 막 믿음을 시작한 빌립보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앞서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빌 4:15절 말씀을 보면, 복음의 시초인 빌립보교회 외에 바울의 복음사역에 참여한 교회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또 빌립보교회에 감사하는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위한 바울의 괴로움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빌 4:14)
다 함께 빌 4:17-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참여가 그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에 감사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때문에 감사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풍성하심으로 성도들의 필요한 것을 채우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였습니다.
2.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 겸손한 삶을 살라” 고 권면합니다.
빌 1:27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나, 떠나 있으나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고, 대적자들을 두려워 말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한 마음 한 뜻으로 서서 복음을 위해 협력하라고 권면합니다. 4: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두 명의 성도 이름을 거명하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복음 사역에 힘쓰는 가운데서도 갈등과 불화는 흔히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불화는 교회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는 사람의 몸처럼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 귀한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 곧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또 고난을 당할지라도 복음을 가로 막는 대적자들에게는 담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빌1:2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빌 1:29)
빌 1: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뿐만 아니라, 고난도 선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또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워지며, 인내하여 고난을 이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저희 칠남매 가족 중에 지금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형제가 두 명이나 있습니다. 암 확정을 통보 받았을 때는 본인은 물론이고, 형제들 모두 크게 당황했지만, 믿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중보기도하면서 지금 담대한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매일 카톡으로 성경말씀을 나누고 늘 찬양하면서 예수님과 더욱 가깝고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몸이 힘들지만, 잘 인내함으로 승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믿습니다.
지금은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암 투병 중에 계실 때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축복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믿음 없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축복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오직 고난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위장된 축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빌2:1-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으로 인해 높아지신 모범을 들어서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해질 것을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성도들 간에 협력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세상의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높이셔서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주(퀴리오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신앙에 정진하라고 권면하면서, 바울 자신도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롬 7:20),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기뻐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전제(奠祭)로 드릴지라도”(빌 2:17) 나는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하나님은 우리가 억지로 신앙에 정진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정진을 인격적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먼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우리가 자원해서 그것을 기쁘게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기독교 진리는 유대주의자들처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공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구를 과도하게 억제하는 금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 연합하여 주의 일에 힘쓰라” 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수고한 동역자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파송한다고 편지하였습니다.(빌2:24)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존경과 예를 갖추어 자신을 섬겨 주었고, 또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빌 2:22)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서신의 발송자를 ‘바울과 디모데’라고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 함께 동역한 디모데를 성도들 앞에 함께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 서로를 상호 존중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애썼습니다. 또, 바울의 옥중 생활을 돌본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자라고 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빌 2:25)
또, 딤후 4:11절에 보면, 마가와 누가가 옥중에 매인 바울과 동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는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서로 다투었지만, 바울이 두 번째 감옥에 투옥되어 순교를 앞두고 있을 때까지 함께 연합하였고, 의사인 누가도 바울과 전도여행을 함께 하면서 마지막까지 그를 돌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의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얻어진 연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전도여행을 할 때 각 도시에서 묵을만한 집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는 옷감장사 루디아의 집에서(행16:15), 고린도에서는 가이오의 집에서(롬16:23), 에베소에서는 바울과 동업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고전 16:19), 골로새에서는 눔바의 집에서(골4:15)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희 교회 역시 신실한 믿음을 가진 형제의 집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옥중에서 매어 있으면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주의 재림을 소망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성도들을 섬기고 연합하면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권면이 오늘 우리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져서 역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찬송가 323장(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시면서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축도(주기도문)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