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시인의음악사랑이야기 (107)
《흔들리되 꺽이지 않는 것, '갈대의 순정'》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마러라 아~ 아아 아~아 갈대의 순정
말없이 보낸 여인이 눈물을 아랴/
가슴을 파고드는 갈대의 순정/
못잊어 우는것은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마러라라 아~아아 아~아 갈대의 순정"
온천천변 호젓한 카페에서 나오니 해가 벌써 기울어 있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가보여 나온 길이었는데, 발길이 자연스럽게 온천천변으로 향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 온천천 양옆으로 갈대가 잔뜩 우거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하얀 이삭이 일제히 흔들리며 어디론가 날아갈 듯 일렁였다.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는 오후, 갈대밭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보였다.
여름내 푸르던 것들이 가을 햇살에 빛이 바래, 이제는 금빛 은빛 도는 누런 이삭을 달고 바람 따라 한쪽으로 눕는다. 눕는가 싶으면 다시 일어나고, 일어나는가 싶으면 또 눕는다.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자니 입에서 노래 한가락이 저절로 나온다.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의 순정~~~"
오래전 부터 즐겨 불러 온 노래다. 이제는 미숙한 솜씨지만 오늘은 실용 악기로도 연주해 보려고 한다. 가사를 입으로 부르면 목이 먼저 울지만, 특히 하모니카는 숨으로 부는 악기라서 울음을 숨 속에 감출 수 있다. 사나이 울음을 노래한 곡이니 어쩌면 하모니카가 더 잘 어울리는 옷일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 중반, 저음 가수 박일남이 데뷔곡으로 부른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킹레코드에서 나온 음반이 30만 장 이상 팔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였다.
박일남은 이후 '정', '전선야곡', '마음은 서러워도' 등으로도 사랑받았지만, 그를 대표하는 이름은 여전히 이 노래다.
그는 특유의 중후하고 호소력 있는 저음으로 남자의 마음을 절절하게 전달했고,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다. 작사·작곡은 오민우(본명은 차상용)
인데, 그는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온 연인과 깊은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 입대로 둘 사이가 멀어졌고, 제대 후 집안의 결혼 성화에 못 이긴 그녀가 가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을 것이다. 두 사람이 자주 찾았던 전북 이리 목천교 아래 만경강 갈대숲을 떠올리며, 그는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그 흔들림을
나약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갈대는 꺾이지 않는다. 다만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뿌리를 지키려 한다. 오민우는 그 모습을 남자의 순정에 빗댔다. “사랑에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 울지를 말어라”라는 가사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던 그 시대 남자들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사나이도 운다, 다만 그 눈물을 쉽게 내보이지 못할 뿐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면서도, 끝내 제자리를 지키려는 마음. 그것이 이 노래가 말하는 ‘순정’이 아닐까.
이 노래가 나온 1960년대는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격동의 시기였다.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흔들렸다. 사랑도, 약속도, 믿음도. '갈대의 순정'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던 남자들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노래였다고 생각된다.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여리고, 떠나보낸 사람을 못 잊어 밤잠을 설치면서도 “울지를 말어라”고 스스로를 다잡는 마음. 박일남의 낮은 목소리는 그 복잡한 감정을 아주 담백하게, 그러나 깊이 전달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이 채 가시지 않은 그 시절, 가장은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고, 사내는 소리 내어 울면 안 된다고 배웠다. '갈대의 순정'은 그런 남자들의 억눌린 감정을 대신 울어 준 노래였다. 술 한잔 기울이며 이 노래를 부르던 이들에게 그것은 하소연이자 위로였을 것이다.
필자 역시 지나온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그래서 이 노래를 술 한잔 들어가면 그리 목청껏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갈대는 물가에서 자라며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만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이 이중성이 노래의 핵심이다. 흔들리는 마음은 미련과 아픔을 뜻하고, 꺾이지 않는 줄기는 끝내 서 있겠다는 다짐을 뜻한다. 슬픔을 호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슬픔을 안고 견디는 노래라는 점이 세대를 넘어 공감을 얻는 이유다.
갈대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 마음도 그와 같지 않을까. 세월이 지나고 사랑이 변해도, 어떤 순정 하나만큼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노래가 지금까지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 노래여서가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비슷한 갈대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갈대를 두고 여자의 마음이라 했지만, 오늘 이 가을날 온천천변에 서서 들려오는 갈대의 서걱임은 분명 고독을 품은 '사나이의 순정'이다.
젊을 때는 이별의 노래로 들렸지만 이제 나이가 들으면 견딤의 노래로 들린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놓친 사랑이나 이루지 못한 꿈 하나쯤 갈대처럼 심어 두고 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흠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이 노래는 말하고 있다.
흔들린다는 것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파스칼이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 부른 것도 그런 연약함과 질김을 함께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젊을 때는 흔들리는 것이 약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흔들렸기 때문에 더 단단해진 마음도 있다.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
바람이 세게 불면 더 많이 휘어질 뿐이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몸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것이 갈대의 순정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순정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아파하면서도,
그 사랑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순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더 느려도 괜찮았다.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순정을 조용히 마음에 되뇌어 보는 저녁이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려도 뿌리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갈대의 순정이라면,
오늘 이 가을 저녁,
나는 그 순정을 잠시 빌려 걸어가고 싶다.
이런 맘 이런 생각하는 필자를 보고
"그대는 아직도 청춘인겨!"라고 말해도
그냥 싱긋이 웃을 수 있겠다, 오늘 만큼은.
/문화칼럼니스트 최진태
첫댓글 박일남 - 갈대의 순정
https://youtube.com/watch?v=aW4vMW6OT9E&si=arhZ8ZgWuJVXw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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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필드] 갈대의 순정 - 이의근 하모니카 연주
https://youtube.com/watch?v=ULPOPGqsI2M&si=0KuQDXt8FkLqNL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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