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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장 12-18절. 주 안에서 자랑하라
1.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해 해명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와 말이 시원치 않음을 몹시 비난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외모는 아주 볼품없었고, 말도 더듬고 웅변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께 대한 헌신의 열정과 영적인 능력이 중요하다고 답변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자기를 자랑한 데 대해서, 바울 사도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교훈합니다.
12절.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we are not bold to class or compare ourselves with some of those who commend themselves; but when they measure themselves by themselves and compare themselves with themselves, they are without understanding.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Οὐ γὰρ τολμῶμεν ἐνκρῖναι ἢ συνκρῖναι ἑαυτούς τισιν τῶν ἑαυτοὺς συνιστανόντων·
not for dare we to classify or to compare ourselves some that themselves commending
직역하면 ‘왜냐하면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과 짝하거나 비교하는 것을 우리는 감히 않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칭찬하는’(συνιστανόντων)은 현재분사로서(commending) 현재 칭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짝하며’(ἐνκρῖ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classify) 똑같은 종류로 간주하는 것을 가리키며(reckon among: classify), ‘비교할 수’(συνκρῖναι)도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compare) 단호하게 비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감히 하지 않기’에서 동사(τολμῶμεν)는 현재형으로서(dare we) 감히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ἀλλὰ αὐτοὶ ἐν ἑαυτοῖς ἑαυτοὺς μετροῦντες
but these by themselves themselves measuring
‘헤아리고’(μετροῦ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measuring) 현재 헤아리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καὶ συνκρίνοντες ἑαυτοὺς ἑαυτοῖς, οὐ συνιᾶσιν.
and comparing themselves with themselves, not they understand
‘비교하니’(συνκρίνοντες)도 현재분사로서(comparing) 현재 비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지혜가 없도다’(οὐ συνιᾶσιν: not have understanding)의 주어는 앞 소절의 ‘그들이’(αὐτοὶ: these)이고, 동사(συνιᾶσιν)는 현재형으로서(they understand)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1.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1) 엘리코트(Ellicott)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를 자기 우상 숭배자(autoaltry)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칭찬하고 자기를 우상시하는 자는 모든 시대인들의 경험상 ‘지혜롭지 못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가 없도다(not they understand)는 헬라어(οὐ συνιᾶσιν)가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모든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을 가리킵니다. (Of all such self-admiration—one might almost say, of all such autolatry—St. Paul declares, what the experience of all ages attests, that they who practise it “are not wise.” They lose, as the Greek verb more definitely expresses it, all power of discernment.)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바울은 좋은 행동 지침을 말했는데,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분량을 넘어서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신앙인을 판단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얼마나 다릅니까. 그리고 아첨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은 가장 나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칭찬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 구원은 기타 모든 것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주는 것이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높여야 할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높이거나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If we would compare ourselves with others who excel us, this would be a good method to keep us humble. The apostle fixes a good rule for his conduct; namely, not to boast of things without his measure, which was the measure God had distributed to him. There is not a more fruitful source of error, than to judge of persons and opinions by our own prejudices. How common is it for persons to judge of their own religious character, by the opinions and maxims of the world around them! But how different is the rule of God's word! And of all flattery, self-flattery is the worst. Therefore, instead of praising ourselves, we should strive to approve ourselves to God. In a word, let us glory in the Lord our salvation, and in all other things only as evidences of his love, or means of promoting his glory. Instead of praising ourselves, or seeking the praise of men, let us desire that honour which cometh from God only.0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용감하지 못하고 힘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10:1-2, 10). 여기에 엄격한 긴장지만 우아한 풍자 속에서, 바울은 그들이 했던 것만큼 담대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이루어진 것들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든 함께 있지 않든, 그러한 담대한 성격에 대해서 바울은 아무런 주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They had accused him of a lack of boldness and energy when present with them, 2 Corinthians 10:1, 2 Corinthians 10:10. Here in a strain of severe but delicate irony, he says he was not bold enough to do things which they had done. He did not dare to do the things which had been done among them. To such boldness of character, present or absent, he could lay no claim.)
휫트비와 클라크는 이 말이 그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비교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거짓 사도들을 그들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도드릿지, 그로티우스, 블룸버그와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가 그들은 자기들을 특출함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게속 그들이 성취한 일들을 보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출함을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불균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그러한 데 담대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할 만한 도덕적인 용기가 없었습니다. 호레이스는 이와 비슷한 표현을 했습니다.( Whitby and Clarke suppose that this means that they compare themselves with each other; and that they made the false apostles particularly their standard. Doddridge, Grotius, Bloomfield, and some others suppose the sense to be, that they made themselves the standard of excellence. They looked continually on their own accomplishments, and did not look at the excellences of others. They thus formed a disproportionate opinion of themselves, and undervalued all others. Paul says that he had not boldness enough for that. It required a moral courage to which he could lay no claim. Horace (Epis. 2 Corinthians 1:7. 98) has an expression similar to this:)
바울이 말한 의미는 그들이 자신들로 뛰어남의 기준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업적으로 만족했고, 다른 사람들이 이룩한 훨씬 더 뛰어남과 업적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The sense of Paul is, that they made themselves the standard of excellence; that they were satisfied with their own attainments; and that they overlooked the superior excellence and attainments of others.)
이처럼 자기를 기준 삼아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Themselves they make to be the standard, and they judge of everything by that. Are not wise - Are stupid and foolish)
제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주의 거짓 사도와 거짓 교사들은 자기 자신을 공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들 같은 사람들과 비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한 눈 가진 사람은 봉사들 세계에서 쉽게 왕이 될 수 있습니다. ( Instead of measuring themselves by the public standard, they measure themselves by one made by themselves: they do not compare themselves with others who excel them, but with those like themselves: hence their high self-esteem. The one-eyed is easily king among the blind.)
매튜 폴(Matthew Poo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감히 과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만 가지고, 자기로써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 패거리들 가운데서 자기들끼리 비교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This whole verse is a reflection upon the false teachers of the church of Corinth, from whose manners Paul purgeth himself. I (saith he) durst not, as some others, magnify myself, nor compare myself with those that do so. Neither is it any wisdom in them to contemn and despise others, in comparison of themselves; for observe what measures they take, they only measure themselves by themselves, and compare themselves amongst themselves, such as are like unto themselves, and of their own faction and party; which no wise men would do.)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말을 비꼬는 말로 생각합니다. 마치 바울이 조롱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는 천박하고 야비한 사람들과 수준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듯이, 비록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야유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큰 은사를 자기고 있고, 학문도 높고, 웅변술도 뛰어나다고 하는데, 비록 그들이 야유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사울 사도와 동료 사역자들의 온화한 태도는 자부심이 강한 거짓 사도들과 혼돈되지 않을 것입니다. (Some understand this as spoken ironically, as if the apostle jeeringly should say, he would not pretend to join, or put himself upon a level, who was a poor, little, mean, despicable person, with such great men as the false apostles were, men of such large gifts, and of such great learning and eloquence; though they may be understood without an irony, that the modesty of the apostle and his fellow ministers would not suffer them to mingle with such persons, and act the vainglorious part they did)
자기로써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고, 대단히 우스꽝스럽고,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comparing themselves among themselves, are not wise, or "understand not"; how foolish they are, how ridiculous they make themselves;)
그들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입니다(they falsely think highly of themselves.; Geneva Study Bible)
(2) 여기서 바울이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네, 이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란 자기를 스스로 칭찬하면서 자신이 참된 사도라고 추천서를 써온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을 추천서도 없는 거짓 사도라고 매도하고, 자기들은 여러 가지 칭찬할 점들이 있다고 장점들을 나열하면서 추천서를 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왔다고 했고, 자기들은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은 거짓된 이단이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가 참 복음이라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3)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추천서에 의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린도후서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추천서)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이처럼 바울 사도는 종이로 쓴 추천서를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전도의 열매인 고린도교인들이 바로 바울 자신의 추천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태권도 5단인가 아닌가를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유단자라는 단증이 아니라, 실제로 대련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둑도 1단인지 2단인지 문서로 자격증을 보여주는 것 보다 실제로 바둑을 두어보면 압니다.
축구 선수인가 아닌가를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선수 자격증이 아니라, 실제로 축구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종이로 사도의 추천서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고, 바울이 복음 전도로 구원받아 성도가 된 고린도 교인들이 바로 바울이 참된 사도인 증명서라고 말했습니다.
(4) 바울의 대적자인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추천을 받은 진짜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받은 참 사도였습니다(갈 1:1).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5)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과 모세를 최고의 권위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맡은 신약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7-9,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6) 대적자들은 인간적인 비교를 통해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로 세워주신 것을 자랑하고, 인간적인 자랑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 사실 적대자들이 만든 표준이나 척도- 즉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무 추천서를 받는 것, 인간적인 지혜, 사도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위압적인 태도, 수사학적인 웅변술 등-은 당시에 헬라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기준들을 이미 오래전에 하찮은 것으로 버렸습니다.
고린도후서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처럼 바울은 그런 세상적인 척도들을 천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적인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추정하고 과시하는 것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렇습니다. 율법주의 지도자들(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이 율법적 지식이나 세상적 학문이나 세상적인 권력으로써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면, 그것은 바울 앞에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적으로 율법적 지식이나 세상적 한문이나 세상 권력이 너무도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유대인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 대학을 나왔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권력으로는 대제사장의 전권대사로 군사들을 지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이런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처럼 바울은 세상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3)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그러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복음 전도해서 결신자를 많이 만들어 낸 것을 자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봉사 한 것을 자랑하고,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서 많이 기도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도 많이 한 사람은 전도 집회 강사로 전국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수 순동교회의 박 아무개 집사 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새벽기도로 성공한 것을 간증하면서 집회하고 다닙니다.
(4) 즉 군포 영광교회 이상돈 목사님은 5년 전에 150명 교인이었고, 새벽기도에 20명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교회 제일 목표를 새벽기도에 두었답니다.
그래서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무조건 다 새벽기도에 나오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5년 만에 성도가 1,000명으로 늘어났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국에 부흥강사로 간증하러 다닙니다.
(5)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천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8-29.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뒤로 돌아서 하시면 꼴찌가 첫째가 됩니다.
다윗은 당시 가장 천한 사람이었지만,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요 죄수였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포로된 노예였지만, 바벨론 나라의 최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르드게도 남의 나라의 포로였지만, 페르시야 왕국의 최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뒤로 돌아서 하시면, 꼴찌가 첫째가 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머슴의 아들인 류태영이는 새벽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박사가 되고, 대학교 부총장이 되었습니다.
조용기라는 학생도 세상에서 폐병으로 다 죽어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뒤돌아서 하시면 꼴찌가 첫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직분자들을 세상적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시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통해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고 자녀들이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13절.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e will not boast beyond our measure, but within the measure of the sphere which God apportioned to us as a measure, to reach even as far as you.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ἡμεῖς δὲ οὐκ εἰς τὰ ἄμετρα καυχησόμεθα,
we but not into the things beyond measure we will boast
직역하면 ‘그러나 분수 이상의 것들에까지 우리가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우리가’(ἡμεῖς, we)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자랑을 하지 않고’에서 동사(καυχησόμεθα)는 매래형으로서(we will boast) ‘우리가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ἀλλὰ κατὰ τὸ μέτρον τοῦ κανόνος οὗ ἐμέρισεν ἡμῖν ὁ Θεὸς
but according to the measure of the area that assigned to us the God
‘나누어주신’(ἐμέρισεν)은 부정과거로서(assigned) 과거에 분명히 할당해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μέτρου ἐφικέσθαι ἄχρι καὶ ὑμῶν.
measure to reach as far as also you
직역하면 ‘너희에게까지 이른 한계니라’는 뜻입니다.
‘이른’(ἐφικέσθ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reach) 과거에 확실히 이른 것을 가리킵니다.
1.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태도를 곡해하고, 자기들을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따라 자랑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 엘리콧(Ellicott)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범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범위의 한계’란 한편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두 그룹 사이에서 체결한 협약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할례파 사도들이 세운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하고 밀어내면서 이 협약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현재는 고린도에까지 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일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조직적으로 선교 한계의 협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세운 안디옥 교회에 쳐들어왔고, 갈라디아 교회들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린도교회에 쳐들어와서 분쟁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바울은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롬 15:19.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얼마 후에 고린도에 갔을 때 일입니다. 즉 사도행전 20장 2절(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에 말씀한 대로, 바울은 헬라(고린도)에 이르렀는데, 이때 로마서를 썼습니다. (The words imply, of course, that his opponents were doing this. He refers in it to the concordat established between himself and Barnabas, on the one hand, and Peter, James, and John on the other, to which he refers in Galatians 2:9. He had not transgressed the terms of that concordat by thrusting himself upon a Church which had been founded by one of the Apostles of the circumcision. He had gone, step by step, seeking “fresh fields and pastures new,” till he had reached Corinth as, at present, the farthest limit of his work. In that apportionment of work, though it was a compact with human teachers, he saw the guidance of God; his opponents, on the other hand, had systematically violated it. They had come to the Church of Antioch, which had been founded by Paul and Barnabas (Acts 15:1); they had followed in his footsteps in Galatia (see Introduction to Epistle to the Galatians); they were now stirring up strife and disloyalty at Corinth. We note as an undesigned coincidence that a few weeks or months later, as in Romans 15:19, he had preached the gospel as far as Illyricum, but this was during the time immediately following on the despatch of this Epistle, during which, on his way to Corinth, whence he wrote to Rome, he had “gone over those parts, and given them much exhortation” (Acts 20:2)..
벤슨(Benson)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범위의 한계’를 침범하는 것을 주의 일을 하는 주의 종들이 다른 사람이 일한 노력의 댓가(the credit of other men’s labours)를 가로채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회심한 성도들을 간섭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meddle with those converted by them)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인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것이 바울 사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인 양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They had boasted of what had been done in Corinth as though it were really their work though it had been done by the apostle himself.)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범위의 한계’란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각각의 사역지를 할당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고유한 구역을 할당해주셨는데, 바울에게 할당해주신 지역은 고린도교회라는 뜻입니다. (God had measured out or apportioned their respective fields of labor; that by his providence he had assigned to each one his proper sphere, and that in the distribution Corinth had fallen to the lot of Paul. )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는 뜻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행 26:17-18) 헬라반도 전체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할당해주신 선교 구역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마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설립한 것이 침략자의 행위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도 바울이 선교 구역의 한계를 넘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Paul was the apostle to the Gentiles Acts 26:17-18; and the whole country of Greece therefore he regarded as falling within the limits assigned to him. No one therefore could blame him for going there as if he was an intruder; no one assert that he had gone beyond the proper bounds.)
제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한계 밖의 자랑을 한다’는 말을 ‘다른 사람의 선교 노력으로 회심한 성도들을 가지고 자랑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It would be to "boast of things without our measure," were we to boast of conversions made by "other men's labors.)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서 복음 전도의 구역으로 정해주신 한계라는 뜻입니다. (Paul's "measure" is the apportionment of his sphere of Gospel labors ruled for him by God).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그 범위의 한계’라는 것은 천주교에서 주교도 자신의 구역 밖으로 사역자들을 임명할 수 없다는 그런 교황의 칙령과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는 바울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사역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즉 고린도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선교 구역으로 정래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를 거쳐 남쪽으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까지 선교한 후에 고린도에까지 복음을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A "rule" among the so-called "apostolic canons" subsequently was, that no bishop should appoint ministers beyond his own limits. At Corinth no minister ought to have been received without Paul's sanction, as Corinth was apportioned to him by God as his apostolic sphere. The Epistle here incidentally, and therefore undesignedly, confirms the independent history, the Acts, which represents Corinth as the extreme limit as yet of his preaching, at which he had stopped, after he had from Philippi passed southward successively through Amphipolis, Apollonia, Thessalonica, Berea, and Athens)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과 동료들은 유대나라로부터 중간 지역을 넘어서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도 자기들의 관할하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사도들은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 아무런 권리와 권한이 없었습니다. ( the line of their ministration was drawn, or the bounds of their preaching were carried from Judea, and through all the intermediate places to Corinth, so that the Corinthians were properly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apostles, and in their district; wherefore the false apostles had really no right nor claim to be among them)
(2)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만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한다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네, 율법주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자들인데, 원래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2장 9절.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이런 원래의 약속을 어기고 이방인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까지 와서 자기 자랑을 하고, 바울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수를 넘는 지나친 행동이었습니다.
(3) 즉 바울은, 적대자들의 자랑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의 영역을 무시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계>에 해당하는 헬라어(κανόνος: cannon)는 <길이를 재는 막대기, 줄자>라는 뜻인데, 일정하게 한정된 영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일정하게 한정된 선교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도, 대적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 영역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행 9:15; 롬 1:5; 15:18), 그에게 이방을 선교 영역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합의된 사항이었습니다( 갈 2:9).
갈라디아서 2:6-9.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4) 이런 한계에 입각하여 바울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롬 15:20).
로마서 15:18-21.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5)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지키면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선교의 한계를 무시고, 고린도 교회에 와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했습니다.
(6) 오늘날 교회에서도 종종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 어릴 적부터 교회를 섬겨왔던 본 교인들은 도외시 되고, 외부에서 갑자기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갑자기 장로와 권사가 되더라도 교인들의 이름이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원만하게 직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중직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이 중직자로 일해야 자연스럽게 일할 수 있습니다.
(7) 그리고 교회에서 각 기관이 있고, 기관의 책임자들을 세워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의 직분의 한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역장이 다른 구역을 간섭해서는 안 되고, 한 주일학교 부서가 다른 주일학교 부서를 간섭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여전도회 같은 곳에서는 연로하신 한나가 선배로서 젊은 에스더나 루디아를 조언을 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재정을 담당한 장로가 서로 존중해주어야 하지, 서로 간섭하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처럼 교회에서도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바울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선교 영역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투해서 바울이 설립하고 목회하는 고린도 교회를 거짓 사도들이 장악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일할 때에도, 서로 자기의 직분과 직무의 한계를 잘 인식하시고, 다른 직분자들의 직무를 간섭하거나 한계를 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존경과 협력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4절.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we are not overextending ourselves, as if we did not reach to you, for we were the first to come even as far as you in the gospel of Christ;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οὐ γὰρ ὡς μὴ ἐφικνούμενοι εἰς ὑμᾶς, ὑπερεκτείνομεν ἑαυτούς,
not for as not reaching to you, we overextend ourselves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너희에게 도달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지나쳐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란 뜻입니다.
‘미치지’(ἐφικν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reaching) 현재 미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나쳐 나아간’(ὑπερεκτείνομεν)은 현재형으로서(we overextend) 지나치게 나가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ὑπερεκτείνω)은 ‘나에게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손을 뻗다’(stretch out beyond the measure assigned to me)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ἄχρι γὰρ καὶ ὑμῶν, ἐφθάσαμεν ἐν τῷ εὐαγγελίῳ τοῦ Χριστοῦ·
as far as for also you, we came in the gospel of the Christ
‘이른 것이라’(ἐφθά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came) 확실히 이른 것을 가리키고, 원형(φθάνω)은 ‘가다, 도달하다, 이르다’(come, arrive, reach)는 뜻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만한 것은 ‘우리가 먼저 왔다’는 뜻이고, 우리는 우리의 선교 구역의 한계 내에서 선교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설립된 것이 그 증거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 후에 들어온 바울의 대적자들은 침략자들이라는 뜻입니다. (And this is obviously St. Paul’s meaning. “We were the first to come,” he says, “as working within our limits; the very fact that we did so come being a proof of it.” They (his rivals) came afterwards, and were intruders.)
벤슨(Ben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한 것은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우리의 한계 안에서 전도한 것이고, 그래서 고린도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순서를 따라서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7절(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에 말씀한 대로, 어떤 지역에서는 전도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바울은 이 규칙을 따라서 소아시아 모든 지역에 전도했고, 마게도냐 지역에 가서 주요 도성들에서 전도했습니다. 그 후에 헬라에 이르러 아덴에서 전도했고,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누가 전도하지 않는 곳에서만 전도했습니다. ( In preaching at Corinth, we do not, like the false teacher, go out of our line, as not reaching to you; but we are come even as far as you — By a gradual, regular process, having taken the intermediate places in our way. The apostles themselves, (unless they received particular direction to that purpose, see Acts 16:6-7,) “were not at liberty to preach in some countries, and pass by others. St. Paul, therefore, following this rule, preached in all the countries of the Lesser Asia, beginning at Jerusalem. From Asia he passed into Macedonia, where he preached in many of the chief cities. Then he preached in Greece, and particularly at Athens; and at last came to Corinth, in a regular course of preaching the gospel, where it had not been preached before.)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도록 전도한 것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고유의 한계를 넘어서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한계를 넘어서 고유한 지역을 확장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고유한 선교 지역을 지켰습니다. ( In coming to preach to you we have not gone beyond the proper limits assigned us. We have not endeavored to enlarge the proper boundaries, to stretch the line which limited us, but have kept honestly within the proper limits)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자기들에게 정해진 구역을 넘어서 가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고린도에까지 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력이나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리도 주장하고 사도직을 행사할 때,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았습니다. (They did not go beyond the bounds set them by the purpose and providence of God, by going to Corinth; nor did they boast of things without their measure, when they spoke of their labours, and of the success of their ministrations among them; nor did they assume and arrogate to themselves what did not belong to them, when they claimed an authority over them, and a right of exercising their apostolical office among them:)
바울 일행은 이곳저곳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들을 세우고, 고린도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자신이 고안한 것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고, 사역자이시고,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해서 많은 영혼들이 회심하게 만들었고, 매우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고, 정당한 권리로 고린도에 이르렀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일행은 자기들이 일하지 않는 곳에 쳐들어간 것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여전히 고린도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they were not only come to other places, where they had preached the Gospel, and planted churches, but as far as to Corinth also, where they came "in, by, or with the Gospel of Christ": not their own, or what was of their own invention, but Christ's; of which he is the author, minister, and subject; they did not come without something with them; they came with the good news and glad tidings of salvation by Christ; they came preaching the Gospel, which was owned for the conversion of many souls, and for the raising a very considerable church; all which was a full proof that they were of right, and not by usurpation, come to them; that they had not thrusted themselves in, where they had no business, and consequently still retained a power over them.)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서 전도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교 영역상 고린도 교인들은 이방인 지역이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도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고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지나쳐 나간 것>이란 공적으로 선교 영역이 아니데, 자기 스스로 사적으로 선교 영역을 넘어 전도하러 간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간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바울이 베드로와 선교 영역을 정한 그 선교 영역을 어기고, 스스로 고린도에 선교하러 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고린도가 이방인의 선교 영역이므로, 합법적이고 공적으로 합당하게 고린도에 선교하려 갔다는 말씀입니다.
2. 바울이 이 말씀을 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선교 영역에 대한 합의사항을 어기고, 스스로 고린도에 들어와서 바울을 쫓아내고, 불법적으로 자기들이 사도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지적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로 베드로가 바울과 합의한 선교 영역에 대한 영역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고린도에 들어왔습니다.
3. 그러므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추천서도 없는 거짓 사도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참된 사도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선교를 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이방인 지역인 고린도에 들어와서 교회를 장악하려는 것은 원래 선교 영역에 대한 합의를 어기고, 불법적으로 선교 영역을 어기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4. 이처럼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선교 영역 자체를 어긴 사람들로서 무슨 참된 사도냐 아니냐를 따지고, 또 추천서 문제를 제기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바울은 전남노회에 소속이 되어서 전남에 와서 목회를 할 수 있는데, 저기 경상노회에 소속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전남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지역 자체가 다른데, 추천서 문제나 자격증 문제를 따질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필리핀 사람이 한국에 와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국 사람이라서 한국 국회의원을 해도 되지만, 한국 국적도 없는 필리핀 사람이 한국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과 같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한국 사람과 같은 바울을 국회의원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따진다는 것을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요즘 교회에 적용하자면, 다른 교회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장로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격 논의를 하려면, 우선 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 자격도 없는 사람이 선거 후보의 자격을 논하면, 그것은 월권입니다.
6.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우선 이방인 선교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목회할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하는 것은 선교 지역주의를 초월한 월권이라는 것입니다.
7. 본 절에는 두 가지 요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고린도에 갈 자격이 있고, 고린도는 바울이 정당하게 선교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고린도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남의 선교 영역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8. 게다가 이 바울의 적대자들은 참 복음이 아닌 거짓된 복음(율법주의)을 가지고 들어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11:4).
고린도후서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선교 영역에 합당한 고린도 지역에 복음 전도를 하여 고린도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선교 영역이 유대인들이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만 전도하고, 유대인 교회만 간섭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베드로 등과 선교 영역에 대해서 합의한 대로,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 지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손을 뻗친 것은 선교 영역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침투한 범법행위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율법을 전해서, ‘할례를 받아라. 율법을 지켜라’고 대상에 합당치 않는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교 합의에 따라서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에게까지 복음으로 전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합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선교 영역을 어기고 더구나 이방인에게 복음이 아닌 율법과 할례로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교 영역을 침범한 불법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울을 참 사도가 아니니, 추천서가 없느니 하고 탈을 잡는 것은 눈에 들보가 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빼라고 하는 격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직분자의 직무에 간섭하지 마시고, 자기의 직무 한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영역을 넓혀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칭찬과 복을 얻고, 자손이 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5절.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t boasting beyond our measure, that is, in other men's labors, but with the hope that as your faith grows, we will be, within our sphere, enlarged even more by you,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οὐκ εἰς τὰ ἄμετρα καυχώμενοι ἐν ἀλλοτρίοις κόποις,
not to the things beyond measure boasting in others’ labor
직역하면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에서 동사(καυχώ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boasting) 현재 자랑하고 있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바라노라.
ἐλπίδα δὲ ἔχοντες, αὐξανομένης τῆς πίστεως ὑμῶν,
hope however having, increasing the faith of you,
직역하면 ‘오직 너희 믿음이 자라고 있어서, (풍성함에 대한) 소망을 갖노라’는 뜻입니다.
‘바라노라’(ἐλπίδα ἔχοντες)는 직역하면 ‘희망을 갖고 있다’는 뜻인데, 동사(ἔχ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having)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랄수록’(αὐξανομένης)도 현재분사로서(increasing) ‘자라고 있어서’란 뜻입니다.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ἐν ὑμῖν μεγαλυνθῆναι κατὰ τὸν κανόνα ἡμῶν, εἰς περισσείαν,
among you to be enlarged according to the area of us, to abundance
직역하면 ‘우리의 지역까지 (너희 믿음이) 너희 안에서 자라게 되어서, 확장되기를 (바라노라)’는 뜻입니다.
‘규범’(κανόνα)이란 여기서는 ‘한정된 지역, 지방’(defined area, province)을 가리킵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범위’로, 현대인의 성경은 ‘한계’로 번역했습니다.
‘풍성해지기를’(μεγαλυνθῆν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enlarged) 크게 확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연곽 현대인의 성공에는 ‘확장되기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1. 바울은 결코 남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분수 이상으로 자랑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이 전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전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로마서 15:20-21.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 제일 먼저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전도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4-11절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인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전도해서 설립해놓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바울의 업적이 자기들의 업적인 양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들도 남이 수고한 것을 칭찬해주고, 자기가 한 것인 양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간혹 잔치 때 보면, 주방에서 수고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자기가 음식을 나르면서 자기가 만든 양 생색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 어르신들 대접하려고 음식을 만들었을 때,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막상 어르신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자기가 음식 만든 것인 양 생색내는 사람이 따로 있으면 속상한 것입니다.
4.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죽을 고생해서 설립한 교회입니다.
즉 사도행전 18장 12절 이하에서 말씀한 대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자칫 죽을 뻔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죽을 고생을 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는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수고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아내고, 자기들이 교회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도 보기 어려운 대단히 불량한 행동입니다.
이처럼 가끔 교회에서 신앙이 타락한 사람들은 불신자들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5. 그렇습니다.
저는 불교인이나 이단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경험해보면, 가끔 불교인이나 불신자들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때는 교인들 보다도 불신자들을 더 편하게 대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수를 넘어서 남이 수고한 것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착한 양심을 가지고, 아름다운 믿음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 이 말씀이 이전 성경에는 이 말씀이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우리는 범위를 넘어서 남이 한 수고를 가지고 생색을 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서 우리의 선교 사업이 여러분 사이에서 더욱 확장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범위를 넘지는 않겠습니다“
새번역에는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우리는 남이 수고한 것을 내 것인 양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고 우리의 일도 주어진 한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 더욱 확장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2. 여기서 바울 사도가 바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그리스파 사람들처럼 고린도 교회 지도자를 몰아내려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복 받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꼭 교회 지도자를 몰아내려는 데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종은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복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바라는 것은 바울의 선교 영역이 더욱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우리의 규범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란다>(우리의 범위가 더욱 널펴지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을 다 전도하고, 헬라지역도 다 전도했는데, 이후로는 로마지역에 전도하고, 더 나아가서 서쪽의 끝인 서바나까지 전도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즉 로마서 15장 23-24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그렇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교회가 성장하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이단들은 오직 기성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장악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악한 마귀의 짓입니다.
4. 금 년 들어 이단들이 부쩍 우리 교회를 공략하더니, 이제 금 년 말부터는 이단들이 노골적으로 유인물로 우리 교회를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밤에도 교회에 몰래 쳐들어와서 유인물들을 붙이고 갔습니다.
유인물 내용에는 목사가 <사나운 이리이고, 삯을 위해 일하는 거짓 선지자이고, 교인들을 노예로 지배하려는 이단자이고, 예수의 이름 팔아서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자이고,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지 않고, 세상적으로 드리는 자이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파렴치한이고, 마귀 사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주의 보내심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명예훼손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이 참된 종교인이라면, 떳떳하게 목사에게 찾아와서 전도할 것이지, 숨어서 이런 유인물을 부착해놓은 범죄행위를 한단 말입니까?
5. 이렇게 이단들은 불신자 전도를 하지 않고, 꼭 기성교회를 공략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 이단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전도가 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했고, 오직 성도들은 믿음이 성장하기만을 바랐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양심이 파괴되면, 짐승과 같습니다.
바로 율법주의 이단자들 그랬고 오늘날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이 수고한 교회에 가서 교권을 장악하려는 이단들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고, 복음 전도와 교회 부흥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16절.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as to preach the gospel even to the regions beyond you, and not to boast in what has been accomplished in the sphere of another.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εἰς τὰ ὑπερέκεινα ὑμῶν εὐαγγελίσασθαι,
so as that beyond you to preach the gospel
직역하면 ‘너희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는 뜻이고 ‘지역’은 번역상 첨가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εὐαγγελίσασθ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preach the gospel)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οὐκ ἐν ἀλλοτρίῳ κανόνι εἰς τὰ ἕτοιμα καυχήσασθαι.
not in other’s area in things ready to boast
직역하면 ‘남의 지역에서 준비된 것들로 자랑하지 아니 하고’란 뜻입니다.
‘규범’(κανόνι)은 ‘한정된 지역이나 지방(defined area, province)을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는 모두 ’지역‘으로 번역했습니다.
’자랑하지 아니 하고‘에서 동사(to boast)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oast) 단호하게 자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이루어놓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자기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이 이루어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직접 자기가 복음 전선에 뛰어들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전도해서 설립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일입니다.
2. 오늘날 이단들도 그렇습니다.
즉 이단들은 불신자 전도를 하려고 하지 않고, 꼭 기성 교회에 침투하여 기성 교인들을 유혹하고, 기성 교회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런 악행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즉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천하에 다니면서 교인 하나를 만나면, 이전보다 더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3. 오늘날 이단들도 그렇습니다.
즉 이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건전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오직 자기들만 14만 4천에 들어가서 구원받겠다는데 현혹이 되어서, 가족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양심이 마비되어, 악마같이 전도하고 다닙니다.
우리 지역에도 10가지가 넘는 이단들이 들어와서 양같은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합니다.
특히 신천지 이단이 금 년에 들어와서, 우리 교회를 타켓으로 삼아 온갖 수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도 목사를 7가지로 욕하는 전단지를 사방군대 붙이고 갔습니다.
즉 <목사는 사나운 이리다. 삯을 위하는 거짓 선지자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압제자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세상 영광과 출세를 하려는 자다. 예배를 세상적으로 드리는 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파렴치한이다. 마귀 사탄의 종이다> 이렇게 욕하는 전단지를 붙였습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는 떳떳이 목사에게 와서 따졌어야 하는데, 자기는 숨어서 <주의 보내심을 입은 자>라고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전단지를 보십시오.
4. 이미 이단들이 우리 교인들 몇 사람과 접선을 이루어놓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단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단들은 마귀같이 어두운 곳에 숨어서 욕하고 비방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단들을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은 정정당당하게 대항하지 않고, 은밀하게 침투하여 교인들을 종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4절에는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서 1장 4절에도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계와 분수를 넘는 이단들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수를 넘는 이단들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고, 교회와 가정을 굳게 지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전도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점령하려고 하지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넘어서 로마나 서바나까지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19-23절에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 전도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할 때는 에베소에서 설교하기를 이제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전달한 후에 로마도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즉 사도행전 19장 21절에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이미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교회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복음 전도의 불모지를 찾아서 전도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불신자 초청 전도 집회, 불신 주민 초청 잔치, 이웃과 함께 하는 시간 등을 자꾸 만들어서, 불신 이웃들을 초청해서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도록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 전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이 해놓은 전도의 업적을 가지고,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의 불모지에 전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늘의 별같이 빛나고, 큰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7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So the one who boasts must boast in the Lord.
Ὁ δὲ καυχώμενος, ἐν Κυρίῳ καυχάσθω·
the (one) but boasting, in Lord let him boast
직역하면 ‘그러나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자랑하는’(καυχώ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boasting) 현재 자랑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자랑할지니라’(καυχάσθω)는 현재 명령형입니다(let him boast).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즉 이 율법주의자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가지고 왔다고 자랑했고,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했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랑했고, 말을 잘한다고 자랑했고, 잘 생겼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자랑을 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님을 자랑했고, 복음을 자랑했고, 전도의 열매인 성도들을 자랑했고, 자신은 약한 것들만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참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리고 바울은 자기는 약한 것들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 믿은 후로는 세상적인 자랑거리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2.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려면 자랑할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빌립보서 3장 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바울은 이런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예수님 믿은 후로는 이런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약한 것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치 못 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당시 권력을 가진 바리새인들이니 서기들이나 제사장들보다는 세상에서 천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태복음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러자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또한 베드로전서 5장 5절과 잠언 3장 34절에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리고 잘 아시는 대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말해달라고 할 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2.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율법주의 교사들이 감히 위대한 바울 사도 앞에서 자기 자랑을 했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즉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정통교회를 비판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리고 반기독교 운동가들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깊은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교역자의 말을 안 듣고, 이상한 신앙을 고집하면서 오히려 교역자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전문가들이 있는 것입니다.
의사도 전문가요, 법률가도 전문가요, 축구선수나 음악가도 전문가요, 목사도 전문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나 목회에 관한 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전문가 앞에서 일반인은 자랑을 말아야 합니다.
3. 그러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자랑할 것들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굉장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이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또한 성도들은 세상을 판단하고, 종말에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의의 면류관도 받을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일한 대로 천국에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것과 장차 몸이 부활해서 천국 갈 것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생명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 쓰고, 상급 받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으로 자랑하지 마시고,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과 일한 대로 상 받을 것을 자랑하십시오!
그래서 주님 위해서 충성하다가 장차 큰 복을 받으시고, 천국에서도 큰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t is not he who commends himself that is approved, but he whom the Lord commends.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οὐ γὰρ ὁ ἑαυτὸν συνιστάνων, ἐκεῖνός ἐστιν δόκιμος,
not for the (one) himself commending, the (one) is approved
직역하면 ‘왜냐하면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신을 칭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칭찬하는’(συνιστάνων)은 현재분사로서(commending) 스스로 칭찬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인정함을 받는’에서 동사(ἐστιν)는 현재형으로서(is) 현재 인정함을 받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ἀλλὰ ὃν ὁ Κύριος συνίστησιν.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칭찬하는’(συνίστησιν)은 현재형으로서(commends) 현재 칭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자기가 자기를 칭찬해보았자 남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면,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칩니다.
2.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보시도록 은밀하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행을 하고서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3. 그런데 바울 당시에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화자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 대해서는 아주 나쁜 말을 했습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참 사도라고 말했고, 자기들은 추천서도 받아왔다고 말했고, 자기들은 설교를 잘하고, 자기들은 인물도 잘생겼다고 스스로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 대해서는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고, 선교헌금을 도둑질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못생겼고, 말도 잘못하고 자기 병도 고치지 못하고, 영적 체험도 없다고 비방했습니다.
4.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세상적인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5-9.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그리고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과 추함을 자랑할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자기가 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5. 그러므로 참으로 옳다 인정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0절에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6.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심판 때 상 받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심판 때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상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의를 행치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의를 행합니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그러기 때문에 심지어 기도할 때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들으십니다.
마태복음 6:5-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고 금식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면서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16-17.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심판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칭찬을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4:4-5.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눈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그리고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만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칭찬받고,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