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니스 성호스피시오 성당
2024. 7. 19
오바드야서, 요나서
(오바 1,3~4)
네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 내리리라.
(오바 1,13)
그 재앙의 날에 너라도
그의 불행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요나 1,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해 타르시스로 달아
나려고 길을 나서..
(요나 4,4~11 참조)
네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묵상ㅡ
오늘 뽑은 헤드카피가
4개나 된다.
옴니버스 형식이 되겠다.
재밌어야 할 텐데..
챕터 1,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 내리리라.
(오바 1, 4)
왜?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속인다는
말, 자아인식을 어설프게
하면 내 안에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숨어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화가 난줄 알았는데
들여다보면 외로움이었고,
억울한 것같은데
알고보면 슬픔이었던
경우, 많았을 터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해서
주제넘게 개입하고 판단하여,
교만을 저지르는거다.
오바드야서의 주님께서는
너를 속일정도로 간사한
교만의 상태가 되었을시,
거기(있는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신다.
아무리 높이 치솟고
별들 사이에 있더라도..
옴마야, 무섭다요.
구약을 읽다보니,
주님께서는 우리를
저승으로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는 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공감된다.
헉헉 거리며 구원의
산에 올랐건만,
마음 좀 돌아섰다고
바로 끌어내리신다니,
그것도 올라간 만큼의
수고로 되돌아 내려오는
수준이 아닌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끌어내려지는듯한 그런
찰나의 경지로 말이다.
소화데레사 성녀의
엘리베이터 영성이 있다.
우리가 완덕의 정상에
오르기엔 한계가 있어서
괜히 가파른 계단을 오르지
말고, 예수님의 두팔이
엘리베이터라고 여겨
그분이 우리를 쉽고
빠른 지름길로 끌어
올려주신다는 믿음으로
올라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이처럼 가벼운 빈손,
가난의 상태가 되어
당신의 팔에 매달릴것을
촉구하신다.
위로 거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지
아래 구렁으로 곤두박질
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아휴, 상상만 해도 어둡고
비통하다.
하여튼 주님은 고성능
엘리베이터를 여러대
소유하신 사장님이시다.
상기하자, 엘리베이터!!
챕터 2,
(오바 1,13)
그 재앙의 날에 너라도
그의 불행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십계명엔,
ㅇㅇ하지 마라,
ㅇㅇ해라.
이런 식의 규정이 있다.
둘 다 지키기가 어렵다.
여기에선 너희가 하지
말아야 했다. 는 문장으로
에돔의 죄악을 시장
좌판에 깔아놓은 물건
헤아리듯이 말씀하신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이해해라 베풀어라
선행해라 기타등등
내가 그를 사랑했나?
그의 허물을 이해했나?
그의 잘못을 용서했나?
가난한 그를 도왔나?
이렇게 성찰해야 할
것들이다.
반대로, ㅇㅇ하지 말아야
했다. 에 대한 성찰은,
어제 유투브를 보지 말아야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더 경청해야 했다.
가족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했다. 전화하지 말아야 했다.
담배를 많이 피지
말아야 했다.
일을 너무 과하게 하지
말아야 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했다.
기타등등
일상에서 내가 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소소하게 돌아볼수
있게 해준 대목이었다.
챕터 2,
(요나 1,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해 타르시스로 달아
나려고 길을 나서..
니네베가 벌받게
생겼으니 가서
회개하라고 외쳐라.고
했건만, 그는 니네베가
아닌 타르시스로 갔다.
괜히 가서 듣기싫은 말
했다가 미움받으면
어쩌라고, 또 나 걔들
평소에 맘에 안들었는데
회개하라고 했다가
진짜 회개해서 주님이
용서하시면 어쩌누,
안좋은 역할은 다른
사람 시키세요. 저는
제가 할수 있는것만
순종할게요.
나에게도 있을법한
태도와 편견, 고집과
회피의 기제들이다.
요세피나야,
그 사람이 지금 어둠에
싸인것 같으니 가서
기도해주고 맘을 나에게
향하도록 도와주렴,
부탁한다 안그럼 걔
나한테 혼날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거기(니네베)로
가지않고 타르시스(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장소)로
가서 나몰라라 하는거다.
괜히 내가 나서서 인심
잃을 게 뭐야. 싫은소리
못하는거 아시면서.
그리고 나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은 신념있는데
나를 싫어하고 외면해서
혼자 남게 될까봐 겁나.
그래서 니네베(주님 뜻)가
아닌 타르시스
(성체조배실,내 맘대로
하고싶은 편안한 장소 등)로
도망갈 때가 많은 거다.
또 상대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행하면 다행인데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너는 상관하지마.'라고
하면서 늘 해오던
자기 고집대로 반응한다면,
'그렇지.말해봐야
안들을거야.'라는 선입견에
매여서 요나처럼 포기해
버릴수도 있겠다.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영적인 조언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인데,
요나같은 상황이라면
아뜩해질게 뻔하다.
요나의 마음이 엄청 공감되었다.
챕터 4,
(요나 4,4~11 참조)
네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질문만 던지시고는 말씀이
없으시다. 대체 어쩌라고.
이런 질문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열린질문이라고 한다.
상대가 단답식으로 예,
아니오. 라고만 답하지
않도록 배려한 질문이다.
주님이 몰라서 물으실까.
아니다.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시면 분명 그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해야 상대가
원하는 답을 할지를 고민한다.
상대가 자기 안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활짝 열어놓은 질문,
그러려면 질문자가
성숙해야 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답을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신념이 있는 사람은,
그런 기다림이 필요한
질문을 하기가 어렵다.
상대의 내면에서도
내 안에서처럼 역동적이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가 알아서 답을 찾을 힘이
있음을 믿어줄때 그런 열린 질문이
가능해지는것 같다.
짧은 분량이지만 내 일상생활과
연결되는 구절이 많아서
묵상이 풍요로웠다.
주님,
당신은 니네베가
망할것을 걱정하신
나머지 중재자 요나를
선택하셨습니다.
누군가를 깨우쳐주고
영적 생명을 심어
주기 위해서는 꼭
중간에서 역할을
해주는 심부름꾼이
있었다는 것,
그 부르심엔 평범한
나를 포함, 내친구와
부모와 가족도
포함될수 있다는 것,
다시금 살펴봤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가서
당신말씀을 전해야
한다면, 더도 덜도
말고, 있는대로만
예, 아니오 라고
말할수 있게 해주소서.
그리 말씀하신
주님의 단순성을
닮아 꼭 해야할 말만
하게 해주소서.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