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高麗史 卷95
이자인(李資仁)은 문종(文宗) 때에 급제한 후,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문종(文宗)과 순종(順宗)이 연이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한 후 이자인을 요(遼)나라에 파견하여 왕의 부고(訃告)를 전했는데, 요나라 임금은 경관(京館)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힐문(詰問)하였다. “두 왕이 연이어 죽었다니 반드시 무슨 변고가 있을 터이니 바른 대로 고하라” 다그치듯 물었다.
이자인이 대답하기를 “국왕이 본래 신병이 있던 차에 부왕(父王)의 상사를 만나서 과도하게 애통한 까닭에 신병이 더해서 드디어 별세한 것이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즉 저희들을 이곳에 억류하여 두고,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사하시면 될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의 말에 거짓이 있을 때에는 중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절실하고 곧았다. 요나라의 임금이 성 밖으로 나와 전전(氈殿)에서 접견하고 그를 위로하였다.
후일에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임명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승진되었다. 왕이 팔관회(八關會)에 임석하기 위하여 신중원(神衆院)으로 갔을 때 눈비(雨雪)가 내려서 축하연에 참석했던 여러 신하들의 의복이 모두 젖었는데, 저녁 때 돌아 올 무렵에는 하늘이 개고 달이 밝았으므로, 왕이 창덕문(昌德門) 밖에서 수레를 멈추고 종친(宗親)들에게 축배를 드리라고 명령하니, 이자인이 좌간의(左諫議) 김상기(金上琦)와 보궐(補闕) 위계정(魏繼廷) 등과 함께 왕에게 간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상서좌승(尙書左承)으로 되었다가 전중감 중추원부사(殿中監中樞院副使)로 승진되어 재직하다가 죽었다
(원문) 高麗史 卷95 -列傳 卷第8 -李子淵
資仁, 文宗朝, 登第, 累遷侍御史, 文․順相繼薨, 宣宗卽位, 遣資仁如遼告喪, 遼主不許入京館, 詰曰: “二君連逝, 必有其故, 宜奏以實.” 資仁曰: “國公夙有疾恙, 加以哀毁, 遂至大漸, 實無他故. 願留臣等, 遣使本國究問. 臣若誣罔, 當服重罪.” 語甚切直. 遼主出城外氈殿, 引見慰諭, 後拜兵部侍郞, 遷右諫議大夫.
王以八關會, 幸神衆院, 雨雪, 侍宴群臣皆霑服, 及夕將還天霽月明, 駐輦昌德門外, 命宗親, 奉觴爲壽, 資仁與左諫議金上琦․補闕魏繼廷等諫止之, 改尙書左丞陞殿中監中樞院副使, 卒.
17) 高麗史 卷96
최사추(崔思諏)의 자는 가언(嘉言)이요, 원래의 이름은 사순(思順)이었는데, 후에 임금이 사추(思諏)란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손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으며 문종(文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최사추가 명문의 자손이고 학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넓다 하여, 왕이 그를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여 대화하여 본즉 그의 응답하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왕이 기뻐하였다. 선종(宣宗) 때에 전중소감지상서호부사(殿中少監知尙書戶部事)로 임명되었으며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나갔다.
왕이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였을 때에, 마침 요(遼)나라 사신 왕정(王鼎)이 왔었는데 최사추가 접대사(館伴)로 되었다. 그런데 왕정이 밤마다 홀로 앉아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최사추가 묘계를 써서 그 문서를 가져다가 왕에게 바쳤는데 그 글은 그가 요나라 임금에게 보내려는 간쟁의 상소문이었으며, 그 내용은 요나라가 오랜 기간 태평무사하여 군비에 등한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역설하였고 또 송나라가 남하(南夏)를 토벌한 것에 관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었다.
왕은 최사추가 접대사로서 능숙하게 일한 것을 가상히 여겨, 친필로 조서(詔書)를 써서 주고 그를 표창(表彰)하였으며, 왕의 행차에 수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임명되었다가 동지중추원사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使左散騎常侍)로 개임되다. 헌종(獻宗) 때에 이부상서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로 임명되었다. 숙종(肅宗) 초기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내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되었고 수태위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 벼슬을 더 받았다.
대장군 고문개(高文盖), 장홍점(張洪占), 이궁제(李弓濟)와 장군 김자진(金子珍) 등이 비밀리에 반역을 도모하였으므로 최사추가 그들의 죄상을 조사하고 모두 남녘 땅 끝으로 귀양 보냈다. 이 공로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직되었으며 보정공신(輔正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9년에 수태보(守太保)가 되었는데, 늙었음을 이유로 세 차례나 왕에게 글을 올려 은퇴를 청하였다.
위계정(魏繼廷)이 말하기를 “최공이 조정에 있으므로, 우리들이 태산과 북두성 같이 우러르고 있으며, 군국대사(軍國大事) 일체는 그의 의견을 듣고 처리하여 왔는데, 이제 만약 은퇴(告老)한다면 국정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왕은 수춘궁(壽春宮)에서 작은 연회를 차렸는데, 최사추를 여기에 불러들였다.
연회석에서 최사추가 일어나 축수의 술잔을 드리니, 왕이 친히 잔에 술을 부어 그에게 권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가 기어코 퇴직하겠다면, 누구와 같이 정사를 의논하리요! 나는 어진 이를 우대하고 원로대신을 소중히 여기니, 차마 그대의 뜻을 들어줄 수는 없노라!”
(원문) 高麗史 卷96 - 列傳 卷第9 - 崔思諏
崔思諏, 字嘉言, 初名思順, 後賜今名. 文憲公冲之孫, 自少力學工文. 文宗朝, 登第. 王以思諏名家子, 博學多聞, 召入內侍省, 與語對稱旨, 王悅. 宣宗朝, 拜殿中少監知尙書戶部事, 出爲西京副留守, 駕幸西京, 時遼使王鼎來, 思諏爲館伴, 聞鼎每夜獨坐爲文, 以計取其書奏之, 乃諫䟽也, 其䟽極言, 遼大平日久不修武, 備, 又言大宋伐南夏事. 王嘉其擯接之能, 手詔褒之, 令從駕. 尋除御史大夫, 改同知中樞院使左散騎常侍.
獻宗時, 拜吏部尙書知樞密院事. 肅宗初, 叅知政事, 進中書侍郞平章事, 加守太尉判吏部事. 大將軍高文盖․張洪占․李弓濟․將軍金子珍等, 潛圖不軌, 思諏按治其罪, 悉流之南裔. 以功, 拜門下侍中, 賜輔正功臣號.
九年, 守太保. 以老, 三上表乞骸骨. 魏繼廷曰: “崔公在官, 吾輩仰如山斗. 軍國大事, 一聽其議. 今若告老, 奈國政何?” 時王, 曲宴壽春宮, 召思諏赴宴, 思諏起爲壽王, 親酌酬之, 執其手曰: “卿若固退, 誰與共政. 朕優賢重老, 不忍從也.”
(144-143일차 연재에서 계속, 저자의 편집후기가 143일차와 144일차 등 두번에 걸쳐 반드에 게재됩니다)
첫댓글
(144-142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42일차에도 '충렬공 관련 고려사 기록' 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주) 143일차와 마지막 144일차 (본문)에는 저자의 편집후기(향후 후손들의 미션 등)가 게재되며, 일종의 참고라 할수 있는 (댓글)부분에는 천년세고 선집의 수록기준과 발간사 등을 실어 선집을 통하여 추구하고자 애썼던 방향성과 목적 그리고 그 의미 등을 종중들과 공유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를 종중들께서 조금이라도 빨리 접할 수 있도록 143일차 게재분을 142일차와 같이 동시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차인 144일차 게재분은 차분하게 음미할 수 있도록 하고자 계획대로 11월 23일(목)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본문내용- 충렬공 관련 고려사 기록]
(앞에서 이어서, 7- 7회차, 마무리)/ 무곡
왕족들의 주연반대 주청(위씨요람에서)
※ 본문에 제목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위씨요람에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차용하였습니다)
위계정이 예부시랑(위의 고려사에는 보궐)으로 재임 중일 때인 1086년(선종3년) 음력 11월 왕을 수행해 법왕사 팔관회에 참여했다. 행사를 마치고 환궁하던 중 눈이 내리던 날씨가 맑게 개이자 선종이 왕족들에게 술잔을 올리고 장수를 축원하게 했다. 이때 호부상서 이자인과 위계정 등의 반대로 잔치를 그만두게 했다.
백성들은 가뭄 등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왕족들이 술이나 마시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코 조정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주청했다.
선종은 신하들의 반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연을 중지했다./ 무곡
이렇게 청백리이자, 태자의 스승, 문하시중 등등의 이력이 화려함은 물론 '불가상서' 라는 고사성어를 남기는 등 청사에 빛이 남에도 불구하고
역사책에서는 충렬공 함자를 확인하는게 쉽지 않아 참으로 많이 안타깝습니다.
이의 여파인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엉뚱하게도 남의 조상인 (김)위홍(향가 삼대목 편찬)이 한동안 우리조상으로 분류가 되기도 하는 등 안타까운 상황이 있어 몇자 적어 봤습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