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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禪房 의 風俗
十一월 三일 禪房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 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다랗게 놓인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 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 다. 휴게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앉아 법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 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看病室과 겸하고 있어 病氣가 있으면 치료도 한다. 옷을 꿰매는가 하면 佛書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 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禪房이거나 큰방 祖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法力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病氣와 口辯이 결정 짓는다. 큰방에서 禪房의 正史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野史가 이루어진다.
禪房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 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상원사의 뒷방 조실은 火臺스님이 당당히 차지했다. 위궤양과 十년을 벗하고 海印寺와 梵魚寺에서도 뒷방 조실을 차지했다는 경 력의 소유자이고 보니 만장일치의 추대다.
사회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불가에서는 四敎까지 이수했고 절밥도 십년을 넘게 먹었고, 남북의 대소 禪房을 두루 편력했으니 뒷방조실로서의 구비요건은 충분하다. 금상첨화격으로 달변에다 다혈질에다 쇼맨십까지 훌륭하다. 경상도 출신 이어서 그 독특 한 방언이 구수하다. 낙동강 물이 마르면 말랐지 이 뒷방 조실스님의 화제가 고갈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파라독스하고 때로는 페 이 소스하다. 때로는 도인의 경계에서 노는 것같고 때로는 마구니의 경계에서 노는 것같다. 諸佛祖師가 그의 입에서 死活을 거듭 하는가 하면 현재 큰 스님이라고 추앙되는 大德스님들의 서열을 뒤바꾸다가 때로는 캄캄한 밤중이나 먹통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 무불통지요 무소부지인체 하면서 거들먹거리지만 그의 천성이 선량하고 희극적인 얼굴모습과 배우적인 소질때문에 대중들로부 터 버림받지는 않지만 추앙 받지도 못했다. 천부적인 뒷방 조실감이라는 명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 뒷방 조실이 가끔 치명적으로 자존심에 난도질을 당하고 뒷방 조실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 주스님 때문이다. 禪房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원주스님은 대중들의 生必品 구입때문에 江陵 출입이 잦았다. 강릉에 가면 住居 가 布敎堂인데 포교당은 각처의 여러 스님들이 들렀다가 가는 곳이어서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 구나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되고 보면 신문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고 자세히 알 수 있다.
원주스님도 꽤 달변이어서 며칠동안 들어 모은 뉴스源을 갖고 돌아오면 뒷방은 뒷방 조실을 외면하고 원주스님에게 이목이 집중 된다. 그때 뒷방의 모든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같이 경청하고 있는 뒷방 조실의 표정은 우거지상이어서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기까 지 하다. 그러나 뉴스가 한토막씩 끝날 때는 막간을 재빨리 이용하여 뉴스에 대한 寸評을 코믹한 사족(蛇足)을 붙이거나 독설을 질타하는 것으로 체면유지를 하다가 원주스님의 뉴스원이 고갈되자 마자 맹호출림의 기상으로 좌중을 석권하기 위해 독특한 제스 처로 해묵은 뉴스들을 끄집어 내어 재평가를 하면서 日報通(뉴스통)의 권위자임을 재인식 시키기에 급급하다. 면역이 된 대중 스 님들은 맞장구를 치지도 않지만 삐에로의 후신인양 지껄여댄다.
十一월 七일 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할까. 가끔 생각해보는 문제다. 우리대
중 가운데 특이한 방법으로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다. 흔히들 선객을 怪客이라고 하는데 이 선객들이 괴객이라고 부르는 스님들 이다.
처음 방부 받을 때 논란의 대상이 된 스님은 明燈스님이다. 이 스님은 生食을 하기 때문이다. 시비와 논란의 우여곡절 끝에 방 부가 결정되어 공양 시간에 뒷방에서 생식하기로 합의 되었다. 그래서 소임이 간편한 명등이 주어졌다.
水頭스님은 일종식(하루에 한끼만 먹음)을 하고 원두스님은 午後不食을 한다. 그리고 看病스님은 長座不臥(절대로 눕지 않고 수 면도 앉아서 취함)를 한다. 浴頭스님은 默言을 취한다. 開口聲이란 기침뿐이다. 일체의 의사는 종이에 글을 써서 소통한다.
그 초라한 선객의 식생활에서 더욱 절제를 하려는 스님들이나, 하루 열두시간의 결가부좌로 곤혹을 당하는 다리를 끝내 혹사하 려는 스님이나, 스스로 벙어리가 된 스님을 대할 때마다 공부하려는 그 의지가 가상을 지나 측은하기까지 한다. 이유가 있단다. 스스로 남보다 두터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또는 無福衆生이라 하루 세끼의 식사는 과분해서라고.
뒷방에서 색다른 시비가 벌어졌다. 도대체 인간이란 육체가 우위냐? 정신이 우위냐?하는 앙케이트를 던진 스님은 持殿스님이다. 언제나 선방의 괴객들을 백안시하는 理科출신의 스님이다.
[단연코 정신이 우위지요. 선객답지 않게 그런 설문을 던지시요. 입이 궁하면 염불이 나 할 일이지요]
文科 출신인 負木스님이 면박했다.
선객들은 대부분 佛敎儀式(특히 불공시식)을 외면한다. 평소에 지전스님이 의식의 권위자처럼 으시대고 중이 탁자밥(佛供食物) 은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목스님이고 보니 비꼬는 투로 나왔다.
[정신을 지탱하는 것은 뭐요?]
지전 스님이 물었다. 드디어 지전스님(理科)과 부목스님(文科)이 시비의 포문을 열었다.
[그거야 육체지요]
[뿌리없는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구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는 않을게요. 육체를 무시한 정신이 있을수 있겠소?]
[육체가 있으니 정신이 있는게 아니겠소. 어찌 상식이하의 말을 하오.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자고 하면서 말이요]
[논리적인 상식에 충실하시요. 우리는 지금 논리를 떠난 화두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논리에 입각해서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는 시비를 가리고 있는거요. 결국은 唯 物이냐 唯心이냐라는 문제가 되겠소만]
[유심의 宗家격인 선방에서 유물론을 들춘다는 것이 상식이하란 말이요. 육체는 時限 性이고 정신은 영원성이란 것은 유물론자 들이 아닌 한 상식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요. 시간이 소멸됨에 따라 육체의 덧없음에 비해 정신의 승화를 생각해보시오]
[본래적인 것과 결말적인 것은 차치해 두고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여 논리를 비약시켜 보도록 합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 신이 깃든다는 생리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보면 육체가 단연 우위일 뿐이요. 병든 육체에서 신선한 정신을 바란다는 것은 고목 에서 잎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요]
[육체적인 외면이 많을수록 정신적인 승화가 가능했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의 사실들을 들어 예증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주위 에서도 실증되고 있소. 나는 근기가 약해 감히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일종식이다 오후불식이다 생식이다 장좌불와다 묵언이다 하 면서 육체가 추구하는 안일을 버리고 정신이 추구하는 견성을 위해 애쓰는 스님들을 잘살펴보시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육체에 대한 사랑스러운 정신의 도전이며 승화인가를]
[그것은 作爲며 위선이요. 내가 구도자임을 표방하는 수단일 뿐이요. 참된 구도자일
수록 性命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요. 養生 이후에 良知가 있고 양지이후에 견성이 가능 할 뿐이오]
[老莊學派의 無爲에 현혹되지 마시오. 그들은 다만 세상을 기피하면서 육체를 오롯이 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끝내 그들이 내세 운 至人이되지 못했기에 濟世安民을 하려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소멸될 숙명에 놓여 있는 육체를 무시하면서 究竟目的인 見性을 향해 나아갈 뿐이오. 견성은 곧 衆生濟度를 위해서니까요]
[육체가 제기능을 상실했을때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승화될 수 있겠소? 業苦속 에서 輪廻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중생이 말이오?]
[가능하지요. 그 가능성 때문에 여기 이 산속에 있지 않소. 거의 지옥같은 생활을 하면 서 말이오]
[중생에게 절망을 주는 말을 삼가하시오. 스스로 병신이 되어야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데 우리 佛家에서는 육체적인 불구자 는 중이 되지 못하도록 규정짓고 있소. 이 규정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진리를 웅변으로 대변해주고 있소. 고 장을 모르고 조화된 육체야 말로 우리 선객에게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지요. 見性 悅般 彼岸 寂滅이 있기까지엔 말이오]
[끝내 스님은 그 간사한 육체의 포로가 되어 等身佛처럼 안온한 양지 쪽에 서서 업보 중생을 바라보려고만 하는군요]
[나는 등신불이 되지 않기 위해 육체를 건전히 하며 업보중생을 느끼기 위해 극악한 업보중생의 표본같은 이 선방생활을 하고있 소. 결론에 도달해 봅시다. 나는 스님 말마따나 그 간사한 육체가 좋아서 다스리는게 아니라 육체가 너무 싫어서 육체를 다스리 고 있소. 육체는 바라볼 수 있는게 아니라 느껴야 하기 때문이오. 마치 우리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느끼지도 바라보지도 못할까봐 세상을 멀리 하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하기 위해 견성 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과 같을 뿐이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멀리 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불완전하더라도 최소한도 현재 상태라도 유지 하고 있어야지 근본적으로 와해돼버린다면 우리가 견성을 해도 어쩔수 없을 뿐이오. 이해가 되는지요? 그만합시다. 입선시간입니 다]
시비는 가려지지 못한채 끝이 났다.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是와 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本能 과 禪客
本能 과 禪客
十一월 十五일 상원사의 동짓달은 매섭게 차갑다. 앞산과 뒷산 때문에 밤도 무척이나 길다. 불을 밝히고 먹는 희멀건 아침 죽 이 꿀맛이다. 오후 다섯시에 먹은 저녁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소화가 되어 위의 기능이 정지상태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
<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라고 물을 정도로 상원사 김치는 짜기로 유명하다. 그런 김치를 식욕이 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나물 먹듯이 먹는다.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기야 상원사 골짜기의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니까 염 도(鹽度)를 용해시킬 물은 걱정 없지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食思(먹는 생각)다.
출가인은 욕망의 단절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留保狀態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 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 바로 食本能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饑餓)에서 오는 공포라고 결론 지어준다.
話頭에 충실하면 見性이 가능한 것처럼 食思에 충실하다보니 먹는 공사가 벌어진다. 대중공사에 의해 어려운 상원사 살림이지만 초하루 보름에는 별식을 해먹자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별식이란 찰밥과 만두국이다.
절에서 행해지는 대중 공사의 위력이란 비상계엄령보다 더한 것이어서 일단 통과된 사항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소를 잡 아 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소를 잡아 먹어야 하고 절을 팔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절을 팔아 먹어야 한다. 대중공사의 책임은 대중 전체가 지는 것이며 또 토의는 극히 민주적이고 여러가지 여건에 충분히 부합되어야만 결의되기 때문에 극히 온당하지만 약간의 무리도 있을 수 있다. 상원사 김치를 먹어보면 원주스님의 짭짤한 살림솜씨를 알 수 있지만 대중 공사에서 통과된 사항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원주실에 비장해둔 찹쌀과 팥과 김이 나왔다.
부엌에서 팥이 삶아져가자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의 코끝이 벌름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넘기는 소 리가 어간에서나 말석에서나 똑같이 들려왔다.사냥개 뺨칠 정도로 후각이 예민한 스님들이고 더구나 거듭되는 食思로 인해 상상 력은 기막힌 분들이라 화두를 잠깐 밀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찰밥을 기름이 번지르한 김에 싸서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뱃속이 뭉클하면서 등골에 붙었던 뱃가죽이 불쑥 튀어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면 약간 구부러졌던 허리 가 반듯해지면서 밀쳐 놓았던 화두를 꼭붙잡게 되고 용기백배해진다. 이 얼마나 가난한 풍경이냐. 이 얼마나 천진한 풍경이냐. 찰밥 한 그릇이야말로 기막히게 청신한 활력소이다.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자기 밖에서 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별식은 넉넉히 장만하여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 食量대로 받는다. 주림에 무척이나 고달픔을 겪은 선객들이라 위의 사정은 아랑곳 없이 발우(鉢盂) 가득히 받아 이 제까지의 주림에 대한 복수를 시원스럽게 한다. 찰밥이고 보니 격에 맞춰 상원사 특유의 산나물인 곰취와 고비나물까지 곁들여 상을 빛나게 해준다. 발우 가득한 찰밥과 나물을 비우고서는 포식과 만복이 주는 승리감에 젖어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면서 [평 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한다. 생식하는 스님에게 죄송하다고 고하니 자기도 찹쌀을 먹었으니 뱃속에서야 마 찬가지라고 대꾸한다.
佛經을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 다>라고.
愛憎을 떠나 但無心으로 살아가라는 敎訓이다. 이 經句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객들
이지만 주림에 시달림을 받다보니 스르로 經句를 어기고 포식을 했으니 그 果報가 곧 나타났다.
오후 입선시간에 결석자가 십여명이 넘었다. 좌선에 든 스님중에서도 신트림을 하고 생목이 올라 침을 처리하지 못해 중간 퇴장 을 하는 스님들이 너댓명 되었다. 결과부좌의 자세를 갖춘 스님중에서는 몇분은 식곤증이 유발하는 졸음을 쫓지 못하여 끄덕거리 는 고개짓을 되풀이 한다.
통계에 의하면 선객의 九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 한다.
食本能에 무참히 패배당한 적나라한 실상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만신창이가 된 위장을 어루만지면서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는 골방으로 쫓겨가서 유야무야(有耶無耶) 사라져 간다. 그래서 선객은 이 중으로 도박을 한다. 世間(인생)에 대한 도박, 出世間(僧伽)에 대한 도박.
언제나 모자라는 저녁 공양이 남아돌아갔다. 위가 소화불량을 알리느라 신트림을 연발하는 스님들은 공양시간에 참석하지 않았 고 끼니를 걸르기가 아쉬워 참석한 스님들 물에 말아 죽처럼 훌훌 둘러 마신다. 그렇게도 죽 먹기를 싫어하는 스님들인데도.
저녁 시간의 큰방은 결석자가 많이 휑뎅그렁하여 파리 몇마리가 홰를 치면서 제세상을 만난듯 자유롭다.대신 뒷방은 만원사례다 . 뒷방 조실의 코믹한 면상에 희색이 역연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학부출신에다 이력(大敎科)을 마친분이지만 과묵해서 시비에 끼어 들지 않는 스님이다.
[인간의 본능억제란 미덕일까요? 부덕일까요?]
[정신적인 기능을 개발하기 위해선 약간의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육체적인 조화를 위해 선 부덕이겠지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겐 악덕이겠고 노인들에겐 무덕이겠지요]
한참후 다시 물어왔다.
[선객은 반드시 본능억제를 행해야만 견성이 가능할까요?]
[본능을 억제한다고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지요. 본능억제는 필요조 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조건은 수단같은 것이어서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본능억제가 하나의 수단이 라면 그 역(逆)인 본능개발도 또한 수단이되겠지요. 필요조건인 본능억제가 없더라도 충분조건인 自性이 투철하면 見性의 요건은 충족 되겠지요]
[함수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가 본능억제라면 다른하나의 정수는 자성에 해당되겠지 요. 그런데 함수관계에서 변수가 없어 도 함수관계가 성립될까요?]
[數理學적인 공리를 禪理와 대조 내지는 결부시킬 수는 없잖을까요. 전자는 형이하학적 인 것이고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인데 ]
[선객의 필요조건인 본능억제와 충족조건인 자성에서 필요조건은 없어도 충분조건만 있 다면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가요?]
[그렇지요.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처음부 터 불가능할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 이하학적인 한계성과 가능성은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문제되는 거지요. 이렇게 지껄이는 내 자신이 가능성의 존재인지 불가능성의 존재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가능성 쪽에 매달려 정진하고 있을 뿐이지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으니까요]
[무서운 도박이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무서운 운명이지요]
[퍽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命題군요]
[명제가 아니라 문제지요. 해답은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얻어지겠지요. 어서 잡시다. 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 인답니다.]
밖에서는 雪寒風이 굉음을 울리면서 지각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