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학아세(曲學阿世)와 학자적 양심
“곡학아세(曲學阿世)”는 ‘학문이나 도리를 구부리어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진리나 원칙을 외면하고 현실에 편승하거나 타협하는 태도를 비판할 때 사용되는 성어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곤 한다. 한 마디로 곡학아세하는 지식인을 부르는 단어로는 어용학자의 태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는 원칙과 진리를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디는 것이다. 지위나 이익을 추구하며 학문이나 지식을 비틀어 맞추려는 사람들로 인해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려는 것은 쉬운 일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진리와 원칙을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진정한 학문의 길을 버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으로, 스스로 비굴하게 될 뿐이다. 이뿐 아니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곡학아세를 하게 되면, 국민들을 올바로 이끌어야 할 지도인사가 오히려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위험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곡학아세에 대립하는 다른 말로는 “학자적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든지,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적 진리에 입각하여 최소한의 지킬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행동양식이 ‘학자적 양심’을 의미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의롭고 타당한 말을 하고, 진리를 전달하고자 한, 과거의 선비정신이 곧 오늘날 학자적 양심이다. 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곡학아세’하고자 할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나라가 이렇게 어지럽지만, 이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내는 학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학자적 양심은 정치적으로 어느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누구이든 올바른 행동에는 칭찬을 하고, 잘못된 행위에는 비판을 가하는 올곧은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잘 보이지 않고, 여기 저기 곡학아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젊은 이들은 냉철하게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양심바른 학자들의 말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