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말씀/고린도전서 15:1-34
요절/고린도전서 15:4 찬송가/151, 157장
오늘부터 2번에 걸쳐서 부활장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부활을 말할 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나눌 수 있고, 또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외에도 부활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공천에 대한 뉴스가 한참인데, 누가 공천에서 떨어졌다가 부활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부활은 개념적 부활로, 그냥 말을 막 갖다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바울이 전하는 고전 15장의 부활의 메시지는 세 번째 경우 입니다. 부활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활의 메시지도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그 부활의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주는 실제적인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지금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은 먼저 이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린도는 그리스 최대 항구 도시오, 동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만나는 20세기의 뉴욕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쾌락과 음란의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또 온갖 신전이 많은 신전의 도시오,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준에 이곳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고린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 교회에 온갖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를 돕고자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 전서를 썼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자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그때 복음을 듣고 믿었으니 너희들의 구원은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들이 들은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한번 믿으면 무조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한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굳게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온갖 것들이 나의 믿음을 흔듭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끊임없이 나를 이 복음에서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돕고자 문제를 하나 하나 끄집어내어서 해법을 제시해왔습니다. 그것이 고전 1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중에 사랑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해법이 바로 오늘 말씀인 고전 15장 부활의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장은 믿음을 지키기 힘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부활장을 통해서 우리도 복음을 새롭게 하고 흔들리던 믿음도 견고해져서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지켜야 할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복음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마음대로 죽고 살고 하면서 원맨쇼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을 굳게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공개 처형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고, 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벽에 무덤가를 간 찾아간 여인들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오후 3시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덤가에서 나와 부활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새벽녘에 여인 몇 사람만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잘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런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성적으로나 역사적 사건으로나 잘 믿지 않습니다. 특히 부활을 말할 때, 단지 영의 부활이나 죽은 후에 영생을 얻는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이런 정도의 부활은 모든 종교가 어느 정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부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쪽짜리 부활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반 마리 코끼리 부활신앙입니다. 코끼리가 있는데, 한 마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 마리가 있습니다. 좋을까요? 반 마리 코끼리는 죽은 코끼리입니다. 반 마리 코끼리는 처치가 곤란합니다. 형체는 있는데 쓸모가 없습니다. 반밖에 없으니까, 죽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영의 부활이나, 단지 영생으로 이해하는 부활신앙은 죽은 코끼리 반 마리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부활신앙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은 있기는 있는데, 오히려 더 훼방만 되기에, 어찌 보면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부활신앙, 완전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복음에 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5-11절입니다. 첫 번째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게바입니다. 복음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목격자는 예수님의 무덤가를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자를 증인으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여자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당시 여자는 증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바가 첫 번째 증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증인으로 세운다고 해서 다 증인이 아니라, 증인다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즉 게바가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증인다운 증거가 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게바를 보니까, 과거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겁쟁이 게바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는 그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게바는 부활의 첫 번째 증인다운 증인입니다. 게바만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의 변화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로들로서 분명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던 AD53-AD55년경에 대다수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AD33년이라면 22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로 하면 22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2002년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대한 민국, 짝짝짝’ 길거리 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어 나와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응원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더욱이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까지 썼으니 그때의 감동과 흥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썼던 그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자들이 대다수가 살아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침을 튀겨 가며 “나. 22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하며 생생하게 부활을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또 모든 사도에게와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바울이 부활의 증인이 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자신이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사도가 될 수 없는 자였는데, 이런 그도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골수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도저히 사도라고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도리어 가장 먼저 심판을 받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가장 많은 초대교회를 세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 은혜를 받게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도 부활의 생생한 증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이 있을 정도로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요, 수많은 증인들이 증거 하는 생생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실제적인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은 그냥 이론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된 새 삶을 살게 하는 위대한 부활의 능력자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서 이 시대 가운데 부활의 증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습니다. 증인들도 많습니다. 또 그들의 삶이 예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그 정도면 믿을 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겠느냐? 하면서 부활을 의심합니다. 그만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이것이 당연하고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고, 이제까지 늘 그래왔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사람이,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 세상 속에만 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부활을 의심합니까? 바울은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교회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믿음도 없는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도 갖고 구원을 사모하는 신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부활이 있을 수 있겠어?” “그게 정말 가능할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바울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아이고 속터져.” 너무나 당연한데, 바울은 “나도 부활의 예수님을 봤는데. 그래서 내가 사도가 되었는데, 내가 복음도 전했는데, 그런데 아니 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가?” 바울은 너무도 속이 터지고 답답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부활에 대해 변증합니다. 그러면 정말 죽은 자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고 합리적인 생각일까요?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말함으로서 부활이 필연적이고 확실한 것임을 변증합니다. 이것은 당시 어떤 진실을 증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권야곱목자님이 제주항공에 다니지 않는다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말함으로, 제주항공에 다니는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야곱목자가 제주항공에 다니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보니 매일 아침 김포공항으로 출근합니다. 때론 외국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몇 일씩 출장도 갑니다. 또 점심을 김포공항 근처 식당에서 먹습니다. 이런 여러 정황 등을 통해 볼 때, 야곱목자는 제주항공에 다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증법을 귀류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울은 부활이 확실함을 변증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들이 생깁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1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지도 못한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은 헛것입니다. ‘헛것’이라는 말은 ‘텅 빈, 무가치한’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엉터리 복음을 믿어봐야 구원이 없습니다. 그럼 복음을 전하면서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전도자들은 거짓 증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한 사도들은 다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저는 주일마나 양복에 넥타이 매고 폼 잡으며 사기 치는 것입니다.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있는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지,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셨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진짜 해결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늘 찜찜하고 답답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서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부활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부활을 믿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까지 했는데, 부활이 없다니! 완전히 폭망한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부활도 없고, 이 땅의 삶이 전부인데, 하늘에 보물을 쌓고자 하는 신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남들은 이 화창한 봄날에 벚꽃 구경 가고, 산으로 강으로 피크닉가고, 트래킹 하러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지도 않은 부활말씀을 갖고 예배를 보고, 부활찬양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하고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또 부활이 없다면 죽음으로 다 끝날 인생이니 허무하고 불쌍합니다. 이처럼 부활이 없다고 할 때, 죄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산 소망도 없고 인생도 신앙도 다 허무할 뿐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할 때,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복음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산 소망 가운데 살아야 분명한 이유를 밝혀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 우리의 구원자요, 능력의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 무엇입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람들은 부활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라고 하지 않고 잠자는 자라고 합니다. 왜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사람들이 나무를 심습니다. 실제로 묘목시장에 가서 나무를 보면,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습니다. 사과나무와 체리 나무가 구분이 안 됩니다. 아무튼 나무 하나를 사다 심습니다. 뭐가 열리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3년 자라더니, 열매가 열리는데 봤더니 체리였습니다. 와! 체리 나무구나. 그럼 계속해서 이 나무에서 체리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체리가 열리고, 내년에는 사과가 열리고 내후년에는 감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첫 열매대로 계속해서 같은 열매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첫 번째 부활의 증거가 되셨기에,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부활할 때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를 예수님이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한 사람의 원리를 말합니다. 21절을 보면, 한 사람 아담의 죄 때문에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아담 때문에, 우리는 죄와 죽음에 시달리며 고생하면서, 우리는 가끔 원망합니다. “아담 할아버지가 에덴동산에서 그냥 잘 사시지? 왜 선악과는 따 먹어서 후손인 우리까지 힘들게 하는가?” 또 “아담이 죄 짓은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불평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원리로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담에게 적용했던 그 원리대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이 뻘 짓하는 바람에 우리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즉 아담 안에서 다 죽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활을 알지 못했던 쇼펜하워는 “사람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무덤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죽으러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언젠가는 죽는 죽으러 가는 인생입니다. 이런 염세주의 철학자의 말을 듣고, 한 목자님은 고등학생시절 저녁에 자려고 눕자, ‘채칵...채칵...’ 돌아가는 시계 소리가 마치 내 인생을 가위로 채칵 채칵 잘라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차피 그렇게 잘려나갈 것인데 무엇 때문에 애쓰며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 방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채칵 채칵 하는 시계 소리가 내 인생을 가위로 잘나내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산 소망을 향해서 채칵 채칵 나아가는 힘찬 발자국 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밤에 한번 집에 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아날로그 시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오는지, 생명줄을 자르는 가위 소리인지?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힘찬 발자국 소리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집니까? 23절을 보면, 첫 번째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다시 오신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본래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십니다. 맨 나중에 원수 사망까지 멸하고 승리의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고 끝나는 역사의 파노라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부터 수 천 년 동안 구원의 약속을 계시하면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 모든 구약의 약속들을 집대성해서 하나로 응축해서 완성하도록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 많은 언약들, 많은 계시들...이 모든 구원의 약속들이 십자가에서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구원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 마침내 모든 만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마무리 하며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가 과거의 모든 역사의 종착점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출발점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와 과거를 싹 정리하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영생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을 가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31,31절을 보십시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릎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괴로워서 날마다 죽을 맛으로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으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그의 삶은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는 삶이었습니다. 즉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나는 날마다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노라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에베소에서 바울이 싸운 맹수는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라 그를 핍박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사납게 핍박한다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만이 아니라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 대단한 바울이지만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 자신도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삶을 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했잖아?” 이 말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의미? 개나 주라고 그래.” “부활이 없으면 나도 그냥 살래.” 즉 부활이 없다면 다 쓸데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이 없다면 힘들고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인생을 즐기면서 살면 그만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 노나니.” 세상은 끊임없이 이런 삶을 살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삶속에 빠져, 인생을 즐기며 살다 가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맞습니다. 뭔 의미를 찾습니까? 뭔 가치를 찾습니까? 잠깐은 폼 잡는 것이지만, 뭔 의미가 있습니까? 누가 알아줍니까? 또 알아주어서 뭐 합니까? 죽으면 끝인데. 죽어서 이름을 남겨, 남겨서 뭐 할라고? 죽으면 끝인데,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나는 죽어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모르는데, 내가 살았을 때, 나를 인정해 주어야지, 내가 죽었을 때 인정해 주어봐야 나에게 뭐가 돌아옵니까? 그래도 죽은 나를 위해 기념비, 공덕비 세워준다고요? 사실 사람들 그런 기념비니 공덕비니 다 귀찮아합니다. 죽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난다면 우리 인생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고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고, 영원히 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3,34절을 읽겠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속지 말라는 말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동무들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이고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악한 동무가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내 동무요,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하는 거지. 부활 그런거 안 믿어.” 무엇보다 이들의 말을 듣다보면, 내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의 선한 행실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대상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문제의 근본원인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을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부활이 없는 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나도 신앙과 내 삶에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과 문제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고전15장, 바울이 전한 말씀을 볼 때, 내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내가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부활의 능력은 내 삶을 달라지게 합니다. 착한 행실을 행할 수 있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내일 일을 염려하기보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내 삶에 많은 문제가 있고, 고민도 있고, 갈등도 있고, 걱정거리도 있고, 시급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인생 이 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가 종착지가 아닙니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번 생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번 생이 내게 주어진 기회이고, 이번 생이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의 시간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이번 생의 문제를 극복하고,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서, 내 삶이 부활의 증인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엄청난 부활의 에너지를 갖고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