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동침 / 곽주현
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뿐하다. 요즈음 바쁘게 움직였다. 싹 틔운 감자를 심고 비닐로 덮었다. 장마가 오기 전 하지(夏至) 무렵에 수확해야 해서 일찍 심는다. 관리기로 땅을 갈고 퇴비를 뿌려 북을 만들었다. 겨우 세 이랑인데 3일이나 걸렸다. 이제는 무슨 일이든 한꺼번에 하면 힘이 부쳐서 나누어 하다 보니 더디다. 평소에도 잠을 잘 자는 편이지만 이런 날은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다. 지금은 그렇지만 오히려 젊었을 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잠자는 시간이 두려운 날이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기분도 천천히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밤이 깊어져 잠자리에 들 시각이 닦아오면 점점 더 불안해져서 안절부절못했다. 피곤해서 몸은 가누기 어려운데 잠을 청할 수가 없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지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면 꿈도 현실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괴이한 현상에 몸부림쳤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천장에 흐릿한 사방무늬 벽지가 그려져 나타났다. 그때부터 공포가 시작된다. 무거운 물체가 짓누르는 압박이 가슴을 조여 온다. 인상이 험상궂고 힘이 센 악마가 커다란 바윗덩이를 가슴에 올려놓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가 내 방이고 지금 내가 침대에 누워있다는 생각이 들고 벽시계도 희미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의식이 깨어있는 거다. 그런데 손발을 까닥거려 보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해도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나 봤던 ‘유체(喩體) 이탈(離脫)을 경험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이를 악물고 몸을 뒤척여 보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목까지 조여와 숨이 곧 멈출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손발이 움직여지면 거짓말처럼 그 증상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한 날은 몇 번씩 그런 현상이 반복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 증상이 나타나 나를 그렇게 괴롭게 했다. 그때가 내 3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을 지인 몇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대부분 귀신 붙은 게 아니냐며 농담으로 받아넘겨 버린다. 아내조차도 자기도 꿈에서 그런 적이 있다며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 그런 것을 “가위눌림(수면 마비)”이라 한다며 사람 대부분이 한두 번쯤은 겪는 현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가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자를 때 쓰는 그런 기구가 아니다. 꿈에 나타나는 무서운 존재(귀신 등)라는 뜻으로 쓰인다. 무당들이 귀신에 씌어서 그런다고 할 때 표현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때는 정말 내 몸에 다른 누가 들어와 해코질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귀신같은 건 없다는 신념이 있어서 점집을 방문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랬다면 아마 정신과 등을 찾아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례자를 본 적이 있다. 밤만 되면 귀신이 보여 잠들지 못해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전문가가 최면을 걸고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머리를 풀어 해친 여자가 방문 앞에 서서 자는 사례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자기 어머니 같다고 대답한다. 최면에서 깨어나서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어렸을 때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더 흐느낀다. 아마 트라우마가 심해서 그런 같다며 다 잊고 마음을 굳게 가지라는 전문가의 조언이 따른다. 그녀는 실체를 알고 나니 다시는 그런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다며 표정이 밝아진다.
인간은 잠이 들면 옅은 수면(REM, Rapid Eye Movement)과 깊은 수면을 반복한다고 한다. 꿈을 꾸는 것은 렘(REM) 상태일 때다. 꿈에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는데 침대에서 떨어지는 등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근육을 마비시키는 신체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가위눌림은 이런 근육 간의 조절에 일시적인 이상이 생겨 일어나는 일종의 경직된 꿈이다. 그 원인은 불안하고 우울한 상태에다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런 증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몽유병은 몸은 깨어있고 정신이 잠든 상태가 된다. 이거나 저거나 몸과 마음의 불균형으로 일어나는 이상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는데 나는 오히려 젊었을 때 보다 쉽게 숙면에 들고 훨씬 길게 잔다. 지금도 가끔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기는 하지만 악마와 동침은 전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부터다.
첫댓글 지금은 안 그런다니 다행입니다.
푹 주무신다니 저도 좋네요.
가위 눌리는 게 무서운 거네요.
이런 경험 많은 사람이 하네요.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어요.얼마나 무섭던지요.
나이들수록 잠을 잘 주무신다니, 건강하게 잘지내시는 표시인 것 같아 반갑습니다.
텃밭을 가꾸셔서 그런가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저랑 같은 주제네요. 늘 편안하게 잘 주무시길 바랍니다. 감기약을 먹었더니 하루 종일 잤네요.
전 경험이 없지만 남편과 아이가 가끔 가위에 눌려요. 기가 약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스트레스도 원인이라니 미안해지네요... 이제 잘 주무신다니 다행입니다.
확실히 잠의 양이 정해져 있나 봅니다. 젊어서는 그리도 잘 잤는데 요즘 그러지 못하거든요. 차라리 요즘 잘 주무시는 곽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지금도 잘 주무시는 건 천운을 타고 나신 거지요.
선생님의 건강 비결이기도 하겠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