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特里는 그 지명대로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행정 지명 중 특별하다는 의미를 가진 ‘특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은 단 두 군데뿐이다. 하나는 행정구역상 수도인 서울특별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곳 특리다. 주산은 왕을 뜻하는 왕산王山(923m)이고 우측은 문자적 힘이 결집된 필봉산筆峰山(848m), 좌측은 왕이 거처하는 궁을 받친다는 망경산望京山이 경호강鏡湖江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린 형국이다.
이곳 터에는 백두대간 기맥 끝자락의 응결된 단전자리로 3개의 혈자리가 있다. 하늘의 별자리와 같아서 자미원紫薇垣 터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혈자리는 명혈明穴. 두 번째 혈자리는 통파혈通派穴이다. 큰 용을 꽈배기처럼 꼬아 두르고 진행하여 합세된 힘은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의미다. 세 번째 자리는 탄파혈灘派穴로, 반딧불이 별이 되는 자리다.
이렇듯 특리가 특별한 마을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모두를 건강하고 활력 넘치게 해주는 좋은 기운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성종 때 서예가 금재 강한姜漢 선생도 특리의 기운에 반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역사를 더듬으면 특리 일대는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과 관련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서기 162년 김수로왕은 첫째 왕자인 거등居登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장대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 방장산方丈山(지리산) 자락에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궁은 태왕궁太王宮으로, 산은 태왕산太王山으로 명명했다. 그로부터 330년이 흐른 뒤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제10대 양왕 讓王(구형왕仇衡王)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긴 후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돌아왔다. 왕은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나라를 선양禪讓한 것이었는데,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산 아래 경좌의 언덕 석릉에서 영면에 들었다. 왕산은 바로 태왕산을 가리킨다. 산 서쪽 기슭에 양왕의 타원형 돌무덤으로 전해지는 구형왕릉이 여기에 있다.
구형왕이 태왕산으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의 이름을 수정궁水晶宮으로 편액하고 수년간 은거하다 붕어했다. 훗날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 동안 시릉侍陵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해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왕의 5대 외손인 신라 30대 문무왕은 제향을 받는 비용으로 왕산 일대 토지를 하사했다고 한다.
현재 왕릉은 국가사적 제214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국내 유일의 피라드형 석릉石陵으로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7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정면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을 둘러 왕릉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로 하단 길이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세로 40cm, 깊이 68cm의 석문石門이 마련돼 있다.
한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의 영토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동으로 황산강이요, 서남으로 창해에 이르고, 서북으로 지리산 끝까지를, 동북으로 가야산을 경계를 두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특리에는 거북이 형상을 한 화강암 바위가 있다. 거대한 거북이가 왕산을 오르다가 가락국이 위치한 동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리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눈 주위의 눈물자국이 선명히 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잠기도록 한다. 태왕산으로 불린 왕산에는 왕등재 등 연관된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예로부터 지리산의 신비한 약초를 찾던 수많은 약초꾼들이 어루만지고 쉬어가기도 했을 이 바위는 이제 동의보감촌을 찾는 탐방객에게 주변의 명산인 왕산과 필봉산의 사계절 변화를 조망하기에 적합한 쉼터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