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적인 해석
하루에 한 장 두 장을 읽을 수도 있고 그렇게도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읽어서는 평생 동안 성경을 읽는다 하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씩 읽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전체를 단시일에 집중적으로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신약 성경의 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신학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는 어려웠다.
1. 교리(敎理)는 너무 간추려서 알기 어렵고
2. 주석(註釋)은 너무 방대하게 확대하여 알기 어렵고
3. 설교(說敎)는 평생 들어도 미흡하고
4. 신학(神學)은 어렵기도 하고 시대 따라 변동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독하면서 통전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교리처럼 축약(縮約)되지도 않았고 주석처럼 부풀리지도 않았고 설교처럼 미흡하지도 않고 시대를 따라 변동하지도 않는 방법이다.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본 역사가 없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온갖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서야 그들 중 몇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다. 다니엘과 에스겔, 그리고 에스라와 같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게 되었다. 다니엘과 같은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고야 자기와 및 자기 민족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게 된 것은 너무 오랫동안 성경을 읽지 않았기 대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고 계속하여 범죄 하다가 마침내 나라가 망하여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였고 유다는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다가 70년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 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중수한 후 그해 초막절이 이르자 온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혜미야에 의하여 성경을 통독하게 되었다. 그날 그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에스라가 읽어 들려준 말씀을 밝히 알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통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크게 즐거워했다. 그 방법은 신명기의 명령대로 초막절 한 주간 동안 매일 새벽부터 오정까지 계속하여 성경을 읽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밝히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전적으로 읽어서 마침내 신의(神意)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놓은 책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해석하지 말고 읽고 또 읽어서 이해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성경의 말씀 속에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가 하여 지나친 해석을 하게 되는 수가 많다. 성경을 과잉 해석하게 되면 본래의 뜻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보낼 때 거기 아무런 주석이 없었다. 그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특별한 해석이나 주석이 없어도 편지를 읽듯이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복잡하게 해석을 하게 되면 오히려 성도들은 아예 성경은 알 수 없는 신비(神秘)의 책으로 인식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비(神秘)를 감추어 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어 계시(啓示)하신 책이다. 성경은 결코 비밀(秘密)의 책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된 것은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지 않고 지나치게 해석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결과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다. 유럽의 신학(神學)이 성경을 한없이 어렵게 했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의 교회가 그 어려운 해석에 질식(窒息)해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 학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했는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두개인들의 오해(誤解)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해석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성경 전체를 충분히 읽어야 한다. 신 구약 전체의 내용이 파악 될 때까지 적어도 10회 이상 30회 정도는 읽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나 이기적인 해석은 극히 삼갈 일이다. 이기적인 생각을 품고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위험을 초래한다. 설교자들이 회중들의 욕구에만 편승하거나 기복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에 아부(阿附)하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경우 교회는 온갖 종교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타락하게 된다. 성경을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삼갈 일이다. 부분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절, 한 절 따로 볼 수 있는 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잠언뿐이다. 다른 책은 언제나 문맥과 문장을 따라 문법적으로 읽고 스토리를 먼저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해석의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나게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살았고 운동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입이 있어서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분별한 해석이나 비평에 앞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아야 한다. 나피어(D. Napier)가 말한 대로 어떤 신학자들이 영적으로 귀가 멀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죽어 생명이 없는 시체(屍體)인양 “해부하기를 좋아하는 병원의 인턴(intern)과 같이 성경의 부분을 잘라 분해와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의 살점을 아무리 찢어발겨도 그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의 어떤 부분을 아무리 확대하고 아무리 분석하고 비평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위하여 최소한의 해석으로 쉽게 전달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1. 성경을 전체적(全體的, 通全的, 通時的, 通視的)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
2. 66권 각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3. 교리적(敎理的) 선입관(先入觀)에 지나치게 매이지 말고 온 성경 전체를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
4.성경이 본래적(本來的)으로 말씀하시는 그 뜻이 드러나도록 해석해야 한다.
5.불변적(不變的)인 진리와 가변적(可變的) 윤리 사이에서 책임성 있는 해석을 해야 한다.
6.특수성(特殊性)보다는 보편성(普遍性)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7.성경이 문자로 계시된 신언(神言)이라는 관점에서 신 중심적(神 中心的)으로 해석해야 한다.
8.해석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해석 없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9.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하여서는 믿음을 가지도록 해석하야 한다.
10.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대해서는 순종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
11.66권 중에 필요 없는 성경은 단 한 권도 없다는 관점에서 모든 성경을 고루 해석해야 한다.
12.성도들로 하여금 66권의 성경 말씀을 통시적(通視的) 안목으로 성경을 볼 수 있게 해석해야 한다.
13.전체(全體)가 부분(部分)을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성경을 짦은 기간 내에 통독을 하면서 해석한다.
4. 1번역이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원어 성경에서 직역하여 보완하고 그 외 부분에서도 번역된 성경의 자구(字句)보다는 전체를 흐르는 신의(神意)에 관심을 가지고 해석한다.
성경을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한 주간 내지 도주간을 투자하여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다만 어려운 점은 한 주간이란 시간을 온전히 소요한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한 주간을 오로지 바칠 수만 있다면 평생을 혼자 연구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은 더 바르게 깨닫게 된다.
신학을 크게 나누어 두 분야 즉 이론신학(理論神學)과 실천신학(實踐神學)으로 보면 이론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실천신학이란 이론신학을 통하여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학문이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무런 신학자도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이 무슨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성군 다윗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 양심을 따라 살아서 그는 성군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이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지식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영원히 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