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홍씨 독립유공자 만당 홍승로 선생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위해 헌신한 풍산홍씨 남원공파의 애국지사 —
Ⅰ. 머리말
한 가문의 역사는 단순히 혈통을 이어온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삶이 모여 가문의 정신과 전통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풍산홍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국난을 당할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만당(晩堂) 홍승로(洪承魯) 선생이 계시다.
선생은 일본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단결을 이끌었으며, 미국 의원단을 대상으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연극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특히 선생이 풍산홍씨 남원공파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문중 족보에 수록된 선대 계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공적을 정리하여 나라 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Ⅱ. 출생과 가계
만당 홍승로 선생은 1895년 6월 14일 충청북도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 오늘날의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풍산홍씨 남원공파의 후손이다.
풍산홍씨 족보에 따르면 선생의 부친은 홍우의(洪祐懿)로 일명 우필(祐苾)이며, 조부는 1823년생 홍병주(洪柄周), 증조부는 홍우모(洪禹謨), 고조부는 홍희종(洪羲鍾)이다.
선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다.
10대조 홍탁(洪𩆸) — 남원부사
9대조 홍주문(洪柱文) — 현감
8대조 홍만기(洪萬紀) — 우부승지
7대조 홍중교(洪重敎)
6대조 홍취보(洪就輔)
5대조 홍필호(洪必浩) — 동지중추부사
고조부 홍희종(洪羲鍾)
증조부 홍우모(洪禹謨)
조부 홍병주(洪柄周)
부친 홍우의(洪祐懿)
독립유공자 홍승로(洪承魯)
선생의 아들은 1942년생 홍좌근(洪佐根)으로, 일명 좌식(佐植)이다.
이러한 계보는 풍산홍씨 남원공파가 조선시대의 관료 가문으로부터 근대의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역사를 보여준다.
Ⅲ. 일본 유학과 민족의식의 형성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겼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유학생과 노동자들도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단결하기 시작하였다.
홍승로 선생은 1910년대 중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1920년 무렵 도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선생은 학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와 고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을 살피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민족적 단결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1917년 1월 도쿄에서 노동동지회(勞動同志會)를 발기하여 활동하였고, 1920년에는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의 회장 겸 총무를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이 단체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학생들을 지원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신장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 지역을 방문하여 노동 현장을 조사하고 조직의 확대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홍승로 선생의 항일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저항을 넘어,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의 권익과 민족적 자존을 지키려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Ⅳ. 영친왕 결혼식 저지 계획과 항일운동
1920년 4월, 대한제국 황실의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족 이방자(李方子)의 결혼이 추진되었다.
당시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이 결혼을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실에 종속시키고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홍승로 선생과 동지들은 이에 저항하기 위하여 결혼식을 저지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관련 독립운동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폭탄을 제조하여 두 차례 성능을 시험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비록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청년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Ⅴ. 미국 의원단을 향한 독립 호소
홍승로 선생의 독립운동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20년 9월 2일 일본 도쿄에서 전개한 독립시위이다.
당시 미국 의원단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릴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운동 관련 깃발, 호소문 등을 준비하고 미국 의원단이 도쿄역에서 제국호텔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독립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위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아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었으며,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주요 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행동은 무력으로 나라를 지배하던 일제에 맞서 한국인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 정치인들에게 알리려는 시도였다.
비록 일본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으나, 나라를 잃은 청년이 국제사회를 향해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Ⅵ. 연극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홍승로 선생의 활동은 정치적 저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선생은 민족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고 교육과 문화를 통해 민족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조선고학생동우회 활동의 하나로 순회연극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6월에는 약 30명 규모의 연극단과 함께 귀국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과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연극은 당시 일반 대중에게 사회의 현실을 알리고 새로운 사상을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문화적 수단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연극 활동을 통해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에도 힘썼다.
이는 독립운동이 무장투쟁이나 외교활동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 민족계몽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Ⅶ. 동포 보호활동과 광복 이후의 행적
홍승로 선생은 일본에서 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박열(朴烈) 등이 참여한 혈권단(血卷團) 활동에 관여하였으며, 1923년에는 일본 지역 조선인들의 단결과 만주지역 동포 구제사업에도 힘썼다.
특히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동포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구제활동에 참여하였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언비어와 학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포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선생은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감찰위원장과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정신을 광복 이후에도 이어가고자 했던 선생의 행적을 보여준다.
Ⅷ. 대한민국 정부의 서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홍승로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공원에는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26년 10월 26일에는 광복회 충북지부 북부연합지회 주최로 독립유공자 추모제례가 봉행될 예정이다.
이번 제례에는 홍승로 선생의 아들 홍좌근 씨가 아헌관으로 참여하도록 예정되어 있어, 선열의 뜻을 후손들이 이어가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공적을 추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분들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의 자주독립 정신과 민족의 존엄을 오늘날의 후손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계승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Ⅸ. 풍산홍씨 문중에서의 역사적 의의
풍산홍씨는 오랜 세월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역사를 이어온 가문이다.
조선시대 남원부사를 지낸 홍탁을 비롯하여 현감 홍주문, 우부승지 홍만기, 동지중추부사 홍필호 등으로 이어지는 선대의 계보는 남원공파의 역사적 전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홍승로 선생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위해 활동하였다.
시대는 달랐지만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선대의 역사와 선생의 독립운동은 함께 기억할 가치가 있다.
특히 선생의 본관이 일부 인물자료에서 남양홍씨로 잘못 기재되어 있었던 사실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확한 계보 연구와 기록 정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풍산홍씨 족보에 수록된 선대 기록을 근거로 선생의 본관을 풍산홍씨로 바로잡은 것은 가문의 역사를 정확하게 전승하기 위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앞으로 국가보훈부, 독립기념관 등 관련 기관의 인물자료에도 문중의 계보 연구 결과가 충실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Ⅹ. 맺음말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노력으로 보존되고, 후손들의 관심과 실천을 통해 살아 있는 교훈이 된다.
만당 홍승로 선생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조선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끌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연극을 통한 민족계몽운동과 동포 보호활동에도 앞장섰다.
선생의 생애는 나라 사랑이 말이나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있음을 일깨워 준다.
오늘날 우리는 선생께서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되새기며, 그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선조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가문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며,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것은 가문의 미래를 밝히는 일이다.
풍산홍씨 남원공파의 후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인 만당 홍승로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이 우리 가문의 역사 속에 길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아울러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 앞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뜻을 올린다.
2026년 10월19일
풍산홍씨대종회 총무이사
풍산홍씨 남원공파 정익공문중 회장
洪晩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