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7.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가복음10:35-45)
35. The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came to Jesus. “Teacher,” they said, “there is something we want you to do for us.”
36. “What is it?” Jesus asked them.
37. They answered, “When you sit on your throne in your glorious Kingdom, we want you to let us sit with you, one at your right and one at your left.”
38. Jesus said to them,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for. Can you drink the cup of suffering that I must drink? Can you be baptized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39. “We can,” they answered.
Jesus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the cup I must drink and be baptized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40. But I do not have the right to choose who will sit at my right and my left. It is God who will give these places to those for whom he has prepared them.”
41. When the other ten disciples heard about it, they became angry with James and John. 42. So Jesus called them all together to him and said, “You know that those who are considered rulers of the heathen have power over them, and the leaders have complete authority. 43. This, however, is not the way it is among you. If one of you wants to be great, you must be the servant of the rest; 44. and if one of you wants to be first, you must be the slave of all. 45.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he came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to redeem many people.”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세 번에 걸쳐서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두고 겟세마네에서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
이 기도는 주님의 갈등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갈등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주님도 주님의 뜻을 가지고 계셨는데 성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엄청난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요구하셨습니다.
신앙은 두 인격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죽으심을 세 번째로 예고 하셨을 때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35. The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came to Jesus. “Teacher,” they said, “there is something we want you to do for us.”
그런데 예수님만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주님 앞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세상 욕심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수시로 목격한 일입니다.
주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한 마디의 명령으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은 기회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의 하락만 떨어지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주님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일관되게 주님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그 불길한 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울수록 이들은 더 초조해졌습니다.
말씀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죽음을 앞에 두신 주님의 갈등을 보면서 그들 역시 갈등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신앙이란 갈등입니다.
주님도 성자이신 자신과 성부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죽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 그 갈등의 진폭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 인간의 존재는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롬3:10-18)
특별히 이런 죄의 내용은 그들의 이기적인 성취 욕구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절대 의인 앞에 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시든지 말든지 제 욕구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죄인으로써 주님 앞에 서다 보니 늘상 이 갈등을 맞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혼동에 빠진 나머지 그 세속의 욕구를 종교로 포장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것을 성취하고 기뻐하는 간증에 아멘 합니까?
주님은 그런 외식을 정면으로 공격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죽음을 세 번에 걸쳐서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정면 거부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그 뿐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세상의 방식을 이 땅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로 확대 적용할 것입니다.
그 형제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주님의 좌우편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들의 소망의 장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다미선교회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수십만 층인지 빌딩이 즐비한 현대도시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집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우리의 신앙을 부동산 투기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층짜리 마당이 있는 집이 더 좋은데.......
하나님의 나라에 내 생각을 적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기적인 또한 세속적인 관점이 변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도 힘의 논리가 충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강자가 되어 군림하는 곳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곳입니다.
주님은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시며 죽음을 향해 가시는 역사적인 행위로 하나님 나라 지도력을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기심을 이 땅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재울 수 없는 자신들의 요구를 주님께 간청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죄인들은 명확한 능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지를 그 능력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의 탁월하신 능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다 요구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지금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봅시다.
만약에 예수님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생각이셨다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나로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주세요.
로마를 때려 부수고......
꼭 그렇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 능력으로 십자가를 피하시고 성공한 사업가가 되셔서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면서 승리의 하나님을 간증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에도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갈등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6. “What is it?” Jesus asked them.
내가 하나님을 향해 이것만큼은 해주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향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실까?
주님은 주님의 능력을 믿는 그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하느냐?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요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네 기도하는 것이 무슨 내용이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1-33)
당장에 먹을 것조차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또 우리를 위하신다는 신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칠판을 세워두고 분필 가루를 날리면서 강의한다고 죄인이 하나님의 뜻을 요구하며 따를 수는 없습니다.
똥돼지에게 똥은 밥이 아니라고 가르쳐 보세요.
그것은 될 일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 주님이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존재가 변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15:7)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생명까지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일에 주님은 진실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기 위해서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뜻은 금식하고 비몽사몽 중에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제대로 아는 일이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1. When the other ten disciples heard about it, they became angry with James and John.
야고보와 요한이 마음 안에 있던 그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열 명의 제자들이 분개했습니다.
내 이기적인 말 때문에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불쾌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에 말 못 하고 쭈뼛거린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주님 안에 또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7.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7. They answered, “When you sit on your throne in your glorious Kingdom, we want you to let us sit with you, one at your right and one at your left.”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의 나라처럼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제자는 이 땅에 다섯 개의 창고를 짓고 그것을 간증하며 으스대는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런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고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19:28)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까지 버린 소명을 마친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제자로써 그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요한은 이런 식의 사고를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를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구체적인 열매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이 지적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열매를 맺히면 그 사람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8. Jesus said to them,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for. Can you drink the cup of suffering that I must drink? Can you be baptized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첫째로 자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혹은 알고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모르고 있거나 혹은 간과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잔의 의미 또 세례의 의미를 모르고 혹은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심판으로 알고 그것을 용케 피했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고 외우고 또 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보장받는 길입니다.
38.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8. Can you drink the cup of suffering that I must drink? Can you be baptized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혹시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하시면서 정말 억울하게 욕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혹시 왜 그러냐고 내가 옳은 것을 따지고 그 사람을 욕하며 대든 적이 없었습니까?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5:10-12)
그렇게 반응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자리를 얻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을 바라면서도 고난의 잔과 세례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엉뚱한 주소지를 찾아간 것입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또 목사님이 머리에 안수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이 보장되는 줄로 잘못 안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주님께 내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여러분의 얼굴을 알아보실 사건이 있습니다.
엉뚱하게 욕을 듣는 역사적 실천 행위들입니다.
핍박과 고난의 장소입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18.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롬8:17,18)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들은 희생 혹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세상과 전혀 다르게 해석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수없는 간증들이 우리에게 신앙적 혼선을 주는 것입니다.
원수가 팍 꼬꾸라진 일이 아닙니다.
내가 원수에게 무참하게 당하는 일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36.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6. “What is it?”
주님은 그 실례를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고난 받을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바로 그 일을 해주시기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일이 내 좌우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으라.
그런데 주님은 이 잔과 세례를 더 구체적으로 한정하고 계십니다.
그 고난의 기준은 철저히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를 짓고 자기 죄 때문에 옥에 갇히며 당하는 그런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8. 내가 마시는 잔을 --, 내가 받는 세례를 --?"
38. -- that I must drink? --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언제인가 부산 놀이동산에서 사고가 나서 60m 인가의 높이에서 손녀를 껴안아 살려낸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가족이 놀이터에 놀러 갔다가 순식간 일어난 일입니다.
방금 웃고 있던 가족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주저 없이 바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죽을 힘으로 손녀까지 껴안은 것입니다.
그렇게 손녀가 할아버지의 손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친할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동기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고백대로 기적을 보았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놀이기구가 기도를 통해 고장이 고쳐졌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껴안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껴안은 그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성령 하나님이 아니고 원수가 사랑의 대상으로 보이겠습니까?
39.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39. “We can,” they answered.
Jesus said to them, “You will indeed drink the cup I must drink and be baptized in the way I must be baptized.
주님이 고난을 말씀하셨을 때 두 제자는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당돌하지 않은가?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말을 일정 인정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처음 하셨을 때 주님의 말씀이 반어법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38절)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입을 맞추어 고백했는데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하라고 다시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을 원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외우로 또 외우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보장하는 열쇠입니다.
바로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편을 차지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의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희생이 자신의 일상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오늘의 주인공 야고보는 정말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그 하나님 나라의 집주소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옆집에 사는지 한참 떨어진 집에 사는지.......
그들이 당한 고난의 무게를 달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마 주님의 가까이에 사실 것입니다.
주님은 삶의 모델을 보이신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당 하신 모델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사람은 주님의 바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이란 눈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고 눈뜨고 하는 일이 기독교의 예언입니다.
그의 손에는 못 자욱이 있는지
그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렸는지
그 비난의 소리를 침묵으로 감당해 냈는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처럼 무고한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앞날을 귀신같이 맞추고 손을 들어 병을 고치고 주여 주여하고 그런 종교 기술이 하나님 나라를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 결과를 보장해달라고 주님께 요구했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 열매 좀 보자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같은 희생의 실천이 있느냐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것과 같은 그런 고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 달라는 것이 유일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자초하는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하나님 나라의 주소를 정하는 일에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40. But I do not have the right to choose who will sit at my right and my left. It is God who will give these places to those for whom he has prepared them.”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최종의 판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조차 야고보와 요한의 하나님의 나라 주소지를 모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내 영역이 아니다.
40.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0. But I do not have the right to choose
주님도 성부의 뜻을 따르시기 위해서 주님은 주님의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것까지 확실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그 일을 마치시며 최후의 순간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46.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눅23:46)
믿음이란 관계의 사건입니다.
성자는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또 그렇게 사신 후에 자신의 생명을 성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신앙은 철저히 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손에 우리는 맡기는 일입니다.
나 홀로 선한 윤리를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사는 일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의 사건입니다.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이 아닌 죄인의 생명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그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죄인의 생명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어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관심에 주님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혹은 그 하나님의 나라도 남 위에 군림하는 곳인 줄 착각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런 고질적인 죄성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세 번을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세 번 이기심을 드러내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 한 사람만 만족시키는 일을 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쾌감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두 제자가 그들의 뜻을 밝혔을 때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1. When the other ten disciples heard about it, they became angry with James and John.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열 사람의 속으로는 똑같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42. So Jesus called them all together to him and said, “You know that those who are considered rulers of the heathen have power over them, and the leaders have complete authority.
주님은 지금 개인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이 세상이 진리로 여기며 이 세상이 죽자사자 추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이 가신 길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나라 논리를 적용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은 어느 나라의 논리를 가져다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회조차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힘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세일즈맨을 불러다 돈을 주고 전도를 시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죄인들에게 이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말씀을 보면서도 막상 그 내용은 부자가 복을 받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뒤집어 놓은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처음 들어보는 말씀을 하고 계셨는데 그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 출생이 우리와 다르셨던 것입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그 나라에 대한 정보는 오직 주님 말씀의 책 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으려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가 교회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조차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한다는 것을 선을 행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적용하는 기준을 바꾸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최종적으로 그의 나라 백성을 찾으실 때에 선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따라서 산 사람을 고르실 것입니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3. This, however, is not the way it is among you. If one of you wants to be great, you must be the servant of the rest;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것 중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을 지도력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노예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노예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인정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생각은 세상 것과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바로 그 일을 하셨는데 주님은 스스로 남을 섬기는 예를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종이 되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 역시 남을 섬길 것입니다.
주님은 지도력에 대해 믿는 사람들의 정의를 바꾸신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로 지도력이란 단어의 뜻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과 거꾸로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을 생각해 봅시다.
그 가족은 단위 안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부모는 자녀를 위한 희생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한 가족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장난으로 씨름을 해도 아들에게 져주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렇게 세상과는 순위가 완전히 뒤집혀 있는 것입니다.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4. and if one of you wants to be first, you must be the slave of all.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순위는 반드시 뒤집혀야 합니다.
그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으뜸이 되어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을 으뜸이 되고자 할 때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말씀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종이 종이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자리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7.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를 쓰고 윗자리를 골라 잡는지를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 말씀하셨다.
8. "네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들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9.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 때에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맨 끝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눅14:7-9)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45.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he came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to redeem many people.”
주님의 죽음은 정해지신 일입니다.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섬기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을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창고 다섯을 짓고 로마를 물리치시는 그런 다른 길을 걸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길은 죽음으로 정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세 번에 걸쳐서 주님의 죽으심을 예언하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에 뛰어내리셔서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이 길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주님이 죽으심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죽음을 정면으로 부인 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주님이 죽으심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를 다투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 때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자리를 취하려 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일은 주님이 정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그 자리를 정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집주소는 그렇게 여러분에 의해 정해지며 또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