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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필요성 5-107.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가끔 여러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 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는 문제로 옥신각신할 때가 있습니다. 대개 남편들은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이상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부인들은 남편의 건강이 걱정이 되기 때문에 남편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어도 미리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실 자기 스스로 몸에 전혀 이상이 없고,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진찰을 받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없이 너무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신앙을 가지게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면회를 가서‘당신은 지금 큰 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가 잘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있지도 않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당신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죄가 해결되도록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굉장히 기분나빠하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Ⅰ.구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구원이라고 하면, 큰 어려움에서 건짐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 경우의 구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불이 맹렬하게 붙고 있는 건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불에 붙고 있는 건물에 갇혀 있었는데, 용감한 소방대원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업고 나와 살게 되었다면, 그는 불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배(船)를 타고 가다가 조난을 당했는데, 마침 구조본부와 연락이 되어서 헬기로 가까스로 건짐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도 구원받은 것에 속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주 무서운 병에 걸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실력이 좋은 의사를 만났습니다. 그 의사의 치료를 받아 병을 이기고 건강을 되찾았다면 그 사람은 그 병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어떤 연약한 여성이 밤거리를 혼자 걸어가다가 나쁜 깡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큰 봉변을 당하려는데, 마침 아주 용감한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고, 무사히 집으로 오게 되었다면, 그 여성은 나뿐 사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불타는 집에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침몰하는 배(船)에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치한으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죽을병에서 좋은 치료를 받고, 목숨을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일까?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인간들에게 필요가 없는 종교인 것 같습니다. 모두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기독교의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사람들에게‘병 주고 약 준다.’고 말합니다. 모두 멀쩡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몰아붙인 후에 오직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독교의‘순환론 법’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중에서 오직 예수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환론(循環論)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구원을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로부터의 구원☜ 아직도 우리나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휴전선에서는 군인들이 주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남북으로 떨어져 있는 가족들도 만날 수가 없고, 남과 북의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할 수도 없으며, 서로 좋은 부분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협력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온 세상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마치 남한의 햇볕정책과 비슷합니다.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쌀도 받고, 비료도 받고, 금강산 관광 수입금도 받으면서 남한에 대한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것이 이와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좋은 혜택을 다 받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여 흩어지게 하고, 교회당까지 폐쇄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을 때, 치명적인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햇빛이나 비나 땅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꼭 받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기독교의 신앙 안에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계속되는 한 필요한 능력을 받지 못하고, 거의 목숨만 유지하는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고장 난 자신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예)어떤 기계가 있을 때, 그 기계의 설계도나 부속은 그 기계를 만든 회사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원형(原形)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고장이 났을 때, 하나님께로 가지 않으면, 고장 난 자아(自我)를 고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로 인한 자아(自我) 파괴(破壞)입니다. 즉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곧 인간성 상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맹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존귀함이 아니라, 죄악 된 자존심(自尊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가장 귀중한 것을 되찾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도둑맞은 인생의 가치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가장 귀중한 체험은 자신의 소중함과 존귀함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죄 성으로부터의 구원☜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나 가까운 다른 사람에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일에 흥분하여 광기(狂氣)를 부릴 그때입니다. 즉 술에 취했거나, 너무나도 화가 나면, 눈빛은 이상하게 빛이 나고, 통제되지 않는 성질로 난폭하게 행동할 때. 우리는 완전히 하나의 맹수(猛獸)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맹수가 하나씩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이 맹수가 잠잠하게 있다가 일단 자극을 받으면, 날뛰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통 말하는‘죄(罪)’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곧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죄악 된 본성’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가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난 ‘죄악 된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표현은 같은 죄라고 하지만, 하나는 원인이 되는 죄악 된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에 해당하는 죄악 된 행위입니다.
보통 사회에서 처벌하는 것은 죄악 된 행위이지, 본성은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악 된 본성은 학교 교육으로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즉 사람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은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이 죄악 된 본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마음속에 미친 맹수(猛獸)를 하나씩 데리고 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집 안에 우리를 뛰어나온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면, 그 호랑이를 잡아 가두기 전까지는 절대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에 대하여 맹수가 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가 보면, 물론 상습적으로 죄를 지어서 붙들려온 사람들도 있지만, 한순간에 눈이 뒤집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해치거나 살인과 간음을 저질러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것은 바로 이 죄악 된 본성 때문입니다.
죄악 된 본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내가 죽는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이 미친 혈기를 지속적으로 굴복시켜서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길을 들이십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천사보다 더 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기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죄악 된 본성이 죽어질 때에야 원래 천사 같은 그 모습이 되살아납니다.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우리의 구원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한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지옥(地獄)의 고통입니다. 이것은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서 불에 타 죽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또 바다에 침몰한 배(船)에 갇혀서 빠져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왜냐면 이 지옥(地獄)의 고통과 비참함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천국(天國)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아무리 행복해도 천국의 행복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시간이가면 갈수록 더욱더 깊이 깨달아지게 되어 있고, 더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은 후, 지옥(地獄)의 고통에 대하여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죽고 난 후, 삶의 예비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고통과 진짜 축복은 모두 다 죽은 후에 있습니다.
☐ 구원의 과정 ☞이 세상 위의 하나님 나라☜ 우리는 보통 구원이라고 하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왜냐면 천국은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종말적인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천국을 끌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지혜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곳에 미군 부대가 있습니다. 물론 이 미군 부대는 한국에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꼭 미국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즉 그 안에서는 영어를 사용합니다. 식사도 미국식 식사를 합니다. 냉장고나 세탁기 등 모두 미국 제품을 사용합니다. 옷도 미국 스타일로 입습니다. 위치만 우리나라에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미국에서 온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몸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초청☜ 누구든지 이 세상의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청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죄 용서만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가 형기(刑期)를 다 마치고,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죄수복은 벗고, 평상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죄수복만 벗고, 새 옷은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은 그를‘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청받는 것은 복음(福音)을 듣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移民)을 가려고 하면, 그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릅니다. 매일 미국 대사관 앞에는 수천 명씩 줄을 서서 미국행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비자를 받지 못하고, 되돌아갑니다.
구약 시대에는 천국 백성 되는 것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국행 비자를 길에서 발급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길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어도 그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카드 회사에서는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용불량자들의 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리 많이 발급해 주어도 천국에 가는데 무자격자들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천국으로 오는 초청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제자들과 믿는 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그 자리에서 천국 백성이 되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와 거듭남☜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듣는다 하더라도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진심으로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천국 백성이 되려면,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영(靈)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성령님의 깨우침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더욱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회개(悔改)’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께서‘회개해야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설교를 하시면‘아니 장부가 있어야 회계를 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면서‘회개(悔改)’를‘회계(會計)’로 잘못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罪)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자기 생각대로 교만하게 사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이것이 나쁜 줄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죽은 영혼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면 자기가 살아온 교만한 인생에 대하여 깨닫게 되면서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이 멸망할 죄만 쌓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죄 없지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십자가에 죽어야 할 자가 나였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때,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겨 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중생한다.’라고 말합니다.
회개하는 것과 중생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데, 우리는 자신이 중생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단들은 구원받은 시간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구원파’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날 때, 어떤 큰 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두 다 씻음 받았다는 확신이 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만약 사람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달걀에 비유하면,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법적으로‘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을‘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부께서 하시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면‘의롭다 함’을 받으면, 우리는 무엇이 달라질까? 일단 예수 믿는 사람을‘의롭다’고 하는 것은 진짜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마음속에 여전히 죄악 된 본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죄악 된 생활이 다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어떤 사람이 법적으로 중요한 죄를 짓고, 재판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기소(起訴)한 검찰 측에 중요한 과실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법률 적용에 중요한 하자가 발견되면, 그 사람은 무죄(無罪)를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는 있지만,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의롭다’하심은 마치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는 출입증과 같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암행어사는 왕이 준 마패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든지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즉 어느 관공서에든 들어갈 수 있었고, 심지어는 왕궁에도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믿음으로‘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의롭다’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의롭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구원을 이루어 간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어 의로운 생활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동안에 우리나라 기독교는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던 것 같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서 복락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어서도 천국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생활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사는 목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즉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많이 가지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확실하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혹시 나름대로 열심히 믿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는 없을까? 일단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에게 절대로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어떤 사람들이 깊은 산에서 조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한순간이라도 빨리 구조대가 와서 그들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드디어 구조대에서 구조대원 한 사람이 왔습니다. 이 구조대원은 아주 베테랑이어서 절대로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모두 다 구조 받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면 오기는 한 사람이 왔지만, 그는 본부와 무전연락이 되기 때문에 헬기라든지, 다른 구조대원이라든지, 아니면 필요한 의약품이나, 식량을 모두 다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구조대원의 말을 잘 따르고, 그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구조대원이 왔다고 해도 그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다시 그들의 구원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중생한 사람은 거의 확실히 구원받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아직 우리 이 세상에 있는 한 완전히 모든 구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위험은 남아 있고, 악(惡)한 마귀는 할 수 있는 한 택한 자라 하더라도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모두 다 해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구원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죄 용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행(苦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정성은 기특하지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마치 음식 값까지 다 지불된 호텔에서 자기가 음식 값을 따로 내지 않았다고 굶고 있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다 해결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죄책감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죄짓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죄를 다 용서하였기 때문에 죄를 더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인정하지만,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생각한다면, 죄가 다 용서되었다 해서 일부러 죄를 짓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왜냐면 아직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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