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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For Chapter One:
ADDITIONAL NOTES ON THE SECOND ADVENT MOVEMENT
부록 1장: 재림운동에 대한 추가 설명
As noted on page 43, along with intense interest in time prophecies, the Second Advent movement was also characterized by a number of other distinctive factors. Many of the Second Adventist splinter groups that branched off from the original Millerites rejected the immortal soul and hell doctrines (and even the trinity doctrine). This was due largely to the articles and tracts published in the 1820’s, 1830’s, and 1840’s by a former Baptist pastor, Henry Grew of Hartford, Connecticut and later of Philadelphia, Pennsylvania.1 The doctrine of “conditional immortality” was first introduced among the Millerites by George Storrs. It was the reading of one of Grew’s tracts in 1837 that turned Storrs against the immortal soul and hell doctrines, and he was later to become the leading champion in the United States of conditionalism. Typical of many Second Adventist periodicals, the World’s Crisis advocated conditionalism, the doctrine of the conditional―not inherent—immortality of the human soul, with its corollary tenet that the ultimate destiny of those who are rejected by God is destruction or annihilation, not conscious torment. The World’s Crisis had advocated the date of 1854 for Christ’s second coming and when, like all the preceding dates, this date failed, the “immortality question” came strongly to the fore and caused a second major division within the original movement. 본 저서 43면에서 언급되었듯이, 재림 운동은 연대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말미암아, 뚜렷이 구별되는 많은 요소들을 낳게 하였다. 원래의 밀러파에서 갈라진 재림교회의 분파들 대다수는 불멸의 영혼과 지옥의 교리를 부정했다. 이것은 주로 1820년대, 1830년대, 그리고 1840년대에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의 헨리 그로우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의해 출판된 기사가 실린 책자에 의해 설명되었다.1 "조건부적 불멸"의 원칙은 조지 스토러스에 의해 밀러파 사이에 처음 소개되었다. 스토어스가 불멸의 영혼과 지옥의 교리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1837년 그루의 저서 중 하나를 읽은 후였고, 그는 후에 미국의 조건주의 교리의 선도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많은 재림교회 간행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 <세계의 위기>는 조건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인간 영혼은 내재적 불멸이 아니라 조건부적 불멸이라는 교리가 주창되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영혼이 고통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 또는 '완전히 사라짐'이라는 믿음의 결론이 내려졌다. <세계의 위기>는 1854년 을 그리스도의 재림 연도로 주장해왔고, 이전의 모든 연대 예언처럼, 이 연대도 불발이 되었을 때, "영혼 불멸성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원래의 재림운동 내부에 두 번째로 큰 분열이 일어났다. Although the doctrine of conditional immortality eventually was adopted by a majority of the Second Adventists, it was never accepted by the leadership of the original movement, which increasingly began to condemn it as a heresy in their periodical, the Advent Herald. Finally, in 1858, the original Second Adventists, or the “Evangelical Adventists,” as they now called themselves, openly broke with the “conditionalist” Adventists and formed a separate organization, The American Evangelical Advent Conference. The Evangelical Adventists, however, soon became a minority, as their members in increasing numbers sided with the “conditionalist” Adventists. The association finally died out in the early years of the 20th century.2 비록 조건부 불멸의 원칙이 결국 대다수 재림교도들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정기 간행물인 어드벤트 헤럴드에서 이단 교리로 정죄함으로써 애초의 재림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결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마침내, 1858년, 원래의 재림주의자들, 즉 "복음적 재림주의자들"은 "조건주의" 재림주의자들과 공개적으로 결별하고 별도의 단체인 "미국 복음주의 재림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조건주의" 재림주의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복음적 재림주의자들은 곧 소수가 되었고, 마침내 그 협회는 20세기 초에 사라지게 되었다.2 After the break with the Evangelical Adventists, the supporters of the World’s Crisis, too, formed a separate denomination in 1860, The Advent Christian Association (later “The Advent Christian Church”), today the most important Adventist denomination aside from the Seventh-Day Adventists and Jehovah’s Witnesses.3 복음적 재림주의자들이 와해된 후, <세계의 위기> 지지자들 역시 1860년에 별도의 교파인 재림교회(The American Evangelical Advent Conference, 후에 "그리스도 재림 교회")를 형성했는데, 오늘날 제7일 재림교회와 여호와의 증인 외에 가장 두드러진 재림교회 교파이다.3 Many “conditionalist” Adventists did not join this association, however, partly because they were strongly opposed to all forms of structured church organization and would accept no names of their church but the “Church of God,” and partly also because of their distinctive “age to come” views, that is, that the Jews would be restored to Palestine before the coming of Christ, that his coming would usher in the millenium, and that the saints would reign with Christ for a thousand years, during which period his kingdom would be set up on earth. By the early 1860’s, these Adventists had been separated from the Advent Christians.4 그러나 많은 "조건주의" 재림주의자들은 이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모든 형태의 구조화된 교회 조직에 강하게 반대했고 "하나님의 교회" 외에는 교회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들의 독특한 "다가올 시대" 라는 관점 때문이기도 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그가 복천년으로 인도하시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천년간 다스리며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왕국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186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이 재림교도들은 재림주의 크리스챤들과 분리되었다.4 In 1863 another group of “conditionalist” Adventists, headed by Rufus Wendell, George Storrs, R. E. Ladd, W. S. Campbell, and others, broke with the Advent Christian Association and formed a new denomination, The Life and Advent Union. This group promulgated the view that only the righteous would be resurrected at Christ’s coming. The wicked dead would remain in their graves forever. They also denied the personality of the holy spirit and even of the devil. For the promotion of these teachings, they started a new paper, Herald of Life and of the Coming Kingdom, with Storrs as editor.5 Storrs later changed his view of the resurrection and left the group in 1871, resuming the publishing of his earlier Bible Examiner magazine. 1863년 루퍼스 웬델, 조지 스토어스, R. E. 래드, W. S. 캠벨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조건주의적인" 재림주의자들은 재림주의 그리스도인 협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교파인 The Life and Advent Union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악한 자는 영원히 무덤에 남아 있을 것이며, 의인들만 부활한다는 해석을 내렸다. 그들은 또한 성령과 악마의 인격도 부정했다. 이러한 가르침을 홍보하기 위해, 그들은 편집자를 스토어스로, 새로운 신문인 <생명의 헤럴드>와 <다가오는 왕국의 헤럴드>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5 스토어스는 후에 부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바꾸고 1871년에 이 무리를 떠나, 그의 초기 잡지인 <성서 검토자>의 발행을 재개했다. |
For Chapter Two:
METHODS OF RECKONING REGNAL YEARS
The accession and nonaccession year systems
2장: 통치년의 계수방식, 즉위년과 비즉위년 방식
Babylon, and later Medo-Persia, applied the accession year system, in which the year during which a king came to power was reckoned as his accession year, and the next year beginning on Nisan 1 (spring), was reckoned as his first year. 바빌로니아와 그에 이어서 메도페르시아는 즉위년 방식을 적용했는데, 즉위년이란 왕이 권력을 잡은 해를 말하는 것이며, 그 다음 해, 니산 월 1일(봄)부터 시작하는 해를 통치 1년으로 정하였다. In Egypt the opposite method was applied: the year in which a king came to power was counted as his first year. There is evidence to show that the latter method,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was also applied in the kingdom of Judah. The evidence is as follows: 이집트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썼다. 왕이 권력을 잡은 해를 통치 첫 해로 간주하였다. 유다 왕국은 후자의 방법인 비즉위년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The battle of Carchemish in 605 B.C.E., when the army of Pharaoh Neco of Egypt was defeated by Nebuchadnezzar, is stated at Jeremiah 46:2 as having occurred “in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the son of Josiah, king of Judah.” According to Jeremiah 25:1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 . . was the first year of Nebuchadnezzar.” But the Neo-Babylonian Chronicle 5 (B.M. 21946) clearly states that this battle took place in Nebuchadnezzar’s accession year, not in his first year.6 The reason why Jeremiah reckons Nebuchadnezzar’s accession year as his first year seems to be that Judah did not apply the accession year system. Jeremiah, therefore, applied the Jewish non-accession year system not only to Jehoiakim, but also to Nebuchadnezzar. 1. 기원전 605년, 이집트의 바로 느고 군대가 느부갓네살에게 패하였을 때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에 일어났다고 예레미야 46장 2절에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 25장 1절에 따르면, 여호야김 4년은 느부갓네살의 원년이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 연대기>5 (B.M. 21946)는 이 전투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첫해가 아니라 즉위 년에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6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의 즉위 연도를 원년으로 여기는 이유는 유다가 즉위 연도를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유대인의 비즉위년 방식을 여호야김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에게도 적용하였다. 2. In 2 Kings 24:12; 25:8, and Jeremiah 52:12 Jehoiachin’s deportation and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re said to have taken place in Nebuchadnezzar’s eighth and nineteenth regnal years, while Jeremiah 52:28–30 seems to put these events in Nebuchadnezzar’s seventh and eighteenth years, respectively. The difference in both cases is one year. The Neo-Babylonian Chronicle is in agreement with Jeremiah 52:28 in stating that Nebuchadnezzar seized Jerusalem and captured Jehoiachin in his seventh year. 2. 왕하 24: 12; 25; 8 그리고 예레미야 52: 12에서 여호야긴의 유배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느부갓네살의 통치 8년과 19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예레미야 52장 28~30절에서는 느부갓네살의 통치 7년과 18년에 각각 해당된다. 두 경우의 차이는 1년이다.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느부갓네살의 통치 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기록하므로써 예레미야와 52장 28절과 일치되고 있다. There is evidence to show that the last chapter of Jeremiah, chapter 52, was not authored by Jeremiah himself. This is clearly indicated by the concluding statement of the preceding chapter (Jeremiah 51:64): “Thus far are the words of Jeremiah.” Chapter 52, in fact, is almost word for word taken from 2 Kings 24:18– 25:30, the only exception being Jeremiah 52:28–30, the verses containing the divergence of one year in the reference to Nebuchadnezzar’s regnal years.7 Professor Albertus Pieters in all probability gives the correct explanation of this difference when he states: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인 52장은 예레미야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이것은 앞의 장(예레미아 51: 64)의 "예레미야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결론으로 볼 때 분명하다. 52장은 사실상 왕하 24:18–25:30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며, 유일한 예외는 예레미야 52:28–30인데, 느부갓네살의 통치시기와 관련하여 1년의 차이를 나타내는 구절이다.7 알베르투스 피에테르 교수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여,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This difference is perfectly explained if we assume that the section in question was added to the prophecies of Jeremiah by someone in Babylon who had access to an official report or record, in which the date would, of course, be set down according to the Babylonian reckoning.8 이 차이는, 만약 우리가 문제로 보는 이 부분이 바빌론의 공식 보고서나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누군가에 의해 예레미야의 예언에 추가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바빌로니아의 계산 방식에 따라 연대가 정해졌을 것으로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다.8 The compiler of Jeremiah 52, then, faithfully reproduced the dates found in his two sources, even if those sources reflected two different ways of reckoning regnal years: the accession year system used by the Babylonians, and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used by the Jews. 예레미아 52장의 편찬자는 두 가지 다른 계산 방법, 즉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즉위년 방식과 유대인들이 사용한 비즉위년 방식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의 두 가지 자료에서 발견된 연대를 충실하게 재현한 셈이었다. The last four verses of chapter 52 of Jeremiah (verses 31–34), although taken verbatim from 2 Kings 25:27–30, also reflects the accession year system, which may be explained by the fact that the passage reproduces information that originally must have been received from Babylonia. As stated in this passage, Evil-merodach (Awel-Marduk), “in the year of his becoming king,” released the Judean king Jehoiachin from prison in the 37th year of his exile. According to Professor Pieters the clause “in the year of his becoming king” (Jeremiah 52:31) “is the technically correct term for the year of the monarch’s accession,”9 the Babylonian documents using a similar expression when referring to the accession year. 예레미야 52장의 마지막 네개의 절(31-34절)은, 비록 왕하 25:27-30에서 그대로 인용되었지만, 이것은 바빌로니아로부터 원래 받은 정보를 재현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말한 것처럼, 에윌-므로닥(아웰-마르둨)은 "왕이 된 해에" 유대의 왕 여호야긴을 유배 37년에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피에터스 교수에 따르면, "그가 왕이 된 해"라는(예레미아 52장 31절) 것은 "군주가 즉위하는 해를 나타내는 바빌론식의 바른 표현"이며, 바빌로니아 문서들은 즉위 연도를 언급할 때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9 That the writer of the passage in Jeremiah 52:28–34 used the accession year system is thus the conclusion of a number of modern Biblical scholars.10 예레미야 52장 28절에서 34절의 기록자가 즉위년도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의 결론이다.10 3. The accession year system is most probably also employed by the prophet Daniel at Daniel 1:1, where he dates the first deportation of Jewish exiles to the “third year” of Jehoiakim. This deportation, however, must have followed upon the battle of Carchemish, the victory there paving the way for Nebuchadnezzar’s invasion and conquest of the countries in the west, including Judah. 3. 즉위년 방식은 아마도 다니엘이 유대인 유배자들이 처음 유배된 시점을 여호야김의 "3년"으로 추정하는 시기로서 다니엘 1:1에 기록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유배는 갈그미스 전투 후에 있었음이 분명하며,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승리함으로써 유다를 포함한 서쪽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열리게 되었다. As noted above, this battle is dated at Jeremiah 46:2 to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not to his third. Most commentators, therefore, choose to regard the “third year” of Daniel 1:1 as a historical blunder by the author of the book, and as indicating that he was not contemporary with the event, but was writing hundreds of years afterwards. Some, including the Watch Tower Society, argue that the deportation mentioned in the text was identical with the one that occurred eight years later, after the end of Jehoiakim’s 11th year of reign, when his son and successor Jehoiachin was exiled to Babylon.11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전투는 예레미야 46장 2절에서 여호야김의 '4년'에 일어난 것이며, 그의 통치 셋째 해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다니엘 1:1의 "3년"을 책의 기록자에 의한 역사적 실수로 간주하고, 그가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가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나서 쓴 것이라 한다. 워치타워 협회 등 일부에서는 본문에 언급된 유배가 여호야김 통치 11년 후, 그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여호야긴이 바빌론으로 유배된지 8년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고 주장한다.11 However, if it is accepted that Daniel was living in Babylon in the Neo-Babylonian period and was occupying a high rank in its administration, it would have been natural for him to apply the Babylonian calendar and their system of reckoning regnal years, and to do this as well when referring to the reigns of nonBabylonian kings, including Jehoiakim, just as Jeremiah, living in Judea, conversely applied the Jewish nonaccession year system in referring to Nebuchadnezzar’s reign. 그러나 다니엘이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바빌로니아에 살면서 그가 행정부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유대에 사는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의 치세를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비즉위년 방식을 적용하였지만, 거꾸로 다니엘이 바빌로니아 달력과 그들의 통치 연도를 계산하는 즉위년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여호야김 등 비바빌로니아 왕들의 통치 기간을 언급할 때에도 이와 같은 즉위년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4. The Babylonian calendar was also used (alongside the Egyptian civil calendar) by the Jewish colony at Elephantine in s. Egypt from the 5th century onward, as has been established by Dr. Bezalel Porten and others. Dr. Sacha Stern concludes that, “NonJewish or ‘official’ calendars were routinely used by Diaspora Jews throughout the whole of Antiquity.”12 4. 바빌로니아 달력은 또한 (이집트 민간 달력과 함께) 베잘렐 포르텐 박사 등의 학자들이 인정하였듯이 엘리팬틴(나일강 지역의 섬)의 유대인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이 5세기 이후로 줄곧 사용하였다. 이집트. 사차 스턴 박사는 "비유대적인 달력 곧 '사무적인' 달력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의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었다.12 Several difficult problems in Biblical chronology are easily solved if the accession and nonaccession year systems are taken into consideration. A study of the chronological tables in the final section of this Appendix (“Chronological tables covering the seventy years”) will make this clear. 성서 연대기에서 몇 가지 난제들은 즉위년 방식이냐 또는 비즉위년 방식이냐를 구별하여 고려한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 부록의 마지막 절에 있는 연대기 표("70년을 다루는 연대기 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
Nisan and Tishri years
니산 월과 티쉬리 월로 시작되는 년도
It is well established that the Assyrian, Babylonian and Persian calendar started on Nisan 1 (the first day of the month Nisan in the spring), which was also the beginning of the regnal years. The Jews, in later times, had two beginnings of their calendar years: Nisan 1 in the spring and Tishri 1 six months later in the autumn—Tishri 1 being the older new-year day.13 Although Nisan was the beginning of the sacred calendar year, and the months were always numbered from it,14 Tishri was retained as the beginning of the secular calendar year.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달력은 니산월 1일(봄, 니산월 초하루)에 시작되었는데, 이 날은 또한 통치 년도의 시작이었다. 후대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달력에서 새해의 시작일로 두 종류의 달력을 사용했다. 봄에는 니산 월 1일, 6개월 뒤인 가을에는 티쉬리 월 1일이다. 티쉬리 월로 시작되는 1년은 더 오랜 전통을 가진 달력이다.13 니산 월 1일로 시작되는 달력은 성스러운 달력으로 사용되었고 니산월을 시작으로 달들의 순서가 이루어졌지만,14 티쉬리 월로 시작되는 달력은 세속적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The problem is: Did the kings of Judah follow the custom of Babylon and other countries in reckoning the regnal years from Nisan 1, or did they reckon them from Tishri, the beginning of their secular year? Although scholars disagree on this, there is evidence to show that the kings of Judah reckoned their regnal years on a Tishri-to-Tishri basis. 문제는, 유다 왕들이 바빌론과 다른 나라들의 관례를 따라 니산월 1일부터 통치 기간을 계산하였는가, 아니면 세속 달력의 시작인 티쉬리월에서부터 계산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은 비록 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유다 왕들이 그들의 통치 연도를 티쉬리월에서 티쉬리월로 넘어가는 달력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1. Jeremiah 1:3 states that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fter the desolation of the city, “went into exile in the fifth month,” which is also in agreement with the record in 2 Kings 25:8–12. Yet this fifth month is said to have been at “the end of the eleventh year of Zedekiah.”15 Only if the regnal years were reckoned as beginning from Tishri (the seventh month) could the fifth month be said to be at “the end of’ Zedekiah’s eleventh regnal year, which then ended with the next month, Elul, the sixth month. 1. 예레미야 1:3은 예루살렘 거민이 그 성읍이 황폐한 후 "다섯째 달에 유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왕하 25:8~12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다섯째 달은 시드기야 제 십일년 말이라고 한다.15 통치년도가 티쉬리월(일곱째 달)에서 시작되는 해로 치면, 다섯째 달이 시드기야의 제 십일년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다음 달인 여섯째 달 엘룰월에 시드기야의 통치가 끝난 셈이다. 2. According to 2 Kings 22:3–10 King Josiah of Judah, in his eighteenth year, began repairs on the temple of Jerusalem. During these repairs High Priest Hilkiah found “the book of the law” in the temple.16 This discovery resulted in an extensive campaign against idolatry throughout the whole land. After that Josiah reinstituted the passover on Nisan 14, two weeks after the beginning of the new year according to the sacred calendar. Very interestingly, this passover is said to have been celebrated “in the eighteenth year of King Josiah.” (2 Kings 23:21–23) As the repairs of the temple, the cleansing of the land from idolatry and many other things recorded in 2 Kings 22:3–23:23 could not reasonably have occurred within just two weeks, it seems obvious that Josiah’s eighteenth regnal year was not counted from Nisan 1, but from Tishri 1. 2. 왕하 22:3~10에 따르면, 유다의 요시야 왕은 열여덟 살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힐기야 대제사장은 이 수리 과정에서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16 이 발견으로 유다 전 지역에 우상숭배를 없애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뒤에 요시야는, <성스러운 달력>에 따른다면, 새해 초로부터 이 주일 뒤인,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재개하였다. 이 유월절은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행한 것이라고 한다. (왕하 23:21~23) 왕하 22:3–23:23에 기록된 성전의 보수와 우상숭배와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이치적으로 고려할 때, 단 2주일 만에 깨끗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요시야의 열여덟 번째 해가 니산월 1일부터 계수된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통치년도는 니산 1일부터가 아니라 티쉬리월 1일부터 계산되었다. 3. Another indication of a Tishri reckoning of regnal years in Judah is given in Jeremiah 36. In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verse 1), Yahweh told Jeremiah to write in a book all the words he had spoken to him against Israel, Judah, and all the nations (verse 2). This Jeremiah did through Baruch, his secretary (verse 4). When Baruch had finished the work, Jeremiah asked him to “go, and from the scroll you wrote at my dictation, read all the words of Yahweh to the people in his Temple on the day of the fast.” (Jeremiah 36:5, 6, JB). Which fast? This was evidently a special fast proclaimed for some unspecified reason. Most probably the reason was the battle of Carchemish in May–June that same year, “in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Jeremiah 46:2), and the subsequent events, including the siege laid against Jerusalem in the same year according to Daniel 1:1. Though Nebuchadnezzar by now, due to the death of his father, had returned to Babylon (as recorded in the NeoBabylonian Chronicle 5), the Jews had good reasons for fearing that he soon would return and continue his operations in Judah and the surrounding areas. Against this background, a “summons to a fast in the presence of Yahweh for the whole population of Jerusalem and for all the people who could come to Jerusalem from the towns of Judah” (Jeremiah 36:9, JB) is quite understandable. Very interestingly, this fast, at which Baruch was to read aloud from the scroll he had written, took place “in the fifth year of Jehoiakim the son of Josiah, the king of Judah, in the ninth month,” according to the same verse. 3. 유다가 통치년도에 티쉬리 월을 시작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예레미야 36장에 있다. 여호야김 4년(1절)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와 온 민족을 상대로 하신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이 예레미야가 그의 서기관 바룩(4절)을 시켜서 한 것이다. 바룩이 그 일을 마치니, 예레미야가 그에게 물었다. `가서, 내가 명하는 대로 쓴 두루마리 가운데서, 금식일에,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성전에 있는 백성에게 낭독하여라.'(예레미야 36:5, 6, JB) 어느 금식을 말하였는가? 이것은 분명히 어떤 특정한 이유로 특별히 금식을 선언한 것이었다. 아마 틀림없이 그 해 5월에서 6월 사이에 벌어진 여호야김 4년(예레미야 46:2) 갈그미스 전투가 일어나던 같은 해에 다니엘 1:1에 따른 예루살렘 포위 등 그 이후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비록 당시에 느부갓네살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바빌론으로 돌아갔지만, 유대인들은 그가 곧 돌아와 유다와 그 주변 지역에서 작전을 계속할 것을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온 백성과 유다 성읍에서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는 모든 백성을 위하여, 야훼 앞에서 금식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설교'(예레미야 36:9, JB)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이 금식은 바룩이 쓴 두루마리를 큰소리로 읽는 것이었는데, 이 구절에 따르면,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 5년에' 일어났다. If Jehoiakim’s regnal years were counted from Nisan, the first month, Baruch began to write down Jeremiah’s prophecies about a year prior to this fast. Besides, it seems to have been proclaimed already in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verses 1, 6), and thus about nine months before it was held. All this seems very improbable. But if Jehoiakim’s regnal years were counted from Tishri, the seventh month, his fourth year ended with Elul, the sixth month (corresponding to parts of August–September, 605 B.C.E.), and the fast in the ninth month (parts of November–December, 605 B.C.E.) took place a little more than two months after the beginning of Jehoiakim’s fifth year. 바룩은 여호야김의 왕위 계승을 니산월부터 계수하면, 이 금식이 있기 일 년 전쯤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또 여호야김 4년(1,6절)에 이미 선포된 것으로 보여, 이 금식이 있기 약 9개월 전에 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통치 기간을 일곱째 달인 티쉬리월에서 계산하면, 네째 해는 여섯째 달(기원전 605년 8월~9월)인 엘룰 월에 끝나고, 아홉째 달(기원전 605년 11월~12월)의 금식은 두 달 조금 더 지나서 시작되었다. Baruch’s writing down of Jeremiah’s prophecies, then, took only a few months, which is more probable, and the fast could have been proclaimed only two months before it was held, and not long after the battle of Carchemish and the subsequent Babylonian operations in Syria and Palestine in the summer and autumn of 605 B.C.E.17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것은 불과 몇 달 밖에 걸리지 않았고, 금식은 기원전 605년 여름과 가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갈그미스의 전투와 그 이후의 바빌로니아 작전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선포될 수 있었다. 4. There is evidence, too, that Jewish writers, when referring to foreign kings, at least sometimes reckoned their regnal years according to the Tishri year. This is done by Nehemiah for example. In Nehemiah 1:1 he refers to the month Chislev(November–December) in the twentieth year of Artaxerxes. But the month of Nisan of the next year is still referred to as in Artaxerxes’ twentieth year of rule. (Nehemiah 2:1) If Nehemiah reckoned Artaxerxes’ regnal years from Nisan 1, he should have written twenty-first year at chapter 2, verse 1. Nehemiah, therefore, obviously reckoned the regnal years of the Persian king Artaxerxes according to the Jewish Tishri-to-Tishri calendar, not according to the Persian Nisan-to-Nisan count. This is also supported in the Watch Tower Society’s Bible dictionary,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2 (1988), pages 487, 488.18 That Judah followed a Tishri-to-Tishri reckoning of the regnal years, at least in this period of its history, is the conclusion of some of the best scholars and students of Bible chronology, for example, Sigmund Mowinckel, Julian Morgenstein, Friedrich Karl Kienitz, Abraham Malamat, and Edwin R. Thiele.19 Although this way of reckoning regnal years makes the synchronisms between Judah and Babylon somewhat more complicated, it clears up many problems when applied. In the chronological tables on pages 350–352 of this book, both kinds of regnal years are paralleled with our modern calendar. 4. 유대인 기록자들이 외국의 왕들을 언급할 때, 때때로 그들의 통치연도를 티쉬리월로 시작되는 해에 따라 계수했다는 증거도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느헤미야에 의해 행해졌다. 느헤미야 1:1에서 그는 아닥사스다 이십년 기슬레 월(11~12월)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다음해 니산월은 여전히 아닥사스다 통치 20년으로 언급된다. (느헤미야 2: 1) 느헤미야가 니산월 1일부터 아닥사스다가 다스린 날을 계산하였다면, 2: 1에서 스물한 해라고 기록했어야 한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명백히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통치 연도를 페르시아의 니산월에서 니산월로의 계수가 아니라, 유대인의 티쉬리월에서 티쉬리월로 이어지는 달력에 따라 계수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또한 워치타워 협회의 성경 사전인 <통찰>, 제2권, 487, 488쪽의 설명으로도 지지된다.18 : "유다가 적어도 이 시기에는 티쉬리월에서 티쉬리월로 넘어가는 달력에 따라 계수했다는 것이 성경 연대기의 일부 최고의 학자들(예를 들면, Sigmund Mowinckel, Julian Morgenstein, Friedrich Karl Kienitz, Abraham Malamat, 그리고 Edwin R. Thiele)과 연구생들의 결론이다."19 비록 이러한 통치 년도를 계산하는 방식이 유다와 바빌론 사이의 동시성을 다소 더 복잡하게 만들지만, 제대로 적용되면 많은 난제들이 명료해진다. 이 책의 350-352면에 있는 연대기 표에서, 두 종류의 통치 년도를 현대 달력과 평행하도록 배열하였다. |
1 LeRoy Edwin Froom, The Conditionalist Faith of Our Father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65, pp. 300–315. Grew’s anti-trinitarian position, too, was adopted by a majority of the Second Adventists, including the three major Adventist groups that branched off from the “original” Adventists: 1) the SeventhDay Adventists, 2) the Advent Christians, and 3) the “age to come” Adventists. In 1898 the SDA Church, on the authority of Ellen G. White, the “prophetess” of this movement, changed its position on the question. (Erwin Roy Gane, The Arian or Anti-Trinitarian Views Presented in Seventh-Day Adventist Literature and the Ellen G. White Answer, unpublished M.A. thesis, Andrews University, June 1963, pp. 1– 110) Some decades later, the Advent Christian Church, too, began to reconsider its anti-trinitarian position.—See David Arnold Dean, Echoes of the Midnight Cry: The Millerite Heritage in the Apologetics of the Advent Christian Denomination, 1860– 1960 (unpublished Th.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76) pp. 406–416.
2 David Tallmadge Arthur, “Come out of Babylon”: A Study of Millerite Separatism and Denominationalism, 1840–1865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Rochester, 1970), pp. 291–306; Isaac C. Wellcome, History of the Second Advent Message (Yarmouth [Maine], Boston, New York, London, 1874), pp. 597–600, 609, 610. See also the excellent overview by D. A. Dean, op. cit., pp. 122–129. Even Joshua V. Himes, editor of the Advent Herald and the most influential leader of the original movement after the death of Miller in 1849, adopted the “conditionalist” position in 1862 and left the Evangelical Adventists.
3 Numerically, the membership of this church has remained at about 30,000–50,000 throughout its history. The two most influential leaders and writers at the formation of the association were H. L. Hastings and Miles Grant, the latter being editor of the World’s Crisis from 1856 to 1876. Hastings left the association in 1865 and remained independent of all associations for the rest of his life, although he continued to advocate conditionalism and other teachings of the Advent Christian denomination. (See Dean, op. cit., pp. 133–135, 142, 210–294.)
4 The leading advocate of these views was Joseph Marsh in Rochester, N.Y., editor of the Advent Harbinger and Bible Advocate (in 1854 changed to Prophetic Expositor and Bible Advocate). See also D. T. Arthur, op. cit., pp. 224–227, 352–371. Henry Grew as well as Bible translator Benjamin Wilson both associated with this group. (Historical Waymarks of the Church of God, Oregon, Illinois: Church of God General Conference, 1976, pp. 51–53) Due to their opposition to all church organization, the “age to come” Adventists were very loosely associated. A more stable organization was not formed until 1921, when the Church of God of the Abrahamic Faith was organized with headquarters in Oregon, Illinois. — D. T. Arthur, op. cit., p. 371.
5 D. A. Dean, op. cit., pp. 135–138; D. T. Arthur, op. cit ., pp.349–351. The Life and Advent Union lived on until 1964, when it merged again with the Advent Christian Church.
6 The Neo-Babylonian chronicles are discussed in Chapter Three, section B-1.
7 It cannot be determined whether chapter 52 was added by Jeremiah himself, his scribe Baruch, or some other person. The reason why this section from 2 Kings was included may have been “to show how Jeremiah’s prophecies were fulfilled.”— Dr. J. A. Thompson, The Book of Jeremiah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0), pp. 773, 774.
8 Albertus Pieters, “The Third Year of Jehoiakim,” in From the Pyramids to Paul, ed. by Lewis Gaston Leary (New York: Thomas Nelson and Sons, 1935), p. 186. That the information in Jeremiah 52:28–30 may have been added to the book of Jeremiah in Babylonia is also supported by the fact that the Greek Septuagint (LXX) version of Jeremiah, which was produced in Egypt (perhaps from a manuscript preserved by the Jews in that country), does not include these verses.
9 Pieters, op. cit., p. 184.
10 See, for example, John Bright, The Anchor Bible: Jeremiah (N.Y.: Doubleday, 1965), p. 369; J. A. Thompson, op. cit., p.782, and J. Philip Hyatt, “New Light on Nebuchadnezzar and Judean History,”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Vol. 75 (1956), p. 278.
1 르로이 에드윈 프룸의 저서 <The Conditionalist Faith of Our Fathers> 워싱턴 D.C. : 리뷰 및 헤럴드, 1965년, 300-315면. 그루의 반삼위일체적 입장은 다수의 재림교도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주된 그룹들은 1) 제7일 재림교회, 2) 재림그리스도 교회, 3) "다가오는 시대"재림교회 이었다. 1898년 엘렌 G.의 권위로 SDA 교회가 세워졌다. 이 운동의 "여 예언자"인 화이트는 삼위일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White Answer, 미발표된 M.A. 논문, 앤드루 대학, 1963년 6월 1~110면)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재림 그리스도 교회 역시 반삼위일체적인 입장을 재고하기 시작했다.—데이비드 아놀드 딘, 미드나잇 크라이의 메아리 보기: 1860–1960년 재림 그리스도 교파의 변증학에서의 밀러파 유산 (웨스트민스트 신학 세미나, 1976년, 미발표된 Th.D. 학위 논문 ) 406–416쪽
2 데이비드 톨매지 아서, "바빌론에서 나와라" 밀러라이트 분리주의와 분파주의에 관한 연구, 1840–1865 (로체스터 대학 박사 논문 미발표), 291-306쪽; 아이작 C. 웰컴의 저서 <재림 기별의 역사> (야머스[메이네], 보스턴, 뉴욕, 런던, 1874) 597–600, 609, 610면. 또한 D. A. 딘의 저서 <the excellent overview> 122-129페이지를 참조하라. 조슈아 뷔도. 1849년 밀러가 사망한 후 최초의 운동에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이자 <어드벤트 헤럴드>의 편집자였던 하인스는 1862년 조건부 입장을 채택하고 복음주의 재림주의자들을 떠났다.
3 이 교회의 교인은 역사상 약 30,000~50,000명 정도의 수로 머물러 있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지도자와 작가는 H. L. 헤이스팅스와 마일스 그랜트로 1856년부터 1876년까지 <세계의 위기>의 편집자였다. 헤이스팅스는 1865년 협회를 탈퇴하고 남은 생애 동안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딘의 동일한 저서 133–135, 142, 210–294면 참조)
4 이러한 견해들의 주요 지지자는 뉴욕 로체스터의 조셉 마쉬로, 어드벤트 하빈저 편집자이자 <성서 옹호자> (1854년에 <예언의 해설 및 성서 옹호자>로 바뀌었다. D를 참조하십시오. T. Arthur, op. cit, 224–227, 352–371쪽. 헨리 그로우와 성경 번역가 벤자민 윌슨은 둘 다 이 그룹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리노이 주 오레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적 웨이마크: 하나님의 교회, 1976년, 페이지 51-53) 모든 교회 조직에 대한 반대 때문에, 재림주의자들은 매우 느슨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1921년에야 아브라함 신앙의 하나님의 교회가 일리노이주 오리건주에 본부와 함께 조직되었다. D. T. Arthur의 같은 책, 371면.
5 D. A. 딘의 같은 책 135–138면; D. T. Arthur의 같은 책, 349–351면. 생명과 재림 연합은 1964년까지 존속되다가 다시 재림 그리스도 교회와 합병되었다.
6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3장 B-1절에서 논의된다.
7 제52장이 예레미야 자신이나 그의 서기관 바룩,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추가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열왕기하로부터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J. A. 톰슨 박사의 저서, <예레미아서> (그랜드 래피즈: W. B. 에이드먼 출판사, 1980년), 773, 774면.
8 알베르투스 피에테르, "여호야김의 3년", 루이스 개스턴 리어리의 저서 <피라미드에서 바울까지>뉴욕: 토마스 넬슨과 선즈, 1935년), 186면. 예레미야 52: 28~30절의 내용이 바빌로니아의 예레미야 책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집트에서 제작된 그리스어 버전의 예레미야(LXX)에도 이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9 피에테르의 같은 책, 184면
10 예를 들어, 존 브라이트, 앵커 성경: 예레미야 (N.Y.: 더블데이, 1965년), 369면; J. A. 톰슨의 같은 책, 782면 및 J. 필립 하얏트의 저서 <네부카드네자르와 유대 역사에 대한 새로운 빛>, 성서문학저널 제75권 (1956년) 278면.
11 Insight an the Scriptures, Vol. 1 (Brooklyn, New York: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New York, Inc., 1988), p. 1269. A detailed examination of this theory is presented in the Appendix for Chapter Five: “The ‘third year of Jehoiakim’ (Daniel 1:1, 2).”
12 Sacha Stern, “The Babylonian Calendar at Elephantine,” Zeitschrift far Papyrologie and Epigraphik, Band 130 (2000), p. 159.
13 J. D. Douglas, ed., New Bible Dictionary, 2nd ed. (Leicester, England : Inter-Varsity Press, 1982), p. 159; compare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1, p. 391.
14 “In the Hebrew Scriptures the months are numbered from Nisan, regardless of whether the reckoning of the year was from spring or fall.” — Edwin R. Thiel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3), p. 52. In footnote 11 on the same page he gives many examples of this.
15 KIV, ASV, NASB, and other versions. The New World Translation (NW) uses the word “completion”: “until the completion of the eleventh year of Zedekiah the son of Josiah, the king of Judah, until Jerusalem went into exile in the fifth month “
16 As argued by many commentators, the “book of the law” probably was the book of Deuteronomy, which may have been lost for some time, but was now rediscovered. Cf. Professor Donald J. Wiseman, 1 and 2 Kings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3), pp. 294–296.
17 According to the Neo-Babylonian Chronicle 5 Nebuchadnezzar was enthroned in Babylon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Elul,” corresponding to September 7, 605 B.C.E., Julian calendar. After that, and still in his accession year, “Nebuchadnezzar returned to Hattu [the Syro-Palestinian area in the west]. Until the month Shebat [parts of January–February, 604 B.C.E.] he marched about victorious in Hattu.” — A. K. Grayson,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Locust Valley, New York: JJ. Augustin Publisher, 1975), p. 100. Thus Nebuchadnezzar may already have returned to the Hattu area at the time of the fast in November or December, 605 B.C.E. The danger of another invasion of Judah, therefore, seemed impending.
18 Few scholars seem to hold that Judah in the seventh and sixth centuries B.C.E. employed this combination of both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and the Tishri-toTishri count of the regnal years, as advocated in this work. Those who opt for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usually hold that Judah applied the Nisan-to-Nisan reckoning, and those who argue that Tishri-to-Tishri regnal years were used generally believe that the accession year system was employed.
19 See for example J. Morgenstein’s review of Parker and Dubberstein’s Babylonian Chronology 626 B.C.–A.D. 45 in the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Vol. 2 (1943), pp. 125–130, and Dr. A. Malamat’s article, “The Twilight of Judah: In the Egyptian-Babylonian Maelstrom,” in Supplements to Vetus Testamentum, Vol. XXVII (Leiden: E.J. Brill, 1975), p. 124, including note 2; also K. S. Freedy and D. B. Redford, “The Dates in Ezekiel in Relation to Biblical, Babylonian and Egyptian Sources,”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 90 (1970), pp. 464, 465. Dr. Edwin R. Thiele, however, assumes that while the books of Kings reckon the regnal years from Tishri, Jeremiah and Ezekiel both reckon them from Nisan. (E. R. Thiel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3, pp. 51–53, 182–191.) This seems a rather far-fetched speculation, and there is no need for it, if we allow for both Tishri regnal years and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for this period.
11 <통찰>, 1권 (뉴욕 부룩클린 : 워치타워 성서 및 책자협회, 1988년), 1269면. 이 주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5장 "여호야김 3년"(다니엘 1:1, 2)에 나와 있다.
12 사차 스턴, "엘리펀틴에서의 바빌로니아 역력", Zeitschrift far Papyrologie and Epigraphik, 밴드 130 (2000), 159면.
13 J.D. 더글라스, 새 성경사전, 제2장 (영국 레스터: Inter-Varsity Press, 1982), 159면; <통찰> 1권 391쪽을 비교하라.
14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한 해를 봄으로 시작하든 가을로 시작하든 상관 없이 니산 월에서 시작한다. 52쪽 52쪽 개정판 히브리 왕들의 신비한 수 틸레 같은 페이지의 각주 11에서 그는 이것에 대한 많은 예를 제시한다.
15 KIV, ASV, NASB 및 기타 역본. 신세계역(NW)에서는 "완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유다 왕 시드기야]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 제11년이 끝날 때까지, 곧 그해 다섯째 달에 예루살렘이 유배될 때까지 임했다.
16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했듯이, "율법 책"은 신명기 책이었을 것이다. 도널드 J. 와이즈먼 교수의 저서, <열왕기 상하>(라이서터: Inter-Varsity Press, 1993년), 294-296면.
17 <신바빌로니아 연대기 5>에 의하면 느부카드네살은 기원전 605년 9월 7일(줄리우스력으로)에 해당하는 "엘룰 월 초하루"에 바빌론의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그리고 그 즉위 해에,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gzar)는 하투(Hattu, 서쪽의 시로-팔레스타인 지역)로 돌아왔다. 셰바트[기원전 604년 1월~2월]까지 그는 하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행군했다." — A. K. 그레이슨의 저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연대기>, (뉴욕주 로커스트 밸리: J. 어거스틴 출판사, 1975년), 100면. 따라서 느부카드네살은 기원전 605년 11월이나 12월에 금식이 있을 때 이미 하투 지역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유다에 대한 또 다른 침략의 위험이 임박해 보였다.
18 본서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 유다가 티쉬리 월에서 티쉬리 월로 넘어가는 비즉위년 방식의 통치년 제도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비즉위년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다가 니산월에서 니산월로 넘어가는 역력을 적용했다고 주장하며, 티쉬리 월에서 티쉬리 월로 넘어가는 비즉위년 방식의 통치년 제도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즉위년 방식을 사용했다고 믿는다.
19 예를 들면 기원전 626년-서기 45년에 이르는 파커와 더버스타인의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대한 J. 모겐스타인의 검토를 참조하라.–근동학회지 제45권 제2권(1943년), 125-130면, 그리고 A. 말라마트 박사의 이집트-바빌로니아 혼란기의 <유다의 황혼>: 제XXVII 권(라이덴: E.J. 브릴, 1975), 124면의 각주 2를 포함, 또한 K. S. 프리디와 D. B. 레드포드, 성경, 바빌로니아와 입집트의 사료와 관련된 에스겔의 날짜들(아메리카 동방사회 저널 90권 1970년, 464,465면) 그러나 에드윈 R. 티엘레는 열왕기에서 티쉬리 월로 시작하는 통치 연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모두 니산 월로부터 통치 연도를 계산하고 있다. (E. R. 티엘레, 히브리 왕들의 신비한 수, 그랜드 래피드: Zondervan 출판사, 1983년, 51-53, 182–191면) 이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추측으로 보이며, 만약 우리가 이 기간 동안 티쉬리 월로 시작하는 통치연도와 비즉위년 방식을 모두 인정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