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잣향기푸른숲
물과 숲이 어우러진 풍경
이 도 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회색빛 도시는 고요했다. 새벽 공기는 묵직하게 내려앉은 비구름에 습기를 잔득 끌어안고 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따라 차는 북한산 등을 밀어내며 북쪽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산골짜기마다 비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돌아앉아 있다. 잘 그려진 진경산수화의 한 폭 같다. 강가에서 피워 올린 물안개도 짙어가는 한여름 들판을 강의 일부인 양 접수했다.
구름이 이동 경로를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 지점인 가평의 "잣향기푸른숲"을 거쳐 자라섬으로 간다. 하늘과 땅이 온통 물의 나라로 변한 대지 위에 7월 숲은 제철인 양 짙은 녹음으로 부풀어 있다.
가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젊고 싱싱하다. 경춘선은 청량리와 춘천을 달리는 낭만 노선으로 오죽하면 청량리와 춘천의 앞 글자를 따서 청춘열차라고 부른다. 지금도 대성리역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인근 남이섬 낭만과 자라섬 캠핑장은 마치 젊은이들의 성지 같은 곳이다. 휴가철이면 모여드는 캠핑족들에게는 선호도 일위 장소다. 요즘은 차박을 하는 여행객들도 즐겨 찾는 자라섬이다.
오늘의 첫 번째 탐방 장소 또한 경기도가 가평 축령산 자락에 야심차게 구성한 치유의 숲이다.
장마전선이 주춤하는 사이 비구름 위로 맑은 햇살이 산정수리에 내려앉는다. 북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산맥의 심장을 관통하는 터널을 몇 차례 지난다. 가평으로 가는 여정은 산과 강을 따라 유순하게 뻗어 내린 지류를 달려가는 평온한 길이다.
포천시 내촌면의 고즈넉한 마을을 지나 강을 역류하며 거슬러 오르는 풍경은 비에 젖어 신선하다. 길옆 산비탈에는 농부의 땀으로 풍성해진 밭에 옥수수, 땅콩 등 농작물이 튼실하게 익어가고 있다.
가평 행현리에 도착하여 마을 회관을 지나 올라간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인 "잣향기푸른 숲"으로 향한다.
잣향기푸른숲은 축령산(887.1m)자락 4백에서 6백 미터 사이 고즈넉한 산품에 지라 잡고 있다. 비교적 완만한 능선으로 되어 있으나 헬기장 사거리로 오르는 비탈진 계단은 소위 말하는 깔딱 고개다. 잘 정비된 순환 임도는 숲의 정취를 감상하고 느끼면서 걸을 수 있다.
잣향기푸른 숲은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탐방을 할 수 있다. 주차장에 도착해 몸을 풀어 관절을 유연하게 하고 탐방을 시작한다. 길옆을 흐르는 시내는 장마로 물이 불어 폭포를 이루어 급류가 굽이친다.
숲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오래 묵은 잣나무 군락지는 하늘을 찌른다. 잘 다듬어진 숲의 안부로 들어갈수록 햇살은 녹음이 짙은 숲에서 멀어진다.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온통 흥겨움이 가득한 물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솦속에서 재잘대는 계곡물 소리가 길을 걷는 내내 동행한다.
천상의 청정한 소리가 따로 없다. 매표소를 지나 방문자센터 앞에서 부터 본격적인 숲 탐방이 시작된다. 야생화 단지를 지나 힐링센타 방향으로 편안한 임도를 따라 걷는다.
장마 구름의 영향으로 흐릿한 날씨와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숲의 그늘은 시원하다. 이곳이 치유의 숲이다.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맑고 청량한 숲이 내 몸속에 가득 들어찬다. 투명한 정신과 냉철한 이성이 명징하게 돋아나는 기분이다.
팔 부 능선 정도 올랐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물막이 사방댐이 눈에 들어온다. 제법 커다란 원형 호수의 아름다움에 반한다. 몇 차례 사진을 찍어 풍경을 앵글에 가둔다. 누군가 말하기를 마치 작은 백두산 천지 같다고 말한다. 그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형태와 아름다움에 공감한다. 원래는 산림 재해 예방과 축령산 일대 산불 취사원으로 조성하였으나 지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사방댐을 뒤로 하고 헬기장 사거리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질척하게 물이 흘러 체력 소모전에 들어간다. 우거진 밀림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짙어가는 녹음을 뒤집어쓴 나무의 그림자를 밟고 걷는다. 오로지 정상을 향해 묵묵히 오른다.
예상 했던 대로깔딱 고개다. 산행 중에 시원하게 땀을 한 번쯤 흘려줘야 엔진을 청소하듯이 폐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 헬기장에 오르고 서야 탁 트인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시원한 바람이 풀숲을 흔든다. 상쾌함이 밀려온다.
하산길에는 비교적 먼 길을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안한 임도 순환 길을 따라 내려간다. 잣향기피톤치드길을 지나 테크로드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이 숲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다. 숲속 여기저기마다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천상의 오케스트라다. 물줄기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나무와 돌을 감싸고돌아 흐른다. 기암괴석을 쓰다듬으며 크고 작은 물줄기에서 내는 합창곡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물이 흐르며 내는 소리는 환상적이다.
계곡을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낙차와 유속의 흐름은 저마다의 진동으로 새로운 주파수를 만들어낸다.
굳이 오선지에 음계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 여러 줄기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오선지 이며 저마다 다른 음색으로 하모니를 이루는 목소리이자 악기이기 때문이다.
현악기 금관악기 타악기의 모든 소리는 사람의 음악이라면 크고 작은 계곡에서 일제히 일어나는 소리는 신들의 음악으로 천상의 음계를 만들어낸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테크로드를 빠져나오자 어는덧 처음 출발 지점인 매표소에 도착한다.
시장기가 돈다. 식사도 할 겸 이제는 자라섬으로 간다.
경춘로를 더듬어 방향을 잡는다. 자라섬 초입부터 강변을 따라 늘어선 닭갈비집이 즐비하다. 춘천 닭갈비의 유명세가 이 일대에서는 최고의 식도락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춘천이 자랑하는 닭갈비로 점심을 먹는다. 닭갈비를 안주 삼아 시원하게 마시는 한 잔 술로 여행자의 빈곤한 배를 채운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여행 중 먹을 수 있는 맛난 음식은 역시 행복과 기쁨을 준다.
차를 타고 자라섬 강변으로 이동한다.
산릉선을 누르고 있는 구름이 서서히 해산하듯 몸을 풀어 흩어질 무렵 드넓은 강물을 품에 안고 있는 자라섬 캠핑장에 도착한다.
캠핑장의 풍경은 도시에서 떠나온 사람들의 또 다른 휴양도시다. 잘 다듬어진 섬의 풍경은 획일화된 모습이지만, 그래도 녹음이 우거진 숲과 강은 힐링을 위한 공간으로 충분하다. 강심을 달리는 모터보트가 시원한 물줄기를 만들어내며 달린다. 강물따라 남이섬이 지척이다. 아득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필자도 얼마전 대성리역에 내려 남이섬의 추억을 찾았다. 대성리역과 자라섬 그리고 남이섬의 지난 기억을 더듬어 시한 수를 읊조렸다.
남이섬 그리움 머무는 풍경
이 도 연
섬인 듯 섬, 물길 끝에 닻을 내린
오래된 이름표 하나
겹겹이 퇴적된 그리운 문장을 열어
기어이 마음 설레게 하는 곳
새벽이 눈을 뜨면
고운 햇살은
은빛 물비늘 위로 뛰어오르고
잠든 강물을 깨운 물안개는
비단처럼 날아올라
몽환의 강을 이룬다
가평과 춘천, 북한강 그 경계의 품속에
둥지를 튼 나미나라 공화국
만국기 펄럭이는 뱃길 위에서
찰나의 함박웃음을
앵글에 영원히 가두는 사랑
고요한 수면에 포물선을 그리며
청량하게 쏟아지는 연인들의 푸른 비명이
강물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나 강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요 며칠 내린 폭우로 강물은 바다처럼 강폭을 넓혀 발밑까지 물결이 찰랑거린다. 산맥의 갈비뼈에서 돋아난 물의 실핏줄이 급하게 모여들어 내를 이루고 천을 만들어낸다.
시내와 천은 한강의 지류를 부풀려 자라섬과 남이섬 강변의 풍경을 멋지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산맥의 잔해를 끌고 내려오는 강물은 거칠게 뒤척이며 황톳빛 물줄기를 꾸역꾸역 쏟아낸다.
물길이 지나는 곳마다 순한 물길을 이루어 민가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의 고요와 정중동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거칠게 달려드는 물의 흐름은 자칫 방심하면 재앙이 되기 십상이다. 뒤채는 물의 속살을 바라보며 물의 신 포세이돈의 마음을 달래본다.
하루의 여정이 흐린 구름 사이로 기울어질 무렵 자라섬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린다. 비록 갈 길은 멀어도 강과 구름으로 장식한 하늘을 배경으로 순간 포착, 멋진 추억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의 한 갈피에 소중하게 끼워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