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듯이”: 이지끼을 님,
바람이 불어야 풍차가 돕니까, 풍차가 돌아야 바람이 붑니까?
四季 朴埰同 (2026.02.24.23:05)
이지끼을 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어서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서 반가워야 할 텐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2020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로 씨름하시는 걸 보니, 반가운 마음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는 말은 ‘예정된 나무를 향해 새 생명(영생)의 씨인 믿음의 씨를 품고 가시 채를 휘두르시며 불어오시는 성령께서 예정된 나무를 꺾어 믿음의 씨를 심으시면, 다시 태어난 사람, 중생자는 회심(믿음+회개)한다.’는 말입니다.
이지끼을 님, 이지끼을 님이 위 본문에서 인용하신 {개역 성경} 요한일서 5장 1절 상반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현재 시제) 자마다 하나님께 난(완료 시제) 자니,”는 {헬라어 원어 성경} 시제 의미를 잘 드러낸 번역입니다. 그러나 {NIV} 요한일서 5장 1절 상반절 “Everyon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은 {헬라어 원어 성경} 시제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 번역입니다. 저는 성경 원어를 알지 못해, 다음은 구글 제미나이에게 질문해 받은 답변입니다.
★ πιστεύων (pisteuōn/believes): 현재 분사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분사는 ‘지속되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지금 계속해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 γεγέννηται (gegennētai/is born): 완료 수동태입니다. 헬라어 완료형은 ‘과거에 사건이 이미 종결됐고 그 결과가 지금도 유지됨’을 뜻합니다.
이같이 요한일서 5장 1절 상반절 “게겐네타이(완료 수동태)”는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낳아 놓으셨음을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새 생명(영생)의 씨인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자에게 불어오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해 ‘중생의 선행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날씨)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불어옵니다. 그러므로 나무(인간)가 흔들려 소리를 냈다고 해서 “나무가 소리를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구름에 달 가듯이”와 같습니다.
기독교 최초 총회, 사도행전에 적힌 예루살렘 총회는 바리새파(할례파) 행함 구원론을 단죄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최초 총회를 잇는 도르트 총회는 “믿음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 행함 구원론을 단죄했습니다.
이지끼을 님, 풍차(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 즉 시체)가 열심히 날개를 돌려야(믿음→세례) 바람(중생)을 일으킵니까?
멈춘 시계가 있습니다. 멈춘 시계를 두고 우리는 “시계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시계가 시곗바늘을 열심히 돌려 태엽을 감는다.’가 바릅니까, ‘사람(하나님)이 태엽을 감아야 죽은 시곗바늘이 돈다.’가 바릅니까?
해가 떠오른다고 해서 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는 참 아름다운 시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현상만을 보는 “구름에 달 가듯이”가 알미니안 신학이라면, 알미니안 신학을 도르트 총회에서 단죄한 개혁 신학은 현상에 숨은 본질, “구름에 달 가듯이”에 숨은 이면을 보는 신학입니다. 알미니안 신학은 이지끼을 님과 똑같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 ‘결과를 원인’으로 말하는 신학이라면, 개혁 신학은 ‘결과에 숨은 원인’을 보는 신학입니다. 감히 이지끼을 님 홀로 넘볼 수 없는 정밀한 신학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입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정지해 있는 풍차 날개를 이지끼을 님 힘으로 억지로 돌려 소경에게 “자, 보십시오. 이제 바람이 붑니다! 아니, 풍차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이제 바람이 붑니다!”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인공적인 소음일 뿐입니다. 성령의 생명력이 낳은 소리, 예정된 나무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아닙니다.
소경이 이식수술로 눈을 뜨는 것은, 소경의 노력이 아니라, 의사 손길에 달려 있습니다. 이같이 영적 소경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중생이라는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 대권 사역의 결과입니다.
“믿음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 구원론을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며 “다른 복음”으로 단죄한 개혁 신학, 개혁 신학의 {영적 생물학}은 ‘시체(죄인)가 스스로 심장을 뛰게 해(믿음) 의사(하나님)를 부를 수 없다.’입니다. 이토록 자명한 진리를 말하는 신학입니다.
{무물카페}에서 이지끼을 님을 염려하신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지끼을 님에게 “역시나 본인 해석만 전적으로 옳고 수많은 주석이나 신학책 해석을 무시하고 저나 다른 회원분들 의견을 완전히 배제하실 것 같아서 염려됩니다.”는 댓글을 쓰셨던 ‘엔드리케리’ 님이십니다. 또한 {개혁신앙 푸르내}에서는 저만이 아닌, ‘TR-RE’ 님도 이지끼을 님을 염려하셨습니다. 이지끼을 님을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여기시기에 하신 염려들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주님 안에서 한 형제들 이 염려를 외면하시렵니까?
이지끼을 님, 눈도 뜨지 않은 소경에게 “당신이 지팡이를 잘 휘두르면(믿음-세례) 눈이 떠질 것(중생)이다.” 말하는 어리석음을 언제 멈추시렵니까?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행함 구원론의 알미니안 신학과 함께해 오직 하나님만의 절대 대권 사역에 도전하시렵니까?
* 타 카페에서 옮겨 옵니다.
첫댓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