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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수용과 고양 - 전란 후 향촌사림의 시조
장성진(창원대 교수)
1. 시대 변화
조선시대 사회와 문화 전체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은 상식이면서도 의미가 있다. 왕조의 존속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변화의 계기도 적지 않았지만, 그 중간 지점에서 겪었던 두 차례의 전란은 너무 충격적이었고, 그와 관련된 제도와 현실의 변화가 총체적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제시된 일반론이다. 한편 역사적 사건이나 일부 제도의 개편을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는 것이 사실을 과장시킨다거나, 분야에 따라서는 변화보다 지속성이 더 큰데도 일괄해서 처리함으로써 도식성의 폐해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16세기와 17세기 엘리트 집단의 사상적 기반이 변화보다는 지속에 더 큰 의의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두 세기를 묶어서 조선 중기로 설정하는 편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수용되기도 한다. 엘리트 집단과 사상에 관심을 집중시켜 보면 이 주장은 대체로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분야별 변화의 폭과 변화가 지속된 기간의 차이를 고려하고, 변화의 내외적 원인을 종합해서 보면 16세기와 17세기를 나누어 살피는 것이 역시 설명의 편의뿐 아니라 더 실체에 부합된다고 하겠다. 문학의 경우는 변화의 폭과 시기에 대하여 좀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하며, 그 중에서도 시조와 같이 정형성이 강한 양식에 대해서는 더욱 유의해야 변화와 지속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시조 작가의 신분 계층, 그들의 위상 변화, 시조를 실현시키는 음악 등 여러 요소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변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이다. 첫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외적 충격이다. 이 두 전란은 조선조에서 겪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일시에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판탕된 점에서는 같지만, 전란의 원인과 진행 과정, 전란의 기간과 지역, 실제로 피해를 입은 계층과 내용 등에서는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전란이 끝난 뒤 국가에서 결과를 처리하는 과정과, 영향의 지속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나아가 그것이 기억되는 방식에서는 더욱 큰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이 피해는 더 컸지만 잊어야 할 전쟁으로 인식되었다면, 병자호란은 잊지 말아야 할 전쟁으로 남은 것이다. 둘째, 유학자의 위상 변화이다. 유학자의 학문 내용이나 사회적 위상과 지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적은 없다. 그것은 유학이라는 학문의 총체성에 기인한다. 가령 한 개인으로서는 정치로 일생을 보낸 경우도 있고, 반대로 한 번도 정치에 입문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생의 전반기는 학문만 하다가 후반에 정계에 진출한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일찍 정계에 진출했다가 후반에는 물러나 학문에만 전념한 경우도 흔히 있다. 이들은 삶의 태도를 선택한 방식이 서로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유학의 이념이 개인으로서 자기 수양에서부터 궁극적으로 정치를 통한 세상 교화에까지 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수양은 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하며, 정치적 실천은 반드시 학문과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기에 따라 서로 차이가 나는 엘리트들의 삶을 두고 유학의 목표나 사상 체계가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같은 유학자이면서 삶이 다른 것은 원칙적으로 그가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나 개인의 선택으로 볼 수 있지만, 경향으로서의 차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궁극적인 목표가 같으면서도 어느 한 요소의 비중이 급격히 커진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유학자들의 경향이 바뀌고, 그로 인해 문학의 지향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유학자들이 처한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상황이란 양반의 수적 증가와 그에 따른 현실적 진출 기회의 축소라는 것을 제일 먼저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창의한 선비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직 관리로 임용되었다. 비록 녹봉을 받을 처지는 못 되고, 난중에 임시로 만든 자리가 많았지만, 적어도 신분의 변화는 컸다. 전란이 끝나자 많은 이들이 명분상의 양반으로 남았으며, 게다가 공명첩의 대대적 발급으로 양반의 수가 급증하면서 이전과는 양반의 현실적 위상이 급변하였다. 여기서 그들의 지향도 다양해지고, 이것이 문학으로 표출된 것이다. 셋째, 음악 쪽의 사정이다. 건국 초기 궁중 예악에 관심이 경도되고, 예악 완성 이후에는 건국 주체세력 또는 그 자손들 사이에 특권적 예악 향유가 유행하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훈구 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하고, 학문을 바탕으로 한 사림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음악에 대한 관념과 수용이 차츰 변하였다. 연향으로서의 음악 향수가 풍류로서의 음악으로 바뀌고, 나아가 음악은 권력의 표출이 아니라 선비가 가지는 교양으로 인식되어 갔다. 여기서 듣고 즐기는 음악에서 가다듬고 연주하는 음악으로 나아간 것이다. 특히 사림들이 정치 현실에서 훈구 세력의 권력에 밀려 향촌사림으로 자리를 잡고, 수양과 교육에 전념하는 단계에서 음악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서원이 발달함으로써 후진에 대한 교학과 선현에 대한 향사가 동시에 이루어지자, 정치적 예악의 관념이 학문적 예악으로 바뀌어 음악 교육이 중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음악과 시는 성정의 조화로운 활동으로 여겨졌으며, 나아가 필수적 교양으로 교육되었다. 그들에게 중요하게 선택된 악기가 바로 거문고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거문고는 선비들에 의해서 거문고 음악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도 그 반주에 의해 시를 노래로 읊고 풍류를 즐기는 수단으로 애용되었던 현악기였다.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까지 시조가 어떤 음악으로 실현되었는지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았다. 고려의 삼진작에서부터 시조의 원형이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데까지는 폭넓게 인정되지만, 정작 시조가 가창된 악보를 재구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성악곡으로서의 구체적 한 형식은 조선 전기의 향악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대엽과 그 후속곡이다. 임란 이전에 이미 성악곡의 독특한 형식이 만대엽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노래의 형식은 다섯 장과 여음으로 구성되었다. 다섯 장과 여음으로 구성된 만대엽의 형식은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중대엽과 삭대엽, 나아가 그 발전형인 가곡의 형식 형성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으므로, 음악사적인 견지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만대엽과 중대엽이 시조형만을 싣는 음악은 아니었으나, 시조에 가까운 시형을 그 가사로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조는 조선 전기에 만대엽으로 불리다가 중기 이후 중대엽으로 발전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는 삭대엽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의 변주곡이 다양해짐으로써 시조를 노랫말로 삼는 가곡이 전성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현금동문유기(1620)와 금보신증가령(1680) 등에는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이 모두 기보되어 있어서, 임란 후 중대엽과 삭대엽이 만대엽을 대신하여 발전해 간 모습을 보인다. 또 17세기에는 중대엽이 번성하다가 18세기에 들면 이미 삭대엽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위의 문헌들이 모두 금보 즉 거문고를 연주하기 위한 악보인데, 여기에 시조형의 노랫말이 곁들여졌다는 점에서 거문고 반주에 의한 시조의 다양한 가창을 짐작할 수 있다.
2. 전란의 기억과 회한
1) 전쟁이 아닌 전란
임진왜란은 한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전쟁으로서 피해와 충격의 정도도 심각하였던 만큼, 그 성격을 간단하게 규명할 수 없다. 조선왕조의 중심권에서 설명을 하자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사회가 안정되고 중세적 문화가 한창 발달하고 있을 때,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와, 나라의 체통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백성들은 나라를 위하는 충정에 불타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의병이 되고, 종주국인 명나라가 못된 왜를 징계하고자 출정하여 점차 세력의 균형을 회복하고, 마침내 적보다 강하게 되자 적이 물러가고 다시 안정을 찾았다고 설명하면 된다. <징비록>의 서문에서도 전란이 끝난 것을 두고 “하늘이 도운 것”이며, “조종의 어진 은덕이 백성에게 미친 것”이며, “임금의 사대하는 마음이 황제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 실제로 조선조의 지배계급들이 설명하는 임진왜란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시각을 확대하면 오히려 복잡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의문은 전쟁의 원인, 진행, 결과 등에 걸쳐 수많은 갈래를 낳는다. 결정적인 갈등이 없었는데 왜 그다지 큰 전쟁이 일어났는가, 관군은 왜 한 차례도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고 무너졌는가, 어째서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전국이 유린되었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전쟁은 7년을 끌었는가, 명나라는 왜 개입했으며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전쟁은 어떻게 끝났는가, 전후 당사국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은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그것은 제값을 한 변화인가 하는 것들이 모두 분명하지 않다. 전쟁을 일으킨 계기에 있어서 조선은 수동적이었고 일본은 능동적이었다. 일본은 그 전까지의 분립된 막부들이 내전을 통하여 통일되자, 이 세력들을 교묘히 억누르는 방안으로 조선 정벌을 계획했다. 전쟁에 이기면 새로운 통치 지역을 나누어 가지고, 지면 위험세력들이 저절로 제거되니 이래나 저래나 좋은 책략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전쟁 따위를 생각하는 것이 문화국으로서의 명분을 손상시키는 일이라 여겨 국방 같은 건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전쟁의 진행도 이와 관계가 있다. 주요 지휘관이 문신들이어서 싸울 줄 모르는 데다가 싸울 의지마저 없었으니 전투는 아예 성립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예외적인 벼슬아치들이 적을 맞아 도망하지 않고 의연히 죽는 기개를 보인 정도이다. 왜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산에서 의주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의병의 봉기는 전쟁 초기부터 있었으며, 실제로는 관군을 대신하거나 관군의 주력부대로 편성되었다. 주로 자기 지역을 지키고, 지역에서의 생활권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였으므로 싸울 이유가 분명하였고, 익숙한 지리적 상황 등을 이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전국 단위에서는 원군인 명군도, 침략 지휘부인 일본의 통치자들도 전쟁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화전 양면전을 펼쳤다. 전쟁의 종식은 조선의 저항력이 강해진 데도 원인이 있지만,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침략군들이 본국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려는 욕망이 합쳐져서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참담한 전쟁은 끝났으나 그 결과는 각국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났다. 일본은 전쟁 결과 도쿠가와에 의한 완전 통일이 이루어져 중앙집권적 중세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중국은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 빌미가 되어 명청 교체를 맞았다. 이것은 단순한 왕조교체를 넘어서 한족의 지배에서 만주족의 지배라는 큰 변화이다. 그런데 정작 전쟁의 현장이었으며, 참혹한 피해를 입은 조선에서는 왕조의 교체는커녕 지배층의 변화조차 없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임란의 성격이 영토 또는 통치권보다 물자 확보를 위한 장기전이었다는 데 한 원인이 있다. 이 때문에 지배층은 전투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그 세력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일반 백성들과 지방의 선비들은 전쟁의 당사자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사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두 계층의 입지와 주장은 확연히 달랐으며 갈등을 겪었다. 서민층에서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자각과 함께 양반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게 인식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기 문화를 사회의 중심에 놓으려는 생각보다는 자기도 중심 문화의 향수자로 옮겨가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계층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개인적 수직 이동을 꿈꾸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편 지배층에서는 전후 재정난을 타개하고 서민들의 신분적 요구를 수용하여 부분적 개혁책을 시행하였다. 이른바 납속책을 실시하여, 상민을 양반으로 또는 천민을 상민으로 상승시킨 것이다. 이것은 양반계층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임란 도중에 창의하였거나 관료로서 이룩한 공적을 찾아 이것을 미화시키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어쨌거나 조선 전기에 철저히 강화되었던 신분의 벽이 다소 허물어진 것은 사실이다. 생득적으로만 가능했던 양반사회에의 편입이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도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민층의 진출은 곧장 한계에 부딪혔다. 왜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양반 사대부들이 전대 질서의 강화를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곧 왕조의 위기와 국가의 피폐는 오랑캐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중세적 질서를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거세어졌다. 임금과 나라를 위한 충성심을 더욱 다지고, 국가적 요구 앞에 개인적 욕망을 자제해야 하며, 유교 이념을 더 넓고 깊게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반 계층은 서민들을 물러앉히고, 대신 붕당을 강화하여 수적으로 증가된 양반의 특권을 그 내부에서 독점하기 위한 갈등을 전개하였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이미 동아시아의 패자로 성장한 후금(後金)의 막강한 힘과 중원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목표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 오랑캐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에서 전란이 시작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가중되는 후금의 요구와 이에 대한 강온 대응론이 마침내 척화배금론을 거쳐 주전론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636년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개칭하고 정식으로 조선에 대하여 종주국을 자처하는 여러 정책을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조선이 거부함으로써 그 해 12월 전쟁이 일어났다. 건국 초기에 위세 과시를 겸한 청의 공격은 규모와 속도에서 조선의 예상을 앞질렀다. 청군의 진격 속도는 조선의 상황 파악을 앞질렀으므로, 거점 지역의 항거나 타지역 군대의 움직임도 무력화되고, 인조의 강화도 피난길마저 선점당하여,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갇혔다. 12월 9일에 압록강을 건넌 청군이 불과 1주일만인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니,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인근 몇몇 고을과 성 주변에서 소소한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1월 3일에 화의 문서를 채택하고, 청의 추가 요구와 조선의 주화 양론이 갈등을 일으켰지만 결국 1월 30일에 왕이 삼전도에 나가 직접 항복 의식을 행함으로써 호란은 끝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수없이 많은 의병장들이 자의타의로 포상을 받은 것과는 달리 병자호란이 끝나고는 패전에 대해 다소 가혹한 징벌이 가해졌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전투를 한 사람은 몇 없었다. 전쟁이 급속히 전개됨으로써 참전의 기회를 잃은 것인지, 전쟁이 끝난 뒤 그저 허세를 부린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대신 심양에서 포로생활을 해 본 효종을 포함하여 정치 관료들이 북벌론을 외쳐댔지만 실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2) 시조 속의 전란
임란을 겪고 나서 시조문학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가 나타났다. 장르 성격상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직접 제재로 선택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주제 면에서는 다양성을 보여 주는 한 양상이다. 이 다양성은 무엇보다 작자가 증가한 데서 가장 큰 계기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도 작자는 여전히 양반 계층으로 한정되었으며, 그들의 사고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는 데서는 전대의 경향을 대체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양반의 생활이 전대와 같을 수만은 없었으며, 체험과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전란은 그 체험의 실체이기도 하고 계기이기도 하며 또한 기억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을 직접 소재로 한 작가와 작품은 의외로 적다. 이 “의외”라는 것은 상식적 기대 지평에서 의외라는 것이지, 실제로는 지배층의 당대적 관심을 오히려 잘 드러내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런 중에도 이덕일(李德一)의 우국가 28수는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더구나 그의 문집인 <칠실유고(漆室遺稿)>에 수록되어 있어서 서지적 가치도 크다. 이덕일(1561 ~ 1622)은 의병으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이후 관료로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한 점에서 이 시기의 인물로서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 읽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정유재란 때 피난민을 모집하여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산에 거점을 두고 싸워 전과를 많이 올리자 통제사 이순신과도 교유를 하였다. 이순신 사후 성을 쌓아 적을 제압할 방책을 논하여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에 올랐으며, 뒤에 통제영의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의금부의 탄핵으로 삭직을 당하였다. 경력에서 보듯이 사류의 학맥에 의해서가 아니라 30대에 전란 중 무과와 의병활동을 통하여 관계에 나아갔으며, 개인적 역량으로 관직을 수행하다가 정쟁 때문에 파직을 당하였다. 권력의 중심 세력과 인척관계에 있었으나 비교적 하위직과 외직으로 일관하였으니 개인적 성품이 곧았으며, 당파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지은 시조 <우국가>에는 그러한 비판의식이 다분히 깔려 있다. 28 편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주제가 작품군을 이룬다. 대체로 자탄을 포함한 성찰, 당대의 현실과 관료들에 대한 비판, 우국과 권유 등 시대적 특성이 뚜렷하다. 이것은 시조를 보면 표면에 드러난다. 첫째, 자탄과 자성이다. 양반 관료층에서는 임진왜란을 두고 천병(天兵)인 명나라 군사의 도움이라든가, 천명의 보살핌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병과 관료를 지낸 작자가 스스로 탄식과 성찰을 하는 것은 중요한 성과이다. 전란을 현장에서 겪고, 백성들의 참상을 바라본 사람들 중에는 전통적으로 학맥과 인맥에 의해 관료가 된 사람들과 시각차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문(學文)을 후리치고 문무(文武)를 하온 뜻은 삼척검(三尺劍) 둘러메고 진심보국(盡心報國) 하렸더니 한 일도 하옴이 없으니 눈물겨워 하노라.
나라에 못 잊을 것은 왜 밖에 다시 없다 의관(衣冠) 문물(文物)을 이렇도록 더럽힌고 이 원수(怨讐) 못내 갚을까 칼만 갈고 있노라.
앞의 작품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과제와 그에 대한 자신의 좌표를 읊었다. 초장에서 문장을 공부하다가 내던지고 문무를 한다고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서 당장 필요한 것은 무예나 무술이지만 그것을 직접 들추지는 않고 “문무”를 겸한다고 하였다. 문학만 공부하다가 나이 들어서 무예를 단시간에 쓸모 있을 정도로 연마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문이 없이 무를 내세우는 것은 유학자들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장의 “삼척검”과 “진심”으로 이어진다. 무술로서 칼은 적 또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도구이지만, 그 칼마저도 “진심”이라는 나의 주체적 태도를 위해 쓰이고, “보국”이라는 이쪽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는 문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으로서 이룩한 “나”의 작은 승리나 관리로서 이룬 일상 공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내세울 성취가 아니라 “임금”을 위해서는 눈물겨울 수밖에 없는 실패이다. 뒤의 작품은 구성이 반대이다. 초장과 중장에서는 객관적 사실을 서술하고 종장에서는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나라에서 잊지 못할 것은 왜 밖에 없다고 했으니, 주체와 대상이 모두 객관적 집단이다. 중장에서는 이유를 밝혔는데, 의관문물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의관문물이 더렵혀진 것은 예(禮)에 속한 문제이다. 현실 전쟁인 임진왜란의 피해를 추상적이고 고급스러운 의관문물로 들추는 데서 상층부 의식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의관문물을 내부적으로 회복하는 정도로 처리하고 말 수 없어서 원수를 갚고자 칼을 갈고 있다고 하였다. 종장의 이러한 결의는 이전의 시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태도이다. 서정성을 가장 큰 문학적 속성으로 확보한 시조는 어떻든 가치를 내면화하려고 애쓰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대상을 향한 행동만이 내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보인다. 현실 인식이 한걸음 나아간 모습이다. 둘째, 비판과 권유이다. 어느 학파나 편당에 속하지 않았던 작자로서는 현실의 객관적 상황과 인물에 대하여 비판하였으며, 특히 관료들의 무책임함과 당쟁에 대하여 신랄하다. 자성을 한 다음의 비판이기 때문에 진실성을 얻는데, 구성상의 연시조는 이러한 효과를 확보할 수 있는 장치이다.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옷밥에 묻혀 있어 할 일 없어 싸우누나 아마도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어이하리.
어와 가소(可笑)로다 인간사(人間事) 가소(可笑)로다 모없이 궁글여 시비(是非)를 아니한다 아무나 공도(公道)를 지키어 모나본들 어떠하리.
싸움을 소재로 하여 싸우지 말아야 하는데 싸우는 일과, 싸워야 하는데 싸움을 피하는 일을 비판하였다. 앞 작품에서는 정작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숨었다가 전란이 끝나자 다시 관계에 나와서 싸우는 관료들을 질타하였다. 싸우는 당사자들은 저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힘써 내세우지만 그것은 옷과 밥이 넘치니 할 일이 없어서 싸우는 것이라고 일갈하였다. 전란 때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옷과 밥이 없어서 굶주리고 죽어가는데, 옷밥이 넘쳐서 싸움질만 하는 이들은 도적과 다름없다. 그러고도 그치지 않으니 다시 어쩌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물음 속에는 다시 전란이 닥친다는 경고가 숨어 있다.
동서 남북에 뭇싸움 일어나니 / 밀치며 당기며 말할시고 일할시고 이좋은 수령들 물어뜯나니 백성이요 / 톱좋은 변장들 허무나니 군사로다 재화로 성쌓으니 만장을 뉘넘으며 / 고혈로 해자파니 천척을 뉘건너료 기라연 금수장에 추월춘풍 수이간다 / 해도 길건마는 병촉유 그어떨꼬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던 선산 출신 선비 최현(崔睍)이 지은 <용사음(龍蛇吟)>의 일부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장르로 표현한 좋은 예이다. 가사는 개방적 장르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하기에 적합하고, 시조는 폐쇄적 장르이기 때문에 함축적으로 묘사하기에 적합하다. 뒤의 작품은 시비의 진정한 가치를 역설한 독특한 주제를 표출하였는데, 연시조의 효과를 아주 잘 살렸다. 일반적으로도 세속의 시비를 무익하거나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는 시가 많으며, 이덕일의 <우국가>에서도 파당과 공연한 시비를 가장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직접 내세운 작품의 초장만 보아도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 이는 저 외다 하고 저는 이 외다 하네”, “말을지여 말을지여 이 싸움 말을지여”, “말리소서 말리소서 이 싸움 말리소서”, “이 이긴들 즐거우며 저 진다 서러울소냐”, “이 외나 저 외나 중에 그만저만 던져두고”, “이쪽이라 다 옳으며 저쪽이라 다 그르랴”, “알고 그러는가 모르고 그러는가” 등 여러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뒤집어서 모 없이 둥글둥글하게 시비를 회피하는 일을 비판하였다. 공도(公道)를 지켜서 모가 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주견 없이 파당적 주장에만 묻혀가는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앞서 예로 든 여러 작품 속에서 이 역설은 빛을 발하니, 이것이 바로 연시조의 의미를 잘 알고 활용한 예이다. 관료들에 대하여 이런 정도로 비판을 가한 시조가 이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도 현실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책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전체의 주된 경향인 비판적 작품은 다른 면에서 대안을 전제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과제를 내세운 작품은 주제 의식을 더 강하게 드러내었다.
말으소서 말으소서 이도(移都) 뜻 말으소서 일백 적 권하여도 말으소서 말으소서 향백년(享百年) 불발공기(不拔鞏基)를 던져 어이 하시리까
성 있으되 막으랴 왜 와도 하릴없다 삼백 이십 주에 어찌어찌 지킬 게요 아무리 진신정졸(盡臣精卒)인들 의거 없이 어이하리.
베 나아 공부대답(貢賦對答) 쌀 찧어 요역대답(徭役對答) 옷 벗은 적자(赤子)들이 배고파 설워하니 원컨대 이 뜻 알으사 선혜(宣惠) 고루 하소서.
세 작품 다 군주의 올바를 태도를 촉구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도읍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왕의 잘못된 판단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두 번째 작품에서는 추상적으로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뒤에서는 구체적으로 선혜 곧 구휼사업을 고루 하라고 진언하였다. 작자는 축성 사업을 가장 절실하게 추진하였고, 그것으로 관직의 성공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성의 가치에 대하여 잘 알았다. 첫째 작품에서는 전란 중 선조가 도성을 떠나 자주 행궁을 옮긴 사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전란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한양 대신 새로운 도읍지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난 데 대하여 반대하였다. 성은 버릴 대상이 아니라 공고한 기반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왕을 직접 비판할 수 없어서 일백 번 권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성이 있어도 왜군이 오자 어찌해 볼 수 없었던 경험을 말하였다. 전국에 320 개나 되는 고을을 어떻게 지키겠느냐고 반문도 하였다 결국은 충성스러운 신하들과 정예한 병졸들이 의거할 대상 곧 임금의 확고한 신뢰가 없이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마치 맹자가 성을 지킴에 있어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보다 인화(人和)가 훨씬 중요하다고 한 말을 되풀이한 듯하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에서는 백성들이 베를 짜고 쌀을 찧어서 각종 세금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파서 서러워 하니, 임금은 그 취지를 알아서 혜택을 고루 베푸시라고 요구한다. 고루 베푸시라는 말은 백성들의 세금이 부당하게 관료들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이덕일의 시조에서는 임란의 원인을 당파싸움과 사리사욕 추구에서 찾고, 그것이 임금과 나라에 치욕을 불러왔다는 판단과 함께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움을 그만둘 것을 여러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다. 비판과 권유의 대상을 관료에게 집중시키고, 시비의 내용보다 싸우지 말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현실 타개책을 개인의 충성심과 예의 회복에 두는 등 의식의 한계를 내보이지만, 임금에게도 의무를 요구하고, 민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짐으로써 현실인식의 진전을 보여 준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대표적 작품은 이정환(李廷煥)의 <비가(悲歌)> 열 수이다. 이정환은 병자호란 직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를 하지 못하다가 호란 이후에는 향리에 은거하였다는 정도로만 알려진 한미한 인물이다. 호란의 치욕은 충신이 없어서 당했다고 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충신을 기렸다. 그러나 나라나 백성을 두고 읊은 것이 아니라 주로 심양에 잡혀간 두 왕자를 구해낼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여서, 이덕일의 작품보다 사회성이 얕다.
박제상(朴堤上) 죽은 후에 임의 시름 알 이 없다 이역(異域) 춘궁(春宮)을 뉘라서 모셔 오리 지금에 치술령귀혼(鵄述嶺歸魂)을 못내 슬퍼하노라.
후생 죽은 후에 항왕을 뉘 달래리 초군(楚軍) 삼년(三年)에 간고(艱苦)도 그지없다 어느 제 한일(漢日)이 밝아 태공(太公) 오게 할꼬?
두 작품 모두 볼모로 잡혀간 왕족을 구한 고사를 활용하여, 청에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하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박제상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제(王弟)를 몰래 귀국시키고 순절한 인물로, 악부를 포함하여 수많은 한시에 활용된 인물이다. 치술령은 박제상이 떠난 사실을 뒤늦게 안 부인과 딸이 올라서 일본을 바라보다가 돌이 된 곳으로서, 박제상의 혼이 여기에 돌아왔다고 함으로써 충과 효와 열을 동시에 상징하는 공간으로 설정하였다. 후공(侯公)은 유방의 사신으로 항우에게 가서 유방의 부친 곧 태공을 구해온 인물이다. 태공이 돌아온 사실과 한나라의 건국을 동일시함으로써 두 왕자를 구해내는 일이 조선의 국운에 관계된다는 점을 암시하였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작품은 관료들에 의해 더러 지어졌다. 다만 국가나 백성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다는 자괴심과 왕자들의 욕됨을 설치하지 못한 울분으로 일관함으로써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3. 생활과 윤리의 접근
1) 유학자의 향촌 생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는 몇 차례의 사화는 정치적 성패를 떠나서 사림의 성격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학문과 윤리를 바탕으로 한 신진사류들이, 정변을 통해 권력과 부를 독점한 훈구 세력들과 힘겹게 싸우고 패배하면서 유대감과 학문적 이상을 고양시켜 나갔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치에 대하여 가치를 낮게 보거나 욕망을 접은 것은 아니다.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적어지고 관직에 종사하는 기간이 짧아졌다는 것이다. 사림들은 향촌에 물러나 있으면서 비교적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유지한 채 학문과 교육에 힘을 기울여, 학맥이라는 이름으로 인맥을 쌓아갔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림들이 실질적으로 정계를 장악하였지만 초기의 지향대로 이상 정치는 펼치지 못했다. 훈구파와의 대립이 해소되자 사림들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을 통하여 맺었던 인맥은 곧장 붕당으로 전환되어 이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계속 작용하였다. 그런데 전란 과정에서 많은 선비들이 적극적으로 창의하여 나서거나, 학맥과 인맥에 따라 의병 활동에 가담하거나, 수요가 늘어난 관직에 등용되었다. 의병으로 나선 인물들 중 많은 사람이 도중에 관리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전란이 끝난 후에 계속 관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물러나 향반이 되었다. 나아가 전란이 끝나고 포상을 하는 과정에서, 난후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로로 신분이 상승하여, 명분상의 양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란 후에 향촌에서 생활한 양반들은 세 가지 정도로 분류가 가능하다. 관직에 종사하다가 물러나 있는 사람들과, 관계 진출을 하지 못한 사람들과, 국가 경제 정책에 호응하여 양반으로 편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인의 성향이나 처지에 따라 문화를 향유하는 양상이 다양하였지만, 크게 보아 어느 정도의 스팩트럼을 형성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전원 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심취하고 자연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풍류를 즐기는 경향을 보여준다. 두 번째 부류는 전원에서의 생활과 독서 또는 윤리적 지향을 지속한다. 세 번째 부류는 창작 활동보다 문화의 향유자로서 가끔 후원자 역할도 한다. 이들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든 조선 후기 문학을 다양하게 하는 데 한몫을 하며, 다음 세대에 의해 그 결과가 잘 나타난다.
2) 실천 윤리와 수신
앞서 말한 두 번째 부류는 시조 창작면에서 전대의 경향을 견실하게 계승하면서 주제 의식을 강하게 표출한다. 전란을 소재로 하여 시대적 지향을 보인 작가들도 대체로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학맥과 인맥의 중심에 진입하지는 못하였으며, 전란 중에 임시로 관직을 가졌지만 그러한 직책을 계속 유지하지도 못하였다. 출사의 의지를 가졌지만 기회를 맞지는 못하였으며, 그렇다고 생업에 종사하는 양민으로 편입되려고 하지도 않아서 양반의식은 강한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에 많은 공을 들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향반 또는 잔반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시조와 가사 창작에 크게 공헌한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박인로(1561~ 1642)는 부친이 관직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현달한 가문 출신은 아니다. 일생 견실하게 학문과 실천에 충실하였지만 사승 관계도 뚜렷하지 않으며, 학문의 경향도 뚜렷하지 않다. 교유한 인물들은 대체로 생의 후반에 만났는데, 그 관계는 후에도 돈독하게 지속된 셈이다. 82세까지 장수한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은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고, 후반생은 독서와 수행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후반생에서 작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수학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남방의 여러 고을이 함락되었으며, 특히 경주 영천 지역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의병으로 나섰다. 38세 때는 좌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과 선전관을 지냈으며,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에 만호로 부임하여 지방관으로서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란 후에 관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40세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경전 공부와 시가 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고유하였으니,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유명한 시조 <조홍시가>와 가사 <사제곡>, <누항사> 등은 이덕형의 요구에 따라 지었을 정도로 교분이 깊은 사이였다. 그 밖에도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같은 영남의 거유들과 교유하였으며, 퇴계를 흠모하여 도산서원에 참례하는 등 사림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많이 하였다. 박인로는 10편의 가사와 함께 68수의 시조를 지은 조선조의 대표적 시가 작가이다. 그런데 이 많은 시조 작품이 큰 범주에서는 교훈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오륜가> 25수는 당연히 윤리를 표방하고 있거니와, <입암가> 29수도 입암에 있는 자연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주제는 역시 교훈이다. 교훈을 주제로 하거나 자연을 소재로 하는 시조는 이미 16세기적 성취를 대표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박인로는 여기에 사실성을 확보함으로써 시대적 특징을 이룬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누나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 하노라.
박인로가 쓴 최초의 시조로 보인다. 노계 스스로 “신축년 9월 초에 한음대감이 소반 안에 있는 조홍을 가리키면서 단가를 지으라고 하는 명에 따라서 지었다.”고 하였으니, 신축년 즉 1601년에 지은 작품이다. 이러한 주석이 없더라도 이 작품은 체험과 윤리의식이 얼마나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초장에서 쟁반에 담긴 홍시가 매우 고와 보인다는 것은 평범한 체험이자 감각이다. 그런데 중장에서 유자가 아니라고 한 것은 이미 반사적으로 주제를 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어떤 사물에서 유사성이나 인접성을 활용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인지 작용이지만, 반대로 그것이 없는 데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지식이나 관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감과 유자가 그렇다. 감을 보면서 유사성이 없는 유자를 떠올린 것은 유자에 덧씌워진 관념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념은 곧 “회귤고사(懷橘故事)”이다. 그 결과 품어가서 반길 사람이 없어서 슬퍼한다는 주제 곧 “효”가 나타난다. 윤리적 교훈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작품은 오륜가 25수이다. 특히 박인로의 오륜가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 중 “장유유서” 대신에 “형제유애(兄弟有愛)”가 설정되어 작자 나름의 윤리의식을 잘 보여준다.
직설(稷契)도 아닌 몸에 성은(聖恩)도 망극(罔極)할사 백번을 죽어도 갚을 일이 없건마는 궁달(窮達)이 길이 달라 못 모시고 설웠노라.
동기(同氣)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야문외(夕陽門外)에 한숨겨워 하노라.
앞의 작품은 군신유의, 뒤의 작품은 형제유애(兄弟有愛)에 속한다. 오륜가 시조는 앞 세기의 주세붕과 송순 이래 여러 사람이 지었는데, 대체로 오륜의 항목을 들고 고사나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박인로의 오륜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몇몇 작품은 윤리의 당위성보다 개인적 체험이나 감성을 소재로 삼아 서정성을 더 잘 드러내기도 한다. 앞의 작품에서는 군신유의라는 큰 주제를 다루면서, 다소 추상적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었다. 자기는 직설처럼 훌륭한 신하가 못 되는데 임금의 은혜를 끝없이 입었다고 하고, 당연히 갚아야 하지만, 출세의 길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모시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서럽다고 하였다. 충성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나타내려 하면서도 은근히 자기 신세를 한탄하였다. 뒤의 작품은 더 구체적 체험과 감성으로 일관하였다. 세 형제로 태어나서 우애를 다하였지만 두 형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날마다 문밖에서 한숨겨워 한다고 읊었다. 형제의 우애를 주장하기보다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노계의 작품에서 공간 또는 장소가 의미를 가지는 과정은 생동감이 있다. 현실의 공간을 체험하고, 그 체험이 주제로 나타나는 구체성이 강하다.
무정(無情)히 섰는 바위 유정(有情)하여 보이도다 최령(最靈)한 오인(吾人)도 직립불의(直立不倚) 어렵거늘 만고에 곧게 선 저 얼굴이 고칠 적이 없도다.
<입암(立巖)>이라는 제목이 붙은 29수 중 첫번째 작품이다. 입암은 지명이자 지명을 있게 한 바위이기도 하다. 입암에 대하여 박인로 스스로 그것은 자신의 고향 영천군 북쪽에 있는데, 당시에 장현광이 거기에 은거해 있었으므로 찾아가서 대신 지었다고 주석을 붙여 두었다. 29수 중 바위인 입암을 읊은 작품은 10수이고, 19수는 각각 입암에 있는 봉우리와 골짜기, 누대 등 구체적 지점을 읊었다. 구조는 거의 일관되게 초장에서 실제 공간의 모습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중장에서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나 행동을 서술하고, 종장에서는 그 의미 또는 가치를 읊었다. 자연의 공간은 작가에 의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장소로서 설정되어 가치를 창출하는 이른바 토포필리아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 토포필리아는 이 시기 시조의 중요한 성취이다. 시조뿐 아니라 조선조의 시에서 자연은 거의 절대적인 제재가 되고, 그것은 특정 관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자연의 공간이 그 실재성과 구체성으로 인해 사실성을 확보하는 일은 하나의 특징을 이룬다.
3) 실생활의 편린
자연 또는 전원과 그 속에서의 삶을 직접 드러내는 작품으로서. 신계영의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10수, 김광욱의 <율리유곡(栗里遺曲)> 17수,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 등 도 같은 계열을 이룬다.
봄날이 점점 기니 잔설(殘雪)이 다 녹누나 매화는 벌써 지고 버들 가지 누르렀다 아이야 울 잘 고치고 채전(菜田) 갈게 하여라.
여름날 더운 적에 단 땅이 불이로다 밭고랑 매자 하니 땀 흘러 땅에 듣네 어사와 입립신고(粒粒辛苦) 어느분이 알으실꼬?
앞의 작품은 신계영의 <전원사시가> 중 봄을 노래한 것이고, 뒤의 작품은 이휘일의 <전가팔곡>중 세 번째 작품이다. 신계영(1577 ~ 1669)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가 뒤늦게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외교 분야에 능력이 있어서 일본과 청에 사신으로 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업적을 이루었다.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만년에는 사직을 하고 고향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관료로 오래 생활했지만 학맥이나 인맥에 속한 학자라기보다 독자적으로 관직을 하고, 물러나 전원에 살던 생활인이다. 그의 작품은 전원에서 농촌 체험에 직접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전원생활을 이념이나 학문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한가로운 생활의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위의 작품에서도 세월의 흐름을 주변의 초목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 계절에 맞는 농사일을 독려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겨울 지낸 울타리를 손질하고 채전을 갈게 하는 것은 손수 하지 않더라도 생활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관념보다 경험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휘일(1619 ~ 1672)은 영덕의 명망가에서 생장하였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외조부 장흥효의 문하에서 유학을 익혔으며, 이후 여유롭게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풍류에 몰입할 수 있었다. 위의 작품에는 마치 농사일을 체험한 사람처럼 자연에 핍진한 모습이 나타난다. 여름날 달아오른 땅이 불처럼 뜨겁다거나, 밭고랑을 맬 때 땀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농민의 일상이다. 아마 전원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스스로도 농사일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종장에서 낟알 하나하나에 고생이 들어 있는 줄 누가 알겠느냐고 하였으니 자기는 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충성이나 효도와 같은 윤리적 주제로 끌고 가지 않고 고생을 강조만 하였으니 실생활을 중요하게 여긴 작품이다. 자신은 서민이 아니지만 서민의 삶을 느끼고 또한 느끼게 하는 효과가 크다. 이렇게 향촌 사림의 작품이 생활에 다가가 있는 것은 그들이 향촌 생활을 다른 출세의 전단계나 틈새로 여기지 않은 현실 인식이 작용한 모습이다. 한편 지금까지 언급한 임란 이후 향반들의 작품은 주로 작자들의 문집에 실려 있고, 후대의 가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청구영언을 비롯한 후대의 가집은 전문적인 가객들의 공연용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 작가의 작품 또는 문예적 성격이 강하다는 경향을 보인다. 그에 비해 이 시기 이 유형의 작가들은 시대와 장소 같은 사실성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공연용으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요소도 지녔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문학과 실제가 그만큼 접근해 있어서 시조문학의 변화를 드러내는 의의를 지닌다.
<참고 문헌>
김석배, 庚午本 蘆溪歌集, 구미문화원, 2006. 김용찬, “시조에 투영된 대청(對淸) 인식의 양상”, 배달말 55, 배달말학회, 2014. 12. 宋芳松, 韓國音樂通史, 一潮閣, 1984. 이동근, “임진왜란의 문학적 대응”, 관악어문연구 20, 서울대 국문학과, 1995. 이상원, 17세기 시조사의 구도, 月印, 2000. 崔載南, 士林의 鄕村生活과 詩歌文學, 國學資料院,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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