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집
-.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1]
방생법회는 바로 생명해방 법회입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생명이 아닌가?
분명히 우리 마음이 생명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생각하듯이 우리 마음만 생명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동물도 똑같이 생명입니다.
또한 식물도 똑같은 생명입니다.
그 외에 무생물도 역시 생명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상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만 생명이 있고 다른 것은 없다, 이러는 것이지
생명의 본 모습, 생명의 실상을 볼 수 있는 맑은 안목에서는
우리 사람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다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우주의 인과의 법칙 따라서 무슨 상(모양)이 생기면
즉 사람 몸 같은 모양, 나무 같은 모양, 해 같은 모양, 달 같은 모양,
그런 모양이 생기면 그 모양만 실상 실제인 것이고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 그러면 남자같이 생기고, 또는 여자같이 생기고,
잘나고 못나고 하는 그런 현상적인 상만 사실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지혜로 볼 때는 사실 그런 상이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상은 본래로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 불교 말씀으로 하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서 망상 번뇌로 해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참말로 성자의 청정한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사람이라는 상(相), 남자라는 상, 여자라는 상, 또는 나무라는 상,
현상적인 어떠한 것이나 사실 이것은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고유한 것을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대체로 알으시는 색즉공(色卽空) 아니겠습니까?
색즉공이라 하는 우리 불교의 하나의 대강령(大綱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그냥 그렁저렁한 현상 지혜가 아니라
실상지혜(實相智慧)라, 실상 지혜는 바로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반야 지혜가 부처님 지혜인 것이고 반야 지혜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반야지혜로 보지 못하고서 상대 유한적인 인간의 업장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런 업장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생명은 그 업장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생명해방(生命解放)》
불자님들 우리는 이와 같이
방생 불사를 한다, 방생 법회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꾸라지 몇 마리, 잉어 몇 마리 해방하는 것이 불사다.
이렇게만 생각을 말으십시오.
그러한 어류들을 방생하는 이것은 하나의 방편적인 인연에 불과한 것이고,
물론 어류도 방생하기는 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해방(生命解放) 생명 존중의 법회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성자 아닌 분들은 모두가 다 지금 구속되어 있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이 우리에 갇힌 그런 짐승같이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갇혀 있습니다.
갇혀 있는 그 사실마저 모르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탐욕심의 노예가 되고 분노하는 그 마음의 노예가 되고
또 어리석어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바로 못 봅니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미운 것도 없고 또는 사랑할 것도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바로 못 보고서 좋다, 궂다, 시비(是非)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그러면 어떻게 생겼는가?
이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자취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자취가 없고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다른 동물의 생명도 자취가 없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그런 생명도 자취가 없습니다.
나무 같은 상, 풀 같은 상만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러한 나무나 풀도 역시 생명 자체는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나 해나 별이나 이러한 것도 역시
생명의 본모습은 자취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취가 없는 것은
사실 우리 인간적인 관념으로 해서는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물질로 해서는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 생명 자체는 우리 인간의 몸속의 신장에나
또는 뇌 속에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 생명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나 내(川)나 물이나 흙이나 모두가 다
생명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생명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 그 생명은
바로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무량무변하게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사실 생명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모양이 없는 물질이 아닌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박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똑같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러한 본 생명의 실상, 본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본 성질을 모르기 때문에 내 생명 다르고 네 생명 다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업을 짓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러기에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내가 없다는 소식을 모르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보리(菩提)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모양이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소중한 내 몸뚱이가
이와 같이 존재하는데 왜 나보고 없다고 하는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품 같은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림자가 있지가 않듯이 잠시간 그림자같이 모양을 낸 것이 이 몸뚱이입니다.
내 몸뿐만 아니라 삼천 대천 세계, 두두물물이 모두가 다
그림자같이 또는 물속에 비친 달 같이
그런 가짜의 상만 지금 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강경(金剛經)이나 다른 경전에도
우리 범부는 상에 걸려서 상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성자는 모든 상, 이것은 그림자 같은 상이기 때문에
본래로 없고 생명만 존재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네 생명, 내 생명 둘이 아니고 나무나 또는 다른 식물이나 자연계나
모두가 다 공기나 물이나 같은 생명입니다.
자연계나 모두가 다 공기나 물이나 같은 생명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니까
나무도 함부로 하고 풀도 함부로 하고 흙도 함부로 하고 토양도 오염시키고
물도 오염시키고 공기도 오염시킵니다.
그러나 생명의 실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도 나와 둘이 아니고 또는 흙도 나와 둘이 아니고
따라서 물도 오염시킬 수가 없고
그 토양도 우리가 함부로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공기도 또한 생명입니다.
따라서 공기도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우선은 인간존재,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나라고 우리가 고집하는
인간존재의 그러한 구속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것이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이 모양이 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근본 생명의 성품을 보지 못하니까
이 모양 이것이 내 것이다 이런단 말입니다.
모양을 제 아무리 살찌게 하고 모양을 잘 먹이고 옷을 잘 입히고
팔찌를 팔에다가 순금덩이로 하고 귀걸이를 하고 뭣을 하고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모양 그것은 더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부처님 믿는 분들은 이것은 우리 생명을 해방시키는 작업,
해방시키는 공부가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공부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삼악도에 떨어진 중생들은
자기 생명을 해방시킬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과거 전생에 다섯 가지 계행 정도는 지켜서
우리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의식 활동을 하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 판단도 할 줄 알고 스스로 반성을 할 줄 압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나 인간 이상의 천상이나
그런 생명의 존재만이 생명을 해방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무수 만생 동안 돌고 돌다가, 지옥으로, 아귀로, 축생으로 돌고 돌다가
어쩌다가 다행히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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