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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의 역동적인 묘사
-조영민의 시세계
김관식
1. 프롤로그
인류는 수세기 동안 자연에 의존하며 제1차 산업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던 것이 점차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게 되자 자연을 원료로 가공하는 제2차 산업시대로 진보했고, 더 나아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3차 산업 시대, 그리고 오늘날 정보화시대를 열어놓은 디지털 혁명의 시대, 급격하게 다가온 디지털 시대를 바탕으로 기술을 융합한 정보·의료·교육서비스 등의 지식집약형 산업으로 한 제4차산업, 취미·오락·패션 산업으로 한 제5차 산업시대를 열어놓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산업구조는 자연과의 점차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 속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은 주체성의 상실로 인한 불안감과 고독감은 날로 고조되고, 과학기술문명의 편리함을 추구한 나머지 기계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주체성을 상실함에 따라 신화적인 상상력이 더욱 절실하게 향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질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의 향유문화는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결국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려 인류의 생존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고질화된 물질적인 가치관은 인간성마저 황폐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구촌의 평화와 공생공존의 사회이념이나 철학은 물론 예술과· 문학 등 분야의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현대인들의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만들어 풍요속의 고독감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시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하는 담론이 제기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극도의 물질주의 시대, 인간성의 상실마저 외면하고 서로가 하나의 고독한 섬으로 전락하여 서로가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연결망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 마이크로블로그, 글로벌 모바일 메시지 서비스로 데이터 통신 기능의 이용이 가능한 카카오톡 등의 전자통신매체의 연결망으로 현실 세계을 가상현실로 수용하면서 서로가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마치 신화 속의 현실 공간에서 초현실주의 문화를 각기 창조하며 대중문화를 이끄는 미스미디어의 환상을 쫓아가며 주체성을 상실한 수동적인 인간으로 서로의 감시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견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암시했었다. 미래의 인류는 모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 송두리째 감시되고 사람들의 꿈과 무의식조차 “빅 브라더”의 전방위적 감시체계에 의해 조작되는 초전체주의 체제의 모습으로 살아가거나, 푸코가 주장하는 『감시와 처벌』 속의 판옵티콘(Panopticon)을 스스로 자초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예견이었다.
조영민의 시집 『사라지는 것들』은 내시경 카메라로 들여다본 자아의 내면풍경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내면세계에 잠재해 있는 현실적인 갈등의식을 탁월한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하여 생생한 묘사력으로 표현해놓은 시들을 엮어놓았다.
제4,5차 산업혁명 시대,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고독감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초현실주의 기법과 경험세계를 역동적인 형상화하여 묘사함으로써 생생한 리얼리티로 재창조해는 레시피의 방법이 독특하고, 특히 자아와 우주의 일체화를 통해 신화적 원형을 추구하는 시정신과 그의 휴머니즘적인 서정성이 육화된 그의 시는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강한 공감과 흡인력으로 다가온다.
공감하는 역동적인 서정시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시집 『사라지는 것들』 중에서 그의 시세계의 특징이 드러나는 17편의 작품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시세계에 가까이 접근해보기로 한다.
2. 내면세계의 역동적인 묘사
1) 내시경 카메라로 들여다본 자아와 사회의 내면풍속도
21세기는 디지털 정보화 지식사회다. 정보화 사회란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자원이 에너지나 물질에서 정보로 대체되고 정보 기술의 발달로 재화와 용역의 고부가가치화가 이루어지며, 정보의 공유와 배분에 따른 경영의 고도화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나아가 최근에는 디지털정보 지식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정보·의료·교육서비스 산업 등 지식집약형산업을 융합하여 제4차 산업시대로, 취미·오락·패션 등의 분야를 접맥시켜 제5차 산업시대가 이미 진행되어가고 있음에 따라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전 지구촌이 공유될 수 있는 열린사회로 진화됨에 따라 개인과 사회가 다 함께 투명해지고, 정보의 공유정도에 따라 특정 지역에 급격한 변화가 예견되는 다가치화 다변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다가치의 이해와 변화에 적응하는 민감성이 생존과 직결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인터넷 통신망이라는 동일한 수단으로 연결되고, 다양하게 분화되어 다양한 트렌드에 대한 이해력이 요구되며,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생존할 수 있음으로 해서 불안감과 함께 심리적인 억압을 받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프로이드의 주장에 의하면, “감각적 인상과 경험과 상황들 속에서 우리들에게 불안하게 하는 낯설음이라는 감정. 다시 말해,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감정은 공포감의 한 특이한 변종인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 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열린책들, 1996, p.102.
이러한 불안의식은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문화현상으로 고독감으로 자리 잡아 현대 사회의 일상 전체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조영민의 「고양이 카메라」는 집을 나간 길 고양이들이 인간을 감시하는 주체가 되는, 즉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전자문명의 도구가 마침내 인간을 감시하는 인간의 주체가 객체화되고, 인간이 만들어낸 고양이 카메라가 주체화가 된 주체와 객체가 변화된 사회양상을 생태계의 파괴당한 고양이를 통해 감시의 카메라로 푸코의 판옵티콘이 되는 시대는 결국 “내 모든 추억은 감옥으로 가겠네/ 지금 내 모든 추억은 용의자네”로 불안의식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판옵티콘적 사회의 권력을 쥔 「고양이 카메라」는 어느 누구도 규범적인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박제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규범적 판단에 대해 거부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혀버리게 된다. 판옵티콘이란 본래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을 일컫는 말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모두가 다 본다’라는 용어인데, 감시자 없이 죄수들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감옥이다. ‘빅 브라더’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감시, 통제하는 관리권력 또는 사회체계를 일컫는데 원격스크린, 도청장치 등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게 디는 사회구조로 조지오웰의 소설이 현대사회에도 적용된다고 보는 까닭 중의 하나는 컴퓨터, 정보통신의 발달로 도청이나 감시카메라가 일반 영역에 차지하는 영향이 늘어남에 따라 빅 브라더 사회가 현재 우리 삶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을 뱅뱅 도네 내 집의 소화불량 같은 저 고양이
고양이 눈을 보면 찰칵찰칵 찍힌 기분이네
저놈의 고성능 눈빛 카메라
태엽을 감아놓은 듯 밤에도 불빛이 도네
멀리 있어도 녀석의 눈빛에 빨려드네
내가 키운 흑백 풍경들을 끌어당겨
시시때때로 여러 각도에서 찍어대네
면발처럼 팅팅 불어터진 내 그림자가
나를 부축하고 대문에 들어설 때 한 컷
담벼락에 걸린 달빛도 한 컷
소파에 누워 파리를 쫓을 때도 한 컷, 요즘은
집어등 같은 눈으로 마음에 잡힌 주름들과
녀석의 정보가 담긴
내 몸의 내부를 수시로 들락거리네
그곳에 숨겨둔 테이프, 가발들이 찍히네
갈수록 소화되지 않았던 것 어설프게 묻었던 것들이 드러나네
몇 년 전 누군가를 할퀴던 손톱에 앵글을 맞추고
플래시를 터트리네. 나의 모든 추억은 위법이었네
-「고양이 카메라」 일부
마치 「고양이 카메라」라는 첨단 과학기술 기기인 내시경 카메라로 들여다본 자아의 내면풍경을 “빅 브라더”의 사회의 시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빅 브라더”라는 권력자의 시선으로 화자의 내면 풍경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화자의 과거가 낱낱이 들어나는 불안의식과 공포감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화자는 “추억=감옥”으로 감금함으로서 자유를 얻으려는 “잊혀질 권리”를 갈구한다. “잊혀질 권리”라는 말은 인터넷에서 생성·저장·유통되는 개인의 사진이나 거래 정보, 개인의 성향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 소유권을 강화하고 이에 대한 유통 기한을 정하거나 이를 삭제, 수정, 영구적인 파기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는 『잊혀질 권리』에 대해 “유사 이래로 인류에게는 망각이 일반적이었고, 기억하는 것이 예외였다. 그렇지만 디지털 기술과 전 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에 이 균형이 역전되었다. 오늘날 널리 퍼진 기술의 도움으로 망각은 예외가 되어가고 있으며 기억이 일반적인 게 되어가고 있다.”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잊혀질 권리』, 지식의 날개, 2011. P.18.
라고 『잊혀질 권리』로서의 남에게 드러내놓고 싶지 않는 추억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조영민 시인의 「고양이 카메라」 에서 추억의 위법성 담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조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의 풍경을 자연현상을 보는 시각과 일체화시켜 「고양이 카메라」로 감시하는 ‘빅 부라더’의 권력주체로 역동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도시의 아웃사이더 서민의 삶을 내시경 카메라의 시선으로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어디론가 날마다 인출되었지요
몇 해 전 햇빛과 나비를 꾸어간 친구는
맑은 가을을 송금해 준다더니 감감무소식,
도시에선 도무지 자산이 붇지 않아요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제 몸의 살구꽃 향기나
하루하루 반딧불이 빛을 탕진하며 살아요
변두리로 이사 한 나는 소주병보다 먼저 쓰러져
모서리를 껴안고 잠들 때가 많았어요
이제는 깨진 적막을 치우고 꽃잎 넣어 도배하고
낡은 의자에 노루표 페인트를 칠하고 싶어요
마당 입구는 까치 부부에게 세놓고
지난날 집의 심장 소리 같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아
텃밭 냉장고를 가동하고 싶어요
누구도 받지 않던 매미 전화벨을 받아 들 때는
창으로 부침개 냄새를 흘리고 싶어요
날이 어두우면 밝은 별 하나만 켜고, 그 빛으로
대처로 인출된 아이에게 가고 싶어요
-「봄의 은행銀行」 일부
익명에 의해 인출된 봄은 “맑은 가을”을 송금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도시의 생활은 자신이 증식되지 않고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제 몸의 살구꽃 향기나/ 하루하루 반딧불이 빛”으로 유추되는 조상들의 생활근거지이고 화자가 태어난 고향의 유년시절의 추억을 탕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아웃사이더의 소외감에 갈등을 하게 되고, 치솟는 전세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전전하게 되는 정서의 상실감을 벗어나기 위해 “변두리로 이사 한 나는 소주병보다 먼저 쓰러져/ 모서리를 껴안고 잠들 때가 많았어요”라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그는 도시 공간에서 “마당 입구는 까치 부부에게 세놓고/ 지난날 집의 심장 소리 같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아/ 텃밭 냉장고를 가동하고 싶”다는 향토적인 유년시절의 생태공간에서 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웃과 소통이 없는 단절 공동주택의 도시문화에서 “누구도 받지 않던 매미 전화벨을 받아 들 때는/ 창으로 부침개 냄새를 흘리고 싶”은 서로가 소통하며 정을 주고받는 휴머니즘의 세상을 꿈꾸고 있고, “대처로 인출된 아이”를 찾아가겠다는 소시민의 소망을 내시경 카메라로 들여다본 자아와 사회의 내면풍속도를 형상화해냈다.
2)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세계의 역동적인 묘사
조영민 시인은 경험세계를 역동적인 묘사력으로 재창조해는 독특한 스타일의 산문시다. 외형묘사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을 일체화시켜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자유 분망한 그의 내면세계를 표출해낸다.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복합적인 심리를 정확한 관찰력으로 묘사해내는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든다. 사회적인 현실의식도 자연과 버물려서 조형을 해내는 마술을 부린다. 「수상한 달」에서는 ‘무면허약장수=능변가’로 등장시키고 그가 파는 만병통치약은 환한 가루약과 여름철 잘 말린 향기를 섞여 제조해 “늦은 밤 창에 기댄 사람”, 즉 절박한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만변통치약이었다는 역설과 “그가 고치지 못한 병은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었지”라는 익살로 시를 읽는 재미성을 가미하고 있다. 현대시가 독자와 멀어진 까닭이 난해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조영민의 시는 익살과 역설을 구수한 입담을 섞어 진술하기 때문에 감칠맛을 있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 했어 은밀히 찾는 사람들도 많았었지 독수리가 이사 간 불암산 선바위 밑에 펜션도 마련해두었지 하지만 위기는 빨리 왔어 곳곳마다 아파트 신축현장이 들어서자 철근들 속에서 린치를 당했지”라고 불암산 선바위와 아파트 신축현장을 대비하여 달이 뜨고 지는 변화와 크기의 변화를 건설사를 운영하는 사장과 은유함으로써 달의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고 있다.
요즘은 가짜들이 너무 판을 친다지 스키장이나 마천루의 불빛들 빛이 아니면서도 빛인 척 빛을 모조해 파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시에서 그의 약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아 빨대로 쪽쪽 빨아 팩처럼 일그러진 도로변의 달 더 이상 재기는 어려울 것 같은 달 그래서 몇 년째 달은 뜨는 둥 마는 둥 도시를 조용조용 맴돌지 날마다 수상스런 저 달, 누군가에게 이 폐암 같은 도시를 다 팔아넘길지도 몰라
-「수상한 달」 일부
스키장, 마천루의 불빛과 만병통치의 가짜약과의 동일한 이미지, “빨대로 쪽쪽 빨아 팩처럼 일그러진 도로변의 달”은 수상한 달이며 “폐암 같은 도시에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폐암과 희뿌연 매연, 그리고 도시의 환락을 상징하는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불빛, 그 이면의 병든 도시를 달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사의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엮어 편집해놓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주체 및 경계를 해체하여 자연과 인간의 삶을 믹스하여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의 영역을 확대시켜놓고 있다.
추억이 어두울 때면 나무 하나를 켭니다
플라타너스는 빛이 가장 환한 혈족이지만
기름이 떨어져도 어둠으로 불을 켤 수 있지요
그 어둠으로 골방을 비추면, 곧장
사라지는 것들의 빨간 내복이 보입니다
선반 위 기도하는 인형과 머리맡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타구 안쪽까지 환하게 어둠을 켜 놓으면
그런데, 할머니는 왜 가까운 미래를 소등 했을까요
주름 골짜기 사이마다, 언뜻언뜻 켜져 있던
민가의 불빛들도 이제 더는 보이지 않아요
저수지 속으로 유성들이 하나, 둘 꺼지고 나면
낯선 풀벌레 소리는 점점 환해지곤 했지요
언제나 정전된 과거를 과다 복용하는 할머니
싱싱한 염문들 모두 말라버린 빈집 마당 같은 치마폭에
얼마 남지 않은 시든 풀잎들이 얼비치곤 했어요
불 꺼진 노을은 다음 생으로 가는 플랫폼 인가요
가끔 골방의 적막을 열 때마다
오래전 떠나간 등 굽은 시간들과 재회하는 기분이에요
그녀, 진통제 같은 집 한 칸 마련하려
서둘러 후생의 램프를 장만했던 것인지, 밥알 흘리는
할머니가 오래 앉았던 그늘 밑엔
문고리도, 유리창도 죄다 그녀를 따라가고 없네요
이런 날이면 나는,
가끔씩 나의 길도 단 한번 멀리까지 열어보기 위해
잔가지 무성한 나무를 켜듭니다
벌써, 내 주변은 온통 타들어가는 것들 천지네요
- 「나무 램프」 전문
「나무 램프」는 유년의 경험세계다. 과거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절묘한 세부묘사와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그런데, 할머니는 왜 가까운 미래를 소등 했을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낯선 풀벌레 소리는 점점 환해지곤 했지요.”의 청각적 이미지의 시각적 이미지로의 변환묘사, “정전된 과거를 과다 복용하는 할머니”에서의 시간의 전기에너지화와 시간을 “과다 복용”하는 미각적 이미지, 그리고 그러한 할머니라는 사물화, “싱싱한 염문들 모두 말라버린 빈집 마당 같은 치마폭”에서의 “싱싱한(시각적 이미지의 수식어)와 염문들(청각적 이미지의 복수형태)” 등등 초 공감각적인 상상력으로 자유 분망한 이미지들을 결합해서 시적인 탄력이 넘치는 시로 변신해놓고 있다. 이러한 탁월한 시적인 형상력과 언어의 탄력성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그의 독창적인 묘사력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조영민 시인만의 개성이다. 이러한 장점은 근래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문 시적 묘사력의 鬼才라 해도 지나친 찬사는 아닐 것이다.
3) 자아와 우주의 일체화를 통한 신화적 원형 추구
조영민 시인의 시 창작방법은 자아와 사회현상의 내면풍속도를 정밀묘사법에 의해 형상화해내는 시적 묘사력의 마술에 있다. 그만큼 독창적인 시적 감수성이 탁월하고 시적인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예견 된다. 시작과정에서 자아와 우주를 일체화시고, 과거의 경험을 끌어내어 변용하고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형상을 빚어내는 언어의 마술사다운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러한 표현방법에 있어서 감각적인 표현으로 사물의 이면을 정밀하게 드러내는 상상력의 원천은 신화적 원형을 추구하려는 그의 피나는 시적 産苦에 있다고 본다. 자아와 우주의 일체화를 통한 신화적 원형을 추구하는 그의 시정신은 신화적 상상력으로 시작품으로 현현함으로써 신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울림으로 서정적인 충격으로 다가온다.
「가을史」에서 “카드를 슬쩍 바꿔치기한 날씨였다”처럼 날씨를 인간의 생활한 장면인 “카드 바꿔치기”로 묘사한다든가 “돌 틈에 꽃이 만발하고 냇물에 간밤 별들의 겨드랑이 냄새가 날 때/ 판을 뒤엎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는 습관적인 카드놀이의 행위를 가지고, “돌 틈에 꽃이 만발”한 자연현상과 “냇물에 간밤 별들의 겨드랑이 냄새가 날 때”라는 신화생성의 순간을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변용하고 형상화하여 묘사와 진술로 풀어내는 그의 감각적인 재능은 현대시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시가 건조한 문명의 잔해를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정서의 사막화가 진행되어 독자들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독자를 유인해 시적인 감동과 정서의 샘을 자극하여 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될 운명적인 인연으로 맺어줄 묘책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인간의 원형으로 복귀시키는 주술적인 힘의 위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가을 호수에 앉아」에서 물활론적인 사유를 통해 “호수는 울렁울렁 제 몸에 슬픔을 가두고 머리맡에 달 하나를 띄워두고 나는 달을 접고 또 접어 물갈피에 감춘다”라고 호수의 이미지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역동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또한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지나간 후 그의 냄새는 남는다”는 불가시한 바람의 후각적인 이미지로의 변형은 토템사상이나 샤머니즘의 원시적인 신화적인 원형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며, 결국 시인 자신이 시창작 행위를 운명으로 알고 행하듯이 인간의 원시형태 사고라고 할 수 있는 물활론적인 발상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자연현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원시성은 「저녁은 운명 같다」는 인간의 변함없는 원형에 대한 확신에 찬 “저녁”에 대한 단정이다. 모든 원시적인 신화가 활성화되는 때는 어둠이 둥지를 트는 “저녁” 때이다. “저녁”이 되어야 하늘에는 달과 별이 눈을 뜨게 되고, 어둠 속에서 신령들이 활동하게 된다. 바로 인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두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원시적인 신화를 창조하는 귀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행」에서 사람들이 자주 가는 백화점이라는 현실공간과 히말라야 등반의 이미지를 융합한 신화적인 상상력은 그가 일상에서 창조해내는 신화다. 그는 산행은 서랍의 수납장에 “히말라야 바람의 취사도구와/ 패션모델 같은 구름의 옷을 개어 놓”은 현실공간에 신화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시를 통해 신화적인 상상력의 유발하는 행위를 묘사해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을 신화적인 상상력의 공간으로 강하게 빨아들이는 싱크홀로 작용한다.
그의 이 같은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능력은 유년시절부터 비롯된다. “벤치에서 불량한 바람 서넛이/ 학급문고 같은 하루를 뒤적이고” 있는 「수상한 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그가 태어난 장흥 유치의 덕산리는 신화적인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햇살을 찾아서」나선다. 이러한 사향의식은 신화적인 공간으로 도시화된 공간에서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병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하여 도덕성이 타락한 오늘의 현실공간을 병으로 사유하는 시인이지만, 다른 한편 현실 공간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은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혼자 중얼대는 시인의 행위가 병적으로 보일지도 가정을 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게 인식되지만 결국 신화적인 원형을 찾아가는 죽음이라는 생명의 한계는 우리에게 무한한 서정성의 보고일 수밖에 없다. “살구꽃 향기를 널어 말리고 절뚝절뚝 논둑길을 걸어오면/ 머큐로크롬을 발라 주고 반창고를 감아주던 내 유일한 주치의 햇살”처럼 그는 숙명적으로 “살구꽃 향기를 널어 말리고 절뚝절뚝 논둑길을 걸어”가는 현실공간의 상처를 안고 걷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신화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신화소인 유년의 공간은 「꽃점」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배울 국어 산수 자연의 기초이자 선수과목인 기다림에/ 매번 낙제했고/ 시나브로 잠이 들면 붉은 노을이었지”라는 과거 유년의 독백적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고고학자처럼 유년의 공간에서 귀중한 상상력의 보물을 캐내는 작업을 기록한 「출토기」에서 “다 쓴 치약 같은 햇볕에/ 창(窓)이 오래 버려두었던 상처들이 드러나고 있어요.”라고 토로하고 그가 발굴해낸 상상력의 공간을 “사라졌던 길들/ 깨진 기와들/ 죽은 잎사귀들”이라고 과거의 유물들을 꺼내고 있다. 일한 행위들은 자아와 우주의 일체화를 통한 신화적 원형을 추구하는 그의 시작업과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불안의식과 고독감
조영민 시인이 시를 쓰는 창작행위는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현실공간에서 고독감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감수성이 예민한 촉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시는 내시경 카메라로 들여다본 자아의 내면풍경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내면세계에 잠재해 있는 현실적인 갈등의식을 생생한 묘사력으로 형상화한 시로 현대인들의 정체성 상실의 불안과 고독감을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들의 상처를 공감을 통해 치유한다.
그는 이제 “휴일이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가 되는/ 사내아이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좌판이 되고 밤나무 그늘 밑의 노인이 되는/ 그 헛기침을 배워가는 불혹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내과 의사처럼 내시경카메라를 들고 수년 동안 곳곳의 공간을 검진하고 다녔다. 그가 검진하고 다닌 공간은 때로는 “길이 없어지고 몸 안으로 새 길이 난다/ 그 길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상상력의 창조적인 공간을 탐색하다가 「해거름」이 된 것이다. “당신은 어스름에 나갈 때마다 꼭 종이처럼 방을 구겨놓지/나는 그것을 다 읽느라 편두통이 왔어”라는 시 창작의 고통을 겪으며, “당신의 환한 오른쪽 어딘가에 잠들고 싶었지만/ 내 문들은 덜컹거리는 것들이 많았어/ 제대로 닫히는 문들이 하나도 없었어”라는 진술을 할 덜커덩거리고 재대로 닫히지 않는 고장 난 문을 단 낡은 집에서 「해거름」을 맞이하는 쓸쓸한 자신을 뒤돌아보고 회한에 젖는다. 그는 자신의 창작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저녁이 팽팽한 테잎처럼 감기면 방이 천천히 움직여요. 볼펜은 나에 대해 쓰고 싶어 안달이에요. 책장의 '시베리아 독수리'는 내 몸을 노리는 듯 잔뜩 발톱을 움켜쥐고 있어요. 건너편 청소기는 언제 날 빨아들일지 몰라요. 태엽이 천천히 풀리고 달이 떠오르면 방은 부화장이 되어요 나는 나도 모르는 나를 계속 낳아요 방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너무 많아져요. 연필을 깎다 칼에 베인 후 없어졌던 나, 참새 혓바닥 같은 학교 종소리에 신발을 잃어버렸던 나. 꽁꽁 언 골목의 모서리를 되돌아오다 주머니에서 잃어버렸던, 나 나 나들을 만나요 나는 바쁘진 않지만 수많은 동생을 둔 고아원의 큰언니처럼 쉴 새 없이 나를 돌보아요 옷을 한 뼘 한 뼘 기워주고, 깍지 않는 다른 쪽 발톱을 깎아주어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곱게 따주어요 인형들을 만들어 주어요 밤을 꼬박 새워요 팽팽했던 테잎이 느슨해지는 아침. 밤이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요 내가 곳곳에서 타인으로 녹아 내려요 돼지 떼 같이 킁킁 거리는 해는 녹아내린 내 발부터 머리까지 꼼꼼히 핥아 먹어요. 그동안 내가 너무 많았어요.
-「타인의 방」 전문
그의 원형적인 상상력의 공간인 유년의 공간을 방으로 상정하고, 고정된 방을 움직이는 방으로 환상하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초현실주의적인 상상력으로 볼펜으로 글 쓰려는 창작욕을 불태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의 방을 달이 떠오르는 부화장으로 환상하며 고아원의 아이가 된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형들을 돌보는 유년시절을 재생적인 상상력으로 묘사하여 자아가 많은 다중인격체로서의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속에서 정체성 상실의 불안감을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밤을 핥아 먹는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타인의 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불안과 고독감에서 몸부림하는 창작의 행위는 「11월」이면 “내가 가꾸었던 드라마나 물 주었던 책의 활자들이/ 하나둘 잎이 맺히고 줄기가 올라오는 이 계절/ 잘못 찾은 집배원 같은 어둠이 창으로 기웃거리는 어스름.” 책의 활자로 독자들에게 배달된다. 그러나 자꾸만 창을 기웃거리는 어스름의 고독감에 빠진다.
그는 이러한 정체성 상실의 불안과 고독감을 어찌 보면 오히려 좋아하고 애린」하고 있었음을 진술한다.
앉았다 간 자리에 펑퍼짐한 침묵이 앉는다
빗살무늬의 방석이 보이고
그가 앉은 곳은 무늬들이 대신 이야기한다
무늬들마저도 침묵할 때
어둠의 실반지 낀 손가락이 쓰다듬고
밤새도록 어둠과 무늬는 또 하나의 방석을 짜고
아침이면 나에게 내놓는다
어둠도 잘 짜여진 시나리오 같은 것인데
나는 어둠을 바람 같은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애린愛悋」 일부
“앉은 곳”이라는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방석의 “무늬”이 이야기를 나누듯이 “밤새도록 어둠과 무늬는 또 하나의 방석을 짜고/ 아침이면 나에게 내놓는다”는 초현실적인 환상의 결과물을 소유하는 행복감은 불안과 고독감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기쁨일 것이다.
그는 “빅 브라더”의 전방위적 감시체계에 내시경 카메라로 자신과 이웃의 공동체험공간인 유년시절을 재현하고 다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자아와 우주를 일체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3. 에필로그
현대는 과학기술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첨단 디지털매체의 시대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과학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자연과 투쟁하고 더불어 살아온 생명의 신화를 잃어버리고 안일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 안일함의 이면에는 조영민시인의 시 「고양이 카메라」처럼 집을 나간 길고양이들이 인간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소외당한 고양이의 삶처럼 지구촌의 주인인 인간이 자기 주체를 첨단디지털과학 문명의 기계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객체로 전락한 주객전도의 불안과 고독감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디지털전자문명의 도구가 마침내 인간을 감시하는 주체가 빅 브러더의 실체인 길고양이 카메라가 주체화가 된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사회양상을 생태계로 소외당한 고양이로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위주의 생태관의 사회구조에 의해 생존을 박탈당하고 쫓겨난 무수한 생명체의 상징물로서의 길고양이와 첨단디지털기기인 감시 카메라를 합성한 「고양이 카메라」라는 푸코의 판옵티콘이 되는 시대의 불안감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의 자성적인 사고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창조적인 작업들을 통해 조영민시인은 인간으로써의 주체성을 찾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아가는 길을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안내한다. 그 길은 유년의 체험과 사향의식을 바탕으로 한 과거 경험의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재현함으로써 인간성의 원형을 찾아가는 시창작업의 과정으로 형상화하여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면세계의 역동적인 묘사와 시적 형상화로 자아와 사회현실의 이면을 내시경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곳저곳의 숨어서 들어나지 않는 내면풍속도를 들추어내는 작업을 해왔으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 분망한 상상력으로 경험세계를 농밀한 서정성을 압축하고 형상화하여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 역동적인 묘사기법을 차용했다.
이러한 그의 시 창작방법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이다. 특히 자아와 사회현상을 일체화시키고 융합하여 내면풍속도를 정밀묘사해내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세계의 역동적인 묘사력은 마술에 가까울 정도로 독자들을 공감의 블랙홀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은 놀랍다.
조영민 시인, 그만이 레시피 할 수 있는 독특한 묘사력으로 자아와 우주의 일체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이 가능해진 까닭은 신화적 상상력에 의한 원형을 가시화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시 창작 행위에 따르는 고통을 타인에게 형상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정체성 상실의 불안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한다. 자연과 공존하는 원시지향의 세계를 향한 그의 집념은 오늘날 현대인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원초적인 원형으로서 고향이며, 그의 신화적인 상상력의 원천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을 탄생한 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찾아감으로써 오늘날 첨단과학문명 속에 주객전도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다만 조영민시인의 시적인 에스프리가 창조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사물과 체험을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구체화시키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시를 통해 무엇을 독자에게 말하려는가하는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결점을 안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숨은 속뜻을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게 간접화로 우회하는 창작방법이 흔히 적용하는 현대시의 창작기법이다. 대부분 시적 대상에 대한 관조와 감정이입한다거나 은유와 상징으로 우회하여 숨은그림찾기의 마력을 보여주는 일이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낯설게 하기 창작방법이다. 그렇다고 해독 불가하도록 관념의 늪으로 빠져들면 아무리 장황한 장식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시는 압축미를 잃어버리고 감동과 서정미마저도 제약을 받아 드라이한 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조영민 시인은 다양한 경험을 형상화하여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와 진술하고, 역설과 해학적인 기법과 자연과 인간사의 융합으로 독자의 관심과 정서적인 환기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켜져 주제에 집중도가 떨어져 버렸다. 따라서 조영민 시인에게 부여된 과제는 모든 시어를 구조화하여 주제에 집중시키는 작업이 요구된다. 과도한 공감각적인 표현의 활용, 은유와 상징, 역동적 이미지에 의한 시상의 중첩으로 화자의 속뜻이 미로에 빠져 산만하게 흩어져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조영민 시인이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 참고 문헌※
1.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열린책들, 1996.
2.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잊혀질 권리』, 지식의 날개, 2011.
3. 김인숙, 남유선 지음, 『4차 산업혁명, 새로운 미래의 물결』, 호이테북스, 2016.
4. 미르치아 엘리아데, 『신화와 현실』, 한길사, 2015.
5. 신동욱, 『신화와 원형』, 고려원, 1992.
6. 미셜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16.
7. 조지 오웰, 『1984』, 문학동네, 2009.
자연에 대한 상상력과 묘사를 통한 자기 존재탐구
- 한성희 시집 『푸른숲우체국장』 의 시세계
김관식
1. 프롤로그
한성희 시집 『푸른숲우체국장』은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의 보고서다. “바람에 깎인 흘림체로 숨을 쉰다.”라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흘림체”라는 곡선의 이미지로 살아가야하는 내면의 세계에 대한 갈등, 그리고 현재를 살아간다는 거부할 수 없는 자기 존재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데, 특이하게도 자연의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인 대지와 다양한 나무가 존재하며 바람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숲속의 명상을 통해 자연에 대한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정밀하게 감정이입하여 묘사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제1부의 15편은 「아버지의 숲」으로 평생을 산림청 직원으로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며 아버지와 통신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고인이 된 아버지의 존재를 「푸른숲우체국장」으로 모시고, 자연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을 담은 15편의 시와 제2부 「나를 바람 곁에 묻는다」에 담은 15편의 시에서는 끊임없이 삶의 「리허설」하면서 살아가는 시인 자신과 「내 몸에 물소리가 잠겨 있다」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나를 바람 곁에 묻는다」는 자기 성찰과 「슬픔은 밥알 같았다」라고 술회하며 살아가는 삶의 의문을 담은 시들, 그리고 제3부 「월식증후군」 15편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의 고뇌와 갈등으로 삶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월식증후군」에 걸린 채 「저인간 보고서」를 써야하는 자신의 모습을 때로는 「깊은 고요」같은 명상으로 천태산 은행나무에서 「혼불」을 보고 그려내기도 하고, 「울음나무」가 되기도 하며, 유한한 생명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허공이라는 변명」을 하며 「가벼운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제4부 「플러그」는 「냉장고와 자동차」 등의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며 의학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냉철하게 비판한 「발효인간」의 존재와 재개발현장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며 살아가야하는 「안식각」, 요양원의 현실을 비판한 「동물원」 등 사회비판과 냉혹한 현실에서 밥을 위해 「바람의 투사」처럼 투쟁하며 살아가면서도 「저녁밥」되고자 하는 「사과의 불안」을 담은 「눈물발원지」를 찾아가는 이유와 사회비판의 시선을 보이 14편의 시, 총 59편의 자연에 대한 상상력과 묘사를 통한 자기 존재탐구를 지향하는 시를 담아내고 있다.
한성희 시인이 스스로 「푸른숲우체국장」이 되어서 보내온 59편의 시세계의 생명력 넘치는 생생한 삶의 보고서를 들추어내보며 그의 시인으로서의 애환을 담은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에 입각하여 들추어보기로 한다.
2. 자연에 대한 상상력과 묘사를 통한 자기 존재탐구
1) 『푸른숲우체국장』이 된 아버지와 대지에 대한 상상력
『푸른숲우체국장』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뿌리 찾기에 대한 존재탐구의 방편으로 대지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대지에 대한 상상력은 가스통 바슐라르는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사물들의 물질적 내밀성은 그 다양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아주 특징적인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꿈꾸는 인간은 사물의 한가운데로, 사물들의 물질 자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정영란 역,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문학동네, 2002, p.114.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지의 이미지는 금속, 암석이나 수목, 고무 등의 세계에 현저하게 드러나는데, 의지의 몽상과 휴식의 몽상으로 보고, 의지의 몽상은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변증법, 대지의 물질들의 모든 영상들을 지배하는 변증법을 제시하고 다른 세 원소는 다른 특색으로 저항한다고 보고 있다. 휴식의 몽상에서는 내밀성의 영상에 대한 탐구로 투쟁의 내밀성에 대해 휴식과 동요가 병치되는 독자적 영상, 도피의 영상으로 집이나 배, 동굴에 관한 탐구가 이루어졌는데, 도피의 영상에서 깊이의 영상의 동형 법칙을 단순형으로 나타내는 기회는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무의식의 동일화 경향, 모성에의 회귀에서 유래된 것임이 쉽게 증명된다.
몽상이 거주하는 몽상의 집은 꿈들의 뿌리, 애착, 심오함이 그 잠김에 있어서 비밀스런 방을 선호하는 것은 몽상의 집이 우리의 내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몽상의 방은 우주적인 인상을 받게 되고, 도피처가 되고 은거지가 되고 중심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의 집은 사회적인 상징일 뿐 온전한 집, 우주적 잠재력들을 가진 그런 집이 주는 몽상의 세계에는 근접할 수 없고, 몽상으로 완전한 집은 내밀한 몽상들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집이다.
한성희 시인의 「푸른숲우체국장」은 아버지가 묻힌 무덤은 바슐라르의 동굴 이미지이며 존재의 무덤이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동굴은 은신처로 고요한 휴식, 보호된 휴식의 꿈을 꿀 수 있는 처소로서 자신의 존재 탐구를 위한 사랑을 위한 은밀한 방으로서의 원형이다. 그러면서도 미궁으로 표상되는 대지의 이미지로 불안을 느끼는 미궁의 꿈을 꾸기도 한다. 미궁의 꿈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고뇌와 불행한 미래에 대한 걱정의 종합으로 인간 존재는 닫혀버린 과거와 막혀버린 미래 사이에 갇힌 것이라 여겨질 때 감금당하게 되고 유년의 고통으로 가위눌림의 이미지, 억눌린 신체, 지하의 이미지 등을 만들어 내게 된다.
산벚나무의 그림자를 모아 편지를 썼다. 흘림체의 그늘에 말린 첫인사는 푸른색이었다. 흔들리는 숲의 잎맥으로 바람의 안부를 물었다. 봄바람은 꽃을 들고 학생부군청주한씨영준지묘를 기웃거리며 서찰의 서두를 생각 중이었다. 문맥의 파동에 떠밀려 꽃잎들이 순하게 하늘로 풀렸다.
평생 나무 그림자로 가계를 키워낸 아버지 스물세 살 맨주먹을 나무뿌리 밑에 숨기고 산맥을 오르내렸다 잎사귀를 뜯어내며 나뭇가지를 분지르며 바람에 떠밀려가는 민둥산을 따라 다녔다. 삼림청 산림계 말단직원으로 박봉의 자리마다 푸른 그늘이 채워졌다. 그때마다 나무들은 허공에다 아버지의 편지를 썼다.
넓은 잎사귀의 사연들이 도봉산 발치 아래로 모여들었다 고향집 목련나무가 봄의 겉봉을 뜯기 시작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낮아졌다 성황당 기억 너머 무위의 땅 그린벨트에 낮게 엎드린 당신의 안부를 만났다 골필로 써내려간 문장들이 흘림체로 날렸다
봄날 우편함을 열면 숲에서 보낸 싱싱한 잎맥의 글씨체가 가득했다 푸른 숲 공무원으로 아버지는 죽어서도 푸른숲우체국장이 되었다 발신자 없이 배달되는 봄편지에서 꽃잎우표를 붙였다가 떼어낸 산벚나무가 올해는 꽃편지를 풍경 밖으로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
-「푸른숲우체국장」 전문
「푸른숲우체국장」 은 4연의 산문체시로 1연에서는 대지의 휴식처에 누운 아버지를 숲으로 상징하여 해마다 봄이면 “봄바람은 꽃을 들고” 아버지의 무덤을 기웃거리며 “서찰의 서두를 생각 중”이라는 상상력으로 “숲의 잎맥”을 죽은 자의 서찰이라는 경이로운 시적 발상으로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어서 봄바람에 흔들리는 숲을 “문맥의 파동에 떠밀려 꽃잎들이 순하게 하늘로 풀렸다.”로 봄의 상승 이미지를 부드러운 흘림체로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묘사적 진술로 동기유발을 시키고 있다. 2연의 시인의 부친에 대한 일생을 “평생 나무 그림자로 가계를 키워낸 아버지”로 객관적 상관물인 숲의 이미지를 끌어와 “삼림청 산림계 말단직원으로 박봉의 자리마다 푸른 그늘이 채워졌다.”고 묘사해낸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나무가 된 화자가 자신을 보살펴주신 아버지, 즉 휴식과 몽상의 집이 된 대지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그때마다 나무들은 허공에다 아버지의 편지를 썼다.”고 아버지의 애환서린 소식을 전해주는 나무는 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편지를 쓰는 재생적인 상상력의 주체가 되고 있다. 3연의 시인이 태어난 고향집으로 아버지가 쓰신 편지가 배달되었음을 “넓은 잎사귀의 사연들이 도봉산 발치 아래로 모여들었다”로 묘사적 진술로 이어지고, “고향집 목련나무가 봄의 겉봉을 뜯기 시작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낮아졌다 성황당 기억 너머 무위의 땅 그린벨트에 낮게 엎드린 당신의 안부를 만났다”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고향집에 대한 추억을 유추해내는 표현을 물활론적인 사유로 “고향집 목련나무가 봄의 겉봉을 뜯기 시작”하며 그 소식이 궁금하여 “새들의 노랫소리가 낮아졌다”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아버지는 편지는 흘림체의 글씨이다. “흘림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한 자 한 자 꼭꼭 박아 쓰지 않고 획을 잇대어 휙휙 쓰는 글씨체”, 또는 “서체(書體)의 한 가지. 자체(字體)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글씨로 특히 한자의 경우 초서(草書)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람에 의해 부드럽게 쓰인 글씨이며, 능숙한 솜씨의 세련된 글씨를 의미하며, 곡선으로 드러난 나뭇잎들의 잎맥의 이미지다. “성황당 기억” 등 오늘날과는 사뭇 달라진 고향집의 풍경에 대한 미궁에 관한 이미지다. 바슐라르의 대지에 대한 상상력의 중요한 이미지는 휴식이나 집과 동굴, 미궁에 관한 이미지는 정신적으로 안정을 주는 공감이며, 휴식의 공간이며, 불안감을 주는 공간으로써의 이미지다. 과거의 의식 저변에 낮게 자리 잡은 “성황당 기억 너머 무위의 땅 그린벨트에 낮게 엎드린 당신의 안부”는 개발에 밀려 휴식, 집과 동굴, 미궁의 이미지가 함께 융합해서 드러난 고향집의 추억이다.
4연에 오면 완연하게 봄기운이 돋아난 봄편지가 들어있는“우편함을 열면 숲에서 보낸 싱싱한 잎맥의 글씨체가 가득”하고 잎이 무성함을 은유하고 있고, “푸른 숲 공무원으로 아버지는 죽어서도 푸른숲우체국장이 되었다”는 아버지에 대한 재생적인 상상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발신자 없이 배달되는 봄편지에서 꽃잎우표를 붙였다가 떼어낸 산벚나무가 올해는 꽃편지를 풍경 밖으로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고 산벚나무의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는 풍경을 “꽃잎우표를 붙였다가 떼어낸 산벚나무”로 “꽃편지를 풍경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시간의 변화까지 정밀한 묘사로 객관화시켜 보여주는 참신하고 세련된 시적인 감각과 탁월한 언어 표현이 돋보인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은 물질의 근원을 바라보는 심리적인 물질이며, 시적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나 본질을 이끌어내는 물질과의 교감을 통해 시적 대상을 창의적인 인식으로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창조해내는데, 그는 물질적 상상력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방향을 깊이 잠겨드는 방향과 비상하는 방향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보고 있다. 비상하는 방향으로 어떤 물질에 대한 상상력을 이끌어낼 때 열린 상상력으로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내게 되는데, 이의 능력은 시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인다.
시적 대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인식이며, 숲은 한성희 시인은 시공을 초월하여 꿈을 꿀 수 있는 몽상의 공간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인간은 결국 편애하는 이미지, 하나의 원시적인 감정, 근원적으로 동양적인 하나의 기질에 지배당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이가림 역, 문예출판사, 2010. p.11
고 했다. 따라서 한성희 시인의 숲을 소재로 한 시들은 숲이 바로 몽상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고, 고유한 본성으로써 회귀하는 공간이기때문이다.
1
숲으로 불러 모은 몇 마리 떠돌이 새들에게
나무가 심장을 꺼내 직립의 생애를 들려준다
2
하얗게 흩날리는 대설을 껴안고
비탈에서 나무들 수직으로 굳어있다
숲을 떠난 꽃 때문만이 아닌 듯
짐승의 발자국은 산을 꿇어앉힌 채
봉분을 지키고 있다
3
몸을 움츠려 바람과 섞이고
눈보라에 두개골 내밀던 나무들
은박을 업힌 설산처럼 숲의 나무들은
아버지의 자세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숲」 일부
「아버지의 숲」은 한성희 시인의 본원적인 상상력이 숲에 있으며, 숲은 부성성을 지니며 존재의 당위성을 획득한 직립으로 굳어 있고, 숲은 떠돌이새들에게 자신의 “신장을 꺼내” 직립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생애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겨울 설산의 “숲의 나무들은 아버지의 자세”로 가족을 보호하며 “푸른숲 우체국 앞에서 봉함엽서를 들고/ 이름모를 새들을 불러 모은다”는 상상력은 그의 시세계의 근원을 형성하는 숲이 신성화된 유년시절의 신화소로 자리잡아 「본원의 우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성화의 모든 유년시절은 인간의 넋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한 원형이 활동하고”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2, p.152.
있으며, 숲은 한성희 시인의 심리적 공간에 자리잡은 유년시절의 영원성의 징후로 몽상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제1부 아버지의 숲의 15편은 숲이라는 이미지를 부성성으로 존재하는 「푸른숲우체국장」이 된 아버지와 대지에 대한 상상력을 펼친다. 이러한 상상력의 근원은 숲이며 숲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보고임과 동시에 시인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2) 숲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과 바람
한성희 시집 『푸른숲우체국장』의 제2부 「나를 바람 곁에 묻는다」에 담은 15편의 시는 숲이라는 부성성의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과 바람에 대한 현상학적인 상상력을 펼친다. 「유목인의 잠자리」라는 공간에서 “생의 움직임”으로서의 바람으로 살아가는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은 끊임없이 삶의 「리허설」하면서 살아가는 시인 자신과 「내 몸에 물소리가 잠겨 있다」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나를 바람 곁에 묻는다」는 자기 성찰과 「슬픔은 밥알 같았다」라고 술회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숲은 한성희 시인이 존재하는 우주이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지구의 생명체들이 숨을 쉬고 활동하며 살아간다. 숲은 시인의 시공간을 초월한 생명 공간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가 진행되고, 빛, 물, 공기, 흙, 미생물, 동식물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순환하며 초자연적인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무한한 몽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한성희 시인은 숲이라는 생명공간에서의 숲의 생명력을 나뭇잎의 색깔과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듣고, 꽃향기와 열매를 맛보며 줄기와 가지를 만지기도 하는 바람이 되었다가 나뭇가지 않았다가는 새들이 되는 등 무한한 꿈과 상상력으로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탄생과 죽음의 몽상에 빠지기도 하고, 생태의 순환의 생명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숲을 구성하는 풀과 나무는 유기적인 기본 형태를 구성하고 나무들의 집합체로서의 숲을 형성하는데, 숲은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으로 단순화되고 상징화된다. 한성희 시인은 숲이라는 생명 공간에서자연이 가져다주는 감성적인 이미지를 나무나 숲, 바람과 물에 이입시켜 자신의 내면세계를 서정적인 모습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의 세계를 이미지의 묘사적인 진술로 단순화시키고 구체화시켜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독특한 재능을 가진 시인이다.
「유목인의 잠자리」처럼 본능적인 욕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사랑의 음각은 이미 발설되지 않게 음영 처리”하고 “잠자리에서 침묵하는 초원의 배경은 지루한 구름보다 튀어나온 들풀이 따뜻하네.”로 표현되는 서민들의 “생의 전리품 같은 통증”을 “투명한 그림자로 침묵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아픔을 투명한 그림으로 입체화시키는 참신한 메타포와 상징으로 고독한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인 상관물인 숲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때로는 “잎사귀가 없는” 나뭇가지가 되어 “들풀처럼 흔들림으로/ 눈시울이 따갑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하면서 「오래된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기도 하며 “부리가 잘려 흐릿해지는/ 새 울음소리를 듣”다가 “의자 곁에서 잠이” 들기도 하며, 「저녁의 결」에서 “가뿐 숨소리로 몇 년을 버티다가/ 숲으로 사라진 당신을 기다렸다가 나무처럼/ 새들도 등이 휘어져 울음을 풀어” 놓듯 “저녁을 글썽이며 흐려지는 숲”의 타자를 바라보기도 하는 등 「리허설」을 하며 살아가는 시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일상생활에 겪은 온갖 체험과 정서를 식물적인 이미지로 치환하여 철저하게 객관화시켜 사물을 조망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수법으로 시를 구성한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도 원초적인 자연의 이미지와 연결 지음으로써 꿈이 되고 몽상이 되어 역동적으로 활성화되어 나타난다. “책상과 의자를 돌아나가는 안무/ 서류의 비문이 지워질 때쯤/ 새가 찍고 간 발자국 따라/ 빈집으로 어두워진다/ 멈출 수 없는 노동의 춤꾼/ 춤추는 발목을 잘라 냉장고에 가둔다.”(리허설)로 일상의 노동이 숲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무희는 스스로 춤을 멈추지 않는다”와 “새벽의 폐활량은 크다”라는 생명력으로 형상화된다. “바람의 나무, 어둠의 새, 오늘의 애인/ 부재와 존재 사이/ 꽃을 기웃거리면서 서로 입술을 비비는/ 상징은 오랫동안 선명하다.”(오늘의 애인)처럼 철학적인 명제를 감각화 시켜 놓았으나 추상어로 인한 빈번한 상징은 시의 의미의 확장으로 인해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바람의 나무”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어둠의 새”는 어떤 새일까? “오늘의 애인”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나무, 새, 애인으로 전개되는 상징적인 의미는 바람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나무의 존재와 나무 위에 앉아 쉬었다가는 어둠의 존재와 함께 머물다 가는 새, 오늘의 애인이라는 의미로 바로 현존재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녁 무렵 나무를 찾아드는 새 사이의 관계 양상을 “오늘의 애인”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본래 상징은 다양한 추상적인 가치들을 이미지로 응축시키는 힘을 말하나 이러한 이미지의 자율성에 의해 상상력의 무한한 창조성이 나오는 것을 원동상징이라 하여 뱀의 역동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한성희 시인의 원동상징은 새를 등장시킨다. 「내 몸에 물소리가 잠겨 있다」로 나무가 된 자신의 존재와 「숲의 불협화음」의 원동상징으로 새를 등장시켜 “기류에 편승한 날개들의 출렁거림/ 분절음을 걸치고 흩날릴 때마다/ 주술이 풀린 나무들 춤사위를 던진다”는 역동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나 한성희 시인의 시는 식물성이 속에서 나무의 생명력과 바람이라는 기상 현상을 통해 생명의 역동성을 묘사하는 시적 기법을 보이는 것이 그의 시의 주요한 특성이다.
겨울나무가 푸른 싹이 나올 때까지 지금껏 한 번도 안색을 바꾼 적 없는 골목의 표정을 읽기란 매우 어렵다
잿빛 구름을 받들다 말라죽은 창문을 등에 두고 눕는다 천 년 만에 발굴한 유적지의 목관처럼 사각의 방을 생각하다 눈동자가 가려워진다
루치오폰타나가 겨울의 창을 면도날로 그을 때처럼 나는 움푹 들어간 매트리스를 찢고 칼날처럼 울음을 참는다 나무뿌리가 얼음물에 잠기듯
불면의 창을 예우하다 깊어지는 겨울밤, 나무에서 빠져나간 바람들이 골목을 휘감아 돌고 있다 하얗게 질린 표정을 들고 일어나는 유리창, 부리로 나무속을 다 비워내고도 골목을 파먹는 새들이 날아오른다
골목에 단련된 새들이 봄을 기다리다 숨을 거둔 나를 바람 결에 묻는다
-「나를 바람결에 묻는다」 전문
고목나무에 대한 사유이다. 구멍 뚫린 밑줄기는 동굴과 구석의 이미지이나 난폭한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화가 루치오폰타나는 전위예술가로 공간주의 예술사조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예술은 인간의 지성의 창고인 것이며, 물적 요구는 아니다. 그러기에 예술은 어떠한 변화에도 견디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그는 우선 낡은 예술의 개념을 깨뜨리려고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칼로 째어서 또 하나의 공간을 암시하는 작업을 하는 등 전위적인 예술을 선보인 화가인데, 죽은 나무에 대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부존재를 역동화된 상상력으로 바람에게 존재의 확인을 묻는다.
그리고 또한 물의 상상력으로 「내 몸 속에 물소리가 잠겨 있다」는 인식을 보이고 “발밑에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아울러 “바람이 나뭇가지를 불안하게 붙잡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동안/ 강물은 서늘한 발바닥을 갉아먹었다”고 바람과 물의 이미지와 탐욕스런 식욕의 역동성으로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부드러운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물은 두 개의 이미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부드러운 물과 난폭한 물로 구분된다.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드러운 물의 지배를 받으며, 물질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문화 콤플렉스, 모성적 상상력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유동적인 이미지는 흐르는 것은 물의 상상력으로 파악되며, 경이로운 물은 꿈꾸는 사람으로서 떠도는 구름 사이나 저녁노을에서 휴식을 취한다. 꿈꾸는 사람을 떠받치는 참다운 물질은 바로 물이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물은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홍윤호, 『물의 과학과 미학』,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P.230.
물을 근원으로 보는 시각을 보이고, 바슐라르의 4원소 중에서 가장 몽상으로 잘 유도하는 물질이 물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물에 대한 상상력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린 시절 물과 가까운 고향에서 태어난 사람은 고향이 물질화되어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숲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과 바람에 대한 몽상은 물의 이미지인 구름과 새의 부리와 결합하여 다양하게 「뼈의 거처」라는 복합적인 몽상을 낳고 있다. “새들은 바람의 기억으로 구름에 닿으면/ 뼈로 방향을 잡는다 부리를 거치지 않고/ 허공의 방위를 뼈에 새긴다/ 무리 지어 날지만 거처를 갖지 못해/ 몸을 풀지않고 낮아진다”라고 새의 존재를 “뼈의 거처를 찾아 붉은 산맥을 밀고 나간다”라는 동영상으로 확인 절차를 거치고 있다. 뼈의 존재는 「납작 엎드려 있는」 자세로 삶을 살다 가신 시인의 부친에 대한 삶의 대차대조표이며, “장거리 이송된 식량”으로 “아이들의 뱃속 가득 새소리로 채운다”는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상상력으로 「끈질기에 웅크린」 자세로 생명을 키워내는 물의 이미지로서의 강과 바람의 이미지로서의 공기와 공간, 흙의 이미지로 대지의 생명력에 대한 상상력을 다양하게 전개해냈다.
3) 삶에 대한 사색과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
제3부 「월식증후군」 15편은 삶에 대한 깊은 사색 통해 공간에 대한 몽상으로 「허공이라는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인 명상과 상상력을 전개한다. 자신의 내면세계의 고뇌와 갈등으로 「가벼운 우울」에 빠지기도 하고, 2억 5천만 년 전 폐름기 말에 일어난 지구상의 생물 대멸종사건에 대한 「저인간 보고서」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사색, 그리고 자연의 풍경과 우주와 자신의 걸어온 삶을 비유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인다. “오늘도 범종 소리가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종소리에는 소박한 찬거리가 담겼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등이 보였다 종소리가 의자를 몇 바퀴 돌다가/ 잠이 든 사내를 잡아당겼다”고 “종소리”라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일상의 먹거리인 미각과 촉각으로 “소박한 찬거리”로 물화시켜 보여주고, 그 찬거리를 요리하셨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등”으로 시각화시켜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보여준다. 지난 날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살아온 시인은 “이력의 몸에 감겨 미라가 된 그림자”의 어머니에 대한 몽상, 그리고 현재까지 삶을 지탱해온 “사내의 뱃속 깊숙이 길을 열었다”는 「깊은 고요」 속에 빠진다. 그의 몽상은 자연과 우주의 변화와 나무와 새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몽상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저께 밤부터 내 심장을 불쑥 스쳐 가는 불빛이 있다 낡은 날갯죽지 질질 끌고 가는 어미새의 길목 살 타는 냄새가 자욱하다”는 자신의 몸과 그 몸을 낳게 해준 어머니에 대한 몽상으로 이어진다. 자연은 「봄의 급식소」가 되고, “응급실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갔다”는 병원의 응급상황을 통해 「봄이 갔다」는 자연의 변화로 교통사고의 현장을 묘사하기도 하고, 천태산 은행나무에서 “나누는 노랑 날갯짓 이전에 불로 살아왔다”는 재생적인 상상력으로 나무의 「혼불」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을 보이기도 한다. “날개뼈가 부러져 죽은 새를 사흘 동안 끌고 가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무의 일생을 「울음나무」로 상상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 「할복장」을 통해 죽음에 대한 사색, 「슬픔, 꽃으로 너를 품는다」를 통해 민족분단의 아픈 상처 “비무장지대”에 대한 슬픔의 묘사, 「뜬 숟가락」을 통해 “노인복지요양원 휄체어에 웅크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바슐라르가 『공기와 꿈』에서 인용하고 있는 월리암 블레이크의 말대로 “상상력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 생존 그 자체”이며, “몽상가는 그의 이미지의 존재가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p.16.
는 것이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존재론은 이미지의 독자성, 상상력의 독자성을 확보하여 자연과 사회 현상을 융합하여 하나의 복합이미지를 창조해낸다. 이러한 창조적 상상력으로 시에 복선을 깔아놓아 주제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상징적으로 우회하여 묘사함으로써 시를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을 요하게 된다.
달은 기억에 말을 거는 차거운 잠
알코올로 숨을 참는 당신은
기억의 한계선을 점검하며
뼛속까지 뜨거워지다 잠에 도달한다
기억을 찾기 위해
달을 안고 매일 새우잠을 뒤척인다
검은 칠이 벗겨진 골목
당신은 술병처럼 굴러와 액체의 밤을 쏟는다
평형이 유지될 때까지
양말을 벗고 환상 속을 걷는다
기억을 복구하려는 듯
달을 붙잡고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당신은 발등이 붓고 월식을 앓는다
월식의 식탁에서 다시 재생되는 밤은
달콤한 에피타이저
그 맛에도 기억이 있다면 달이
당신을 한입에 넣고 우적거린다
울음과 웃음이 섞인 레시피를 중얼거리며
월식 증후군을 앓고 있는 당신은
생의 결락을 채우며
빈 술병을 닮아가다 혼미해진다
유령처럼 머리채가 통째로 사라진다
-「월식 증후군」 전문
「월식 증후군」의 시의 첫구절을 “달은 기억에 말을 거는 차거운 잠”을 통해 “검은 칠이 벗겨진 골목”이라는 달동네의 삶을 “월식의 식탁”위에 재생적인 상상력을 올려놓는다. “기억을 찾기 위해/ 달을 안고 매일 새우잠을 뒤척인다”이며 살았던 과거의 삶에 대한 아픈 기억은 “달을 붙잡고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당신은 발등이 붓고 월식을 앓는다”. 미각으로 재생되는 달은 “당신을 한입에 넣고 우적거리”고 “월식 증후군을 앓고 있는 당신은/ 생의 결락을 채우며/빈 술병을 닮아가다 혼미해진다”고 술에 의존해 자신의 비참한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결국 “유령처럼 머리채가 통째로 사라진다” 로 이어진다. 술은 불의 상상력이며 달은 불과의 대립된 차가운 불의 상상력이다. “머리채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의미는 사람은 꿈을 꿀 수 있는 권리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한다. 상상력의 부재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통하여 과거의 체험에 대한 재생적인 상상력을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바슐라르는 “하나의 시적 이미지를 산다(體驗)는 것, 정녕 산다는 것은, 그것의 조그만 섬유 하나 속에서, 존재의 동요에 대한 의식 자체인 존재의 생성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존재는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한마디 말이 그것을 뒤흔드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p.367.
라고 말했듯이 체험의 재구성을 통해 삶에 대한 사색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가벼운 우울」에 빠져있는 그를 볼 수 있다.
4) 문명에 의존한 현대의 삶에 대한 철학적 명상
제4부 「플러그」는 불의 상상력이다. 현대의 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불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불이란 물리화학적 변화에 동반하여 드러나는 빛과 열 형태의 에너지 덩어리로 에너지로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변환시켜 이용함으로써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에너지를 우리의 생활에 이용하는 형태가 전기의 이용이다. 전기는 인류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원동력으로 그 원형은 불의 이다.「플러그」는 텔레비전, 냉장고나 세탁기, 선풍기 난방기 등 전기에너지의 생활 기구를 사용하기 위한 연결점이다. 한성희 시인은 불에 대한 상상력으로 「플러그」와 「냉장고와 자동차」 등의 문명의 이기에 대한 몽상을 펼친다.
검은 전선 플러그를 콘크리트 벽에 꽂은 뒤에야 겨우 숨 쉬는 노인을 알고 있다는 사실, 벽에게서 듣는다.
여름 휴가 떠나기 전 집안을 살피다가 거실 벽에 두 눈 박고 있는 티브이 플러그를 발견한다.
종일 수인 곁에서 웅웅거리며 바깥세상 애기를 들려주고 한 번도 날 선 시선 던지지 않는 낡은 티브이, 검버섯 손을 붙들고 하루하루 넘기는 검은 줄을 생각하면 쉽사리 저 명줄을 뽑는 일, 아니다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탯줄을 잘라내는 불충한 짓, 당신 이름 석자도 놓쳐 버린 엄니의 당산나무 뿌리를 끊어대는 일
엄니는 내 몸 어딘가에 들숨 날숨의 구멍을 뚫어놓고 시리게 꺾이는 뼈마디 소리 흘러들어 가는 플러그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
〉
난, 플러그 가는 뿌리 끝을 붙잡고 다시 한 번, 벽 쪽으로 힘껏 밀어본다 핑, 강한 전류가 심장을 관통한다
-「플러그」 전문
현대문명의 연결고리 「플러그」에 대한 이미지로 컴퓨터 시대, 미디어 매체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대의 비인간적인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단절된 아파트, 노인문제, 여름휴가 등의 현대의 생활상을 「플러그」는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탯줄을 잘라내는 불충한 짓”으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전통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그로인해 부모 자식과의 단절과 물질주의문명은 “엄니의 당산나무 뿌리”를 끊어내지만, 화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뼈마디 소리 흘러들어 가는 플러그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로 현대사회의 비판의식을 가하나 나는 어찌할 수 없이 문명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플러그를 뽑을 때 “강한 전류강한 전류가 심장을 관통”함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냉철하게 비판한 「발효인간」의 존재와 재개발현장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며 살아가야하는 「안식각」, 요양원의 현실을 비판한 「동물원」 등 사회비판과 냉혹한 현실에서 밥을 위해 「바람의 투사」처럼 투쟁하며 살아가면서도 「저녁밥」되고자 하는 「사과의 불안」을 담은 「눈물발원지」를 찾아가는 이유와 사회비판의 시선을 보고 있다. 문명은 편리함을 가져오지만 편리함 뒤에 웅크리고 있는 불행이 함께 공존시키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문명사회의 인간의 삶이다. 집단의 이해관계로 “미생물 발효에 관한 노인복지법이 수년째 국회에서 발효 중”인 현실을 비판한 「발효인간」은 불안 현실에 대한 상상력이며, 「교수목」의 비참한 현실에서 오는 불안, 문명의 이용에 따른 불안의식을 「냉장고와 자동차」로 형상화하고 있다. “어느 날 금속성 남자를 훔쳐 타고 싶었어 남자 몸에 쑥 들어가 내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보고 액셀을 힘껏 밟는 거야”로 기계화된 인간을 부속품처럼 눈과 머리 제거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냉철한 비판, 문명의 이기를 타지 않고는 꿈쩍도 할 수 없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 지구온난화와 생태계의 파괴, 핵문제로 지구촌의 미래에 대한 불안의식은 「사과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이상기후 속 지하철에 널려 있지만 향기가 없다”는 문명 비판의 시각은 “사각의 유리창으로 추락하는 미래의 과녁은 불안하다”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으로 불안을 노래하기도 하고, 과거 고대 유적지에 대한 상상력으로 「눈물의 발원지」를 묘사한다. “고대로부터 전해진 눈물 발원지란 거울 안에서 증발된 여자의 수몰지 그곳에서 출토된 몇 방울의 슬픔을 화장대로 옮겨 관찰한다”고 인간 문명의 발달 초기의 과거에 대한 상상력, 「유배지의 꽃」으로 동백꽃에 대한 상상력, 나무를 다듬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침대 위에 우리 인간은 휴식을 위해 잠을 청한다. “눈물을 쏟아 부은 여자”를 관능적인 욕망의 묘사를 통해 「침대의 안쪽을 기웃거리는 여자를 수리했다.」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인다.
3. 에필로그
시에서 이미지는 단순히 ‘말하는 그림’ 이상의 것이다. 리듬과 함께 대표적인 시의 구성 원리인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고 사물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시가 구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 곧 이미지를 통하여 추상인 의미를 전달한다. 김준오, 『시론』, 심지원, 1991. p.101.
한성희의 시집 『푸른숲우체국장』이 보내 온 편지는 자연순환의 원리와 윤회설을 바탕으로 한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보고서다. 한성희 시인의 시세계의 사상적 배경은 윤회설이다. 우리들의 삶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돌면서 생과 사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윤회라 한다. 한 존재가 죽으면 그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전제로 하는 윤회설을 배경으로 한성희 시인은 아버지를 『푸른숲우체국장』으로 임명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상상력으로 자연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보여준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물과 꿈』에서 “인간의 꿈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다. 꿈은 어린 시절에 탄생지에서 이미 물질화 된다. 고향이란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물질이다. 시냇물이나 강이 흐르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에 의해 그의 무의식이 지배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이가림 옮김, 『물과 꿈』, 문예출판사, 1992. p.261.
라고 했다.
그의 고향 도봉산 자락은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푸른 숲이다. 바로 숲은 그의 상상력 지배하는 고향으로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존재에 관한 의문을 자연에 풀어내고자 하는 한성희 시인의 시세계를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로 상상력을 전개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자연에 대한 상상력과 묘사를 통한 자기 존재탐구를 위해 시를 쓰는 한성희 시인은 근래에 보기 드문 현대시가 도외시하기 쉬운 서정성을 되살려낸 시인이다. 이미지 위주의 회화적인 그림으로 구체화 시키는 현대시의 경향 때문에 언어적인 리듬을 도외시하고 자칫 감정이나 정서를 절제해야 함에 따라 무미건조한 시가 되어버리기 쉬운데 한성희 시인은 재생적인 상상력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뛰어넘어 감각적인 자연묘사의 독특한 자기만의 기법으로 시에서 울림을 주는 서정성을 융합해놓고 있다. 다만 묘사에 치중한 나머지 주제에서 벗어난 산만한 이미지, 복합적 이미지가 주는 난해한 은유와 상징의 반복, “바람”, “새”, “나무” 등 고정된 소재와 그가 즐겨 쓰는 푸른색과 잎맥 등 고정된 시어, 슬픔, 죽음, 울음 등의 감정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직정을 그대로 노출시킨 점 등을 극복해낸다면 그만의 독특한 감각적인 묘사력으로 창조적인 숲속의 상상이야기를 신선하게 재공해주는 산소 같은 시로 대중들의 잠자는 영혼의 잠을 깨우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한성희 시인의 시집 『푸른숲우체국장』이 보내온 서신의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푸른숲우체국장』이 된 아버지와 대지에 대한 상상력으로 무한한 몽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제1부의 15편은 「아버지의 숲」으로 평생을 산림청 직원으로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통한 자신의 존재확인이라는 철학적인 명상의 세계를 그의 특유의 감각적 묘사법으로 진솔하게 드러냈다.
둘째, 숲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과 바
람을 소재로 대지의 생명력에 대한 몽상의 펼쳤다. 제2부 「나를 바람 곁에 묻는다」에 담은 15편의 시에서 숲이라는 부성성의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과 바람에 대한 현상학적인 상상력을 펼쳤다.
셋째, 제3부 「월식증후군」 15편에서 삶에 대한 사색과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해냈다.
넷째, 제4부 「플러그」를 통해 불의 상상력으로 문명에 의존한 현대의 삶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전개하여 다양한 사회현실의식을 묘사하여 보여주었다.
현대시 낭송의 대중화와 그 한계
김관식
1. 들어가며
최근 현대시의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 음성언어 매체에 의한 전달 방법인 낭송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현대시와 독자와의 단절의 고리를 끊고 소통의 다리를 놓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환영할 일이나 한편 현대시의 본질을 왜곡시켜 버릴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시 대중화의 한계점을 드러내놓고 있다.
현대시는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문화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 하에서 발전되어 온 시로 복잡다단한 현대의 정서를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깊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형상화해낸 창작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창작물을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가치에 맹종하는 물신주의 가치관이 재배하는 현대사회에 소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는 일차적으로 문자로 표현된다. 일정한 사회집단의 약속된 신호체계에 의해 성립된 문자로 표현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소통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1차적으로 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공간과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통을 하기 위한 목적이 전제로 되었으나 이면으로는 문자가 미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전달되는 등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독자까지 포괄한 전달방법이기 때문에 한편의 시는 미래사회에 영구적으로 전수될 확률이 크다고볼 수 있다.
오늘날 컴퓨터의 발달로 종이에 잉크로 인쇄하여 기록보존하는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시가 독자들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통적인 매체환경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만들어낸 첨단 디지털문화로 일상화되고 있고 문자의 전달이 아니라 음성이나 영상 등 다양한 형태로 전달이 가능한 시대로 발전해왔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는 시대에는 미래를 의식하여 영구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위나 나무판 등에 그림이나 기호, 문자로 전달하였고, 직접 붓과 종이에 기록하여 전달하였다. 필사에 의한 전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이 용이하지 않아 점차 목판에 글자를 새겨 종이에 인쇄한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오늘날 디지털의 다매체시대에 시를 전달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에 의해 익명의 수많은 대중에게 시를 창작하여 발표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당대에 살고 있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문자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시대다. 그럼에도 시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제한된 일정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들에게 음성언어를 통해 전달하고 박수를 받고 독자와 소통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자체가 문제이다. 따라서 낭송시가 특정장소의 군중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고 낭송가의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소기의 물질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여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낭송시가 자칫 현대시의 본질을 왜곡시켜버릴 상황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든지 벌어질 개연성이 상존하고 있다. 낭송가에 의해 시인이 의도하지 않는 전혀 이질적인 정서로 뒤바꿔서 시의 본질을 낭송가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변질시키거나 시를 저속한 대중문화로 가치하락을 시켜버릴 개연성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낭송시 대중화의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바람직한 낭송시 발전의 방향을 탐색하여 대안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한다.
2. 낭송문화의 역사적 배경
원시시대는 언어가 발달되지 못하여 의사소통을 손짓과 몸짓, 소리 지르기 등으로 부족들끼리 소통하였고, 오직 생존을 위한 공동체의 작업으로 수렵어로 활동을 해왔다. 이때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원활하지는 못하지만 신체적인 신호인 청각기관에 의해 희로애락의 정서를 표현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야생동물을 공동으로 잡아 서로 나누어 먹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 춤을 추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의 정서를 표현하였을 것이고, 그들이 기거하는 동굴의 벽에 야생동물의 그림으로 그려넣어 그러한 동굴벽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 언어가 발달되자 인류는 음성언어에 의해 의사소통을 해오고 문자가 발명되자 문자로 기록해왔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수세기동안 주로 청각적 매체인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을 해왔다. 문학의 발달도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구비문학으로 전해져왔다. 구비는 항상 불변성과 고정성인 것들이 덜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에 해당되고 항상 가변성과 유동성을 함께 포괄하는 의미로 구비문학은 후자에 비중을 두어 유동문학, 또는 표박문학, 적층문학이라는 말로 불러왔다.
유동문학이나 표박문학이라는 말 속에는 전승과정에서 유동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된 것이며, 적층문학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누적하여 성립하여 왔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와 더불어 구비문학은 민속문학이라든가 민간문학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하는데, 민속문학은 민간의 삶 속에서 전해오는 생활사적인 전승을 간조한 용어이며 민간문학은 민간에서 창작되고 전승되는 창작의 주체가 누구이냐에 중점을 두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오랜 기간에 걸려 구비문학으로 전승되어오다가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구비문학은 기록문학으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구비문학이든 기록문학이든 언어로 표현된 예술이며, 음악이나 미술과는 달리 시간적이고 음과 달리 의미를 갖는 의미예술인 것만은 동일하다. 구비문학이 단순한 비문학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구비전승과는 달리 문학으로서의 구별되는 경계기준은 예술이다.
구비문학은 기록문학에 비하여 현저하게 그 역사가 길며 원초적이며 기본적인 문학으로 짧은 기간에 발전한 기록문학의 바탕이 되어왔다. 설혹 기록문학으로 정착한 구비문학이라 하더라도 오랜 동안 구비문학의 전통으로 구연되어 그 전통을 유지하면서 여러 사람의 노력이 가미되는 공동작의 문학으로 창작활동에 참여되고 구연되는 전통을 이어왔다. 따라서 구비문학은 대체로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문학의 전통을 이어왔고, 창작과정과 전달과정에 일정한 지역의 다수가 참여하므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문학으로 이어져왔다.
구비문학은 신화나 설화, 전설, 민담, 판소리, 민속극, 속담, 민요에 이르기까지 구전되어 오는 과정에서 보태어지고 빼어지고 하면서 다수의 보이지 않는 참여자들에 의해 때로는 참여집단의 흥을 돋우기 위해 구연자에 따라 변개하거나 각색되어왔다.
따라서 낭송문화는 구비문학의 구연성의 특성을 지닌다. 구비문학과 동시에 낭송문화의 뿌리는 고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오랜 시간동안 제정일체의 사회구조에서 해마다 행해지는 제천의식에서 춤과 노래와 결합한 가무의 형태로 발전해왔으며, 고려시대에는 왕궁에서 노래와 시가가 함께 결합한 가곡의 형태로 변주되어 낭송되어 왔다. 한편 민간에서는 국가에서 행하는 제천의식과는 별도로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기복신앙으로서의 무당을 불러 행하는 무당의 무가, 양반계층의 풍류문화에서 낭송문화가 발전되어 왔다.
우리 한글은 소리글자로 낭송문화가 토착화할 수 있는 언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중국의 유교문화가 전수되면서도 우리만의 독창적인 낭송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선시대 주로 시가문학을 창작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려한 자연을 찾아 시회를 여는 낭송문화가 활성화되었다. 주로 향유층들은 양반층의 지배층들이었고, 민간에서는 설화나 전설을 어른이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구연하는 방법으로 전승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 부유한 가정을 찾아다니며 소설을 낭독해주고 대가를 받은 직업적인 이야기꾼인 「요로원야화기」의 김호주 같은 부류가 있었고, 대도시에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를 택하여 소설을 읽어주는 직업적인 낭독가 전기수 같은 부류가 있었는데 낭송문화는 대중들의 흥미 있는 관심거리였다.
김용관이 쓴 『서울, 한영의 기억을 걷다』에 의하면, 소설의 직업적인 낭독가 전기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790년(정조 14년) 8월 10일 《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당시 유명한 전기수(傳奇叟: 고전 소설을 직업적으로 낭독하던 사람)가 익명의 군중에게 살해당한 별난 사건이 기록돼 있다.
당시 《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사건을 다시 그려보자. 오늘날로 치면 종로에서 을지로 사이 약재상과 담배 가게가 밀집한 골목 공터에서 전기수 한 명이 대중들 앞에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담배 가게 앞 전기수 주위로는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고 모두들 전기수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알고 보니 전기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던 청중 한 명이 나쁜 주인공을 응징한다며 들고 있던 낫으로 전기수를 죽인 것이다. 책 읽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나면 청중이 현실과 책 속 이야기를 혼동해 그만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을까? 당시 죽은 사람은 전기수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업복이다.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서얼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것을 보아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은 양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천민이었을 것이다.
전기수는 뒷골목 상권을 형성하는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종로 뒷골목이나 청계천 주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어줬다. 《삼국지》나 《수호지》 등 긴박감이 감도는 인기 소설을 읽을 때면 많은 독자가 몰렸을 테고, 연암이 지은 《양반전》과 같은 풍자소설도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조수삼이 지은 <전기수(傳奇叟)>라는 글을 보면 당시 운종가 혹은 청계천 아래 여러 상점 주인이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해 손님을 모으던 광경이 묘사돼 있다.
전기수들은 한양 서쪽에서 광화문까지 올라갔다가 다음 초이렛날(매달 초하룻날부터 헤아려 일곱째 되는 날)부터는 동대문 방향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한양 도심을 오르내리면서 청중을 몰고 다녔다.
그들은 군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 책을 읽다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에 이르면 갑자기 읽는 것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면 청중들은 다음 대목이 궁금해 앞 다투어 돈을 던졌다. 이때가 전기수에게 공식적인 수입이 생기는 순간이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전기수들이 돈을 버는 절묘한 기술이라 하여 요전법(邀錢法)이라 불렀다.
또한 간호윤의 『아름다운 우리 고소설』에서 의하면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전기수와 동일한 강담사에 대한 기록을 마성린의 『평생우락총록』을 들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기생의 풍류보다도 재미있다.” 이 말은 마성린(馬聖麟, 1727~1798)이 1755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동네 족장 영감이 〈삼국지〉, 〈서유기〉 등을 외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록에 보인다. 얼마나 소설을 잘 외워 이야기하였기에 기생의 풍류보다도 재미있다고 하는지 자못 흥미롭다. 족장 영감을 대면할 수 없으니 기록만 보자면 “그 가운데에 족장 영감의 정신이 남달랐다. 역대 고사와 사대 기서를 외워 이야기하는데 그 재미가 기생의 풍류보다도 나았다”라고 한다.
본래 전기수는 조수삼의 《추재집》에서 사용한 명칭으로 중국에서는 설화인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전기수와 같은 사람을 강담사 또는 강독사라고 칭하였다.
엄밀하게 분류하면,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는 이야기를 잘 읽어주는 직업적인 사람을 일컬어 강담사라 하고, 강담사보다 전문적인 예능인으로 창으로 구연하는 판소리꾼을 강창사, 소설을 청중에게 낭독하는 사람을 강독사로 구분된다.
모두 소설장르에서 읽는 소설을 듣는 소설로 낭송문화의 전통을 이어왔다. 오늘날 낭송시는 조선시대 풍류가객들의 시가낭송에서 그 전통의 맥을 찾을 수 있으나 최근 직업적인 전기수와 같은 낭송가가 인기를 끌고 있다.
3. 낭송시 출현의 배경과 해결과제
낭송시의 효과는 시를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방청자들의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감동을 주었을 때 배가될 수 있다. 따라서 낭송가의 복장과 음성, 몸동작 하나하나까지 시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리하게 시를 전달하는 목적보다는 낭송가가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무리한 동작은 시적인 분위기를 산만하게 할 우려가 있다. 일예를 들면 어떤 낭송가가 김소월의 「초혼」을 낭송한다고 가정해보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의 「초혼」 전문
1연과 2연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감정이 폭발하여 시적 대상을 외쳐 부르는데 감정을 이입하고 슬픈 표정과 슬픔을 과장되게 손짓, 몸짓으로 표현했을 때 시적인 분위기보다도 낭송가의 의도가 많이 개입됨으로써 이미 시적인 본질에서 이미 벗어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시낭송회는 배경음악과 함께 낭송이 이어지기 때문에 청중들은 이미 배경 음악을 통해 슬픈 정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셈이다. 그런데 낭송가의 과도한 제스춰는 그만 낭송가에 집중되기 마련이고 이미 시적인 분위기보다는 연극적인 분위기로 흐르게 된다. 퍼포먼스로 여기에 소도구까지 곁들여진다면 시와 노래와 연기가 결합된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갖게 됨으로써 청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나 청중들은 청각작인 감각기관으로 시를 감상하는 것보다는 시각적인 낭송가의 몸짓에 집중하게 됨으로써 시가 아니라 낭송가의 퍼포먼스에 시각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자칫 시의 본래 가치와 분위기를 오버함으로써 신파적인 연극이나 코미디 장면을 보는 것과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기생문화와 흡사한 낭송문화를 연출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양반층들이 음주문화의 한 풍속도로 눈요기와 흥을 돋우기 위해 양반들처럼 시를 창작하고 대화가 가능한 기생들을 동원하여 춤과 가악으로 풍류를 즐기는 기생문화나 무녀들을 불러 무당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고, 현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의 평안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복신앙의 푸닥거리와 일치하는 공유감정을 자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본질적인 가치와는 동떨어진 시를 매개로 한 낭송가의 종합예술의 발표회가 될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양반집에서 회갑잔치나 팔순잔치를 할 때 기생을 불러 창을 부르게 하거나 판소리꾼을 불러 잔치분위기에 흥을 돋우어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회적인 명성과 경제적인 부를 간접적으로 자랑하는데 이용했고,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낭송가들을 불러 시적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상위계층의 사회적인 신분임을 과시하려하는 시의 낭송문화로 가치 하락될 때 시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본질적인 산물임에도 물질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하녀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최근 낭송가들을 양성하는 학원도 생기고 문학단체마다 전국낭송대회를 개최하여 상금을 주는 등 판소리 경창대회의 성격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시낭송문화가 대중에 야합하는 격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거나 즐겨하지는 않는다. 시를 창작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시를 향유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시적인 감수성이 없이는 공감적인 향유가 불가능하다. 즉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밀한 정서와 감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자신을 뒤돌아보려는 자성적인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일종의 고급문화행위로 출발부터 대중문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함에도 시의 가치를 시적인 감수성이 없는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한 낭송가는 분명 시의 저변확대라는 측면에서 공헌하고 있다고 보나 사실은 자신의 표현욕구의 실현이나 정신적인 억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자기치료적인 행위, 또는 낭송가 자신이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신분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 또는 친교의 목적이나 출연료를 받기 위한 물질적인 이익추구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으나 낭송시의 대중화가 시의 저변확대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시의 본질적인 가치를 왜곡하거나 가치를 떨어뜨려버릴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이미 예술전반적인 문예사조가 신중심의 시대에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는 관념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르네상스 이후 모든 가치관이 실존의 가치체계로 변화되었고, 모든 문화가 관념보다는 실존을 가치를 존중하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체계보다는 형이하학적인 문화체계로 부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오늘날 과학문명과 기술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물질적인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를 물질의 시대라고 한다.
모든 기존의 정신적인 가치가 붕괴되고 있고 더 풍요로운 생활을 추구한 나머지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이어짐에 따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이상의 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수많은 쓰레기를 배출하여 지구촌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이제 그 피해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은 자연과 우주질서의 파괴로 이어졌고, 오늘날 디지털혁명의 시대에서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예부터 농업을 중심으로 한 1차 산업에서 공업중심의 2차 산업에서 지식과 정보의 서비스산업인 3차 산업, 그리고 정보·의료·교육서비스 산업 등 지식집약형 산업으로 제4차 산업, 그리고 미래의 패션, 오락 및 레저산업 등의 제5차 산업으로 패러다임이 바꿔지고 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의 중추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것들이 예술을 기반으로 한 문화산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문화를 통하지 않고는 행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가 충족되면 대중문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 국은 물론 각 지방자치자체단체가 굴뚝 없는 산업인 문화산업에 총력을 기울여 자국과 자기 고장의 문화를 홍보하고 가치를 재창출하기 위해 이색적인 축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기에 시낭송은 미래사회의 문화산업으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이 많은 분야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시가 낭만주의 시대의 감정토로나 노래의 성격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회화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난해성 문제가 불거지고 대중들과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중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하기를 꺼려하고 우선 충동적이고 즉시적인 일회용문화를 선호하는 경형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많은 대중들에게 시와 친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시인들이 대중들이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다가오도록 문학성이 짙은 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르고, 낭송가 역시 현대시를 제대로 알고 시의 본질을 널리 알리는데 목적을 두고 자신이 임의적으로 재구성하여 왜곡하게 할 요소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디지털 다매체의 시대에 오늘날의 문화에 맞게 대중들이 시의 낭송문화에 푹 빠져 향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시낭송으로 배경 음악과 시낭송과 함께 대형 스크린을 통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배경화면의 동영상, 낭송시를 곁들인 시화첩, 낭송시의 분위기를 즉석에서 연출할 수 있는 포토존, 낭송시의 분위기에 나오는 음식이나 음식 실습 체험 등을 낭송장소에서 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문화산업으로 육성하는 것도 바람직한 미래 산업이라고 보겠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산업화가 될 때 낭송의 시의 선별에 각별하게 신경을 쓰지 않고 문학성이 전혀 없는 낭만주의시대의 감정토로의 창작물로 전락하여 청중들의 즉각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사향의식, 그리움, 부모의 사랑 등 대중가사 같은 저급한 시가 낭송문화로 자리를 잡을 때 “시는 잃고 낭송만 얻는” 시의 본질과는 완전하게 멀어진 낭송문화로 정착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시는 유행가의 가사로 전락하고 시를 낭송하는 낭송가만 설쳐대는 마치 대중가수와 흡사한 시낭송 문화를 낳을 때 시의 본질이 왜곡되어 버릴 개연성이 크다는 점이다.
오늘날 낭송가들이 많아지는 추세는 바람직한 일이며, 그러나 낭송하는 사람들이 주로 목소리가 고운 여성분들이 많은 편임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여성상위의 사회적인 풍토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여성의 표현욕구가 강하게 작용한 원인이 클 것이다. 그러나 낭송에 참여하는 여성 낭송가들 대부분이 화려하게 전통 한복 입는다거나 지나치게 외모와 옷차림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연예인과 흡사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 들이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시의 본질적인 가치를 폄하시킬 우려가 많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시가 아니라 낭송하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외모, 몸짓으로 관심을 끌여 정작 시인의 위상을 손상시킬 우려와 함께 시의 본질을 왜곡시킬 우려도 예견된다. 다수의 대중들은 시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낭송가가 낭만주의 시대의 부산물인 감정토로의 사랑이나 그리움, 사향의식, 등의 푸념이나 타령의 시아닌 시를 시로 오인하게 할 우려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낭송가의 자질이 욕구된다는 것이다. 대중에 야합하여 자신의 낭송가로서의 명리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목적을 두었을 때 낭송가에 의한 현대시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시낭송문화가 연예인 활동으로 변질될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 시인들끼리 서로의 자작시를 발표하는 시낭송회야 바람직한 낭송문화이겠지만 여러 공연장이나 음식점에서 낭송전문가를 초청하여 시낭송을 벌이는 문화는 시낭송가를 끌여 들여 그들의 문화적 향수를 만족시키는 시 자체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성이 우수한 낭송시를 창작하여 대중들에게 시적인 감성을 촉발하여 시를 사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시인들도 노력 해야겠지만,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갖춘 전문적인 낭송가들에 의해 우수한 시가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4. 나오며
미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과 다가올 미래는 제5차 산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시가 우리 사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시의 기능이 살아날 것이냐? 대중적인 오락가치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문화의 결정물인 시가 형이하학적인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대중문화로 가치가 전락됨으로써 시의 고유한 가치가 왜곡되고 훼손될 때가 큰 문제이다. 어디까지나 시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사회적인 갈등을 치유하는 건강한 문화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낭송시의 방향을 잡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기능과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사람이 낭송가가가 되어야 시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건전한 낭송문화를 선도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시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시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낭송문화를 선도해나갈 때 낭송시의 발전은 요원하다. 낭송을 잘 하려면 먼저 시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본질적인 가치가 우선되어야 문학이 발전하는 법이다. 어느 문학단체이건 간에 본질적인 가치는 작품을 잘 쓰겠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낭송시 또한 낭송을 잘 하여 시인이 의도한 바를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접근하여 시와 독자의 소통을 위한 시의 매체적인 기능으로서의 낭송시일 뿐이다. 시를 독자와 접근시킬 때 전통적인 방법으로 출판매체를 통해 접하게 하는 것이 기본이고, 여타 시비건립, 시화전 개최, 시엽서, 시를 곁들이 건물 벽화, 산책로의 나무판에 걸린 시조각, 텔레비전 방송, 낭송테이프, 인터넷매체, 핸드폰 등의 전자매체 등 다양한 시청각 매체로 시가 독자에게 소통하려는 시의 발표 매체적 접근으로서의 낭송문화일 뿐 낭송시가 시의 본질을 훼손하고 왜곡한다면 낭송시의 존립가치를 잃어버린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김관식
김관식
학력
광주교육대학 졸업(1974년)
조선대학교 경상대학 회계학과 졸업(1984년)
조선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회계학전공 경영학석사(1986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교육사회학과 교육학석사(1998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201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문학석사(2015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등단
전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상(1976년)
월간 『아동문예』동시 천료(1979년)
계간『자유문학』신인상 시 당선(1998년)
저서
제1동시집 『토끼 발자국』(1983년)아동문예사
제2동시집 『꿀벌』(1990년)동화문학사
제3동시집 『꽃처럼 산다면』(1996)아동문예사
제4동시집 『햇살로 크는 바다』(2000)교단문학사
제5동시집 『화분 이야기』(2007)아이올리브
제6동시집 『바람개비 돌리는 날』(2007)아이올리브
제7연작동시집 『속삭이는 숲속 노래하는 나무들』(2007) 태극
제8연작동시집 『물속나라 친구들』(2008) 아이올리브
제9동시집 『가을 이름표』(2008) 아이올리브
제10연작동시집 『우리나라 꽃135』(2008) 아이올리브
제11연작동시집 『아침이슬83』(2013) 책마중
제12동시집 『이슬에게 물어봐』(2015) 도서출판 해동
제13동시집 『땅콩 속의 연가』(2017) 도서출판 고향
제14동시집 『바람과 풀잎』(2017) 도서출판 고향
제1시집 『가루의 힘』(2014) 도서출판 해동
제2시집 『연어의 귀향』(2016) 문창콘
제3시집 『민들레꽃 향기』(2016) 문창콘
제4시집 『백수의 하루』(2016) 가온문학
제5시집 『시인 백서』(2016) 가온문학
제6시집 『강마을의 신화』(2016) 가온문학
제7시집 『백정』(2017) 도서출판 고향
전설집 『나주의 전설』(1991년) 나주문화원
문학평론집 『현대동시인의 시세계-호남편』(2013) 책마중
문학평론집 『한국현대시인의 시세계』(2016) 문창콘
문학평론집 『아동문학과 문학적 상상력』(2017) 청동거울
명상칼럼집 『한 자루의 촛불』(2017) 명성서림
문학이론서 『아동문학의 이해와 동시창작법』(2017) 명성서림
수상
2009년 한국시 문학대상 수상
2015년 제40회 노산문학상 수상
2016년 제7회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2016년 제19회 매월당문학상 수상
2017년 황조근정 훈장
문학단체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
한국동시문학회 한국산림문학회 회원
양천문인협회 자문위원 서초문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중앙위원, 국제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예춘추문인협회 회원, 자유문학회 회원
백교효문화선양회 회원, 문학의강 문인회 이사
나주문인협회 초대회장 역임
월간 『한국시』 신인추천위원 및 심사위원 역임
월간 『지필문학』 자문위원 겸 신인심사위원 역임
계간 『한글문학』 자문위원, 『별밭』동인
계간 『남도문학』자문위원, 『서정문학』운영위원
계간 『백제문학』, 『가온문학』, 『미래시학』 신인심사위원
계간 『시와 늪』 주필 겸 신인심사위원
인터넷 홈 페이지 주소 : http://kks419.kll.co.kr/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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