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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계보
마태복음 1:1-17 2022/5/15 부활절 제5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와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고난 받는 모든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두 가지의 족보(계보)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3:23-38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17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두 족보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내용이 좀 다릅니다.
나오는 분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고 계대도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계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눅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구전 또는 문서)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요셉의 아들’로 시작해서 어디까지 올라가는가하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첫 사람 아담과
아담을 지은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눅3: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무슨 의미입니까?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삼십 세쯤부터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권위가
창조주 하나님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저자 누가는 이점을 무척 강조합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태복음의 족보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시작되는 데 특히 아브라함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조상이자 모든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계보)를 시작합니다.
왜냐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의 관심은 족보의 혈통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으로 역사하시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 정리된 책이 로마서이지요.
바울의 설명입니다.
(새)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4: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4: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4: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4: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창 17:5)"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4: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창15:5)"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는 오직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율법을 이어가는 후손인가 아니면 믿음을 이어가는 후손인가?
또 ‘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인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 진정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그의 은총이신 아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독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유대인의 최대 관심사인 혈통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의 조건을
하나님의 아들(은총)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셨다‘는 것을 무척 강조합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아브라함의 자손(씨)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조건 역시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뜻밖에 인물들을 족보에 기록합니다.
결코,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이름들을 기록하지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족보
남자들의 소유물이지요.
혈통, 후사를 강조하는 남자들의 전유물이 족보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남자의 전유물인 혈통의 족보에 어머니이자 믿음의 여인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누구누구입니까?
3절 다말, 5절 라합과 룻, 6절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그리고 16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족보에 들어 갈 수 없는
여인들의 이름이 3-6절에 집중해서 등장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큰 힘을 내고 가장 많은 헌신을 하는 분들을 들라면
저는 여선교회(여전도회)를 꼽습니다.
그런데 여선교회 이름 중에 이런 이름 들어보셨나요?
‘다말여선교회, 라합여선교회, 룻여선교회, 밧세바 여선교회’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마리아여선교회인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지요.
이처럼 오늘날 여선교회조차 거리는 이름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속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유대인들이 감추고 싶은 여인들의 이름을 메시야의 족보에 기록한 것일까요?
바로 그들이 메시아를 바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혈통의 족보가 아닌 믿음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입니다.
좀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일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
어떤 여자가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일까?
10대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성형수술 했는데 티 안 나고 예쁜 여자
30대 결혼하기 전에 실컷 놀았는데 시집가서 잘 사는 여자
40대 밤낮 쇼핑하고 노는데 자식이 대학도 잘 가는 여자
50대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60대 타고난 건강에 돈까지 많은 여자
70대 자녀들이 효도하고 게다가 남편도 멀쩡한 여자
80대 아직도 살아 있는 여자
하지만 예수님 족보에서 등장하는 여자들은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여자들이었습니다.
우선 메시아의 족보 속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자는 다말입니다.
다말
야곱의 손주며느리이자 유다의 맏며느리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다말의 사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시아버지와 며느리
그 사이에서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베레스와 세라’ 둘을 낳습니다.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너희가 진짜 아브람함의 후손이라고, 너희만이 유일한 순수혈통이라고,
너희가 이스라엘의 정통을 잇는 장자라고, 웃기지마!
너희가 자랑하는 유대지파의 조상 유다가 이런 사람이야?
이것이 너희 피, 너희 혈통의 실체야?’
뭐 이런 고발이지요.
사실 족보를 기록할 때
큰 아들 베레스의 이름만 기록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일부러 ‘베레스와 세라’ 둘 다 기록합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한 때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여자는 라합입니다.
이분 역시 만만치 않지요.
우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여리고 왕을 섬기는 여리고 사람이지요.
이방여자입니다.
게다가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기생
기생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몸을 파는 창녀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아예 헬라어 ‘포르네’로 표기합니다.
몸을 파는 창녀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장 잘 반영해서 번역한 성경이 공동번역 성경입니다.
(공)히11:31 창녀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자기 편처럼 도와주어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당하는 멸망을 같이 당하지 않았습니다.
(공)약2:25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유다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현대 유대인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조나’를 그들은 애써 여관 주인 정도로 해석합니다.
그렇다고 진실을 가릴 수는 없지요.
공동번역 성경이 번역한 ‘창녀 라합’ 이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로 등장하는 여자 라합도 거룩한 혈통의 족보에 기록될 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지요.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낳고
세 번째 등장하는 여자는 모압 출신의 룻입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방여자이지요.
게다가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서방 잡아먹은 과부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러니까 모압 출신의 룻이 왕 중의 왕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 몸에서 성전 건축을 준비한 위대한 왕 다윗이 나온 것입니다. 아이러니지요.
네 번째 여인으로 가 봅시다.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감추고 싶은 사실(치부)을 기록하지요.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
무슨 말입니까?
십계명(율법)이 금지하는 이웃의 아내를 통해 자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출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신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야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를 믿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이지요.
오죽 했으면 약혼자인 요셉조차 파혼하려 했겠습니까?
(새)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돌아가신 구봉서 장로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구봉서 장로님 댁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입니다.
(하용조, 연예인교회, 평창동 예능교회)
어느 청년이 성경공부 도중 이렇게 묻더랍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자신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그러자 옆에 있던 구 장로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야 임마! 니가 뭔데 안 믿어.
그 남편 요셉도 믿겠다는데, 니가 뭔데 임아 안 믿어?’
이처럼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여자들의 이름이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 있지요
왜요?
혈통의 족보가 아니라 믿음의 족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중 한 분이 기생 라합이지요.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말씀을 마칩니다.
사실 죄와 허물로 따진다면
우리가 다말이고 우리가 라합이고 우리가 룻이고 우리가 밧세바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초청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은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의 증언입니다.
(새)롬3: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3: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 같은 죄인을 너그럽게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초청하신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증거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