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유명한 맞선 1순위 여자 초등교사다. 난 결혼 안 한다고 백 번 말했지만 엄마 아빠는 그러든가 하시다가도 언젠가 마음이 바뀔 거라고 꼭 덧붙이신다. 아빠 친구들은 나를 예비 며느리처럼 대하신다. 아들 잘 교육시켜 놓을게~ (아니요. 관심도 없습니다.) 예비 며느리한테 잘 보여야지~ (아나 당신 아들이랑 결혼 안 합니다.) 선생님이면 방학에 휴가 맞춰 같이 시간 보내기도 좋겠다! (결혼 안 한다구요~~~) 대놓고 아닙니다~ 안 합니다~ 대답하기엔 우리 엄마아빠도 이런 예비 사돈 관계가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아휴 민형이 정도면 우리가 더 좋지~ (아빠!! 아니야!!) 우리 딸이 생각보다 칠칠맞아요~ 우리도 잘 가르쳐 놓을게! (칠칠하긴 해도 결혼은 안 해 엄마......) 만나실 때마다 미래의 나를 벌써부터 결혼시켜서 방학 여행까지 대신 계획해주시는 걸 보며 정색만 피하자, 입꼬리를 관리했다.
내가 생각하는 10년 뒤, 20년 뒤, 어느 미래든 그곳에 남자와의 결혼, 남편과의 인생은 없다.
대학교 3학년 때 동기 4명이 모여 살았다. 빨래 건조대 펼치면 지나가기도 어려운 원룸 살이에 지친 네 명이 모여 이럴 바에야 방 네 개를 모아 집 한 채를 빌리자고 한 것이다. 보증금을 모아 큰 방에 두 명, 작은 방 두 개에 한 명씩, 신림 고시촌 언덕배기에 있는 빌라 501호에 입주했다. 드디어 냄비 두 개가 들어가는 싱크대를 쓰게 되었고, 세탁기를 마주보지 않은 채 샤워할 수 있게 되었다. 넓은 공간이 주는 쾌적함도 좋았지만 친구들이랑 사는 건 효율적이었다. 밥 먹을 때면 방문들을 두드린다. 나간 사람은 빼고, 라면 한 개 대신 두세 개를 끓인다. 친구 어머니가 전라도에서 보내주신 파김치와 무말랭이를 꺼내 함께 먹는다. 한 명이 요리했으면 다른 사람들은 뒷정리를 한다. 사실 한 명이나 두세 명이나 요리 준비나 설거지는 크게 늘지 않기 때문에 총량의 차이는 적고, 분모는 커져 더 적은 양의 집안일을 맡게 되었다.
어쩌다 가끔 네 명이 모두 저녁에 할 일이 없는 경우엔 5분 거리 술집으로 취하러 떠났다. 7900원짜리 안주 2개를 시키고 소맥을 마셨다. 매일 봐도 할 얘기는 계속 있었다. 돌아오는 길 마지막 편의점에서 각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 앞 놀이터에서 번갈아 그네를 탔다. 집으로 들어가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식탁에서 떠들다 마지막 사람까지 다 씻으면 그제야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누군가랑 같이 사는 게 적성에 잘 맞는구나, 내 미래에는 같이 밥 먹고, 종종 시간이 나면 술 마시고, 오밤중에도 신나게 같이 그네 탈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게 내 과제였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연애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내 연애는 항상 기대로 시작해 피곤하게 끝났다. 내 기준 좋은 사람이 되려면 페미니즘을 알아야 했는데, 나도 그렇듯이 완전무결한 완성형 성평등 인간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인 네가 내 마음을 완전히 알아?’같은 생각이 연애의 한 축으로 항상 따라붙었다. 좋아하던 마음이 가다가도 멈췄고, 상대의 실수에도 너그러워지지 않았다. 마지막 연애도 그렇게 끝났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었다고 했던 애인은 내가 빨간 체크무늬 치마를 입을 때마다 투덜대더니 어느 날 그 치마보단 이 바지가 어울릴 것 같다고 청바지를 선물했다. 내 옷에 대해 평가하지 말라고 하다가 이런 걸 설명까지 해야 하나, 지쳤다. 그렇게 내 치마가 싫으면 내가 갈아입을 게 아니라 너를 갈아야겠다 생각했고, 헤어졌다.
3학년 여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자원봉사에 지원했고 일주일동안 상영관 안내를 맡게 되었다. 세상에 여성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맨 앞줄까지 가득찬 상영관이 많았고, 어떤 분은 연달아 두 편을 본 다음, 나와서 내일 볼 영화를 예매하고 갔다. 여성 서사에 애정 있고, 페미니즘에 관심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는 연애나 결혼에서만 방법을 찾았지? 좋은 애인을 찾지 말고, 좋은 ‘사람’을 찾으면 되는구나 깨달았다. 같이 살 ‘친구’라고 생각하니 벌써 세 명쯤 떠올랐다. 그 중 나랑 같이 살면 진짜 재밌겠다 장담하는 강민 언니를 틈만 나면 설득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같이 맥주 마실 사람, 나는 어때?
일단 맥주로 시작해서 자세한 계획을 세웠다. 처음엔 그냥 같이 살면 재밌을 거야 정도였지만 말할 때마다 약간씩 살이 붙었다. 같이 살려면 먼저 자기가 어떤 습관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야 하니까 서른세 살까지는 각자 알아서 산다. 서른네 살에 직장의 중간 지점을 잡고 전세를 구한다. 방은 하나씩, 그러다 언젠가 방 세 개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 제일 큰방은 영화관처럼 쓰고, 거실에는 큰 테이블을 놓자고 했다. 미리 알리기만 하면 애인을 데려오든 누굴 데려오든 상관없다, 혼자 있고 싶은 날엔 인형을 세워놓든 뭔가 표시를 하는 건 어떨까, 의논만 해도 재밌었다. 우리가 애인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한 일을 줄일 수 있었다. 명절은 각자 집으로, 부모님은 알아서 챙기고, 그러다가 가끔 딸 친구로서 서로의 부모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서른네 살이 되기 전에 강민 언니가 결혼할지 모른다고 해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적인 페미니스트 남자를 찾는 것보다 강민 언니와 사는 미래를 그리는 게 더 즐겁다. 중요한 건 그게 누가 됐든 내 인생에 남편 자리 대신 <동반자>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게 결혼 말고 다른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니 유니콘은 있을 거라고 쫓기듯이 연애 상대를 찾는 걸 멈출 수 있었고, 친구랑 사는 실버타운을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의욕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건 내가 선택한 가족이었다. 그 사람이 꼭 사랑하는 사람일 필요는 없었고, 그 방식이 결혼일 필요도 없었다. 그걸 알고 나는 드디어 내 안의 결혼해듀오에서 자유로워졌다.
첫댓글 으아 너무 좋아요. 저는 핏줄로 이어진 가족에 대한 신뢰가 많이 없거든요.
<루폴의 드랙레이스>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나오는데 드랙퀸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문을 만드는데
내가 선택하는 가족이 진짜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요. 입양한 아이든, 동물이든, 동성 친구든, 내가 따르는 언니든, 옆집 할머니든
나와 마음이 맞으면 동반자이자 가족이죠.
저는 사실 외로움이 많아서 사람이 혼자 사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요. 다만 꼭 결혼이나 연애상대가 다 채워줄 거라 기대하지않아요. 현실상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 사람에게 의존할때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 확률이 크죠. 같이 놀면 재미있는 상대면서 각자 공간도 존중해준다면 최상이죠.
정말 28살때부터 가임기라며 결혼에 여자들 들들 볶는건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공감할 대사들을 잘 담으셨어요
저는 아임님의 글을 보고 아주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부터가 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함께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리고 누군가 패션에 대해 지적하면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했고 항상 안절부절 못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조금 더 빨리 글쓰기, 여성 서사에 관심을 가졌다면 과거의 내가 조금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글의 초반에서 괄호 안에 아임님의 마음을 적어주신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자 하는 필자의 마음이 주변이들의 말에 대조적으로 잘 나타난 것 같고요. 중반부에 남자친구 부분, 영화제 부분에서 남자가 아닌 여성이 동거인으로 적합하다는 결론인 것 같은데 맞을까요? 그렇다면 여성 영화제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여자만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강민언니'는 어떤 부분에서 공간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된건지 궁금했습니다. 좋은 걸 감사합니다.
저는 결혼에 매우 만족하는 사람이지만 결혼이 필수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너무 싫어요. 며느리라고 하는 사람들...넘 싫네요. 그것도 초등교사라서 탐을 낸다면 더욱... 나를 사람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요... 분노 유발 글이었습니다.
분노로만 끝내지 않고 미래를 그려보는 계기로 삼으신 것 같아 좋았어요. 마음 맞는 친구가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잘 설명해주신 것 같아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동반자를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되면 좋겠어요.
되게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네요. 문장이 재밌기도 하지만 마지막 문장, "자유로워졌다"는 아임의 태도 때문에 더 생기있게 느껴져서 그런 것 아닐까 싶네요. "내가 선택한 가족"이란 표현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