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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75세에 정승이 된 자가 두 사람이니 심청천(沈聽天)과 이완성(李完城)이다. 나의 외사촌형 김자한(金自漢)은 62세에 강경(講經)에서 14푼(十四分)을 받아 입격해서 과거에 올랐으니 늘그막에 귀하게 된 경우로서 기이한 일이다.
근래의 재신(宰臣)으로서 90세를 누린 이가 두 사람이니 판부사 원혼(元混)과 삼재(三宰) 송찬(宋贊)이다.
형조참판 이거(李蘧)의 모친은 1백 3세에 죽었다. 상을 당할 때 참판은 77세였고, 큰딸은 85세, 다음 딸은 82세였는데 모두 병이 없었다. 그 노인의 나이가 만 1백세 되었을 때에 임금께서 부인 칭호를 봉하고자 했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히 그 아들에게 우윤(右尹)을 제수하고, 아들의 관직에 따라서 부인의 고명(誥命)을 내렸으며, 이외에도 쌀ㆍ폐백(幣帛)ㆍ술ㆍ고기를 후하게 내리는 등 은사(恩賜)가 많았다. 참판의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벼슬길에 들었고, 손자가 근 1백 명이었으니 또한 당대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강릉부(江陵府) 태화현(太和縣)의 갑사(甲士) 임세적(任世績)은 1백 17세에 죽었으니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근세에 다섯 아들이 문과에 오른 자로는 윤신(尹新)의 아들 후(昫)ㆍ길()ㆍ서(曙)ㆍ감()ㆍ탁(晫)이다. 모두들 2~3년 사이에 연달아서 발탁되었는데, 끝의 세 사람은 먼저 죽었다.
그 다음은 윤해원(尹海原)의 아들 방(昉)ㆍ양(暘)ㆍ휘(暉)ㆍ훤(暄)이 모두들 문과에 합격했고, 벼슬은 모두 당상이었다. 맨 끝으로 서자 한(旰)도 과거에 올랐는데, 자급(資級)과 녹봉이 당상급으로 승진되었다. 다섯 사람이 과거에 오르고, 아울러 당상인 것도 또한 드문 일이다. 이외에 무과로는 원주의 이응해(李應獬)와 부안의 민정란(閔庭鸞) 형제가 있다.
과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서 높게 발탁된 경우로는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이 13년 만에 등용되었는데 이는 감반(甘盤)의 노고가 있기 때문이었고, 좌상(左相) 기자헌(奇自獻)은 15년 만에 정승으로 뽑혔는데, 이는 인아(姻婭_사돈관계)로서 총애를 받아서였다.
연원군(延原君) 이광정(李光庭)과 금계(錦溪) 박동량(朴東亮)이 4년 만에 정옥(頂玉)한 것은 호종(扈從)한 공로 때문이었고, 안종록(安宗祿)이 8년 만에 금대(金帶)를 두른 것은 관리로서의 능력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참의 송준(宋駿)과 참의 성이문(成以文)이 모두 5년 만에 붉은 옷을 입은 것은 청반(淸班)으로 제수되어서 갑자기 승진한 것이었다.
낮은 관직에서 갑자기 승진된 자는 이월사(李月沙 월사는 이정귀(李廷龜)의 호)로, 정유년(선조 30, 1597)에 병부 낭관으로서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서 준직(準職)으로서 집의(執義)가 되는 동시에 당상에 올랐다. 무술년(선조 31, 1598)에는 병조참판으로 발탁되었고, 경자년(선조 33, 1600)에는 호조판서로 승진되었다. 신축년(선조 34, 1601)에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문학으로써 임금에게 인정을 받아서였다.
그 다음 한유천(韓柳川_유천은 한준겸(韓浚謙)의 호)은 정유년에 사간에서 승지가 되었다가 잠깐 후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
최분음(崔汾陰_분음은 최천건(崔天健)의 호)은 정유년에 헌납(獻納)에서 잇달아 사간과 승지로 승진했고, 기해년(선조 32, 1599)에 가자(加資)되어서 지신사(知申事 도승지의 별칭)가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주와 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상(右相) 정언신(鄭彦信)이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를 겸했는데, 같은 때에 장원했던 이충원(李忠元)은 겨우 시정(寺正)이었다. 그 후에 오성(鰲城_이항복의 봉호)도 또한 대신으로서 군기시 제조였고, 같은 때 장원이었던 황치성(黃致誠)이 또한 시정(寺正)으로 있었다. 이 두 경우는 서로 부합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오성이 황치성에게 농담으로,
"그대가 완원(完原_이충원(李忠元)의 봉호)같이 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정 정승[鄭相_정언신을 가리킴]같이 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였다. 대개 완원은 그 후에 일품(一品)에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정 정승은 정승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귀양 가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오성 상공은 해학(諧謔)을 잘하였다. 근래 국가에 변고가 많이 발생하자, 해조(該曹)에서는 으레 대신에게 수의(收議)해서 입계(入啓)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도를 넘어서 작은 일까지도 수의하니 대신들이 괴롭게 여겼다. 하루는 예조 낭관이 수의하러 와서 앞에 있었다. 공이 방금 구상(構想)해서 의견을 말하려 하는데,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여쭙기를,
"말먹이 콩이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므로 공이 꾸짖으며,
"말먹이 콩을 잇대는 것도 대신에게 수의하는가?“
하여 듣는 자가 배를 쥐고 웃었다.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邸宅)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耼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_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킴)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_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 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런 일을 들어서 오성 상공에게 이야기하니 상공이,
"그 동네에 무장(武將)이 있는가?“
하기에 내가,
"성우길(成佑吉)의 관직이 가장 높습니다.“
하니 다시,
"그대와 상대해도 괜찮을까?“
하므로 내가 웃으면서,
"성(成)도 북문(北門)에서 공을 세우면 후세에서 오늘날을 볼 때, 오늘날 예전 일을 보는 것과 같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공이 크게 웃었다.
정승 심연원(沈連源)은 정호음(鄭湖陰)과 같은 신해년(성종 22, 1491)생이었다. 호음이 병자년(중종 11, 1516) 봄 중시(重試)에 장원하고 응교가 되어 찬성 김당(金璫)의 집에 갔다. 심 정승은 김찬성의 사위였는데 김공이 불러내어 호음과 배면(拜面)토록 하였다. 좌정한 다음, 그의 나이를 물으니, 동갑이었다. 그런데 정은 벌써 두 번이나 과거에 올랐는데, 공은 아직 유학(幼學)이어서 그때에 자못 부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그 후 심공(沈公)도 과거에 올라서 좋은 벼슬을 지내고 정부(政府)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은 돈령부 지사(敦寧府知事)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심공이 비로소 추천해서 예조판서가 되었다. 세상에 벼슬이 수없이 변하는 것이 대개 이러한 것이다.
참의(參議) 박미(朴楣)는 아들이 셋이었다. 그 중 소영(召榮)과 증영(增榮)은 모두 일찍 과거에 올라서 함께 이조 낭관이 되니 당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맏이인 광영(光榮)은 그럭저럭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채 40세의 나이로 박사 제자(博士弟子)로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무랐고, 공도 스스로 곤혹(困惑)스럽게 여겼다.
그 후 두 동생은 잇달아 죽었고, 공은 늦게야 과거에 올라서 청요(淸要)한 관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봉군(封君)되었으며 76세에 죽었다. 그의 자손도 연달아서 과거에 올랐고, 재상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러해서 이르고 늦음과 통하고 막힘을 가지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의 외왕부(外王父) 참판공(參判公)은 계묘년(선조 36, 1603)에 영남 방백으로서 두 번째 호조참판이 되었다. 당초에 유공 인숙(柳公仁淑)이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공과의 우의가 두터웠으므로 공을 추천하여 지신사(知申事)로 삼았다. 공은 송인수(宋仁叟)ㆍ구수담(具壽耼)ㆍ이임(李任)ㆍ이해(李瀣) 등과 더불어 자주 삼사(三司)의 망단(望單)에 올라 열여섯 번이나 천거되었으나 끝내 낙점(落點)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겼다. 가장 늦게야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어서 나갔는데, 유공은 그의 외직으로 나감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을사년(선조 38, 1605)에 유공에게 죽음이 내려지자, 그가 천거해서 언관(言官)으로 된 자는 모두 뜻밖의 화변(禍變)을 당했다. 공의 강직함으로써 그때를 당했더라면, 반드시 흉악한 사람들의 노여움에 부딪쳤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하게 외방에 나가 있어서, 도리어 면했으니 화복을 요량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왕부(王父)께서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에 조정의 논의는 안로(安老)를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공의 고향사람이었던 심언광(沈彦光) 형제가 그때 요직에 있었다. 안로는 이들과 은밀히 결탁하고, 기묘년(중종 14, 1519) 화변에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임용하기를 허락하였다. 대개 두 심씨는 그때 화를 당한 사류(士類)를 추서(追敍)해서 심정(沈貞)ㆍ이항(李沆)과 대항코자 하였다. 그러나 도와 줄 사람이 없었는데, 안로의 말을 믿고 힘을 다해서 추진하였다. 그런데 회재 선생(晦齋先生_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를 힘껏 배격하였다. 언광이 말하기를,
"이모가 조정에 있는 한, 안로는 조정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여, 탄핵해 쫓아버리고자 하였다. 왕부께서 만류하며,
"복고(復古 이언적의 자)는 정직한 사람이고 안로는 단정하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사류를 임용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고 착한 선비를 공격함은 불가하다.“
했으나, 언광은 듣지 않았다.
그 후 안로가 조정에 다시 들어오자, 하는 짓이 착하지 못하고, 기묘년의 사람도 수용(收用)하지 않았다. 언광이 비로소 분하게 여겼고, 장옥(張玉) 부자를 죽이려 할 때에는 언광이 힘껏 구원하였기 때문에 안로의 뜻을 거슬려 이조에서 함경 방백으로 제수되어 나갔다.
그 뒤 다시 안로가 쫓겨가자 언광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소환하니 당시 논의는,
"언광이 아니었으면 안로가 어찌해서 조정에 들어왔겠는가. 그 후에는 비록 대립(對立)했으나 도헌(都憲)으로는 제수할 수 없다.“
하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왕부께서 그때에 강원도 방백으로 있었는데, 노상에서 만나 위로하였다. 언광이 손을 잡으면서,
"군자(君子)가 그 천거함을 조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을 실패한다고 예부터 경계하였는데, 나는 능히 실천하지 못했으니 공이 한 말을 생각하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이것으로써 한을 품고 집에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
외왕부의 아우 광진(光軫)도 벼슬이 참판이었다. 소시 적에 판윤(判尹) 최연(崔演)과 함께 절에 가서 공부하였다. 《주역(周易)》을 읽다가 반이 못 되었는데 설날이 되었다. 두 분이 함께 근친(覲親)하러 돌아가는 도중에 각자 공부한 것을 외었다. 최공은 잊은 것이 있었으므로 곧 절로 되돌아 올라가서 죄다 왼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전배(前輩)가 배움에 뜻이 독실했음이 이와 같았다.
최연(崔演)은 문장에 능하고, 용모가 아담해서 악담(岳湛)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과거에 급제하니, 여러 공이 사랑하였다. 그가 호당(湖堂)과 홍문관에 들어간 것은 모두 생김새 때문이었다. 정릉(靖陵_중종을 가리킴)께서도 그의 아름다운 용의(容儀)를 칭찬하였다. 일찍이 연일 야대(夜對)했는데 내관(內官)이 너무 자주함을 품(稟)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내가 최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다.“
하였는데, 이는 공이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라 한다.
가정(嘉靖_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신축년(중종 36, 1541)에 외왕부께서 호남 방백이 되었다. 아우 참판공은 그때 경상 우병사(右兵使)로 있었는데, 쌍계역(雙溪驛)에 모여서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갑진년(중종 39, 1544)에 왕부께서 영남 방백이 되었고, 공이 또 호남을 안무(按撫)하게 되었다. 또 쌍계역에서 제사를 거행했는데 양남(兩南)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강원도는 지역이 비좁은데,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에 많은 이름난 인사가 많았다.
건국 초기에는 강릉에서 유명한 정승이 많이 나왔으나, 공헌왕(恭憲王) 때부터 높은 관직을 한 사람이 전혀 없다. 원주에는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 판서(判書) 이개(李墍)가 가장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과거에 높게 합격한 자가 잇달아 나왔으나, 다만 얼마 못 되어서 죽는 자가 많다. 강릉에는 태사(太史) 최대중(崔大中)이 과거에 합격한 지 서른 해 만에 비로소 이오(李璈)가 과거에 급제했다 한다.
원주 사람 고경오(高敬吾)는 을사년(선조 38, 1605) 증광 향시(增廣鄕試)에서 홍수불벽(紅袖拂壁)이라는 부(賦)를 지어 일등으로 장원했고, 남성(南省)은 서명벽상(書名壁上)이라는 부를 지어 합격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성균관 관원으로 있다가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장폐(杖斃)되었으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