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4.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수요일 묵상글>
<루카1,63-66. 80>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하느님을 찬미하였다.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내 영혼은 저 노을처럼 번지리,
계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감격그러운 날입니다. 그러나 이날 눈물을 삼켜야 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가요, 펜을 가지고 독재 세력에 항거했던 양심적인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장준하가 바로 그사람 입니다.
대체 왜 그는
민족이 압제의 사슬로부터 해방되던 날
눈물을 삼켜야 했을까요?
1945년 8월 20일, 50명의 광복군 대원들이 조국 땅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대원들은 조를 나누어 비행기와 잠수함으로 서해안에 상륙할 계획이었습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1)/
연병장에 모인 대원들에게
광복군 대장 이범석 장군은 조국의 광복을 알렸습니다.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장준하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2)/
그렇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광복이 20일 이후에 이루어졌으면 어땠을까요?
아마 우리의 공로가 인정되어 승전국으로서 영토를 더 차지하거나 지금처럼 한반도가 갈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삭주 땅에서 아버지 장석인 씨와 어머니 김경문 여사 사이에서 1남 1녀중 맏아들로 내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다릿골은 압록강의 바람결과 물살이 유난히 세차고, 사방으로는 거문산과 천마산 줄기가 잇닿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장준하는 국민학교(오늘나의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하여 낮에는 밭에나가 어른들 사이에서 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열세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준하를 삭주의 대관 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입학을 시킵니다. 그는 단 1년간의 노력으로 수석졸업을 차지하고 평양 숭실 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신성 중학교로 전학하는데 이 학교에 재학 중 일본식 교육을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결행하다가 여러 차례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준하는 약 3년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유학을 갑니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2)/
이후에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이 되었으나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해방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입국하여, 민주화를 위해 <사상계>잡지일과 신민당 7대 국회의원으로 일하던 중 1973년 개헌 청원 백만 인 서명 운동으로 인해 1974년 긴급 조치 제1호 위반 15년 형 선고, 형 집행 정지 가석방 되었으나 1975년 8월 17일 유신 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중 포천 약사봉 등산길에서 원인 모를 사고로 58세에 절명 합니다. 생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상’ 수상(1962년)을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을 남편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루카1,62-63 참조) 성령의 감도로 알게 되었다고(루카1,41-45 참조)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일치하는 것 역시 아기의 미래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징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은 엘리사벳이 말한 이름을 아버지인 즈가리야가 확인하는데(루카1,60) 그것은 주님의 천사가 정해 준 것입니다(루카1,30).
즈가리야도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미로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61)”이라고 씀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수련을 하고 광야를 떠나 대헤로데와 아르켈라오가 벌인 사업의 결과로 주민이 상당히 늘어날 ‘요르단 강 지역’에서 설교합니다. 장준하 역시 광야와 같이 척박한 일제치하에서 학창시절을 어렵게 보내고 일본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고, 탈출하여 갖은 위험을 다 겪은 후 광복군에 합류. 해방후 임시정부 김구주석의 비서로 입국하여, 민주화 운동을 하며 <사상계> 집필을 통해 암울했던 군사정권시절에 지식인들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성서에서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이 결정되고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곧 생각, 기억, 감정, 결정 등이 이루어지는 곳이지요(루카2,19.35.51; 21,14) 사람들의 마음에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깊이 새겨지듯이, 장준하의 애국과 민주화에 대한 행적이 인정되어 그의 사후에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됩니다.
지금은 민주화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하나 같이 부정부패에 맞서 싸웠노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 시대가 살기 좋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세계12위 권에 올랐었지요. 또한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성이 없이 시행착오를 겪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4차 산업에 투자나 기업환경 개선없이 과도한 세금과 선심성으로 퍼주기식 정책이라면 그동안 쌓아온 경제발전이 회복되기 어렵게 되고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보다 겸손되이 잘못된 정책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고쳐나갔으면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물질문명의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이 때,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도록 새로운 정책이 더욱 아쉬운 때 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장준하 선생이 그랬듯이 자신이 있어야할 위치, 해야할 일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Luke163-66. 80>
63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64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65 Then fear came upon all their neighbors, and all these matters were discussed throughout the hill country of Judea.
66 All who heard these things took them to heart, saying, "What, then, will this child be?" For surely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him.
80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in spirit, and he was in the desert until the day of his manifestation to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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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5.내 손으로 내 나라를 찾겠다던 장준하
“내 영혼은 저 노을처럼 번지리,
계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감격그러운 날이다. 그러나 이날 눈물을 삼켜야 했던 이가 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 운동가요, 펜을 가지고 독재 세력에 항거했던 양심적인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장준하가 바로 그다.
대체 왜 그는
민족이 압제의 사슬로부터 해방되던 날
눈물을 삼켜야 했을까
1945년 8월 20일, 50명의 광복군 대원들이 조국 땅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대원들은 조를 나누어 비행기와 잠수함으로 서해안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19일 산둥 성의 한 비행장, 왼쪽에서 네번째가 장준하
장준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서울 지역의 정보 수집을 맡고 있었다.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대하며 하루 종일 총과 장비를 손질하고 있던 어느 날 모든 대원들에게 즉시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드디어 조국을 내 손으로 구할 수 있는 날이 왔구나.”
기대감으로 장준하는 총을 불끈 쥐었다.
1945년 8월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1)/
연병장에 모인 대원들에게
광복군 대장 이범석 장군은 조국의 광복을 알렸다.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러나 장준하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삭주 땅에서 아버지 장석인 씨와 어머니 김경문 여사 사이에서 1남 1녀중 맏아들로 내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릿골은 압록강의 바람결과 물살이 유난히 세차고, 사방으로는 거문산과 천마산 줄기가 잇닿아 있는 곳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장준하는 국민학교(오늘나의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하여 낮에는 밭에나가 어른들 사이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열세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준하를 삭주의 대관 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입학을 시킨다. 그는 단 1년간의 노력으로 수석졸업을 차지하고 평양 숭실 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신성 중학교로 전학하는데 이 학교에 재학 중 일본식 교육을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결행하다가 여러 차례 징계를 받기도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준하는 약 3년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유학을 간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2)/
1944년 1월 장준하는 일본어 성경과 독일어 사전 등 책 네 권을 들고 학생모 차림으로 일본군 학병에 끌려갔다. 평양의 제42부대에서 학병 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중국으로 가는 선발대에 들어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다.
장준하는 마음속으로
중국으로 가는 선발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기필코 부대를 탈출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중국 쉬저우에서 장준하는 ‘쓰카다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쓰카다 부대는 탈주한 학병이 한 명도 없을 만큼 감시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본군 장교는 조선인 학병들을 시도 때도 없이 위협하곤 했다.
만일 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탈출자는 사형이고
나머지 조선인 학병에게도 무서운 보복이 가해진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조선인 학병들에게 탈출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모두들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에는 내심 탈출을 원하면서도 실패가 두려워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일본군 장교가 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장준하는 민족적인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3)/
어떤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남긴 음식을 던져주면 굶주린 개처럼 몰려가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장준하의 가슴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보다 못한 장준하는 몇몇 동료들에게 말하여 ‘잔반 불식 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굶어 죽을지라도 민족의 자존심만은 지키자고 장준하는 호소했다.
장준하는 부대 내에서 탈출의 뜻을 같이하는 세 명의 동조자를 만날 수 있었다.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이 그들이다. 마침내 그들은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한 기념일을 탈출의 기회로 삼는다. 이날 장준하는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고 있소.”
‘돌베개’는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따온 말이다. 부대를 탈출한 뒤에 드넓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고 찬 서리와 이슬을 맞으며 돌을 베고 자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암시하는 구절이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4)/
대륙의 햇볕은 가혹했고 갈증은 지독했다. 바람은 한 줄기도 없었다. 그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수수밭에서 수숫대를 가져다 씹었다. 그들은 옷을 모두 벗고 그늘이 축축한 흙에 자신의 알몸을 비벼대기도 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밤낮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은 김준엽을 만나 중국 중앙 군관 학교 임천 분교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간다. 훈련반을 졸업한 장준하는 중국군 준위 계급을 받는다.
그러나 조국이 주는 계급장이 아니었기에 반갑지 않았다.
중앙 군관 학교는 장준하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였다.
장준하는 일행을 이끌고 임시 정부로 향한다. 배고픔과 추위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옴이라는 피부병 때문에 온몸이 우툴두툴해지고 진물이 나오면서 가려웠다. 옷을 털면 죽은 이들이 시커멓게 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巴蜀嶺을 넘어 꿈에 그리던 임시 정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준하에게 임시 정부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낡은 건물도 초라했지만 수많은 정파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장준하는 깊은 실망에 빠졌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5)/
임시 정부에서 장준하를 비롯한 청년들이 처참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한 사내가 찾아온다. 키와 골격이 장대한 군복 차림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광복군 참모장 겸 제2 지대장 이범석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안에서 광복군은 미군과 협조하여 국내 침투 작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니, 청년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광복군다운 광복군이 되기 위해 서안으로 떠날 것을 결심한 장준하는 김구 주석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때 김구 주석은 눈물을 흘리며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높이 쳐든다.
*이범석 1900~1972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19년 민주 청산리 대첩 때 김좌진 장군을 도왔다.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6)/
“4월 29일은 내가 윤봉길 군을 죽을 곳에 보냈던 날이오.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소.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침략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윤 의사 말이오.
그는 낡은 내 시계를 차고 대신 새로 산
이 시계를 내게 주었소.
나는 지하에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였소.
나는 지금 여러분의 눈망울에서
윤 의사의 눈동자를 보고 있소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모양이오.
아마도 하늘의 뜻인가 하오.”
임시 정부를 떠난 그들은 미군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OSS는 미군의 전략 첩보대이자 일본 본토 상륙 작전에 대비한 예비 특공 부대라고 할 수 있다. 해외에서 정보 활동과 유격 활동을 병행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것이 주 역할이었다. 그들은 낙하법, 폭파술, 은폐술, 그리고 암벽 등반술 등을 배우고 익혔다.
국내로의 잠입 명령을 기다리던 무렵, 장준하는 1944년 7월 7일부터 8월 3일경까지 써 온 일기장 일곱 권과 손으로 써서 만든 필사본 잡지, 그리고 유서를 인편에 맡겨 고국으로 보낸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7)/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그러나 장준하의 국내 잠입 공작은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후 독립 운동가에서 독재 세력과 맞서 싸우는 언론인, 비뚤어진 현실을 바로잡는 정치인으로, 장준하는 새롭게 태어난다. 그가 만든 잡지 <사상계>는 6.25 전쟁의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정신 풍토에 새로운 양분을 제공했다.
*사상계
<사상思想>이란 잡지를 장준하 선생이 1953년 4월 인수하여 <사상계思想界>로 제호를 바꿔 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사유와 철학을 제공하여 당시 지식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시대를 비판하는 정치 평론을 다수 게재하면서 제3 공화국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1970년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실었다가 강제 폐간되었다.
‘오적’은 당시 부정부패로 물든 권력층을 을미늑약 때의 ‘오적’에 비유하여 꼬집은 당시 형태의 풍자시이다. 이 사건으로 작가와 편집인 등이 국가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8)/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해 일어난 ‘마산 의거’를 보고 <사상계>는 권두언의 제목을 ‘민권 전선의 용사들이여, 편히 쉬시라”라고 비장하게 내걸기도 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 세력과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쿠데타를 주동한 군인을 질타했다.
“4.19는 대낮에 했고, 5.16은 밤중에 몰래 했다.
혁명은 민중이 하는 것이지 군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5.16은 잘못된 불장난이니
군은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99)/
1972년 7.4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장준하는 적극 지지했다. 그해 9월호 <씨알의 소리>에서 장준하는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 명령은 없다.
통인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독재 세력을 가만히 앉아서 볼 장준하가 아니었다. 1973년 장준하는 ‘개헌 청원 백만 인 서명 운동’을 벌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맞선 최초의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당시 이후락 중앙 정보 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이끌어 낸 남북 고위 정치 협상 결과 발표한 성명이다. 자주적 해결,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실현, 민족적 대단결 도모, 중상,비방,무력 도발, 군사적 충돌 방지, 남북 적십자 회담 성사, 서울과 평양 간의 직통 전화 가설, 남북 조절 위원회 구성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0)/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 조치 1호’를 발동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에게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한다. 이후 장준하는 1974년 신병 악화로 형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나와 1975년 1월 8일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처럼 강조한다.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파괴된 민주 질서를 조속히 평화적으로 회복하는 데 있다.”
*1973년12월 24일 서울 YMCA에서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1)/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약사봉 계곡 암벽 아래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다.
향년 57세
목격자에 따르면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고 한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으며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것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고 한다.
의문의 죽음이 아닐 수 없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2)/
*장준하의 빈소
하얀 수염을 기른 이가 함석헌이다.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함석헌은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장준하가 죽었다! 죽었다!
이 한마디가 이 8월의 노염老炎의
무더운 공기마냥 부쳐도, 부쳐도
또 오고 또 와서 가슴을 누릅니다.”
‘장준하 선생 기념 사업회에서는
매년 장준하가 학병에서 탈출한 쉬저우에서 충정까지
6,000리의 길을 현장 체험하는 ‘장정’행사를 벌이고 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3)/
*광복군과 미국의 OSS
광복군은 1945년 5월 미국 정보 기관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협력하여, 한반도 진입을 위한 ‘독수리 작전’에 착수했다. 광복군과 OSS의 협작은 임시 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였다.
OSS와의 합작 훈련은 2지대와 3지대에서 시행됐다. 그중 2지대의 훈련은 서안 근교의 두곡에서 있었다. 20여 명의 OSS 소속 미군 교관이 훈련을 이끌었다. 1기생 50명 중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 병사들도 포함됐다. 첩보 훈련반과 무전 교신반으로 나뉘었고, 훈련 과정은 예비 훈련과 정규 훈련으로 구분됐다.
8월 4일 1기생 훈련이 종료되자, 임시 정부의 OSS는 8월 20일 안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낙하산이나 잠수정 등을 통해 일제 치하의 서울로 침투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한편 3지대의 경우 7월 7일 입황 부근의 미군 부대에 도착한 22명의 대원들이 3개월 예정으로 훈련에 착수했지만 기초 교육 과정이 진행되던 중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4)/
*장준하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출생
1941년 일본 동양 대학 철학과 입학
1944년 일본 신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 탈출하여 독립 운동에 가담
1945년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귀국
1949년 한국 신학 대학 졸업
1953년 <사상계> 창간, 민족,민죽의 길을 밝히는 언론의 사명을 다함.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상 수상.
1966년 대통령 명예 훼손 혐의로 복역
1967년 박정희 유신 정권의 탄압으로 <사상계> 폐간
제7대 신민당 국회의원 당선
1973년 개헌 청원 백만 인 서명 운동
1974년 긴급 조치 제1호 위반 15년 형 선고, 형 집행 정지 가석방.
1975년 8월 17일 유신 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중 포천 약사봉 등산길에서 원인 모를 사고로 절명.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 문화 훈장 추서.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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