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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마틴 루터 킹
●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동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몽고메리 페어의 창고에서 근무하는 재봉사 로자 파크스 부인은 클리블런드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42세의 그녀는 하루 종일 이리저리 오가느라 피곤했다. 파크스 부인은 앞쪽 백인 좌석 바로 뒤 첫 번째 열에 앉았다. 그녀가 안자마자 버스 기사는 ‘방금 올라탄 백인 손님들이 앉아야 하니 흑인들이 앉는 뒤쪽으로 옮겨 앉으라’고 말했다. 뒤쪽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기사의 말대로 하면 그녀는 서서 가야 하고, 늦게 탄 백인은 자리에 앉아 가게 된다. 다른 흑인들은 운전기사의 말에 따랐지만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체포됐다. 이로 인해 흑인들과 여성 운동가들은 버스 안타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덱스터 침례교회를 빌려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마틴 루터 킹은 그때까지 파크스 부인 사건을 알지 못했다.
당시 26세였던 킹 목사는 그해 보스턴 대학교에서 갓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몽고메리로 부임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책상물림이었다. 몇 주 전 킹 목사는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유색인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전국협의회’ 의장직을 거절한 참이었다.
4일 뒤, 집회가 열리는 날 킹 목사는 준비회의에 조금 늦게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그에게 “당신을 의장으로 뽑았소.”라고 인사했다. 흑인들이 저항한다는 사실에 백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의장자리는 그 증오의 창 맨 앞에 서는 일이었다. 킹 목사는 천천히 대답했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는 불과 20분 뒤 교회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과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했다. 아무런 메모도 없이 연단에 오른 킹 목사는 ‘우리는 억압당하고 짓밟히는 데 지쳤다’고 입을 열었다. 청중은 갈채를 보냈다. 텔레비전 카메라의 불빛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킹 목사는 백인들의 폭력적 인종차별단체인 KKK단(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의 행태와 시의회의 잔혹함을 언급하면서, 흑인들은 평화적 방법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버스 안타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킹 목사에게 조롱과 협박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그에게는 2년 전 결혼한 아내와 태어난 지 몇 주 되지 않은 딸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책상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는 의로운 일을 위해 투쟁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력하고 용기를 잃고 그들 앞에 서면 그들도 흔들릴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킹 목사는 자신의 심령을 울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겠다.”
한 달 뒤인 1956년 1월 3일 밤 9시 30분쯤이었다. 킹 목사의 집 베란다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킹 목사 가족은 급히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그때 또 한 번 폭발음이 집을 뒤흔들었다. 우리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났다. 외부에서 연설 중이던 킹 목사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접근을 막는 경찰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폭발로 부서진 베란다에 오른 킹 목사는 군중을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 아내와 아이는 무사합니다. 제발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복수를 통해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내가 이 투쟁을 계속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한 이 운동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사람들은 흩어졌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백인 경관은 ‘흑인 목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모두 시체가 됐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킹 목사가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킨 일은 다음날 신문에 보도됐다. 사람들은 그를 흑인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20일 연방법원은 버스 안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몽고메리의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은지 382일만의 일이었다.
●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15~1968.4.4)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침례교 목사였다. 15세에 흑인들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불리는 애틀랜타 무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의학과 법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졸업 후 신학교에 진학한다. 크로이저 신학교에서 그는 간디의 비폭력철학과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사상을 접한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보스턴에서 그는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하고, 부인의 고향인 몽고메리시의 유서 깊은 덱스터 애버뉴 교회에 25살의 나이로 부임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자신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뎌 놓게 된다.
몽고메리시의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의 이름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시대적 사명에 따라 그는 흑인평등운동의 최전선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몽고베리시 흑인들의 비폭력 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남부 도시 곳곳에서 비슷한 운동들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빈민가의 흑인전용병원에서 태어나야 했으며, 식당, 공원, 극장, 심지어 교회조차 흑인, 백인교회가 분리되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백인들만 들어가는 식당에 들어가 연좌농성을 벌였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버스를 타고 남부지방을 순회하는 ‘자유의 여행’도 시작됐다. 남부 기독교지도자 협의회에서는 흑인들의 투표권을 요구했다. 흑인 인권운동을 시작하면서, 농성과 평화행진에 참여한 킹 목사는 수없이 체포당하고 법정에 섰다.
1959년 인도 네루 수상의 초청을 받아 인도를 방문한 것은 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정신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에 적용하면서 킹 목사의 사상과 철학은 더욱 성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로 이주한 킹 목사는 아버지가 목회하던 에벤에셀 침례교회 동역목사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선다. 1962년, 흑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백악관에서 회동하는 등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하지만 킹목사의 비폭력 노선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결실이 보이지 않는데 대해 조바심을 느낀 흑인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갔다. 1963년에는 10주간 186개 지역에서 750회 이상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던 중, 링컨 기념일인 8월 28일, 25만 명의 군중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 링컨 기념관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연단에 선 킹 목사는 20세기 최고의 연설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한 형제처럼 한 식탁에 앉을 것이며, 언젠가는 인종주의자들이 물러가고 나의 어린 아들과 딸이 백인의 아들딸들과 형제와 자매로 손에 손을 잡고 살아갈 것이라는 꿈입니다.” 킹 목사의 이 감동적인 연설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1964년, 킹 목사는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 이후 킹 목사의 저항운동은 점차 흑인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는 흑인들만의 차별을 위해 운동하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인 인구의 반이 극빈계층에 속했지만 그 수는 전체 빈곤층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혜택을 위해 노동조합들과 손을 잡고 투쟁했다.
그 즈음 미국 정부는 베트남 참전을 결정한다. 킹 목사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서 한 사람의 적군을 죽이기 위해 50만 달러를 쓰면서 미국 내 빈곤퇴치를 위해선 한 사람에서 52달러를 지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인종차별과 빈곤, 전쟁이 상호 관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 모텔 발코니에 총성이 들렸다. 총을 쏜 사람은 제임스 얼 레이, 총탄을 맞은 사람은 39살의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킹 목사가 죽자 미국 전역의 63개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4월 8일 애틀랜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15만 명이 참석했다. 흑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인들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몇 년 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자신을 암살범으로 고용했다고 털어놨다.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날’로 지정하고 그의 생애를 추모하도록 하였다. 인물의 탄생일을 전 국가적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을 제외하고는 유일하며 세계적으로도 드문 경우다.
●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나 성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피부색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차별하던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킹 목사의 짧았지만 헌신된 삶과 암살에 의한 비극적인 종말은 단지 미국 땅에서 차별받고 살던 흑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이민의 역사가 짧은 한국 이민자들은 킹 목사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지금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만약 킹 목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미국의 모든 이민자들은 훨씬 심각한 인종차별을 체험하면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20세기 교회의 역사 가운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애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인권운동이 비폭력주의를 인권운동의 기본 전략으로 내세움으로써 ‘오른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권고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세했다는 것이다.
● 맬컴 엑스(Malcolm X)
1950~196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자유와 평등은 백인들만의 것이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한 지 100년이 지나도록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차별이 무척 심해서 ‘짐 크로우법’이라는 게 있었다. ‘짐 크로우 법’에 의해 흑인들은 백인들이 사는 지역의 학교, 공중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버스에서도 앞자리는 앉지 못했고, 음식점에서도 뒷문을 이용해야 했다. 이것은 유색인종이 스스로 못난 인종이라 생각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국민의 권리인 투표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노예라는 신분만 사라졌을 뿐, 국민으로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이런 시기에 미국에는 두 사람의 인권운동가가 있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맬컴 엑스(Malcolm X)라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흑인으로, 미국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투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많이 달랐다. 성장 배경도 달랐고, 투쟁 방법도 달랐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이긴 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고, 투쟁 방법도 흑백통합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에 반해 맬컴 엑스(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 Malcolm Little)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한 흑백인종차별의 현실 속에서 어렵게 자랐다. 맬컴 엑스의 아버지 얼 리틀 목사는 침례교회 순회목사이자 세계흑인개선협회(UNIA)의 조직담당자였다. 이 협회는 마커스 가비가 주도하는 단체로, 흑인들이 선조의 땅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 여섯 중 셋이 백인에게 살해됐고, 한 사람은 린치를 당해 죽었다. 아버지 얼 리틀 목사는 1931년, 공식적으로는 전차 사고로 사망했지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당시부터 분분했다.
중학교 2학년(미국의 8학년) 때까지 성적이 우수했던 맬컴 엑스는 자신의 장래에 관해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그러나 이 희망을 들은 백인 영어교사가 맬컴 엑스에게 말했다. “삶에서 제일 필요한 건 현실적인 자세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사람들이 너를 좋아한다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넌 깜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네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봐라. 넌 물건 만드는 재주가 좋지. 모두들 목수 솜씨를 높이 쳐준다. 왜 목수일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니? 사람들이 인간적으로는 너를 좋아하니까 일거리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야.” 8학년을 마치는 날 맬컴 엑스는 학교를 자퇴하고 이복누이가 사는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에서 맬컴 엑스의 삶은 밑바닥 그 자체였다. 나이트클럽 구두닦이, 접시닦이, 열차 물건 판매원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17살 때 뉴욕의 할렘으로 갔다. 범죄 소굴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흑인 빈민가에서 밀매, 도박, 사기, 공갈, 강도, 뚜쟁이 등의 일을 하다가 1945년 말 보스턴으로 가서 백인 주택을 털다가 체포됐다.
절도범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 받고 매사추세츠 교도소에 수감된 맬컴 엑스는 교도소 생활 동안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소등 뒤에도 복도의 희미한 불빛을 조명 삼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영어 공부도 제대로 하고 라틴어 통신강좌까지 수강했다.
1948년, 형으로부터 이슬람 국가운동을 소개받는데, 이미 맬컴 엑스의 남매들 중 여럿이 무슬림이 되어 있었다. 1952년 가석방으로 수감 생활에서 벗어난 맬컴 엑스는 이슬람 지도자 엘리야를 만나 무슬림으로 개종했으며, 이슬람 국가운동의 열렬한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엘리야와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맬컴 엑스는 성을 리틀에서 엑스(X)로 바꿨다. ‘푸른 눈의 백인 악마가 리틀이라는 자신의 성을 나의 선조에게 붙였던 것’이고 ‘(흑인) 무슬림의 X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정한 아프리카 조상 집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맬컴 엑스의 투쟁목포는 마틴 루터 킹과 같은 흑백통합이 아니라 미국 내에 흑인 자치 구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투쟁방법도 비폭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맬컴 엑스는 특히 1963년 8월의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비판했다(이 행진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유명하다).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백 년 전에 죽은 대통령의(링컨) 상(像) 앞에서 백인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왜 흑인들이 열광해야 하는가?” 맬컴은 백인들을 ‘악마’라 칭했고, 이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공적 (公敵) 1호가 되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기에 소총을 들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맬컴 엑스는 지도자 엘리야의 비도덕성에 대한 환멸과 조직 내 다른 간부들의 질시 등으로 인해 이슬람 국가운동을 떠나게 된다.
1964년 4월 13~19일 맬컴 엑스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순례를 통해, 인종과 종족을 초월하여 무슬림의 동포애로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 맬컴 엑스는 이슬람이 인종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메카 순례 이후 맬컴 엑스에게 백인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라 ‘인간’, 때로는 협력할 수도 있고 결국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인간’이었다. 성지 순례를 계기로 맬컴 엑스는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고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를 이끌면서 미국 각지는 물론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흑인의 동포애는 물론 인종 간 평화를 역설했다.
이슬람 국가운동 측은 이런 맬컴 엑스에 대해 공공연한 위협을 가했다. 엘리야는 “맬컴 엑스같은 위선자는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고 말했고, 이슬람 국가운동 매체는 맬컴 엑스의 잘린 목이 튀어 다니는 카툰을 실었으며, ‘맬컴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내용의 글도 실었다. 살해 위협과 방화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1965년 2월 21일, 39살의 맬컴 엑스는 1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꿈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네 사전에서 자유라는 말을 지워라.” “누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는가? 누가 너에게 평등, 정의, 또 다른 그 무엇을 주겠는가? 인간이라면, 자유, 평등, 정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같은 시기에 흑인들은 위해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이렇듯 종교 등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 킹 목사가 흑인과 백인이 화합하는 가운데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맬컴은 이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총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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