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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부
3.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1)는 성자들(*2)을 친견하지 못하고(*3)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4)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5),
바른 사람들(*6)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7)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땅을 땅이라고 인식한다.(*8)
땅을 땅이라 인식하고서는(*9)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고,(*10)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고,(*11)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고,(*12)
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13) (*14)
그는 땅을 기뻐한다.(*15)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16)이라고 나는 설한다."
4. "그는 물을 물이라 인식한다. 물을 물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물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물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물로부터 생각하고, 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물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5. "그는 불을 불이라 인식한다. 불을 불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불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불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불로부터 생각하고, 불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불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6. "그는 바람을 바람이라 인식한다. 바람을 바람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바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바람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바람으로부터 생각하고, 바람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람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 “‘배우지 못한(assutava)’이란
무더기(蘊), 요소(界), 감각장소(處), 조건의 형태(緣), 마음챙김의 확립 등에 대한 파악(uggaha)과
질문(paripucchā)과 판별(vinicchaya)이 없는 것이다.
‘범부(puthu-jjana)’라고 하였다.
많고(puthu) 다양한 오염원(kilesa) 등을 산출(janana)하는 등의 형태에 의해 범부라 불린다.
그리고 성스러운 법을 등지고 저열한 법에 빠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포함되기 때문에 범부라고도 불린다.
주석서와 복주서들은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ā puthujjana)와 선한 범부(kalyāṇa-puthujjana)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둘은 아직 예류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지만,
전자는 온 처 계 연 등의 법에 대한 이론적인 지혜(교학)도 없고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수행도 하지 않은 자이다.
후자는 이 둘을 갖추어 예류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SA.ⅱ.200)
(*2) “‘성자들(ariyā)’이란
부처님과 벽지불과 세존의 제자들을 말한다. 혹은 오직 부처님만을 말한다.”(MA.ⅰ.21)
(*3) “‘친견하지 못하고(adassāvī)’라는 것은
성자들을 친견하지 않는 습성을 갖고 있거나 혹은 친견하더라도 존중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눈(cakkhu)으로 친견하지 않는 자와 지혜(ñāṇa)로 친견하지 않는 자의 두 부류가 있다.
그중에서 지혜로 친견하지 않는 자가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육안으로나 천안으로 성자들을 친견하더라도 친견하지 않는 것이 되는데,
그들의 눈은 모습만을 취할 뿐,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Soṇa)나 싱갈라(Siṅgāla)등도 눈으로는 성자들을 친견했지만
성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MA.ⅰ.21)
(*4)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마음챙김의 확립 등으로 분류된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지 않다(akusala)는 말이다.”(MA.ⅰ.22)
(*5)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했다.(ariyadhamme avinīto)’는 것은
– 두 가지 율이 다시 각각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그에게 없기 때문에 인도되지 못한 자라 불린다. -
여기서 두 가지 율(vinaya)이란 단속하는 율(saṃvara-vinaya)과 버리는 율(pahāna-vinaya)이다.
그중에서 단속하는 율이란 계(sīla)를 통한 단속, 마음챙김(sati)을 통한 단속, 지혜(ñāṇa)를 통한 단속,
인욕(khanti)을 통한 단속, 정진(viriya)을 통한 단속의 다섯 가지이다.
버리는 율이란 대체(tadaṅga)를 통한 버림, 억제(vikkhambhana)를 통한 버림, 근절(samuccheda)을 통한 버림,
편안함(paṭippassaddhi)을 통한 버림, 벗어남(nissaraṇa)을 통한 버림의 다섯 가지이다. …
이와 같이 율은 간략하게 두 가지이고, 분류하면 열 가지인데,
그것에 대한 단속이 흐트러지고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않아서 배우지 못한 그 범부에게는 없기 때문에
‘인도되지 못한 자(avinīta)’라 한다.
이 방법은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에도 적용된다.”(MA.ⅰ.22~24)
(*6) “여기서 바른 사람들(sappurisā)‘이란
벽지불과 세존의 제자들을 이른다.
그들은 출세간의 공덕을 가졌기 때문에 아름다움(sobhanā) 사람들이다.”(MA.ⅰ.21)
(*7) ‘바른 사람들의 법’은 sappurisa-dhamma를 옮긴 것이다.
(*8) “여기서는 먼저 범부를 지칭하신 뒤에,
땅 등의 대상(vatthu)이 존재더미[有身, 오취온]를 구성하고 있는 법(sakkāya-dhamma)이라고 여기면서 일어난
[범부의] 허황된 생각[空想, maññan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땅을 땅이라’등으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여기 ‘땅(pathavī)에는
① 특징으로서의 땅,
② 구성요소를 가진 땅,
③ 명상주제인 대상으로서의 땅
④ 관습적으로 불리는 땅의 네 가지가 있다.
이중에서 ① “도반이여, 무엇이 내적인 땅의 요소인가? 안에 있고 개개인에 속하는
딱딱하고 견고한 것을 내적인 땅의 요소라 한다.”(M.ⅰ.185)라는 등에서는
특징으로서의 땅을 말한다.
② “비구가 땅을 파거나 혹은 파게 하면”(Vin.ⅳ.33)이라는 등에서는
구성요소를 가진 땅을 말한다.
머리털 등 스무 가지 부분과 아연, 구리 등 외적인 땅은 형색 등의 구성요소를 가진 땅이기 때문에
구성요소를 가진 땅이라 한다.
③ “어떤 자는 땅의 까시나를 인식한다.”(M.ⅱ.14)라는 등에서는
명상주제인 대상으로서의 땅을 말한다.
④ 땅의 까시나를 통해 禪을 얻은 자가 천상에 태어날 때 [증득의] 출현으로 인해 땅의 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것이 관습적으로 불리는 땅이라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이 네 가지 모두 해당한다.
이 가운데서 어떤 땅을 두고(yaṅkañci pathaviṃ)
범부는 땅으로부터 인식하고(pathavīto sañjānāti),
‘땅이다’라고 인식하고(pathavīti sañjānāti),
땅의 부분을 통해 인식하고(pathavi bhāgena sañjānāti),
세상의 관습을 취하여 (lokavohāraṃ gahetvā) 전도된 인식(saññā-vipallāsa)으로 인식한다.”(MA.ⅰ.25)
전도된 인식(saññā-vipallāsa), 혹은 인식의 전도는
무상·고·무아·부정인 것을
항상하고 즐겁고 자아이고 깨끗한 것[常·樂·我·淨]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9) “‘땅을 땅이라 인식하고서는(pathaviṃ pathavito saññatvā)’이란 것은
‘그는 그 땅을 전도된 인식[顚倒想, viparīta-saññā]으로 인식한 뒤에’라는 말이다.”
“인식으로 인해 사량 분별이라는 이름이 있다.”(saññānidānāhi papañcasaṅkhā -Sn {874})라는 금구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일단 이 땅을 이와 같이 전도된 인식으로 인식하고 나면
다음 단계에서 갈애와 자만과 사견에 의한 사량 분별(taṇhā-māna-diṭṭhi-papañca)은 힘을 얻는다.
여기서 그는 허황된 생각[空想, maññanā]이란 이름으로 설한
이러한 사량 분별을 통해 생각하고 헤아리고 이리저리 헤아리고 여러 측면으로 다르게 취한다
(maññati kappeti vikappeti, nānappakārato aññathā gaṇhati).
그러므로 ‘땅이라 생각한다(pathaviṃ maññati)’라고 말씀하셨다.”(MA.ⅰ.25)
(*10) “‘[자신을] 땅이라 생각한다(pathaviyā maññati)’는 것은
세 가지 허황된 생각[空想, maññanā]을 통해 ‘나는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 ‘나의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의 땅이다.’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내적인 땅(ajjhattika pathavi)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taṇhā-maññanā)을 통해 생각하고,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māna-maññanā)을 통해 생각하고,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diṭṭhi-maññanā)을 통해 생각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는 머리털, 몸 털 등에서 욕망을 일으키고, 머리털을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집착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미래에 나의 머리털은 이렇게 될 것이고, 나의 몸 털도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거기에 기쁨을 일으킨다.
‘이 계행과 청정범행으로 나의 머리털은 이렇게 윤기 있고 부드럽고 가늘고 검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갈망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리털 등에 대해 원하는 바를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을 두고
‘내가 뛰어나다거나 혹은 동등하다거나 혹은 저열하다.’라고 자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영혼[壽者, 생명, jīva]이 바로 몸이다.”(「잘리야 경」(D7) §1)라고 전해 내려오는 방법에 따라
머리털이 영혼이라고 천착한다. 이 방법은 몸 털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혹은 “내적인 땅의 요소이든 외적인 땅의 요소이든 그것은 단지 땅의 요소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보아 땅의 요소를 염오하고
마음이 땅의 요소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합니다[離慾].
(본서 「코끼리 발자국 긴 경」(M28) §6)라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머리털 등으로 분류되는 이 땅은 내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천착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이처럼 내적인 땅을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땅(bahira pathavi)에 대해서도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MA.ⅰ.26~27)
(*11) “‘[자신을] 땅에서 생각한다(pathaviyā maññati).’라고 하셨다.
여기서 ‘땅에서(pathaviyā)’라는 것은 문법적으로 처소격(Locative)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땅에서’라고 생각한다.
즉 ‘나에게 어떤 장애는 땅에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는 ‘다른 이는 땅에서’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의 장애는 땅에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 문맥에 대한 뜻이다.
혹은 “어떻게 물질에서 자아라고 여기는가?
여기 어떤 이는 느낌을 … 인식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여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이 나의 자아는 이 물질에 있다.’라고
이와 같이 물질에서 자아라고 여긴다.”(Ps.ⅰ.145)라고 [장소]로서의 뜻을 [『무애해도』에서] 설했다.
그 방법대로 느낌 등의 법들을 자아라고 거머쥐고 내적인 땅과 외적인 땅 가운데
어떤 땅을 자기의 장소라고 상상하면서 ‘이 나의 자아는 땅에 있다.’라고 땅에서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diṭṭhi-maññanā)이다.
그러면 그 자아에 대한 애정(sineha)과 자만(māna)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taṇhā-māna-maññana)도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MA.ⅰ.27~28)
(*12)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한다(pathavito maññati).’라고 하셨다.
여기서 ‘땅으로부터(pathavito)’라는 것은 문법적으로 탈격(Ablative)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땅과 외적인 땅으로부터 자신과 다른이가 태어나거나 혹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혹은 땅과는 상관 없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의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diṭṭhi-maññanā)이다.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할 때 대상에 대해 애정(sineha)과 자만(māna)이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과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taṇhā-māna-maññana)도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MA.ⅰ.28)
(*13) “‘땅을 내 것이라 생각한다(pathaviṃ meti maññati).’라고 하셨다.
여기서는 오직 땅의 근본물질[지대, mahā-pathavi]에 대해서 갈애를 가지고
내 것이라는 방법으로 일어난 한 가지 허황된 생각만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
즉 [사견과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은 일어나지 않고]
갈애에 기인한 한 가지 허황된 생각만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
이 땅이 나의 머리털이고 나의 몸 털이고 나의 아연이고 나의 구리라고
이와 같이 내적인 땅과 외적인 땅(ajjhattika-bāhira-pathavi)에 연결시켜야 한다.(MA.ⅰ.28)
(*14) 이상 땅에 적용된 네 가지 허황된 생각[空想, maññanā]의 구문은
본경에 나타나는 나머지 23가지 대상에도 다 적용되어 나타난다.
이 네 가지 허황된 생각은
'① [자신을] X라 생각한다. ② [자신을] X에서(in) 생각한다.
③[자신을] X로부터(from) 생각한다. ④ X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로 정리된다.
여기서 ①은 동일시, ②는 근본, ③은 별개 혹은 파생 ④는 소유(전유)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범부는
① 땅과 자신을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고
② 땅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③ 땅은 자신과 다르거나 자신을 땅에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여기고,
④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범부는 이렇게 모든 대상에 대해서
허황되고 전도되고 잘못된 생각[空想, maññanā]을 가진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파하고 계신다.
특히 이 가운데
‘① [자신을] X라 생각한다.
② [자신을] X에서(in) 생각한다.
[자신을] X로부터(from) 생각한다.’는 셋은 『상윳따니까야』 제3권
「야마까 경」(S22:85) §§11~14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관찰 가운데 처음의 셋인
① 오온을 여래라고 관찰하는 것과
② 오온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과
③ 오온은 여래와 다르다고 관찰하는 것의 셋과 같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윳따니까야』 제4권 「뿌리 뽑는데 어울림 경」(S35:30) §3과
「뿌리 뽑는데 도움이 됨 경」1(S35:31) §3에서
“눈을 사량하지 않고, 눈에서 사량하지 않고, 눈으로부터 사량하지 않고
(cakkhuṃ na maññati cakkhusmiṃ na maññati cakkhuto na maññati ”라고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를 관찰하는 것과도 같은 방법이다.
(*15) “‘기뻐한다(abhinandati)’라고 하셨다.
여기서는 사견과 갈애에 의한 기뻐함으로 기뻐하면서 모든 것을 기뻐한다는 뜻이다.”(MAT.ⅰ.79)
(*16)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땅이라는 토대(vatthu)를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기꺼워한다.
땅을 잘 아는 자는 세 가지 통달지를 통해 철저히 안다. 그것은
① 안 것의 통달지(ñāta-pariññā, 知遍知)
② 조사의 통달지(tīraṇa-pariññā .審察遍知)
③버림의 통달지(pahāna-pariññā, 斷遍知)이다.
이 가운데서
① 어떤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인가?
“그는 땅의 요소를 잘 안다.
이것은 내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외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특징이고, 이것은 역할이고, 나타남이고, 가까운 원인이다.”라고
철저히 아는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이다.
② 어떤 것이 조사의 통달지인가?
“물질을 무상으로, 괴로움으로, 병으로 본다.”(Ps.ⅱ.238)라고
40가지 측면에서 땅의 요소를 조사하는 것이 조사의 통달지이다.
③ 어떤 것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조사한 뒤 최상의 도로써
땅의 요소에 대해 욕망을 버리는 것이 버림의 통달지이다.
혹은
①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는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이고,
②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부터 수순의 지혜까지를 조사의 통달지라 하고,
③ 성스러운 도에 대한 지혜를 버림의 통달지라 한다.
땅을 철저하게 아는 자는 이 세 가지 통달지에 의해 철저히 안다.
범부는 이 통달지가 없기 때문에 철저히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기꺼워한다.”(MA.ⅰ.29)
7. "그는 존재들(1)을 존재들이라 인식한다.
존재들을 존재들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존재들이라(*2) 생각하고,
[자신을] 존재들에서 생각하고,(*3)
[자신을] 존재들로부터 생각하고,
존재들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4)
그는 존재들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 “‘존재(bhūta)’라는 단어는
① 오온(pañcakkhandha), ② 비인간(amanussa),
③ 요소(dhātu, 18계 가운데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mahā-bhūta),
④ 존재함(vijjamāna) ⑤ 번뇌 다함(khīṇāsava), ⑥ 중생(satta)
⑦ 나무 등의 존재(rukkhādi)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
여기서는 중생(satta)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MA.ⅰ.31)
(*2) “‘[자신을] 존재들이라 생각한다(bhūte maññati)’는 것 등에서도
세 가지의 허황된 생각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①“그는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기고 있는 것을 본다.”(M.ⅰ.461)라고 설한 방법에 따라
존재들을 아름답고(subhā) 행복하다고 취하고서는 즐긴다.
보고서도 즐기고, 듣고서도 즐기고, 냄새 맡고서도 즐기고, 맛보고서도 즐기고,
닿고서도 즐기고, 알고서도 즐긴다.
이와 같이 존재들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② “여기 어떤 이는 태상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을 근거로
이전에는 다른 이와 자신을 동등하다(sadisa)고,
그 다음에는 자신을 수승하고(seyya) 다른 이를 저열하다(hīna)고 여긴다.
이러한 자만(māna)을 오만(mānātimāna)이라고 한다.”(Vbh.355)라는 말씀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들을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③ 존재들은 항상하고 굳건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nicca dhuvā sassatā avipariṇāmadhammā)거나
혹은 “모든 중생들과 모든 생명들과 모든 존재들과 모든 영혼들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지 못하고 힘도 없고 정진력도 없이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
여섯 종류의 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D.ⅰ.53)라고 생각하면서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이와 같이 존재들을 세 가지의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MA.ⅰ.32)
(*3) “‘[자신을] 존재들에서 생각한다(bhūtesu maññati).’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존재들에서 생각하는가?
① 각각의 존재들에서 자신의태어남이나 혹은 행복의 성취를 바란다.
이와 같이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자신을] 존재들에서 생각한다.
존재들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포살을 행한다.
이와 같이 존재들에서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② 그리고 존재들을 무리별로 취하여 그중에서 어떤 존재들은 수승하다고 보고,
어떤 존재들은 동등하거나 저열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존재들에서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③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들은 항상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존재들은 무상하고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존재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존재들에서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MA.ⅰ.32~33)
(*4) “‘존재들을 내 것이라 생각한다(bhūte meti maññati).’는 것에서는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만 일어난다.
이 땅이 내 아들이고, 내 딸이고, 내 양, 개, 돼지, 코끼리, 소, 말이라고
이런 방법으로 내 것이라고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MA.ⅰ.33)
8. " 그는 신들(*5)을 신들이라 인식한다.
신들을 신들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신들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신들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신들로부터 생각하고,
신들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들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5)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으로 즐기기(dibbati) 때문에 ‘신들(deva)’이라 한다.
혹은 자신의 신통력(iddhi)으로 즐기기 때문에 신들이라 한다. ‘향락한다.’ 혹은 ‘비춘다.’는 뜻이다.
신들은 세 종류가 있으니 ① 일상적인 표현의 신들(sammuti-deva), ② 신으로 태어난 신들(upapatti-deva)
③ 청정한 신들(visuddhi- deva)이다.
① 일상적인 표현으로서의 신들이란 왕들, 여왕들, 왕자들이다.
② 신으로 태어난 신들이란 사대왕천의 신들로 태어났거나 그 보다 높은 신들이다.
③ 청정한 신들이란 번뇌 다한 아라한들이다.
여기서는 신으로 태어난 신들을 말한다. 그러나 모두를 포함하는 건 아니다.
타화자재천(Paranimittavasavatti)의 천상세계에서 마라(Māra)의 무리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육욕천(六慾天)이 여기서 말하는 신들이다.”(MA.ⅰ.33)
9. " 그는 빠자빠띠(*6)를 빠자빠디라 인식한다.
빠자빠띠를 빠자빠띠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빠자빠띠라 생각하고,
[자신을] 빠자빠띠에서 생각하고,(*7) [자신을] 빠자빠띠로 생각하고,
빠자빠띠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빠자빠띠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6) “여기서는 마라(Māra)를 ‘빠자빠띠(Pajāpati)’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이 마라는 타화자재천의 신의 세계(Paranimittavasavatti-devaloka)에 산다.
① 미모를 갖추고 수명이 길고 큰 행복을 가진 빠자빠띠를 보거나 듣고는
즐기면서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② 빠자빠띠의 상태를 얻고서는 나는 중생들의 왕이고 지배자라고 자만을 일으키면서
빠자빠띠를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③ 빠자빠띠는 항상하고 영원하다거나 혹은 단멸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지 못하고
힘도 없고 정진력도 없이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
여섯 종류의 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면서
빠자빠띠를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MA.ⅰ.33~34)
(*7) “‘[자신을] 빠자빠띠에서 생각한다(pajāpatismiṃ māñati).’는 것은
하나의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여기 어떤 이는 “빠자빠띠가 가진 법들은 모두 항상하고 영속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혹은 “빠자빠띠에게는 사악함(pāpa)이 없다. 그에게는 사악한 업들이 달라붙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서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이] 일어난다.”(MA.ⅰ.34)
10. " 그는 브라흐마(*8)를 브라흐마라 인식한다.
브라흐마를 브라흐마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브라흐마라 생각하고,
[자신을] 브라흐마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브라흐마로부터 생각하고,
브라흐마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브라흐마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8) “‘브라흐마(梵天, Brahama)’라고 했다.
여기서는 각각 [禪의] 특별한 공덕으로 향상한(brūhito) 자를 브라흐마(梵天)라 한다.
대범천도 브라흐마라 부르고 여래, 바라문, 부모, 뛰어난 자도 브라흐마라 부른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태어나서 겁의 수명을 가진 브라흐마(범천)를 말한다.
그러므로 범보천과 범중천도 포함된다.”(MA.ⅰ.34~35)
“처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수승한 초선에 의해 태어났거나
혹은 초선의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MAT.ⅰ.84)
11. " 그는 광음천(*9)을 광음천이라 인식한다.
광음천을 광음천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광음천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광음천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광음천으로부터 생각하고,
광음천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광음천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9) ‘광음천(Abhassarā)’은 색계 제2선천의 세 번째 천상이다.
임종할 때의 제2선의 깊이에 따라 광명(ābha)의 크기도 달라진다.
한편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치 횃불의 불빛처럼 이들의 몸에서 광명(ābha)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처럼 흐르기(sarati) 때문에 광음천이라 한다.
제2선천에 태어난 자들은 모두 포함된다.
동일한 세계에 머무는 모든 소광천과 무량광천도 굉음천이라고 알아야 한다.”(MA.ⅰ.35)
12. " 그는 변정천(*10)을 변정천이라 인식한다.
변정천을 변정천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변정천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변정천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변정천으로부터 생각하고,
변정천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변정천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0) “깨끗함(subhena)으로 뒤덮여 있고, 온통 뒤덮여 있다(vikiṇṇā).
깨끗한 몸의 빛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금으로 만든 상자에 놓인 빛나는 금덩이처럼
광채를 발한다고 해서 ‘변정천(Subhakiṇhā)’이라 한다.
변정천을 대표로 제3선천에 태어난 자들은 모두 포함된다.
동일한 세계에 머무는 모든 소정천과 무량정천도 변정천이라고 알아야 한다.”(MA.ⅰ.35)
13. " 그는 광과천(*11)을 광과천이라 인식한다.
광과천을 광과천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광과천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광과천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광과천으로부터 생각하고,
광과천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광과천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1) “수승한(vipulā) 결과(phalā)가 있기 때문에 ‘광과천(Vehapphalā)’이라 한다.
색계 제4선천의 천상이다.”(MA.ⅰ.35)
14. " 그는 승자천(*12)을 승자천이라 인식한다.
승자천을 승자천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승자천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승자천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승자천으로부터 생각하고,
승자천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승자천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2) ‘승자천(勝者天)은 Abhibhū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극복하기 때문에 승자(abhibhū)라 한다. 무엇을 극복하는가?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수·상·행·식)를 극복한다.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aññā-satta)의 동의어이다.
무상유정천의 신들은 광과천의 신들과 같은 천상(색계 제4선천)에 머문다.”(MA.ⅰ.35)
색계의 제4선천의 제일 아래가 광과천이고 두 번째가 이 무상유정천이다.
그 다음은 정거천(淨居天, Suddhāvāsa)인데, 이곳에는 불환자들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무상유정천은 중생으로 태어나는 경지로는 색계에서 최고로 높은 천상이다.
수행자의 마음이 제4선에 들어서 인식을 없애버리려는 의도로 가득 배어 있고,
인식에 대해 혐오하기 때문에(saññā-virāga) 그들은 무상유정천에 태어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무상유정천에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물질로 된 몸만이 있다.
15. "그는 공무변처(*13)를 공무변처라 인식한다.
공무변처를 공무변처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공무변처라 생각하고, [
자신을] 공무변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공무변처로부터 생각하고,
공무변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무변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3) 이하는 [M8 「지워 없앰 경」 §8번 각주 참조함] :
공무변처는 ‘무한한 허공’이라는 산냐가 현전하므로 이것을 공무변처라고 부른다.
식무변처에서 공무변처의 무한하다는 것은 허공이라는 개념(paññatti)을 대상으로 가지기 때문에
허공을 대상으로 가지는 알음알이도 그 무한함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행자는 공무변처의 알음알이를 그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무한한 알음알이라는 두 번째 무색계의 본삼매가 일어날 때까지 수행한다.
무소유(ākiñcañña)는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무소유처는 공무변처의 알음알이가 지금 존재하지 않음이 그 대상이 된다.
그 알음알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natthibhāva-paññatti)’을 대상으로 삼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는 인식이 극도로 미세해져서 인식 등의 마음부수들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심리상태라 하겠다. 비상비비상처의 증득은 인식을 포함했다고도 제외했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비록 인식 하나만 언급했지만 이 마음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마음부수법들도 그런 극히 미세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도 존재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 네 번째 무색계 선은 세 번째 무색계 선인 무소유처의 마음을 그 대상으로 가진다.
16. "그는 식무변처를 식무변처라 인식한다.
식무변처를 식무변처라 인식하고서는 [3] [자신을] 식무변처라 생각하고,
[자신을] 식무변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식무변처로부터 생각하고,
식무변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식무변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7. "그는 무소유처를 무소유처라 인식한다.
무소유처를 무소유처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무소유처라 생각하고,
[자신을] 무소유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무소유처로부터 생각하고,
무소유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소유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18.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비상비비상처라 인식한다.
비상비비상처를 비상비비상처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비상비비상처라 생각하고,
[자신을] 비상비비상처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비상비비상처로부터 생각하고,
비상비비상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