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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2011년 9월 7일 / 삼일예배 / 눅 13:23-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각 성과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 …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 ”(눅 13:23)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민족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눅 13:5). 포도원에 심겨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눅 13:6~9).
이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정말 구원 받는 사람이 적은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고 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狹:좁을 협, 窄:좁을 착, 몹시 좁음)해서 그 문과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에 들어가기 힘들더라도 그 좁은 문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은 그 문에 들어가는 데는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못 얻도록 훼방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열정을 다해, 싸워 이겨,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으로 꼭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좁은 문>이라고 하면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은데 뽑는 사람이 적은 상황을 비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문 자체가 작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 / 작은 문을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십니까? 몸이 큰 분은 배를 집어넣고 키가 큰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손에 들고 있는 짐이 없어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은 많은 것을 가지고 / 고개 들고 / 말 타고 으스대며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 베들레헴에 가면 옛 동굴 위에 ‘예수탄생교회’(Church of Nativity)가 있습니다. 원래, 베들레헴의 동굴 위에는 아도니스(Adonis) 신전이 세워져 있었는데(서기 135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아도니스 신전을 헐고(335년) 그 자리에 ‘예수탄생교회’를 건축했습니다(339년). 그 후 200년이 지난 후 팔레스타인 땅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불행히도 교회는 파괴되었습니다. 소요가 진정된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Justinianus)에 의해 예수탄생교회가 재건되었고(500년대 중엽), 그 후로 오늘까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예수탄생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의 높이는 불과 1m 20cm 밖에 안 됩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그 교회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원래 건축 당시에는 높은 문이었으나, 그 후 말을 타고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높이를 낮추었다고 합니다. 또한 문 입구의 폭이 80cm도 채 되지 않아,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
그러나 오늘 성경본문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밑천이라고 생각하는 돈이나 재능, 학벌이나 실력들을 내려놓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전에 유대인 랍비들에게 듣지 못한 새로운 가르침이자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습니다.
마 16:24 /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니 누가 그런 좁은 문에 들어가고 그런 좁은 길을 걸으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도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 대단하게 생각하던 것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좁은 길 / 좁은 문과 관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좋고 편한 길이라고 해서, 남들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가던 길에서 벗어나 함부로 사람들이 가는 길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마음을 뺏겨 무조건 다른 사람을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남들이 모두 가는데 나만 안가면 이상하게 느껴지고 남들이 다 사는데 나만 안사면 좀 바보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많은 사람이 말하는 대로 / 행동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을 ‘군중심리’라고 합니다. 사람은 군중심리 때문에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 머릿속에 다수가 선택한 것은 옳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 그러나 다수의 생각이 모두 다 옳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택했다 할지라도 옳지 않고, 바르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숫자가 많다고 거기가 정의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민주주의 정치원리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회의를 통해 결정된 일이라 해서 모두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결정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일이거나 모두 옳은 일은 아닙니다.
교회에도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에도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서 정하는 교회회의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로 계산한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까? 교회에서 회의하다가 반대의견이 나와 논쟁이 심해졌다면 회의를 중단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고 서로 양보하고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숫자를 세어 투표로 결정한다면 그곳에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민주주의 정치 / 민주주의 회의 법대로 한 다수가 옳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주주의(神主主義)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휩쓸리지 말고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줄 알면서도, 잘못된 줄 알면서도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병리현상의 하나인 집단사고에 빠지거나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이런저런 구실로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모여진 그룹은 자연히 조직화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똘똘 뭉치게 만드는 것은 장점도 있지만 위험요소도 많습니다. 보통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가 있는 조직은 비슷한 경향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사고’라는 병리현상이 발생합니다. 조직이 너무 한 가지 색깔로 뭉치게 되면 집단사고가 생기기 쉽습니다. 집단사고의 문제는 구성원들이 너무나 뭉친 나머지 방향이 잘못되어 가도 누구하나 그것을 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색깔로 비슷한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지적해도 독선으로 말미암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이 흑백논리가 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의미 없는 다수의 군중에 섞이지 말아야 합니다. 똘똘 뭉칠 때 … 뭉쳐 있을 때 무엇이 그 중심인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생명의 길은 고생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외톨이(왕따)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좁은 길은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길이 험하다는 뜻입니다. 불편하고 힘이 많이 듭니다. 찾는 사람도 적어서 외로운 길입니다. 우리가 왜 편하고 쉬운 길을 옆에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불리하고, 손해를 보고, 왕따를 당하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좁아도, 험해도, 멀어도,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의 길, 생명의 길,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 성곽 도시에서 ‘성문’은 도시의 입구이자 상징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문은 화려하고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성문 앞에 광장이 있어 시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해가 지면 성문은 닫혔고 새벽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상시 사용하기 위해서 거대한 성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살짝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가 진후에 성문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가 없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뿐이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문이 닫히고 좁게 열어 놓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확실한 신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신분은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성경을 들고 “나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된 사람입니다(요 1:12). 나는 예수 믿어 천국 시민권을 받은 사람입니다(빌 3:20).”라고 선언합니다. 분명한 고백을 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졌다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집, 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인천 공항에서 ‘내국인’이라고 쓴 문으로 들어옵니다. 누구인지만 확인하고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입국하려면 ‘외국인’줄에 서야 하고 그 문을 통과하는 절차가 복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 하늘나라가 먼 나라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가 아닌 내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예수 믿어 천국백성 되었다면 하늘나라는 내 나라가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힐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문이 닫히면 그 때 들어가려고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닫힌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눅 13:26 /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 이 말씀에서 그 문에 들어가기를 거절당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상에서 식사를 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었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또 있겠지’, ‘지금은 바쁘니까 후에 여유 있을 때 들어가지’하면서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일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공부하는 것, 드리는 것, 나누는 것, 교제하는 것, 봉사하는 것,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 그런 모든 기회는 여러분 곁에서 항상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기회를 미루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 아무리 머리 좋고, 영적으로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왜 이것 저 것 다 포기하고 좁은 길을 가야 하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찬 545장)
내가 가는 앞길이 선명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지고 걷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걷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기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 구원 받은 사람이기에 - 천국백성이기에 안 하는 것, 안 먹는 것, 안 갖는 것, 안 만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참고,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포기하는 것이 없다면 온전히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좁고 힘든 길이지만, 가끔 갈등도 생기는 연약함이 있지만 이 좁은 길,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안 하는 것, 포기한 것, 남들이 즐기는 것 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 하지 않는 것 … 그 길을 가다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예수님이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까? 그 길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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