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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8년 신축(1901) 4월 2일(정유, 양력 5월 19일) 맑음
38-04-02[12] 고 우찬성 하령군 이양에게 시호를 하사하고 부조의 은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궁내부 특진관 이중하의 상소
○ 궁내부 특진관 이중하(李重夏)가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송구스럽게도 종실(宗室)의 후예로서 외람되이 교정(校正)하는 반열에 끼었습니다. 삼가 우리 황상 폐하를 보건대, 부모에게 돈후하신 성스러운 덕은 그 어느 왕보다 탁월하시며, 더욱이 충성(忠誠)을 기리고 절의(節義)를 장려하는 정치를 정성스럽게 행하시어, 숨겨진 채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은혜는 저승까지 미치고 행하신 일은 역사에 밝게 빛나서 조야(朝野)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치고 감격하여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더군다나 신처럼 수보(修譜)하는 일에 직접 참여한 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성대한 시기를 만나 종반(宗班)의 고사(故事) 가운데 누락되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성상의 의(義)를 선양할 만한 일이 있다면 의당 사람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아뢰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고(故) 우찬성(右贊成)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인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손자로서, 태종조(太宗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대대로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어 덕행과 업적이 모두 뛰어났습니다. 결국 단종(端宗) 계유년(1453, 단종1)에 죽었으니, 곧 당시의 여섯 명의 종영(宗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조카와 종질(從姪)까지도 함께 참화(慘禍)를 당했는데, 온 집안의 바른 기풍은 매우 드높고 빛나서 마치 북두성(北斗星)에 닿고 무지개를 뚫을 정도였으며, 굳세게 정의(正義)를 위해 희생한 자취는 실로 세 정승과 여섯 신하에 못지않습니다. 이에 우리 숙묘(肅廟)께서는 ‘두 대에 걸쳐 뛰어난 공로를 세웠고 온 가문이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兩世元勳 一門夸節]’는 여덟 글자의 어필(御筆)을 특별히 내려서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하고, 또 공주(公州)의 초혼각(招魂閣)과 요당서원(蓼塘書院)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도록 하셨습니다.
고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의 저서에서는, ‘한 가문의 16명이 모두 계유년과 갑술년(1454, 단종2)의 참화를 입었으니, 국조(國朝)의 종영들을 상고해 볼 때 특별히 출중하고 두드러진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며, 고 상신(相臣) 신흠(申欽)도 이르기를, ‘계유년과 갑술년의 변란에서 이양 등이 보여준 곧은 충성과 큰 절개가 모두 파묻힌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향기와 악취는 섞이기 어려운 법이고 천리(天理)는 매우 밝아서, 비록 문자(文字)로 기재된 것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은 가릴 수 없는 점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칭송은 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여러 현인들은 모두 소급해서 표창(表彰)하는 은전(恩典)을 입었건만, 오직 이양은 황실의 가까운 친척으로 공로와 충절이 저와 같이 뛰어났는데도 아직껏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론(輿論)이 억울해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성조(聖朝)의 표창하고 격려하는 은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비록 세대(世代)도 오래되고 사적(事蹟)도 이미 아득하지만, 이처럼 충성스럽고 업적이 뛰어난 신하가 우주를 지탱한 덕분에 강상(綱常)이 이에 실추되지 않았고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일월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위엄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에 선하니, 세월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끝내 민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이 소장(疏章)을 의정부에 내리시어 옛 문헌을 널리 상고하도록 함으로써 아름다운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시고, 이어 부조(不祧)의 은전을 시행하심으로써 백세(百世)의 풍속과 교화를 수립하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단종(端宗) 계유년 : 계유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원로대신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주-D002] 여섯 명의 종영(宗英) : 세조(世祖) 때,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종실, 즉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영풍군(永豐君) 이전(李瑔),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을 말한다.[주-D003] 세 정승과 여섯 신하 : 세 정승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을 말하고, 여섯 신하는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의 사육신(死六臣)을 말한다.[주-D004] 부조(不祧)의 은전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 지내게 하는 일을 이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봉순 (역) | 2003
승정원일기 3133책 (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4월 2일 [양력5월19일] 정유 6/6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 宮內府特進官李重夏疏曰, 伏以臣忝在宗裔, 猥廁校正之列。 伏覩我皇上陛下, 惇親聖德, 卓越百王, 尤拳拳於褒忠奬節之政, 無幽不闡, 有鬱必伸, 恩及泉壤, 事光簡編, 朝野紳庶, 莫不感頌, 況如臣躬參修譜之役者乎? 臣以爲値此千載晠會, 宗姓故事中, 有可以修擧闕典, 對揚聖義者, 義不可以人微而自阻。 竊稽故右贊成河寧君臣李穰, 以開國元勳義安大君之孫, 在太宗朝, 錄佐命勳, 世篤忠亮, 德業俱顯, 竟殉難於端廟祭酉[癸酉], 卽當時六宗英之一也。 其子若孫及從子從姪, 同被慘禍, 闔門正氣, 烈烈炳炳, 直可以磨星斗而貫虹霓, 毅然成仁之迹, 實伯仲於三相六臣。 粵我肅廟, 以兩世元勳, 一門夸節八字, 特賜宸翰, 配享於莊陵忠臣壇, 又妥靈於公州招魂閣·蓼塘書院。 故處士南孝溫所著有曰, 一門十六人, 竝被癸甲之禍, 考諸國朝宗英, 特挺出表著者。 故相臣申欽亦曰, 癸甲之變, 李穰等之貞忠大節, 皆黯昩不傳。 然芳臭難混, 天理孔昭, 雖無文字之載錄, 世間人口有未嘗可掩者, 此可見自古忠臣義士, 無不流涕道之, 有不敢言者。 當時立殣諸賢, 均蒙追褒之恩, 而惟李穰, 以皇室懿親, 勳業忠節, 如彼卓爾, 而尙闕易名之擧, 非但爲輿論之齎鬱, 豈不有欠於聖朝旌礪之典乎? 今雖世代浸古, 事蹟已邈, 而似此忠烈之臣, 撑宇宙而綱常賴以不墜, 亘古今而日月與之爭輝, 千載之下, 凜然如生, 不可以世遠而遂泯焉。 伏願聖明, 下臣此章, 令政府博考舊獻, 特賜美諡, 仍施以不祧之典, 以樹百世之風聲焉。 臣無任云云。 奉旨, 省疏具悉。 疏辭, 令政府, 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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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5월 19일 양력 2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이중하가 이양에게 시호를 하사할 것을 아뢰다
특진관(特進官) 이중하(李重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고(故) 우찬성(右贊成)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인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손자로서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등록되었고, 대대로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어 덕과 업적이 모두 뛰어났습니다. 결국에는 단종(端宗) 계유년(1453) 난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시 여섯 종영(宗英)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종자(從子)와 종질(從姪)들이 함께 참화를 당했으니, 온 가문의 바른 기백이 매우 드물고 빛나서 바로 북두칠성을 달고 무지개를 뚫을 만하였으며, 의연하게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자취는 지조를 지킨 세 정승이나 여섯 신하와 비등합니다. 이에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두 대에 걸쳐 공로를 세웠고 온 가문이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兩世文勳一門夸節〕’라는 8자의 어필(御筆)을 특별히 내려서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하고, 또 공주(公州)의 초혼각(招魂閣)과 요당 서원(蓼塘書院)에 신주를 봉안하도록 하셨습니다.
고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의 저서에, ‘한 가문의 16명이 모두 계유년과 갑술년(1454)의 참화를 입었으니, 국조(國朝)의 종영들을 상고해 볼 때 특별히 출중하고 드러난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며, 고 정승 신흠(申欽)도 이르기를, ‘계유년과 갑술년의 변란에서 이양 등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가 모두 파묻힌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향기와 악취는 섞이기 어렵고 천리(天理)는 매우 밝은 만큼 비록 글로 기록한 것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은 가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로부터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목숨을 바친 여러 현자들이 모두 소급해서 표창해 주는 은전을 받았건만, 오직 이양은 황실의 가까운 종친으로서 공로와 충절이 이처럼 뛰어났는데도 아직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비단 여론(輿論)이 답답해 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성조(聖朝)에서 표창하고 격려하는 은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이 글을 내려 보내시어 의정부(議政府)에서 옛 법을 널리 상고하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시고, 이어 조천(祧遷)하지 않게 하는 은전을 시행함으로써 백대의 풍속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特進官李重夏疏略:
故右贊成河寧君臣李穰, 以開國元勳義安大君之孫, 在太宗朝, 錄佐命勳, 世篤忠亮, 德業俱顯。 竟殉難於端廟癸酉, 卽當時六宗英之一也。 其子若孫及從子從姪, 同被慘禍, 闔門正氣, 烈烈炳炳, 直可以磨星斗而貫虹霓, 毅然成仁之跡, 實伯仲於三相、六臣。 粤我肅廟, 以‘兩世文勳, 一門夸節’八字, 特賜宸翰, 配享於莊陵 忠臣壇, 又妥靈於公州 招魂閣、蓼塘書院。 故處士南孝溫所著有曰: ‘一門十六人, 竝被癸甲之禍, 攷諸國朝, 宗英特挺出表著者。’ 故相臣申欽亦曰: ‘癸甲之變, 李穰等之貞忠大節, 皆黯昧不傳。 然芳臭難混, 天理孔昭, 雖無文字之載錄, 世間人口, 有未嘗可掩者。’ 此可見自古忠臣義士, 無不流涕。 當時立殣諸賢, 均蒙追褒之恩。 而惟李穰, 以皇室懿親, 勳業忠節, 如彼卓爾, 而尙闕易名之擧, 非但爲輿論齎鬱, 豈不有欠於聖朝旌礪之典乎? 伏願聖明下臣此章, 令政府博攷舊獻, 特賜美諡, 仍施以不祧之典, 以樹百世風聲焉。
批曰: "疏辭令政府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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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조병록 ( 趙炳祿 )
민족구분 한국인
본관지 1) 漢陽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생년월일 1) 1874-08-14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현주소 1) 忠淸北道 淸州郡 南次二面 松亭里 1의 2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가족관계 부 1) 趙新元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가족관계 기타 1) 文科 吏曹判書 漢山府院君으로 太祖廟에 배향된 謚 忠靖 趙仁沃(의 19세손), 文科 禮曹判書 謚 節孝 趙賚(의 18세손), 文科 吏曹叅判 提學 端廟殉節하여 公州蓼塘書院에 배향된 號 坡西 趙順生(의 17세손), 文科 都承旨 直提學 端廟殉節하여 木川忠烈祠에 배향된 號 仁村 趙銘(의 16세손), 逸弼善 左承旨로 淸州松泉書院에 배향된 號 慕溪 趙綱(의 12세손), 趙鎭亮(의 증손), 趙載仁(의 손자)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학력 1) 한문 수학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종교 1) 유교
출전 1) 신사보감, 신사 323
참고문헌 조선신사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