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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의 벤치에서
김 선 구
시험기간이어서 그런지 학교 안이 조용하다. 평소 같으면 공놀이하는 학생들의 외침소리, 행사 참여를 유도하는 확성기소리, 이륜차들이 질주하는 소리 등으로 시장 같은 느낌을 같게 했다. 오늘 따라 교정이 본래의 모습을 찾은 것 같다. 시험이란 처방전이 교정의 잡음을 치료하는 영약인 모양이다.
오후의 가을 햇살이 밝게 교정을 내리 비치고 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시험공부에 열정을 쏟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교정이 조용하고보니 널려있는 벤치들이 찾아주는 이 없어 쓸쓸한 모양이다. 시험이 시작되기 까지는 아직 10여분 여유가 있다. 양지 바른 곳을 택하여 빈 의자에 앉으니 가을의 정령(精靈)들이 친구처럼 반긴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지나가자 우수수 낙엽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나무들은 어떤 기색이나 동요 없이 무심히 제자리만을 지키고 있다.
봄철에 가지 끝에서 돋아나와 한 여름 푸른 기세를 뽐내다가 이제 기가 겪인 듯 속절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들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다. 그러나 나무들은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에도 별 감각이 없는지 무심하기만 하다. 마치 과년한 딸의 출가를 지켜보며 미련을 지우려는 무정한 모정 같아 보이기도 하고, 기도에 충실한 목자의 초탈(超脫)한 모습 같기도 하다. 나무들은 그저 겨울을 맞이할 채비에만 여념이 없는 가 본다.
계절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햇살이 뜨겁다고 그늘을 찾던 때가 엊그제였던 것 같은 데 이제는 햇볕이 그리워진다. 바람살이 싸늘한 시선으로 야유하며 지나가니 따스한 외투가 생각난다. 요새 들어 사람들은 가을이 짧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무들은 변함없이 긴 가을을 간직하고 제 할 일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아직도 나무들은 남은 잎들을 하나 둘씩 떨어뜨리며 가을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목(裸木)이 되어 앙상한 나무 가지사이로 찬바람이 거친 소리를 지를 때까지 가을의 정취를 이어 갈 것이다.
떨어진 낙엽들은 제 각각 바람결에 나 뒹굴며 제 멋을 부리고 있다. 공주처럼 화사한 모습으로 단장하기도 하고, 수줍은 소녀처럼 웃음 지으며 돌아서기도 한다. 또한 수심 띤 여인처럼 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삶에 지친 노점상 아주머니 찌든 얼굴모습을 내보이기도 하고,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주름진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바람에 날리고 굴러가는 낙엽들의 모습에서 숫한 삶의 여정을 그려보게 한다.
땅위를 뒹굴고 있는 낙엽들!
그것들이 거쳐 온 과정만을 들여다본다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다. 바람에 흩날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나그네신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수북이 쌓인 낙엽더미를 보면 그 속에 폭 파 묻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낙엽 속에 내 몸을 눕힌다면 아늑하고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 줄 것도 같고, 인생살이에 겪었던 온갖 얘기들을 오순도순 들려 줄 것도 같다.
내 침실을 낙엽으로 장식해 보면 어떨까!. 단풍나무 잎을 모아 베개를 만들고, 은행나무 잎을 모아 폭신한 보료를 만들고,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으로는 이불을 만들면 포근한 잠자리 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여러 가지 단풍을 긁어모아 방안을 장식하면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겠는가! 내가 모든 시름을 털고 그 속에서 머무를 때면 시간까지도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시공(時空)을 넘어선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일 테니 이 때면 나의 삶의 공간이 더없이 풍족해지지 않겠는가!
총총히 모여 있는 낙엽의 무리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시험공부에 열심인 학생들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붉은 색의 단풍나무 잎이 어디서나 돋보인다. 쾌활하고 머리가 총명한 학생처럼 보인다. 노란 은행나무 잎에서는 유쾌하고 따스한 정감이 느껴진다. 유순하면서도 제잘 거리기 좋아하는 학생들처럼 보인다. 플라타너스 잎의 넓적하고 헤픈 모습은 심덕이 좋은 학생처럼 보인다. 낙엽들이 저마다 특색을 갖고 손짓하는 것 같다.
단풍나무 낙엽에는 A학점을, 은행나무 낙엽에는 B학점을 주고 싶다. 그리고 플라타너스 낙엽에는 D학점, 그 외의 낙엽들은 C학점을 매겨본다. 단풍잎은 당연하다는 듯 오만을 떨 것이고, B학점을 받은 은행잎이 분명히 불평을 해 올 것이다. D학점의 플라타너스 잎은 F학점을 면한 것만도 감사하다고 넉살을 떨 것 같다. C학점의 낙엽들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가장 다루기 쉬운 학생들이 C학점의 학생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후한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그렇지만 상대평가라는 규정이 제한된 학생에게만 A학점을 부여해야 하니 안타깝다. 성적처리 할 때가 제일 고심되는 순간이다. A학점과 B학점 사이가 사소한 차이로 명암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래서 B학점 학생들로부터 의의신청을 가장 많이 받게 된다. 출석 100%에 레포트도 열심히 섰고 시험도 잘 치렀는데 B학점이 웬 말인가?하고. 학교의 규정을 언급하며 불가피성을 설명해야하는 내 모습이 궁색하다. 차라리 과목 이수자들에게 공평하게 학점을 처리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시험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우열 평가가 없다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좌절의 쓰라림이 없다면 성공의 즐거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열의 잣대가 있음으로 성취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경쟁하며 사는 존재이다. 봄철에 삭 틔우고 여름에 성장해야 가을에 수확이 있는 것처럼 인간도 청년 시절에 경쟁하고 나서야 장년에 성취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여름이 한창인 저 학생들도 내 나이가 되어야 가을의 정취를 느끼겠지. 저들이 낙엽을 노래하게 될 때 나는 또 무었을 하게 될까?
벤치에 앉아 낙엽이 지는 모습을 감상하노라니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이제 학생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들어갈 시간이다. 부질없는 생각들이 낙엽 따라 흩날린다. 답안 작성에 여념이 없을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도 미래의 단풍이 될 존재들임이 그려진다.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싹이 돋아 오르고 또 낙엽이 되듯이 우리의 삶도 같은 궤도를 돌고 있지 않은가. 미래의 낙엽들! 그들의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 내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 보이는 것 같다. 낙엽이 깔린 보도 위로 내딛는 발걸음이 한결 조심스럽다.
장평을 지나며
김 선 구
고속도로가 계속 정체되니 우리가 탄 버스가 가다가 서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갈 때는 시원하게 잘도 질주하더니 돌아오는 길은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 도로가 몸살을 앓는 것 같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공휴일을 맞아 우리 산악회에서도 단풍놀이에 나섰다. 강원도 오대산 소재 월정사와 상원사를 거쳐 적멸보궁까지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차창너머로 평창IC라는 교통표시판이 눈에 들러온다. 과거에는 장평IC라고 했던 곳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장평이란 명칭을 퇴출시키고 평창으로 바뀌었나본다. 장평(長坪)이란 이름은 나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대관령에서 생활하던 시절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면 반드시 장평정류장에서 쉬어 갔다. 장평은 평창군 용평면의 한 시골마을이었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장평서 북쪽으로 가면 메밀꽃의 고향 봉평이 있고, 남쪽으로 가면 오일장이 유명한 대화로 이어졌다.
옛날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봉평과 대화사람들이 서로 왕래가 잦았던 모양이다. 봉평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봉평으로 장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장평을 거쳐 갔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구수한 얘기들이 이어졌을 것 같다. 특히 메밀꽃이 필 무렵 대화 오일장을 보기위하여 나귀에 짐을 싣고 달빛 속에 밤길을 가며 나누던 나그네들의 얘기가 이효석의 작품 속에 펼쳐지고 있다. 가슴 깊이 간직 했던 뿌듯한 얘기를 틈만 나면 다시 꺼내어 되풀이 하는 허생원의 희열 찬 모습,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얘기를 참고 들어야하는 조선달의 떨떠름한 표정, 어른들의 얘기를 흘려 넘기며 무심히 따라가는 동이 소년의 숨겨진 운명이 오늘도 그 길을 수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대관령 소재 K시험장으로 근무명령을 받았던 시기가 근 사십년이 되었다. 그 시절 입덧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울로 가는 길에 장평을 거쳐 갔다. 장평터미널에 버스가 서면 버스에서 내려 잠시 휴식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휴식하면서 우리도 훗날 허생원과 조선달의 행적을 따라 대화의 오일장으로 가 보자고 했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봉평에도 대화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때 배속에 있던 애가 이제 애들 아빠가 되도록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런 여유조차 없이 지내 왔다.
이번 산행에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을 둘러 볼 것이라는 얘기에 선 듯 따라 나섰다. 40년 전 아내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가 본다는 기대가 앞섰다. 그 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찾아가기도 힘들었고,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나들이 나온 사람이라곤 없었다. 계곡 따라 이어진 좁은 길을 둘이서 걸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봄이 오는 계절이라 파릇파릇 나무 끝이 푸르렀고 맑은 계곡물 소리가 정겨웠다. 문수보살이 동자로 변신하여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는 세조임금의 등을 밀어 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었다. 그 곳이 어디쯤인지? 깊고 넓은 계곡물이 보이면 혹시 저곳인가 하고 막연히 저울질 해보며 걸었다.
이번에 가서 보니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거리가 무려 9km나 되었다. 걸어서 주파하는 데는 서너 시간 걸린다고 하니 다소 먼 길이다. 그런데도 그 때에는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으니 천리 길도 한 걸음처럼 가벼웠던 모양이다. 우리가 걸었던 길이 이제는 넓은 차도로 변하였고 계곡건너 맞은편에 있는 오솔길을 정비하여 선재길이라 부르고 있었다. 불교화엄경에 선재동자가 지혜를 찾아 구도(求道) 길을 걷고 있다. 선재동자가 갔던 길을 재현해 놓았으니 찾아오는 행락객들도 구도의 길을 걸어 보라는 의미일 것 같았다. 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도 구도행각일 터이니 행락객들 모두가 선재동자모습들이 아니겠는가!
월정사 입구에는 주차권을 사려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도 선재길에도 행락객들로 북적 거렸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직진하여 상원사부터 찾았다. 여기에서 일행을 두 팀으로 나누어 일부는 선재길을 걷도록 하고, 우리는 오대산 적멸보궁을 가보기로 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불자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과거 상원사까지 왔다가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다음기회로 미루었던 것이 40년 세월이 흘렀다.
상원사 경내에 들어서니 몰라보게 변해버린 사찰모습에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과거에는 고색이 창연한 법당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 채 건물들이 화려하게 단청한 모습으로 산재해 있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그 때 보았던 법당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눔 해 볼 수 없었다. 문수동자와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는 전각에는 기도하는 불자들의 염송소리로 가득했다. 절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벗어 걸었다는 관대걸이가 눈길을 끌었다. 이제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전설이 주체가 되어 내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상원사를 다시 찾은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다. 상원사를 지켜 낸 한암 선사의 일화 때문이다. 6.25때 상원사가 작전 지역으로 정해져 불태워지게 되었다. 이때 한암 선사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고 법상에 앉아 함께 타 죽기를 자원하자 작전 명령을 받은 장교가 문짝만 뜯어내 불태워 연기를 피우고 철수했다. 생사를 초월한 스님의 행보와 지혜로운 장교의 판단으로 상원사가 지켜졌다. 뿐만 아니라 상원사에 소장된 동종(銅鐘)과 문수동자상 그리고 상원사중창선언문 등 국보급 보물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서울 근교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한암 스님은 50세 되던 해에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오대산에 들어가 상원사에 칩거 하였다. 27년간을 무상무념 속에 영원을 구가하던 스님은 어느 날 아침 가사와 장삼을 단정히 차려입고 법상에 앉아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음을 맞이함)의 경지를 우리들에게 보여 줄 심산이었을까? 어느 정훈 장교가 스님의 열반(涅槃)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알렸고, 그 모습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대면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청산의 학이 되어 오대산 숲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거동 길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오르는 계단들은 대패질 한 듯 잘 다듬어진 현무암으로 깔아 놓았고, 길가에도 현무암석등이 세워져서 밤길까지 밝게 비춰줄 모양이었다. 산길은 산길다워야 하는데 너무 잘 정비해 놓은 모습에 좀 거부감마저 느껴졌다. 옛날 한암 스님도 이 길을 따라 매일 적멸보궁을 드나들었다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드디어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잘 만들어진 길이었지만 적멸궁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상원사에서 불과 2km정도에 불과했지만 등고선이 높아서 힘들게 올라왔다. 산이 높아야 신비감이 있고, 또 힘들여 찾아와야 정성이 더 하는 법이다. 그래서 자장스님은 이 높은 곳에 터를 잡은 것일까?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돌아와서 세웠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그래서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로 법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성지이다.
적멸보궁이 서있는 자리는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이었다. 승천하는 용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천하 명당이라 한다. 풍수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풍광이 수려한 장소로 보였다. 전각 뒤편에 5층 마애불탑을 새긴 조그만 돌비석이 서있었다.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기고 서 있는 폼이 마치 충직한 수문장처럼 보였다. 비석 주변에 진신사리가 묻혀있다고 하니 이 비석이 표지석(標識石)인 셈이다. 표지석을 향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순례 길을 가듯 적멸보궁을 찾아 온 행보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 텐데. 무엇을 구하여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을까? 어쨌거나 나는 40년 밀렸던 숙제를 해결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니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도로는 다시 정체가 풀려 통행이 원할 해졌다. 원주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선 버스가 힘차게 밤길을 달린다. 하루 동안 피로가 슬며시 몰려온다. 40년 만에 다시 찾아 걸어본 여로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러나 아직도 여로가 끝나지 않았다. 장평을 지나 봉평과 대화로 가야할 길이 남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독일에서 맥주문화 체험
김 선 구
독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일이다. 한 대학의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정하자 매 주마다 수건 셋을 건네주었다. 두 개는 얼굴과 발을 닦는데 각각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그릇을 닦는데 사용토록 하였다. 식기든 찻잔이든 세척하고 나면 바로 물기를 닦아내야했다. 물속에 석회성분이 많아서 그릇에 눌러 붙기 때문이다. 물을 그릇에 떠서 놓아두면 그릇바닥이 하얀 석회층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수돗물을 그냥 마실 수 없었다. 대신 맥주나 미네랄워터를 사서 마셨다.
식사 때에는 음료수로 반드시 맥주나 포도주가 등장하였다. 포도주는 라인강을 끼고 있는 프랑스 접경 지방에서 주로 생산 하였고, 맥주는 뮌헨이 주도인 바이에른 지방에서 많이 생산하였다. 독일에서 생산하는 맥주는 4천 종류나 된다고 했다. 운송수단이 없던 시절에는 마을마다 자체적으로 맥주를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역마다 맥주제조법이 다르고 맛도 천차만별이 되었다. 이처럼 주어진 여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생활문화가 독일을 맥주의 나라로 지목받게 만들었다.
독일의 맥주역사는 9세기 경 맥주의 쓴맛을 내는 원료인 호프가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맥주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널리 보급되자 악덕 양조업자들이 향신료나 과일 등을 첨가하거나 야생의 허브나 독성이 있는 약초를 사용하다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맥주 순수령‘을 내려 맥주에는 호프와 보리, 물 이외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때부터 독일맥주가 제품의 순수성으로 유명하여졌다. 국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방부제나 화학처리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독일맥주는 장기간 보관이 어렵다. 하지만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음료가 되었다.
독일인들의 맥주사랑은 사육제나 부활절 등 종교행사에서도 나타났다. 2월 둘째 주가 되면 사육제가 열렸다. 라인강 주변의 지방에서는 카니발(Kannibale)이라 하고 뮌헨에서는 파싱(Fasching)이라 불렀다. 카니발은 가톨릭에서 하층집단인 농민들에게 일정한 자유를 허락해준데서 생겼다. ‘코뚜레를 한 황소를 억압하기만 하면 주인에게 덤벼들 수도 있으므로 가끔 고삐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이 때 바보가 왕이 되어 보기도 하고, 왕이 바보가 되어보기도 하며, 농부가 군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여자가 군주가 되어보는 등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경험케 했다. 가치가 전도된 생활을 경험해 본 다음 더욱 경건해 지라는 뜻이었다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본래의 취지가 변형되었다. 부활절을 40일 앞두고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대중들이 방종한 행동을 즐기는 행사가 되어버렸다. 축제기간 중에 사람들은 가면을 쓰거나 얼굴을 분장하여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즐겼다. 이 때에 사람들은 맥주파티와 음악을 즐기며 이성 간에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광란의 일주일을 보낸다고 해야 할지. 12월이면 아이가 많이 태어나는데 이들을 ‘카니발 베이비‘라 불렀다. 축제기간 중 있었던 불륜은 관대하게 용납해준다니 이해할 수 없어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축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죄를 참회하고 육식을 금하며 고난의 사순절을 시작한다고 했다. 성속 간에 절묘한 조화이다. 그 역할을 맥주가 하는 셈이었다.
남부독일 바이에른주의 주립축산시험장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주말이면 뮌헨시내에 나가서 이국의 풍물과 그들 삶의 모습을 접해보는 일이 많았다. 뮌헨시내에는 맥주집들이 많았다. 그 중 내가 들려본 곳은 ‘호프 브로이하우스’라는 유명한 맥주집이다. 원래는 왕실소속의 양조장이었다. 왕실 소유 경영이 민간 선술집과 양조장 운영에 피해를 준다고 불평하자 민영화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1920년 히틀러가 나치전신인 노동당조직을 결성할 때 첫모임을 가졌고, 이듬해 군중연설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그 후 뮌헨의 관광명소 1호로 주목받고 있었다.
이곳에는 600석 규모의 좌석을 갖추고 있었고, 홀 전체가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구석진 곳에 빈자리를 찾아 앉아 맥주 한잔을 시켰더니 1ℓ짜리 맥주를 가져왔다. 가장 작은 잔이 1ℓ이고 취향에 따라 크기가 다양했다. 항아리만한 맥주잔을 앞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술꾼들도 보였다. 맥주 컵을 떨어뜨려서 깨지는 소리, 술에 취하여 탁자위에 엎드려 잠자는 모습, 심지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여 좌석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 등 추태를 연출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취객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란은 피우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맥주 맛에 기분이 홀가분해진 사람이 탁자위에 올라서더니 굵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홀 안의 모든 사람이 따라 불렀다. 어수선 했던 분위기가 정돈되며 한마음이 되는 모습을 보였다. 독일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단결하는 힘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양해를 구하고는 빈자리에 앉았다. 남녀 구분 없이 곧 친해지고 맥주잔을 부딪쳤다. 맥주야말로 이들에게 삶의 활력소란 생각이 들었다.
뮌헨에서는 매년 9월말 셋째 주 토요일에서 10월초 첫째 일요일까지 2주간은 10월 축제가 열리는 것이 정례화 되어있다.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라는 세계 제1의 맥주축제이다. 1810년 10월 바이에른 공국의 루드비히 왕자와 작센의 테레지에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경마대회가 열렸었고, 이것이 10월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한다. 그때 경마대회가 열렸던 잔디밭이 테레지엔비제 공원이며, 매년 맥주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뮌헨은 남부 독일의 중심 도시이다. 12세기 이래 가장 화려한 궁중 문화를 꽃피웠던 바이에른공국의 수도였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문화유산과 미술관 박물관 등을 갖고 있는 예술의 도시이다. 역사를 자랑하는 6개의 맥주회사, 호프브로이(Hofbräu), 뢰벤브로이(Löwenbräu), 파울라너(Paulaner), 아우구스티너(Augustiner), 슈파텐(Spaten), 하커 프쇼르(Hacker Pschorr)가 소재하는 곳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1883년부터 맥주축제는 뮌헨에 있는 6개의 맥주회사들이 주도하에 이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맥주 축제는 시작하기에 앞서 축제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벌리는 거리의 퍼레이드가 최고의 볼거리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뮌헨시장이 탄 마차가, 그 뒤에는 뮌헨의 상징색인 흑색과 황색의 승려 복을 입은 여성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 뒤로 맥주 통을 산처럼 쌓아올린 마차와 민속 의상을 입은 각 지역 사람들이 그룹을 이루어 따라갔다.
거리의 퍼레이드에는 마차를 끌고 있는 말과 짐수레부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육중한 말들이 끄는 수레에 크고 작은 맥주 통을 실어 날랐다. 싣고 있는 맥주의 무게에 따라 6두필, 4두필, 2두필 마차가 동원되었다. 마차에는 예쁘게 단장한 아가씨가 앉아서 밝은 미소와 함께 관중들에게 맥주를 한 컵 씩 제공하기도 하였다. 마차와 마차 사이에는 전통의상을 한 젊은 남녀들이 춤을 추며 행진하였다. 그들이 춤추는 모습은 손잡고 큰 원을 그리기도 하고, 흩어져서 쌍쌍이 춤을 추기도 하며 각종 묘기를 보였다. 또한 남자들은 짧은 바지와 사냥꾼 모자를 쓴 바이에른 전통복장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행진하였다. 온 도시가 축제의 물결 속에 잠겨있는 듯 했다.
맥주 축제는 뮌헨 시장이 개회를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정오가 되면 축제장 한 텐트에서 그 해에 새로 제조된 맥주를 높이 쳐들고 ‘이제 술통을 땄어요!(O’zapft is!’)라고 외친다. 그러면 그곳 바바리아상(바이에른을 상징하는 여신) 앞에서 열 두발의 축포가 울리고 맥주판매를 개시했다.
축제기간 중 테레지엔비제 광장에는 수십 개의 텐트가 쳐졌다. 그 중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텐트들도 여럿이었다. 실내에서는 밴드가 연주되고 독일 민속음악이 소개되었다. 노래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어울려 장터처럼 떠들썩하였다. 맥주잔을 들고 힘차게 건배하기도 하고 유쾌하게 합창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독일 사람들은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문학과 철학과 인생을 논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축제기간 동안 호프브로이 등 뮌헨지역 여섯 개 맥주회사들이 술을 공급한다고 했다. 맥주는 특별히 빚은 생맥주들로 맛과 신선도가 탁월하다. 여기에서 전통의상을 한 여인들이 술을 날랐다. 1000cc 맥주잔을 무려 10개를 한꺼번에 들어 나르는 묘기도 보였다. 바이에른 지방 여인들의 전통의상은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다. 밝은 색깔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앞치마를 묶는 리본의 위치로 자신의 신분을 표시한다고 한다. 리본이 오른 쪽이면 혼인 했거나 약혼 중, 왼쪽이면 싱글, 뒤쪽이면 사별했음을 나타낸다고 하나 그 이면에 숨은 뜻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는 처세인 반면 한편에서는 용기 있는 남자는 내게 접근 해 보라는 신호였는지 모른다.
옥토버페스트는 유럽에서 열리는 가을 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축제로 발전하였다. 독일인은 물론 이 축제를 보려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어느 해 뮌헨맥주축제장을 찾은 인원은 690만 명, 이 때 소비된 맥주는 750만 리터라고 하니 500cc 맥주잔으로 치면 1,500만 잔이 소비된 셈이다. 부수적으로 쇠고기 118마리 분, 송아지고기 53마리 분, 닭고기 60만 마리 분이 소비되었고, 우리 돈으로 일천 칠백억 원의 축제수익을 올렸다 한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맥주를 상업화해서 얻어 들인 결과가 아닐 것이다. 독일의 열악한 음료수사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맥주를 제조하고, 맥주의 품질을 지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결과일 것이다. ‘맥주 순수령’과 같은 지도자의 과단성과 그것을 잘 따르고 지켜낸 맥주회사들이 독일 맥주를 명품으로 만들어 내었다. 여기에 맥주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어우러져서 옥토버페스트라는 맥주문화를 키워내었다. 결국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일궈낸 결실이라 생각되었다.
내가 뮌헨 맥주축제를 경험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 지금도 그때의 충격과 감동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의 본 취지나 성격 등 전통은 변함없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한 번 더 뮌헨맥주축제를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근래에 우리나라 남해에 독일마을에서 맥주축제를 한다고 하여 은근히 호기심이 간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독일 맥주축제문화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한편 무늬만 독일 맥주축제이고 분위기가 없다면 실망이 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요새 우리나라의 여러 축제장에 가보면 상업성에만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방자치제의 확대에 따라 전통이 없는 문화축제들이 난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서를 아우를 수 있는 축제가 무엇일가? 우리에게도 세계에 내세울만한 전통 있는 문화축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앞날에 기대를 가져본다.
첫댓글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