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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6월 3일, 파로호 전투 이후 장도영 장군을 격려하는 이기붕 국방장관)
-장도영이 있는 줄 알았으면 공격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53. 7월, 금성지구 전투 직후 제5보병사단의 저항에 직면한 중공군의 어느 정보장교)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한국군을 구원한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은 단연 장도영 장군이 주도한 용문산-파로호 전투일 것이다. 이 때의 승리는 기적과도 같았으며, 개편 이전의 한국군이 아직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을 해낸 전장이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인 동시에, 중공군의 5월 공세 역량을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장도영 장군의 위명을 야전이 널리 떨치기도 했다.
전투의 주역은 바로 제6보병사단이었으며 이들은 51년 4월 21일,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무기력하게 붕괴되며 춘천지구 전투의 주역이라는 명예에 오명을 남겼다.
이 당시 사단장이었던 장도영 준장은 미 제1해병사단 및 제24사단과 연계하여 중공군 제20군 주력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전선이 붕괴당하면서 보병과 포병이 뒤섞인 채 가평 방면으로 철수했다.
그나마 영연방 제27여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아 24일 재편을 할 수 있었으며, 이들의 붕괴로 중공군은 아주 유리한 고지에서 5월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다.
UN군, 특히 미군과 영국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그나마 불리한 전황 일부를 만회하였으나 5월 공세는 만만치 않았다.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중동부 일대의 한국군 사단을 섬멸, 고립된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전선에 나섰다.
특히 중동부의 한국군 6개 사단을 섬멸시키기 위해 3개 병단 및 북한군 4개 군단을 포함하여 41개 사단이 동원될 예정이었으며 이 어마어마한 숫자 자체만으로도 연합군, 특히 한국군에게 싸우기도 전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으니, 5월 중순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이 붕괴되면서 모든 희망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중공군은 의기양양하게 북한강과 홍천강이 만나는 지점을 방어 중이던 한국군 6사단을 공격해왔고, 바로 이곳이 분기점이 되었다.
한국군 6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되갚아줄 기회였다. 장도영 준장은 예하 연대 중 2연대만을 강안 일대에 집중배치시켰으며, 중공군의 도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이 6사단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1달 전에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의 중공군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 제대였다. 중공군의 도하 시도를 모두 저지하였으나 양 측의 전력 차는 상당한 것이었다.
때문에 중공군은 한국군 6사단이 현리 전투 혹은 사창리 때처럼 강력한 충격을 주면 스스로 무너질 것을 유도하였으나 돌출부에 배치된 2연대의 저항은 이전과는 달리 지독하였고, 무엇보다도 도망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면서 오히려 인명 피해를 안겨주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의 배치는 상당히 기형적이었는데, 제2보병연대가 돌출부에, 나머지 19연대와 7연대가 상대적으로 후방에 배치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은 이러한 배치는 2연대의 전멸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주저항선에 이들을 합류시키라 권고하였으나 장도영 준장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북한강과 홍천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지리적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 중공군이 자랑하는 인해전술의 효과가 경감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강화된 연합군의 화력이 중공군의 오판을 유도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연대는 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렵다고 판단, 최대한 많은 물자들을 가져가려고 했으며심지어 장교들까지 남는 양말에 쌀과 탄약을 욱여넣고 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20일 즈음되면 이 물자들은 거의 바닥나서 나무껍질까지 벗겨먹었다는 증언이 있다.
2~3일 간 한국군 2연대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버티면서 중공군을 오판하도록 유도하였다. 중공군은 2연대의 방어선을 주저항선으로 착각, 곧바로 돌파하기 위하여 5월 19일, 제187, 188사단의 주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한국군 2연대는 도하하는 족족 중공군을 타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으나, 시체가 강에 쌓여 그대로 밟고 와서 위기를 맞이했다는 증언을 보아 상당히 위협적인 공세를 맞이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2연대의 본부가 공격을 받았고, 지휘관들이 부상을 입는 등 타격을 받았었으나 어떻게든 이들은 견뎌내며 중공군에게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또한 7개 대대 전력의 포병대와 집중적인 항공 지원은 2연대의 저항에 든든한 우군이 되었고, 중공군은 그대로 축차소모되어가고 있었다.
분노한 중공군은 그 날 밤, 예비대로 아껴두던 제189사단 전체를 투입하여 전장에 인해전술의 파도를 내놓으면서 아예 2연대를 포위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연대는 투입된 중공군 사단을 하나하나씩 상대하며 밤새도록 이어진 4차례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예비대까지 소모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여전히 중공군은 2연대의 방어선을 주저항선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2연대의 외로운 싸움은 한국군 및 미군에게 초조함을 자아냈다. 밤새도록 이어진 3개 사단의 집중 공세를 2연대 홀로 견뎌내는 것을 보다못한 미 군사고문과 연대장 및 사단 참모들은 즉각 지원 병력을 보내자고 건의하였으나 장도영 준장은 이를 묵살하였다.
다행히 인접한 한국군 1군단과 미 제2사단이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고, 전면에 투입된 제63군의 공세가 눈에 띄게 둔해지는 것이 확인되자 20일 새벽 5시, 후방에서 대기하던 제7보병연대와 제19보병연대가 주저항선에서 빠져나와 중공군을 강습하기 시작했다.
패닉에 걸린 것은 이제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은 한국군이 사격한 조명탄에 놀라 허공에 사격을 퍼붓다가 그대로 화력에 짓눌려 나갔다. 겉잡을 수 없이 전선이 붕괴되던 중공군은 한국군 군단 전체가 반격을 건다고 오판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한으로 치달았다.
중공군 3개 사단은 이미 누적된 피해와 피로도로 인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이제 사냥꾼과 사냥감의 처지는 뒤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공세 주도권을 잡으며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에게 치명타를 날리던 중공군은, 이제 반대로 한국군 6사단이 주먹을 날리는대로 얻어맞을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추격하는 한국군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중대 혹은 대대별로 무너져나가며 달아나기 바빴다. 26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추격전은 거의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다. 한국군 6사단은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수집하며 파로호로 잔여 병력들을 몰아세웠고, 겨우 6사단의 수중에서 벗어난 이들은 좌익의 미 제24사단과 맞닥뜨리면서 결코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중공군 제20군은 겁에 질려 전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치던 제63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급히 기동하였으나 압도적인 제공권을 갖춘 미군에게 걸려 보급선이 파괴되었고, 경보를 받은 연합군 지상군이 전선을 강화하면서 목표를 잃어버렸다.
중공군은 용문산-파로호 일대에서 6사단 전투상보 기준 21,552명이 전사하고(이 중 1/4 가량이 2연대가 거둔 전과다.) 2,6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한국군은 7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압승을 거두었다.
한국군에 대한 희망은 아직 남아있었고, 현리 전투의 실망감은 용문산-파로호의 기적같은 승리로 대체되었다. 무엇보다도 장도영이라는 걸출한 지휘관의 등장은 중공군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는 중공군에게 큰 치욕으로 여겨졌으며 더 이상 한국군이 자신들의 사냥감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최초의 전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더이상 한국군은 이 전투 이후로, 중공군의 충격 전술에 무너지지 않으며 52년 수도고지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의 승전을 거둘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편 이전의 병력으로 중공군의 군단급 공세를 홀로 저지했다는 것은 상당히 눈여겨 볼 만한 것이며, 이후 어떻게 중공군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51-1953
한국전쟁연구(동원,노무운용,점령정책)
중앙일보사 - '민족의 증언'(1976)
Monthly Operations Command Report for June 1953 (Feeder for RCS CSGPO-28 (RI))
Capital ROK Division in Battle. "Kumsong Salient" July 13-16, 195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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