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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1 부활팔일 목 – 133위 130° 피 가타리나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133위 103°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
이름 : 피 가타리나, 聖 정의배 마르코 妻
출생 : 1818년, 서울
순교 : 1878년 3월 17일, 옥중병사(장티푸스), 우포도청
피(皮) 가타리나는 1866년에 순교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혼인한 뒤에는 서울 창동(倉洞, 현 서울시중구 남창동)에 살다가 남대문 밖 자암(紫岩, 현 서울시 중구 봉래동·순화동·의주로)으로 이주해 살았다. 본디 총명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천주 교리와 기도문을 배웠지만, 비신자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올바로 교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1]
피 가타리나가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오던 정 마르코와 혼인한 것은 1837년 무렵이었다. 이후 남편 정의배 마르코가 1840년 무렵에 자발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자, 피 가타리나도 그의 영향을 받아 신자로서의 본분을 되찾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 정의배 마르코와 정덕(貞德)을 지키기로 굳게 언약하였고, 열심히 묵상 기도 생활을 하면서 대·소재도 열심히 지켰다. 그녀는 많은 기도문을 외운 데다가 폭넓게 교리서를 익힌 덕택에 아주 교리에 밝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권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피 가타리나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했지만, 남을 위한 애긍시사에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좋지 않은 옷과 음식을 입고 먹었지만 헐벗은 교우들을 만나면 남몰래 자기 옷을 벗어 주었고, 교우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 주었으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아 주기도 하였다. 남편 정의배 마르코가 회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집에는 언제나 많은 교우들이 왕래했는데, 이들을 대접할 때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로 겸손하고 온순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피 가타리나는 선교사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1859년 말에는 박해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베르뇌 주교를 보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창동 집을 남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베르네 주교 댁으로 가서 살았으며, 남대문 밖 자암에 작은 집을 사서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베르네 주교를 모셨다. 그뿐 아니라 피 가타리나는 다블뤼 주교와 브르트니에르(J. Bretenières, 白 유스토) 신부도 얼마 동안 자신의 집에 모셨다. 이처럼 밖으로는 남편인 정의배 마르코 회장을 도와 교회에 봉사하고, 안으로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하면서 편히 쉴 틈이 없었음에도 피 가타리나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선교사들과 남편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피 가타리나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숨어 지냈다. 그러면서도 순교하지 못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였고, 스스로 더욱 엄격하게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녀는 비신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도 대재를 지키고 묵상과 기도를 거르지 않았으며, 스스로 첨례표를 만들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부가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것을 늘 서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1877년 9월 24일(음력 8월 18일)에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1.1] 주교가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 피 가타리나는 비로소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이듬해 1월 28일(음력 1877년 12월 26일) 여러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피 가타리나도 이 무렵에 체포되었다.[2]
이내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피 가타리나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선교사들의 거처를 진술하지 않은 탓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는 참된 천주교를 봉행하는 사람인데,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 마리아!”만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 결과 피 가타리나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옥에 있는 교우들을 권면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1878년 3월 17일(음력 2월 14일)[3] 장티푸스까지 걸려 옥사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60세였다.[3.1]
[註]__________
[1] 『좌우포도청등록』, 병인(1866년) 1월 15일. 다음에 설명한 피 가타리나의 행적은 『병인치명사적』(5권, 31-37면)의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1.1]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 ☞ ‘220314 사순2주간 월 – 133위 088° 강 요한’ [註] [1.1] 참조.
[2] 「리델 주교가 1878년 10월 20일에 직접 작성한 옥중 생활기」, A-MEP. Vol. 580, Relation de la Captivité de Mgr Ridel, écrite par lui-même f. 442. 피 가타리나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조카 피영록(皮永祿, 바오로)[3.3]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유소연 역, 살림, 2008, 122면; 『좌포도청등록』, 1868년 윤4월 15일.
[3] 「리델 주교가 1878년 10월 20일에 직접 작성한 옥중 생활기」, Op. cit., f. 442; 펠릭스 클레르 리델, 위의 책, 122면. 리델 주교는 3월 19일(음력 2월 16일) 자신이 우포도청에서 좌포도청으로 이감되기 이틀 전(3월 17일)에 피 가타리나가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피 가타리나의 사망일은 3월 7일(음력 2월 4일)로도 나온다(『병인치명사적』, 5권, 37면).
[3.1]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의 묘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81 중림동약현성당묘원, 곧 ‘파주광탄하늘정원묘지’에 있다. 첫 매장지(‘반포’, 당시 경기 시흥)에서 중림동약현성당 1938년 11월 3일 언구비[3.2]에 본당 첫 묘원을 조성하고 그곳으로 순교자 피 가타리나 묘를 이장한 다음 순교비를 세웠다. 1968년 2월 24일에는 서울시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잠실에 있던 언구비 약현본당 묘지가 폐쇄되고,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임야 43,050평(142,314㎡)을 매입해 1969년 6월 분묘 이장을 완료했다. 이때 피 가타리나 묘도 옮겼다. 그 뒤 잊혀진 채로 지내다가 2019년 5월 16일 133위 시복절차 중 현장심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 가타리나 순교자 묘를 조사하였다.
[3.2] 언구비 : 조선말 순조 11년 무렵 세도정치로 사회가 크게 문란해지자 도둑들이 창궐하여 민가를 수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협심이 강한 아홉 명의 무명 선비가 주동이 되어 의병을 조직하여 도둑을 물리치고 민가를 보호하였는데, 이곳 마을주민들이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홉 개의 비석을 세워 그 넋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오늘날 풍요로운 반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비석은 일제말기에 없어졌다고 하며 현재 이곳에는 언구비공원(1,032㎡)이 있다. 주소는 ‘반포1동 720번지 (언구비공원 내)’이다.
[3.3] 증언자 피영록 바오로와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의 증언 내용에 대한 연구
강석진, 교회사연구 제58집, 202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개갑장터순교성지 담당·심원공소)
국문 초록
배교에서 밀고로 이어지는 악행과 이를 멸시와 조롱으로 처단하는 정죄는 모두 인성의 유약함에서 비롯된다. 본고는 유약한 배교자이자 밀고자였던 특정 인물의 회개와 그 회심을 포용하는 박해 시기 교회 공동체를 조명하면서, 조선 가톨릭교회의 신앙이 어떻게 동시대 교회의 신앙으로 발전적인 계승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을 관련 사료를 면밀히 분석하며 전개했다. 이는 선행 연구와 그 실천적 이해가, 순교와 배교의 흑백논리 속에서, 순교와 선 그리고 배교와 악을, 인위적으로 짝지으면서 초래한, 순교자 현양의 단편적 한계를, 우회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1866년 조선 정부는 보편 교회를 향하여 전대미문의 탄압을 감행했다. 본고는 이 야수적 폭력의 수많은 희생양 가운데, 피영록이라는 인물의 행적에 집중했다. 본고는 첫째, 피영록의 성장 배경과 신앙 수용 그리고 고문을 못 이기고 불가피하게 범하게 된 배교와 밀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았고, 둘째, 피영록의 회심과 회개를 수용하는 공동체의 태도와 그 의미를 고찰했다. 셋째 피영록이 증언한 ‘1866년 교구 시복 재판’ 내용을 분석하며, 넷째 회심한 밀고자의 재판 증언 역시 신앙 증언으로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했다. 1866년의 대박해 한 복판에서, 배교와 밀고라는 오욕의 대명사였던, 피영록의 회심과 그의 재판 증언은, 그 자체가 신앙 고백은 아니었으나, 그가 속해있던 교회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신앙 결행과 그 과정을 꼼꼼히 증언함으로써, 회개의 신학적 가치를 재현하는 행위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멍석말이’를 하는 피영록을 바라보면서, ‘시편’을 합송하는 당대 교회 공동체의 장면이야말로 우리 시대 교회 구성원들이 죄로 물든 세계 속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웅변하고 있다.
교회는 용서가 그 업이다. 교회사 연구 역시 용서의 기록을 발굴하고 판독하는 과업이다. 피영록을 용서했던 순교 시대 공동체는 우리 시대 교회와 교회사학의 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그 시대의 ‘시편’과 우리 시대의 ‘시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 서론
1784년, 조선 사회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이후,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 ‘사교(邪敎)’라고 규정을 내렸고 100여 년 동안 박해를 가했다. 그 박해로 인해 당시 천주교인들 중에는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들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시복 작업으로 이어졌고, 조선 교회의 선교 책임을 맡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이를 구체적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특히, 1866년 병인 순교자에 대한 관심과 시복 작업은 1866년 박해로 중국으로 피신해 있던 선교사들이 1876년에 재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1882년부터 ‘1839년·1846년 순교자’에 대한 시복 수속을 진행함과 동시에 1866년 순교자에 대한 예비 조사를 병행하였다.1)
그 후, 1890년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뮈텔(G.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1866년 순교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1895년에는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를 중심으로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877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자료를 지역별로 정리하여 『치명일기(致命日記)』2)를 간행하였다. 『치명일기』의 간행 목적은 1866년 박해와 관련하여 누락된 부분이나 보완되어야 할 증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수집하기 위함이었다.3) 그래서 교회는 이 책을 발행한 후에 전국의 본당과 공소에 배포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친 다음, 교회는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 중에서 시복 후보자에 대한 예비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29명을 선정하였고, 1899년에는 시복을 위한 교구 재판을 개정하였다.
논고는 1899년에 개정된 ‘1866년 병인 순교자 교구 시복 재판’에 참석한 증언자들 중에서 1866년 박해 때에 배교한 후 밀고자가 되었지만, 회심한 이후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인물인 피영록(皮永祿, 바오로)을 다루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 과제는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생애와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는 데 주력해 왔고, 동시에 순교지 발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이로 인해 박해 시기 신자들의 신앙 기준은 참된 신앙인으로서 ‘순교자’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배교자’ 혹은 ‘밀고자’를 언급함으로써, 흑백논리에 빠져 있었다.
이에 논고는 박해 시기 신앙인들에 대한 순교/배교의 양단법이 아닌, 통합적인 관점을 모색하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그 대상으로 ‘개인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밀고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성실히 살았지만, 신앙 때문에 체포된 인물로 밀고자가 된 피영록을 선정하였다. 논고는 첫째, 피영록(바오로)의 성장과 교회 활동, 배교와 밀고를 추적한 후, 둘째, 피영록(바오로)의 회심과 이를 수용하는 당시 교회의 모습과 신자들의 태도를 살필 것이다. 이어서 셋째,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한 후, 넷째, 피영록(바오로)의 증언 내용을 확인해 볼 것이다.
이와 같은 탐색은 옥살이 중에 박해 당국자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고, 그로 인해 인간적인 갈등을 겪은 후 배교와 밀고의 과정을 거쳤던 신앙 선조들의 현실을 드러낼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박해의 참상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게 되어 향후 시복 재판의 증언에 대한 교회사 연구자들의 학제적 관심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2. 피영록(바오로)의 성장과 교회 활동, 배교와 밀고
1844년(혹은 1843년)4)에 서울의 ‘남문(남대문) 안’5) 사동6)에서 태어난 피영록(皮永祿, 바오로)은 일찍이 부모와 형제를 여의었고, 동생 피기록(皮基祿, 용안?)과 함께 자암(紫巖)7)에 사는 고모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1795~1866)와 고모 피 가타리나(1818~1878)에 의해 양육되었다.8) 피영록의 증언에 의하면 정의배·피 가타리나 집에서 12년을 함께 살았다.9) 피영록은 3살 때 정의배에게 대세(代洗)를 받았고, 세례명은 ‘바오로’라고 하였다. 그 후 피영록이 19살 되던 해에 고모부에게 천주교 신앙을 구체적으로 배웠고,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에게 고해성사도 보았다.10) 한편 피영록은 1864년에 서울 한동(翰洞) 태생의 정아지(鄭阿只, 마리아)와 결혼했다.11)
피영록은 정의배·피 가타리나와 함께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와 3년 동안 같이 지냈고, 드 브르트니에르(J. de Bretenières, 白, 1838~1866) 신부와도 같이 살았다.12) 특히 피영록은 조선에 선교 사명을 갖고 입국한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지내는 동안 복사 역할도 했고, 신부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13) 피영록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1845~1866)과 2년 동안 교류하였고,14) 최형(崔炯, 베드로, 1814~1866)과 친분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15)
1866년 천주교에 대한 조선 정부의 가혹한 박해가 일어났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 숨어 지냈다. 이때 피영록은 가족을 데리고 과천 땅으로 도망쳤다.16) 그런 상황에서도 피영록은 박해 때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다른 치명자들의 시신 이장(移葬)17)에 함께 했다.18) 특히 피영록은 피 가타리나와 함께 새남터 형장에서 고모부 정의배의 시신을 찾은 다음 이장하였고, 이러한 상황을 시복 재판에서 자세하게 진술했다.19)
피영록은 1868(1867?)년 4월(윤4월?)20)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했고, 옥살이 중에 형벌을 받아 배교하였다. 그는 『左捕盜廳謄錄』의 기록에 의하면, 배교뿐 아니라, 심지어 동료 교우들을 고발하거나, 수색에 가담하여 체포에 협력하는 밀고자 역할을 자청하였다.
a-1. “이미 배교(背敎)했기 때문에 전에 서로 어울렸던 교우(敎友)를 낱낱이 죽 기록해 바치겠습니다.”21)
그런데 ‘1866년 순교자’에 대한 교구 시복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左捕盜廳謄錄』의 내용과는 달리 피영록 자신이 밀고자가 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a-2. “배교하였사오며, 배교를 한 후에도 (감옥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석달 동안 갇힌 후에 포교와 함께 다니며, 아는 천주 교우를 지목하면 (그들이) 체포하기로 약속을 한 후에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구실을 삼 년 동안 하였습니다.”22)
앞서 언급한 a-1과 a-2의 두 자료를 비교해 보면 a-1의 『左捕盜廳謄錄』에서는 피영록이 자발적으로 밀고를 약속했고, a-2의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기록에는 피영록이 살아남기 위해서 타의적으로 밀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또한 a-2의 내용에는 감옥에서 나온 후 피영록은 3년 동안 포졸들과 함께 다니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밀고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23) 타의든 자의든 간에 밀고자가 된 피영록은 1866년 박해 때 평신도이자 ‘천주학의 우두머리’였던 고모부 정의배의 조카였기 때문에, 평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박해자 측에서는 피영록을 통해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피영록은 당시 천주교 신자 공동체 안에서 악명 높은 밀고자가 되었고, 그에 대한 신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밀고자 피영록 바오로’라는 이름을 줄인 말로 ‘피록이’라 지칭하면서 그를 경계하였다.24)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블랑(J. 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의 「1883-1884년 보고서」에는 피영록의 회심 부분이 있다. 그 보고서에서 블랑 주교는 피영록에 대해 언급하기를 ‘불쌍한 배교자 피 바오로 록이’25)라고 하였다. 이 명칭을 통해 1866년 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밀고자 피영록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블랑 주교도 피영록을 호칭하기를 ‘피록이’라고 언급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어서 피영록의 밀고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의 명단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치명사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1868(1867)년에 체포된 피영록은 3년 동안 밀고자 역할을 했다는 진술에 따라, 이 기간을 중심으로 피영록에 의해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피영록을 지칭하는 이름인 ‘피록이의 밀고’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이효신(요한)이 있다.26) 그는 정의배 회장 집에서 몇 년간 머물다가 박해로 인해 유리걸식한 인물이고, 기록에 의하면 수년을 함께 지냈던 피영록에 의해 체포된 후 치명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노치명과 그의 아내는 1869년 1월에 남문 밖 ‘좌연 바위’27)에서 ‘피록이’에게 잡혀 치명했고,28) 김순장과 그의 아들은 1869년 8월 추석에 남문 밖에서 ‘피록이’에게 잡혀 치명하였다.29) 또한 김순장의 사위 이은구와 이은구의 형, 이은구의 모친은 1869년 봄에 ‘피록이’에게 잡혀 치명하였다.30) 또한 배론에서 신학 공부를 했던 유 안드레아는 1868년 8월에 모친을 찾아 서울에 왔다가 염천교에서 ‘피록이’를 만나 체포된 후 치명하였다.31)
1878년에 조선에 입국한 후, 1879년 1월에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된 리델(F.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네 번째 여성 신자는 내가 이 감옥에 들어오기 이틀 전에 역병으로 옥사하였다. 영세명이 ‘가타리나’였던 그녀는, 서울의 전교 회장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마르코(Marc)라는 노인의 처였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키운 조카이자 배신자 피 바오로의 밀고로 우리와 같은 시기에 체포되었다.”32)
여기서 리델 주교는 피영록의 고모인 피 피 가타리나가 1878년에 조카 피영록의 밀고 때문에 체포되어 옥사했다고 언급하였다. 이 부분은 피영록이 교구 시복 재판에서 3년 동안만 밀고자 역할을 했다는 진술과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리델 주교가 언급한 인물로 ‘피 가타리나’를 밀고한 ‘피록이’는 당시 ‘밀고자’를 지칭하는 고유명사 격인 ‘피록이’를 일컫는 또 다른 밀고자라고 상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리델 주교의 언급 중에, ‘자기 손으로 키운 조카’라는 내용을 감안해 보면, 피영록이 밀고자의 역할을 했던 기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 확인이 필요할 수 있다.
이상으로 논고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피영록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었지만, 동생과 함께 고모부 정의배와 고모 피 가타리나에 의해 양육되었다. 특히 피영록은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장한 후 신자와 결혼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피영록은 당시 신자들로부터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던 정의배·피 가타리나의 집에 살면서 여러 성직자들과 함께 지냈고, 동료 신자들과 교류했으며, 특히 갓 입국한 선교사의 조선어 선생 역할도 한 사실을 주목할 수 있었다. 셋째, 1866년 박해가 발생했고, 피영록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다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순교한 고모부 정의배의 시신을 찾아 이장에 참여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넷째, 1868(1867)년에 체포된 피영록은 옥살이를 하는 동안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배교와 함께 동료 신자들을 색출하는 밀고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많은 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앞세워졌고, 그래서 그의 이름은 박해 시기에 밀고자의 상징적 글자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피영록(바오로)의 회심
3년 동안 밀고자 노릇을 했던 피영록은 종교 자유의 분위기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이건하’로 개명한 후,33) 몇 년 동안 천주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생활하였다.34) 그 후 피영록은 1883~1884년 즈음에 회심한 후,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돌아왔다.35)
박해 시기 배교한 신자들의 회심 규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857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조선교구 제1차 시노드’를 개최한 베르뇌 주교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이 교령은 한글로 작성된 것으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 하여 신자들을 수취인으로 삼았다. 그 후 시노드에서 제정된 규범들에 대해 반드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1858년 4월에는 라틴어로 된 사목 서한을 반포하였다.36) 이 사목 서한의 규범에는 ‘배교자에 대한 교회의 규정’이 다음처럼 언급되어 있다.
“관장(官長) 앞에서 배교를 한 경우, 추문에 대해 속죄한 후 이렇듯 큰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한다면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위험이 없다면 모든 이가 배교의 과오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려고, 4년 혹은 5년 동안 그들은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더 깊이 아파하거나 보다 작은 과오로 오점을 남긴 이들의 경우, 조금 관대하게 대함이 마땅하나 5년이나 8년 혹은 10년간의 보속을 부과하고, 매일 로사리오 기도의 세 신비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도록 힘껏 권고해야 합니다.”37)
서한을 통해 베르뇌 주교는 배교한 이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절차를 제정하면서, 보속 부분에 있어서 규정을 강화하였다. 즉, 배교자가 배교를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보속 규정으로는 4년, 혹은 5년 동안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5년 이상 10년 간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자주 금식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교회가 그들을 다시 받아주고 성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이 규정은 1884년 9월 초순에 개최된 조선교구 제3차 시노드 때까지 적용되었다. 이 시노드는 제8대 조선교구장인 블랑 주교가 박해 이후 조선 사회가 겪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종교 정책의 변화 속에서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자 개최한 시노드였다. 여기서 블랑 주교는 ‘배교자 문제’를 다루었고, 그 결정 사항을 『조선교회 관례집』의 제1장 ‘성사’ 부분 중 4항 ‘고해성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제시했다.
“배교자들은 자기 마을 신자들 앞에서 한 번 자신의 배교를 철회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사를 허용하기 전에 잘못의 경중에 따라 열 번 혹은 다섯 번 금식을 하고, 신덕송 · 망덕송 · 애덕송과 함께 묵주기도를 두 달간 바치도록 한다. 물론, 배교자가 죽을 위험에 있다면, 그는 선교사 앞에서 자신의 배교를 버리고 죄 사함을 받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살아난다면 그는 신자들 앞에서 공적으로 배교를 철회해야 한다.”38)
배교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규정에서 먼저 배교자는 신자들이 있는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배교를 공식적으로 철회한 후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보속을 하였다. 보속의 내용으로는 배교의 경중에 따라 10회나 혹은 5회의 금식을 하고, 신·망·애덕송을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두 달 동안 바치는 것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배교자의 회심 규정에 엄격한 보속 규정을 적용한 것과는 달리 블랑 주교는 배교자가 회심 후 우선적으로 할 일은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배교를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행위였다. 회심자의 보속 규정 역시 블랑 주교는 베르뇌 주교보다 훨씬 완화시켰다. 이는 1866년 박해로 인해 배교자들이 많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블랑 주교는 교회 재건이라는 사목 방침 안에서 배교자들이 회심 이후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속에 대해 관대한 규정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피영록은 블랑 주교로부터 배교한 죄의 대가로 1년 동안 보속을 하였고, 고해성사를 본 후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39) 이러한 사실은 블랑 주교의 「1883-1884년 보고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저는 확실하게 큰 기쁨을 총장님께 선사할 소식을 잊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주님께서 맡겨주신 신자들 사이에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불쌍한 배교자 피 바오로(록이)를 성교회와 공개적으로 화해시킨 행복을 저는 누렸사옵니다. 아무도 그가 회심하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먼저 그에게 15회의 금식과 묵주기도를 매일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저는 되도록 엄숙하게 합당한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거적을 문 밖에 깔아 놓고 매질을 하면서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시편 50편을 암송하면서 그 일을 거행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고해성사를 베풀며 그의 복권에 필요한 10년간의 고행을 명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더러워진 모든 중죄들에 관하여 합당하게 통회할 수 있는 마음을 그에게 허락하소서. 저는 그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실 것을 감히 총장님께 청하옵니다. 또 다른 불쌍한 자, 최 우더리는 분노와 완고함으로 회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부모에게는 이미 고해성사를 주었고 다음으로 그의 아내에게 고해성사를 주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40)
위의 서한은 블랑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낸 「1883-1884년 연말 보고서」의 ‘추신’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 피영록의 회심 과정과 당시 장면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한에서 블랑 주교는 피영록을 “주님께서 맡겨주신 신자들 사이에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후, 그의 회심이 큰 기쁨이 된다고 하였다. 이 첫 문장은 1866년 박해 때에 피영록의 존재는 동료 신자들에게 큰 고통을 준 밀고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피영록은 규정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회심을 증명하는 화해의 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당시 신자들은 배교한 후 밀고자가 되었던 피영록의 회심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랑 주교는 피영록에게 15회의 금식과 묵주기도를 매일 바치라고 명령한 후에 신자들에게는 피영록의 회심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멍석말이’41)를 부과했다. 그리고 블랑 주교는 신자들이 피영록의 ‘멍석말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시편 50편을 암송한 사실도 기록해 놓았다. 그런 다음 블랑 주교는 피영록이 고해성사 받는 것을 허용했으며, 그 후 10여 년 동안 통회의 삶을 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블랑 주교는 서한을 통해 피영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고, 뒤이어 또 다른 밀고자 최우돌에 대해 언급한 후 그가 회개를 거부한 사실도 보고하였다. 그러나 최우돌의 가족들에게는 고해성사를 베풀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였다. ‘멍석말이’를 한 이후 천주교 신자로서 다시금 신앙생활을 했던 피영록은 본처였던 정아지(마리아)와 사별한 후 1896년에는 박 마리아와 재혼하였다. 1899년에 개정된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할 무렵 피영록은 외국 사람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생활형편은 어렵게 지냈다.42)
이상으로 논고는 ‘피영록(바오로)의 회심과 당시 교회가 회심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고, 그 결과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3년 동안 밀고자 역할을 했던 피영록은 박해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무렵, 이름을 개명한 후 신앙을 멀리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박해 시기 배교자의 회심 규정에 대해서는 베르뇌 주교와 블랑 주교 때의 시노드 규정을 비교해 보았다. 베르뇌 주교는 회심자에게 엄격한 보속 규정을 적용했지만, 블랑 주교는 배교자가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배교를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보속 규정은 완화시켰다. 이는 1866년 박해로 인해 배교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블랑 주교는 교회 재건이라는 사목 방침 안에서 배교자들이 회심 이후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려는 의도임이 유추된다. 셋째, 1883년을 전후로 하여 교회로 다시 돌아온 피영록은 신앙 공동체 앞에서 공식적인 배교 철회 고백을 했으나, 교우들은 그가 밀고자였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블랑 주교는 피영록에게 ‘멍석말이’를 시켰고, 피영록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회심을 객관화하려고 했다. 그 후 피영록은 교회가 요구하는 보속도 충실하게 지키면서 신앙 회복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결심을 보여주었고, 결국 교회는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음이 확인되었다.
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검토
1866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준비는 1876년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재입국한 후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890년, 뮈텔 주교가 교구장에 취임하면서 예비 조사가 본격화되었고, 1899년에는 공식적으로 ‘1866년 순교자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뮈텔 주교는 위임 판사로 르 장드르 신부를, 시복 조사 청원자로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68~1939) 신부를, 서기로는 홍병철(洪秉喆, 루카, 1874~1913) 부제를 임명한 후 1899년 6월 19일,43) 「1866년과 1867년에 순교한 하느님의 종 29위의 재판(Judice in causa viginti novem servorum Dei qui dincuntur martyrium subiisse annis 1866 et 1867)」을 시작하였다.
이 교구 시복 재판은 1900년 11월 30일까지 총 135회 개정되었고,44) 100명의 증인들이 출석하였다.45) 재판이 끝난 후 교회는 모두 9권 분량의 재판 자료를 정리하여 1901년에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하였다.46) 이 재판에 증언자로 출석한 이들은 순교자의 신앙 증거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동료 신자들,47) 순교자의 직계 가족들,48) 순교자와 인척 혹은 사돈,49) 순교자의 견진 대자,50)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주변 신자들로부터 구전으로 전해 들은 성직자51)와 수도자,52) 천주교 신앙과 상관없는 비신자53)도 있었으며, ‘밀고자’54)도 있었다.55)
교구 시복 재판의 진행 과정과 절차는 다른 증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피영록의 재판 문서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피영록의 재판 문서를 통해 시복 재판 시작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증인 이 바오로가 들어와 당신이 진실한 말을 하기로 맹세하고 또한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로 맹세함을 분부하시므로 무릎을 꿇고 성경에 손을 대어 맹세하였다.”56)
위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복 재판의 중요성으로 인해 증언자는 ‘진실된 내용만을 말할 것’, ‘재판과 관련한 비밀 사항에 대해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또한 시복 재판은 증언자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표현하는 행위로 무릎을 꿇었고, 성경에 손을 얹어 맹세하였다. 엄격하고 신성한 절차를 통해서 시복 재판에 출석한 증언자의 증언은 높은 신빙성을 갖고 있으며, 사실 진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시복 재판은 증언자의 진술 내용에 대한 또 다른 신빙성 확보를 위해, 다음의 내용을 맹세하는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 이 바오로
내 앞에 있는 거룩하신 천주 성경에 손을 대어, 물어보시는 말씀과 찰고할 조목대로 진실한 말로 대답하기를 맹세하옵고, 또한 누설하지 아니할 것이며, 물어보시는 말씀과 제가 대답하는 말을 누구에게든지 드러내지 아니하기로 약속을 하오니, 그렇지 않으면 맹세를 배반한 죄와 파문벌에 걸릴 것을 알고, 그 파문벌은 고해를 하여 용서받는 죄들 중에서 으뜸이라도 임종 때밖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홀로 교황이 용서해 주실 줄로 알고, 이렇게 약속을 하고 맹세하오니, 하느님과 믿어 거룩하신 성경이 나를 이렇듯이 도와주소서, 아멘. 이 바오로 건하”57)
피영록의 선서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증언자는 성경에 손을 얹은 다음, 재판 중에 받은 질문에 대해서 진실한 내용만을 대답하고, 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증언자가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그 자체로 교회에서 파문이 되고, 파문의 해소는 임종 직전이나 혹은 교황만이 면제해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선서문의 낭독 과정은 재판에 참석한 증언자가 확고하고 분명한 사실만을 솔직하게 진술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피영록은 제4회기(1899년 7월 3일 오후 3시),58) 제5회기(1899년 7월 5일 오후 5시),59) 제6회기(1899년 7월 8일 오후 5시 반),60) 제7회기(1899년 7월 10일 오후 6시),61) 제8회기(1899년 7월 12일 오후 6시)62)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출석하였다. 당시 재판 장소는 증언자의 지역에 따라 달라졌는데, 피영록은 그가 서울 근교에 살고 있었기에 ‘경기 지방 서울 주교좌 성당 지하 묘지(In provincia Kyeng Kui : districtu in urbe Seoul : in cripta ecclesiae cathedralis)’63) 즉 ‘명동 성당 지하 묘지’였다. 피영록은 4회 차에 베르뇌, 다블뤼, 드 브르트니에르, 도리(P. Dorie, 金, 1839~1866), 볼리외(B. Beaulieu, 徐沒禮, 1840~1866), 프티니콜라(A. 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오메트르(P. Aumaître, 吳, 1837~1866), 위앵(M.L. Huin, 閔, 1836~1866), 우세영, 정의배, 남종삼(南鍾三, 요한, 1817~1866), 최형, 전장운(全長雲, 요한, 1810~1866)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5회 차에 드 브르트니에르, 6회와 7회 차에는 정의배, 8회 차에는 다블뤼, 베르뇌, 드 브르트니에르 선교사와 정의배에 대해 증언하였다.
피영록의 증언 내용은 ‘1866년 순교자 시복 재판’ 외에도 『병인치명사적』에도 들어 있다. 『병인치명사적』에서 피영록이 증언한 인물은 1866년 9월 13일에 참수된 이붕익(바오로)과 김여분(마리아),64) 1866년 9월 14일에 참수된 박내호(사도 요한),65) 1866년에 아사로 순교한 이덕부(마태오)66)가 있다. 네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시 베르뇌 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피영록 역시 베르뇌 주교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정의배를 통해, 네 명의 행적도 알 수 있었다.67) 피영록은 1878년 2월 4일 옥중에서 병사한 고모 ‘피 가타리나’에 대해서도 자세히 증언하였다.68)
피영록의 진술은 사실과 진실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피영록은 시복 재판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 내용이나 치명한 사실에 대해 “실제로 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69)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인 정의배와는 12년 동안 가족으로 살았고,70) 다른 증언 대상자와는 몇 년을 같이 생활했으며,71) 그 외의 증언 대상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친분 관계가 있었다.72) 또한 피영록은 시복 재판에서 증언 대상자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지내는 동안에는 그의 ‘복사’를 했고, 조선어 선생 역할을 하였다.73) 그래서 피영록이 진술한 드 브르트니에르에 대한 인간적 면에 관한 증언74)은 신빙성이 높다. 이를 통해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피영록에게 했던 대화 내용은 박해 때 순교를 앞둔 선교사들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진술인 것이다.75)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의 시신 이장에 직접 참여했고,76) 이장 당시의 시신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77) 이장에 참여한 신자들이 증언 대상자들의 유품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78) 특히 그는 증언 대상자인 고모부 정의배의 이장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다.79) 이러한 피영록의 구체적인 진술은 그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이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상으로 논고는 1866년 순교자에 대한 교구 시복 재판의 준비와 1899년에 개정된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의 절차와 진행 과정, 그리고 증언자로 참석한 피영록과 관련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에 대한 교구 시복 재판은 1899년 6월 19일에 개정되었고, 1900년 11월 30일까지 135회, 100명의 증인들이 출석하였다. 이 재판에 참석한 증언자는 순교자들의 신앙 내용을 알고 있던 사람으로 가족, 친척, 성직자, 수도자, 동료 신자들뿐 아니라 밀고자도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둘째, 시복 재판의 절차와 진행 과정을 피영록의 시복 재판 문서에서 살펴보았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증언자는 시복 재판에서 성경 위에 손을 얹어 맹세했고, 비밀을 유지할 것을 선서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시복 재판에 진술한 내용에 신뢰도를 높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피영록이 참석한 시복 재판은 제4회기부터 제8회기까지 5차례였고, 당시 그는 서울에 살고 있었기에 시복 재판 장소는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 묘지였다. 또한 피영록은 13명의 순교자들에 대해 진술했고, 그 밖에 『병인치명사적』에는 고모 피 가타리나와 4명의 순교자들의 신앙과 일상의 모습을 증언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이 진술한 증언 대상자는 피영록과 특별하게 친분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피영록은 증언에서 ‘실제로 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언급하였다. 또한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의 시신 이장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시신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신자들이 증언 대상자들의 유품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를 통해 피영록의 증언 내용은 사실과 진실에 토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증언자 피영록(바오로)
시복 재판에 참석한 피영록의 증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증언 대상자는 고모부이자, 서울 지역 회장인 정의배였다. 피영록은 시복 재판에서 정의배의 출신지, 나이, 성품80)과 직업 등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다.81) 그뿐 아니라 피영록은 정의배가 천주교 입교 이전에 천주교를 배척했고,82) 천주교 입교 이후 달라진 그의 모습83)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피영록은 정의배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했고, 두 번째 부인으로 자신의 고모인 피 가타리나와 결혼했으며,84) 피 가타리나와 함께 살 때에 ‘정덕 서약을 했다’는 내용도 증언하였다.85) 또한 피영록은 정의배가 신자로서 교회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했으며,86) 타인에게는 겸손과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실도 진술하였다.87) 그리고 피영록은 정의배가 집안에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었고,88)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 깊어지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실을 증언하였다.89) 또한 피영록은 베르뇌 주교와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정의배에 대해 말했던 평판도 언급하였다.90)
이어서 피영록은 정의배가 50세 때91) 페레올(J. Ferréol, 高. 1808~1853) 주교로부터 서울 지역 회장에 선출되었고,92) 1866년에 순교할 때까지 교회가 규정한 회장의 역할93)을 충실히 수행한 사실도 증언하였다.94) 또한 피영록은 정의배가 동료 회장들에게도 ‘회장’ 소임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 사실95)과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에도96) 끝까지 회장 직무를 이어갔던 사실도 진술하였다.97) 피영록의 증언에서 주목할 사항은 당시 서울뿐 아니라 경기의 각 지역과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자, 정의배는 늙은 나이였지만, 그 지역을 찾아가서 신앙을 전파하고, 회장 소임을 충실히 했다는 것이다.98)
또한 피영록은 정의배가 조선에서 활동하던 주교와 선교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내용도 언급하였다.99) 피영록은 메스트르(J.A. Maistre, 李, 1808~1857) 신부 때에 조선에서 영해회(嬰孩會)가 시작되었고,100) 영해회의 조선인 책임자로 정의배가 선출되자, 정의배는 영해회의 정신에 따라 당시 사회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성심껏 돌보았다는 사실도 진술하였다.101) 피영록은 정의배가 프랑스에서 들어온 신심 단체인 ‘전교회’의 활동까지 병행하며 수행한 사실을 증언하였다.102)
이어서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인 정의배가 평소 가지고 있는 ‘순교에 대한 인식’도 언급하였다.103) 피영록은 1866년 박해가 일어난 후 정의배가 체포되어104) 문초받은 사실을 증언하면서,105) 정의배의 위치가 교회 내에서 회장이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에 박해 당국자는 심한 형벌을 줄 계획을 세웠지만, 나이가 많았기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던 사실도 진술하였다.106) 그리고 피영록은 정의배의 문초 기록을 증언하면서, 자신이 문초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유가 문초에 가담했던 포교에게 분명하게 전해 들었음을 덧붙였다.107) 그 후 피영록은 정의배가 주교와 선교사들,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사실과 그 날이 정의배의 생일이었던 것도 증언하였다.108) 그리고 피영록은 증언 중에 『정의배 일기』라는 책이 있음을 언급하면서,109) 그 책의 작성자가 자신임을 밝혔다.
이상으로 ‘1866년 순교자 정의배’에 관한 피영록의 시복 재판 증언을 통해서 다음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피영록은 시복 재판에서 고모부이자, 1866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회장 정의배에 대해 많은 내용을 진술하였다. 그가 정의배에 대해 많은 내용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의배·피 가타리나 부부와 12년을 함께 생활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특히, 정의배가 피 가타리나와 재혼한 후 서로가 ‘정덕 서약’을 지킨 개인적인 사실도 진술할 수 있었다. 둘째, 피영록은 고모부 정의배가 입교 이전과 입교 이후의 삶의 변화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특히, 피영록의 증언에서 정의배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일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한 내용과 정의배에 관한 당시 성직자들의 긍정적인 평판은 정의배의 시복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할 수 있었다. 셋째, 피영록은 증언에서 정의배가 보여준 회장 소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박해 당시 동료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었던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정의배가 선교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며, 선교사들의 사목 방침에 따라 영해회나 전교회 등을 맡아 관리하면서 교회 활동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실도 살펴볼 수 있었다. 넷째, 피영록은 증언에서 정의배가 평소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며 살았다는 사실도 진술하였다. 피영록에 의해 드러난 정의배의 순교 열망은 그가 박해로 인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도중에도 결코 신앙을 잃지 않았고 기꺼이 순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영록은 베르뇌 주교와 관련된 많은 증언을 남겼다. 피영록은 베르뇌 주교가 “헌신적인 마음으로 사목에 임했다는 것과 체포 당시에 포교들이 주교 댁 담을 넘어서 주교를 체포”한 사실을 증언하였다. 특히, 피영록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즉, 포교들이 주교 댁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이를 주교는 미리 알고 있어서 몸을 피신할 수 있었지만, 교우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피신하지 않은 사실도 진술하였다.110) 그리고 피영록은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에 대해 개인적인 친분과 경험을 갖고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은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전례 생활에 성실한 사제’였으며, 교우들에게도 인자한 사목자였지만, 철저한 성격 때문에 피영록 자신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느꼈다’는 인간적인 감정도 진술하였다.111) 또한 피영록은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체포될 당시의 상황과 체포되어 끌려갈 때의 모습도 증언하였다.112) 이어서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 우세영에 대해 진술하면서, 그의 성품과 함께 가족 내 박해 상황에 대해서 진술하였다.113) 또한 피영록은 증언 대상자 최형에 대해 진술하면서, 개인적인 친분 관계와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진술하였다.114)
이상으로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이 정의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고 지낸 인물들에 대해서 증언한 내용들을 살펴보았고, 그 결과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피영록이 증언한 인물들은 고모부인 정의배의 집에서 함께 사는 동안 알게 된 사람이었고, 그중에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피영록은 그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 관해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시복 재판에서 충실히 진술했음을 주목할 수 있었다. 둘째, 피영록은 정의배를 통해 베르뇌 주교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베르뇌 주교의 체포 상황과 목격자를 통해 들었던 문초 내용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진술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구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은 박해 시기 동안 교회 내에 있었던 몇 가지 교회사적 사건도 증언하였다. 피영록은 메스트르 신부 때에 ‘영해회’가 시작된 구체적인 사실115)과 베르뇌 주교 때에 조선에 들어온 신심 단체인 ‘전교회’와 당시 신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116) 그리고 피영록은 베르뇌 주교가 1862~1863년에 정의배 회장이 나이가 많음을 알고, 추가로 서울 지역 공소 회장 3명을 임명했던 사실도 진술하였다.117) 또한 피영록은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사실을 증언하였고,118) 다블뤼 주교가 신자들의 신심 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책들을 발간한 사실도 진술하였다.119)
이어서 피영록은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유해를 이장할 때, 순교자 시신과 관련한 유품들을 나누어 가진 사실도 증언하였다.120) 그리고 피영록은 1866년 박해에 대한 신자들의 의견과 박해 시기와 그에 따른 순교자 발생에 대한 내용도 진술하였다.121) 특히, 피영록은 ‘덕산굴총 사건(德山掘塚事件)’이라 칭하는 1868년 박해를 언급하면서, 그 박해의 특징은 ‘배교한 천주교 신자들도 처형했던 사실’을 증언하였다.122)
지금까지 교구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의 증언 내용을 토대로 당시 교회의 여러 모습들을 추론해 보았으며,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피영록은 영해회와 전교회에 대해 관련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배교 이전에는 그가 충실한 신앙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피영록의 증언을 통해 베르뇌 주교가 회장 정의배에 대해서 늘 배려의 마음과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영록의 증언에서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선교 활동 사항과 다블뤼 주교의 저술에 관한 내용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셋째, 피영록의 증언을 통해 당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신앙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순교자들이 시복될 것을 희망하면서, 순교자의 유품 등을 소장하는 등 당시 순교자 신심이 신자들 사이에서 점차 강화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6. 결론
논고(論考)는 1899년에 개정된 ‘1866년 순교자’에 대한 교구 시복 재판에 참석한 증언자들 중에서 피영록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증언 내용을 다루었다. 1844년에 태어난 피영록은 부모를 일찍 여의어, 당시 신자들로부터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던 고모부 정의배 · 고모 피 가타리나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어릴 때부터 정의배·피 가타리나에 의해 성직자와 여러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신앙인으로 성장한 피영록은 1866년 박해 때에도 순교자들의 시신 이장에 참여할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다. 그러나 체포된 피영록은 옥살이 중에 형벌을 받았고, 배교와 함께 3년 동안 밀고자 역할을 하면서 그의 이름은 박해 시기에 밀고자의 대표적 이름이 되었다.
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은 잔혹한 문초를 받았고, 인간적으로 공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옥살이를 하였다. 이는 충실한 신앙인도 배교뿐 아니라 밀고자가 될 수 있는 상황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된다. 특히, 박해 당국자는 천주교 신자의 효율적인 색출을 위해 밀고자를 양산하였다. 그래서 동료 신자였다가 밀고자가 된 이들은 당시 교우들에게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밀고자에 의해 본인이나 가족, 주변 사람들이 체포될 경우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분란을 일으켰다. 결국 박해 시기 밀고자의 존재는 살기 위해 밀고자가 된 본인뿐 아니라, 박해와 밀고자까지 피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가중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혼란과 심리적인 비참함, 그리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밀고자 피영록은 박해가 종식되고, 종교 자유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회심을 통해 교회 공동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가족과 동료를 잃은 당시 신자들은 밀고자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또한 밀고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도 인간적인 죄책감과 심적인 고통 등 주변의 부정적인 평판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박해 이후 교회가 안정화를 찾으면서 배교 · 밀고자의 회심에 대한 수용 여부에 대한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멍석말이’를 당하는 피영록의 모습과 시편을 읽으며 ‘멍석말이’를 가하고 눈물을 흘렸던 동료 신자들의 모습은 순교를 기억하거나 현양하는 또 다른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교회의 시선에서 순교와 배교는 사랑과 용서의 순환인 것이다.
1866년 박해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고, 블랑 주교는 교회 재건의 기치 하에 사목 방침 안에서 배교자들이 회심 이후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고, 피영록은 교회 공동체에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피영록은 1899년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하여 재판을 통해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던 순교자들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 당시 교회의 상황과 순교자들을 대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중요한 증언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피영록의 증언 내용이 주는 높은 신빙성 때문에 시복 대상자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던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면서 시복 재판은 그 권위를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으로 논고는 1866년 박해 때 체포된 후 박해 당국자의 협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생명에 대한 애착 등으로 인해 배교뿐 아니라, 동료 신자들을 밀고했던 인물이었던 피영록을 조망해 보았다. 회심을 통해 교회 공동체로 돌아온 피영록은 1899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이들에 대한 교구 시복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후 증언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점검하였다. 밀고자 피영록은 교회 공동체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증언자 피영록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특히, 밀고자의 모습을 통해 박해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사람의 가치를 무너지게 하는 폭력 상황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앙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게 만들었음을 주목할 수 있었다. 박해의 일방적이고 야수적인 완력을 버텨낸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배교와 밀고라는 형식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인물들의 처지 역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관점은 박해 시기를 말할 때, 신앙과 불신, 순교와 배교, 선과 악의 양분법적 판단의 오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케 하고, 교회를 둘러싼 다양한 상황을 총체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논고는 배교뿐 아니라 밀고자 역할까지 했던 특정 인물을 조명하면서, 박해 시기 교회 상황과 체포된 신자들이 옥살이를 통해 겪었던 고통을 이해하고자 접근하였다. 본고는 사료의 제한성으로 인해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제안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한계는 사료의 수집과 보완으로 극복되길 기다리는 새로운 과제일 것이다.
<참고 문헌>
1. 교회 문헌
『Compte-Rendu』 Vol. 580, 파리외방전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조선교회 관례집』, 한윤식·박신영 역, 부산교회사연구소, 2014.
2. 재판록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한국교회사연구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드브레 주교 감준, 『병인치명사적』, 한국교회사연구소.
뮈텔, 『치명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3. 관찬 사료
『捕盜廳謄錄』 上·中·下, 보경문화사, 1980.
4. 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5. 단행본
리델, 유소연 역,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살림, 2013.
강석진, 『순교, 생명을 대변하는 증거』, 도서출판 흐름, 2018.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장동하,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6.
6. 논문
나종순, 「해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 수속 자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주>__________
1) 「병인박해」,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3423쪽.
2) 뮈텔, 『치명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3) 『치명일기』는 1866년 박해 때 치명한 교우들에 대한 예비 조사에 참여했던 뮈텔, 블랑, 르 장드르 등이 수집한 증언들을 토대로 간행되었다. 序章에는 ‘1866년에 치명한 이들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기본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혀 놓았다.
4) ‘피영록’의 출생년도에 대한 관련 기록으로 『左捕盜廳謄錄』에는 ‘1868년 윤4월 15일’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고, 당시 나이는 24세로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피영록의 출생년도는 1844년이 된다. 그리고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에는 그가 ‘1867년 4월’에 체포되었고, 당시 자신의 나이는 56세라고 증언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의 출생 연도는 1843년이 된다(『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한국교회사연구소 ; 『捕盜廳謄錄』, 보경문화사, 1980).
5) 『左捕盜廳謄錄』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皮永祿段矣身本以南門內胎生”.
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에서 피영록은 자신의 출생지를 ‘서울 사동’이라고 하였다.
7) 현 서울시 중구 봉래동·순화동·의주로 일대.
8) 『左捕盜廳謄錄』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早失父母兄弟 長養於紫巖 居姑母夫鄭義培家是乎所”.
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34쪽.
10) 『左捕盜廳謄錄』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三歲代洗作號於姑母夫處至 十九歲甘聽義培之從心曳心始爲受學而因渠指揮逢見 洋人張敬一但以告解矣”.
11) 『左捕盜廳謄錄』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鄭女阿只段女矣身本以翰洞胎生 十五歲出嫁於皮永祿處則家”.
1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5쪽.
1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3쪽. 피영록이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조선어 선생이었다는 사실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언급되어 있다(Ch.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396쪽).
1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5쪽.
1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5쪽.
16) 『좌포도청등록』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捽當丙寅風波邪類俱爲走竄之際矣身甘爲率家逃避於果川地”.
1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9~20쪽.
1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7쪽 ; 『병인치명사적』 24권, 73쪽.
1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0~41쪽.
2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3쪽.
21) 『左捕盜廳謄錄』 1868년 윤4월 15일 기사. “矣旣以背敎故前以相從敎友 列錄現納”.
2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3~14쪽.
2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4쪽. “그 구실을 삼 년 동안 하였습니다.”
24) 배교 혹은 밀고자와 관련된 교회 기록에서 등장하는 ‘피록’이라는 이름이 전부 ‘피영록’을 지칭한다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치명사적』에서 ‘피록이’라고 지칭되는 이름 중에는 1878년 기록에 ‘유다스 피록이’(「정리번호 144」,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67~268쪽)라고 언급된 인물이 있다. 이는 시복 재판에서 피영록은 1868(1867)년부터 1871년까지 3년 동안 밀고자 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의 증언과 배치된다. 그리고 1868년의 기록을 보면 밀고자 이름 중에는 구체적으로 ‘허 피록’, 즉 ‘허’씨 성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정리번호 144」,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68쪽). 그러므로 당시의 자료들을 통해 ‘피록’이라는 명칭이 ‘피영록’만을 지칭하는지, 혹은 다른 밀고자들을 지칭하는 지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25) “1883-1884 rédigé par Mgr Blanc”, Compte-Rendu, Vol. 580, Corée 1875-1886, ff.1224~1235, “…Hpi Paul (nok-i) le misérable traître”.
26) 「정리번호 145」,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앞의 책, 271~272쪽.
27) 자연 바위.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 소재.
28) 「정리번호 102」,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같은 책, 171~172쪽 : 『병인치명사적』, 21권 138.
29) 「정리번호 102」,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같은 책, 171~172쪽 : 『병인치명사적』, 21권 138~139.
30) 「정리번호 102」,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같은 책, 171~172쪽 ; 『병인치명사적』, 21권 139.
31) 「정리번호 93」,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같은 책, 153쪽 : 「정리번호 120」,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11쪽.
32) 펠릭스 클레르 리델, 유소연 역,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살림, 2013, 122쪽.
3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3쪽.
3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3쪽.
3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4쪽
36) 이 서한의 본 제목은 “1858년 4월 베르뇌 주교 사목 서한 : 사천 시노드와 조선 시노드 교령을 반포하며(Lettre pastorale de Mgr Berneux, d’avril 1858, portant promulgation du synode du Sutchuen et du synode particulier de Corée)”이다. 이 서한은 시노드가 끝나고 베르뇌 주교가 1년 동안 고심한 끝에 조선교구 제1차 시노드 이듬해인 1858년 4월 라틴어로 발표하였다. 이 문헌은 서한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교구 시노드의 교령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장동하,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6, 339~340쪽 참조).
37) 「베르뇌 주교의 1858년 4월 사목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707~708쪽.
38) 한윤식·박신영 역, 『조선교회 관례집』, 부산교회사연구소, 2014, 44쪽.
3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4쪽.
40) P.S. J’ai oublié une nouvelle qui certainement causera un plaisir sensible à Sa Grandeur : j’ai eu le bonheur de réconcilier publiquement avec la Sainte Eglise Hpi Paul (nok-i) le misérable traître qui jadis a causé tant de ravages parmi le troupeau du Seigneur. Comme personne ne se fiait à sa conversion j’ai exigé au préalable 15 jeûnes et récitation quotidienne du rosaire. J’ai pour le bon exemple fait la chose aussi solennellement que possible “거젹문밧긔갈고(거적을 문밖에 깔고) 매질하고” etc. en récitation le Miserere au milieu des sanglots de toute l’assistance. Après quoi j’ai imposé la pénitence de dix ans exigé restitution etc., et reçu la confession du susdit. Daigne le Divin Maître le prendre en pitié et lui donner jusqu’à sa mort des sentiments de prop contrition proportionnelles à tous les forfaits dont il s’est souillé durant de si longues années. J’ose le recommander spécialement aux prières de Sa Grandeur. L’autre misérable 최우더리 continue à vivre dans la rage et l’impénitence, cependant j’ai déjà confessé q.q. uns de ses propres parents on parle de la confession de sa femme pour la prochaine administration. Dieu le veuille(“1883~1884 rédigé par Mgr Blanc”, Compte-Rendu, Vol. 580, Corée 1875-1886, ff. 1224~1235).
41)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그를 끌고 가 멍석을 펴서 눕힌 후 둘둘 말거나 뒤집어 놓은 다음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매를 치며 교정하는 지역 풍습.
4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3쪽.
43) “교황 레오 13세 재위 때에, 경기 지방 서울 주교좌 성당 지하 묘지에서, 밀렌의 명의 주교이자 조선 대목구장인 귀스타브 뮈텔 주교의 명을 받은 한국의 교황 파견 선교사이자 1866년과 1867년 사이에 순교한 하느님의 종 29위의 재판의 판사인 루도비코 르 장드르 신부가 서기관 소임으로 참석하였다”(『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1쪽). 이 재판은 ‘1899년 6월 19일 오전 9시’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개정하였다.
44) 1899년 교구 시복 재판은 1~12회까지는 ‘서울’, 13~16회까지는 ‘제물포’, 27~32회까지는 ‘평양’, 33~42회까지는 ‘서울’, 43~46회까지는 ‘풍수원’, 47~60회까지는 ‘원주’, 61~63회까지는 ‘장호원’, 64회는 ‘제물포’, 65~75회까지는 ‘전주’, 76~82회까지는 ‘수류’, 83~87회까지는 ‘나바위’, 88~91회까지는 ‘공주’, 92~96회까지는 ‘합덕’, 97회는 ‘공세리’, 98~135회까지 다시 ‘서울’ 등 전국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 재판이 지역별로 이동하면서 진행된 이유는 증언자를 중심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45) 1900년 11월 30일 오후 2시에 제135차 재판을 개최하여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한 1866년 교구 재판은 마무리되었다. 그 후 1901년 4월 22일 오후 2시, 제136차 시복 재판에서 뮈텔 주교와 르 장드르 위임 판사, 무세(G. Mousset, 文濟萬, 1836~1957), 홍병철, 데예(A. Deshayes, 曺有道, 1871~1910), 조아요(A. Joyau, 玉裕雅, 1877~1907), 한기근,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1860~1904),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1871~1929) 등 7명의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시복 법정의 폐정을 선언했다. 그 후 위임 판사인 르 장드르 신부는 교구 수속에 해당하는 조사 내용을 정리한 후, 1901년 3월 30일에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뮈텔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46) 나종순, 「해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 수속 자료」,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앞의 책, 24~25쪽 : 1901년에 교황청으로 발송된 ‘1866년 순교자’에 대한 시복 자료는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 교황에 의해 1918년 11월 13일 예부성성에 접수되었다. 그 후 예부성성은 1919년 7월 29일에 ‘1866년 박해 순교자 29명’의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을 서울교구에 위임하였다. 그래서 당시 서울교구 보좌인 드브레(E. Devred, 兪世俊, 1877~1926) 주교가 시복 판사가 되어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129회의 재판이 개진되었고, 85명의 증인이 심문에 동원되었다. 이 시복 대상자 중 24명이 1968년에 시복되었고, 그 후 1984년에는 ‘103명의 시복자’에 대한 시성식이 한국에서 있었다.
47) 대표적인 인물로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이사여(토마스)와 이사욱(알렉시오)은 형제로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순교자들을 증언하였다.
48)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이 루치아는 증언 대상자 조윤호의 ‘아내’로서 조윤호가 순교한 후 재혼하였다. 손순화(사도 요한)는 증언 대상자 손선지의 ‘아들’이고, 증언 대상자 이윤일의 경우 ‘아들’ 이의서(마티아)와 이의서의 아내인 박 아녜스, 이윤일의 아내의 ‘종질’인 박주현(프란치스코)이 참석하였다. 증언 대상자 이성욱은 ‘아들’ 이경집(니콜라오)이 참석했고, 증언 대상자 이명서는 ‘딸’ 이 마리아와 ‘사위’ 안영지(필립보), 또 다른 ‘사위’ 배치운(필립보)이 참석했다. 증언 대상자 정문호는 ‘손자’ 정순필(요한)이, 증언 대상자 송성보의 경우 ‘손자’ 송성숙(프란치스코)과 송성숙의 아내 이 가타리나가 참석했다. 증언 대상자 조화서는 ‘조카’ 조 가타리나, 증언 대상자 손자선의 경우 ‘조카’이며 1866년 순교자 손자익의 ‘아들’ 손여선(바오로)과 ‘당질’인 손여희(아우구스티노), 증언 대상자 정원지도 ‘조카’ 정기서(요한)가 재판에 참석하였다.
49)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이경춘(베드로)은 증언 대상자 남종삼의 인척이며, 이치문(힐라리오)은 증언 대상자 정문호와 ‘사돈’이다.
50)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문선량(필립보)은 증언 대상자 황석두의 ‘견진 대자’였다.
51)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사제는 르 메르(L. Le Merre, 李類斯, 1858~1928), 페롱(S. Féron, 權, 1827~1903), 알릭스(J. Alix, 韓若瑟, 1861~1948),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1869~1947), 데예(A. Deshayes, 曺有道, 1871~1910),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1875~1938) 신부이다.
52)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수도자는 김 마리아, 최 마리아, 이 아가타, 박 클라라 수녀이다.
53) 교구 시복 재판에 증언자로 참석한 비신자인 전주 사람 강군서는 순교자 조화서 외 6명을 증언했다.
54) 박해 시기에 밀고자였던 인물로서 교구 시복 재판에 참석한 사람은 피영록(바오로)과 최우돌(베드로)이 있다(『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앞의 책, 52쪽).
55)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같은 책, 36~52쪽 참조.
5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1쪽.
5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2쪽.
5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1쪽.
5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2쪽.
6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0쪽.
6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8쪽.
6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6쪽.
6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1쪽.
64) 『병인치명사적』 7권 39~41쪽.
65) 『병인치명사적』 7권 36~39쪽.
66) 『병인치명사적』 7권 44~45쪽.
67) 이들에 관해서는 『치명일기』 80~81쪽 기록과 『좌포도청록』 1866년 9월 13일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
68) 『병인치명사적』 5권, 31~37쪽.
6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4~25쪽.
7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34쪽.
7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5쪽.
7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6쪽.
7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3쪽.
7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3쪽.
7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4~25쪽.
7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7~28쪽.
7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9~20쪽.
7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4쪽.
7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0~41쪽.
8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1~32쪽·53~54쪽.
8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1~32쪽
8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1~32쪽. “기해(1839) 군난 후에 입교하였으며, 그 전에는 성교를 매우 공격하더니, 어떤 친구의 말을 듣고 입교하였습니다.” ; 53~54쪽. “그 형의 성교함을 대단히 조당하여, 심지어 서학 책을 불사르며 책망하였는데 ‘양반이 되어서 국금을 범하겠느냐’ 하더니,”
8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2쪽·53~54쪽.
8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1~32쪽.
8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3~54쪽. “그의 아내 피 가타리나와 함께 수계를 간절히 하며, 정덕 지키기로 서로 의논하여, 언약을 튼튼히 하고,”
8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3쪽. “드디어 열심히 수계를 할 때 과거를 전폐하고, 외인 친구를 도무지 끊으며, 성교 책의 진서나 언문을 의논치 말고 친히 베껴서 많이 장만하고 책을 보아 도리를 익히며 육신 사무를 전혀 잊고, 영혼 공부를 오롯이 하니, 자연히 도리가 밝고 덕행이 여물었습니다.” ; 57~59쪽. “날마다 길에 많이 다니면서, 어떤 사람과 무슨 소리를 분별치 못하고, 음식은 담백하여, 맛이 좋은 음식[甘旨]을 만나면 매우 적게 먹고, 의복은 검소하여, 경난(輕暖 : 가볍고 따뜻한 옷)은 도무지 입지 아니하고,” ; 59쪽. “그 평생 행위를 살피건대, 공번된 규구 외에 그다지 많은 경문을 염하며, 대소재를 지키는 유표(有表, 有標 : 특징이 있음)는 없으나, 또한 가히 나무랄 행실이 없더니,”
8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9쪽.
8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7~59쪽.
8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7~59쪽
9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1쪽. “백 신부 말씀이 ‘미사 참례를 정 회장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하시옵고, 장 주교 말씀은 ‘천당에 정 회장의 자리 하나 있다’고 하였으며, 그 말씀은 모든 교우들이 다 들었습니다.” ; 57쪽. “백 신부 말씀이 ‘미사 참례에는 정 회장 같이 하여야 되겠다’ 하시고, …장 주교 말씀이 사욕 없는 정 회장이라 천당에 한 자리 있겠다 하셨습니다.” ; 59쪽. “장 주교 말씀이 사욕 없는 정 회장이라 천당에 한 자리 있겠다 하셨습니다.”
9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4~55쪽.
9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2쪽.
9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4~55쪽.
9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2쪽.
9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7~59쪽.
9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2쪽.
9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6~57쪽.
9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6쪽.
9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7~59쪽.
10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쪽.
10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쪽·55~56쪽.
10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6쪽.
10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6쪽.
10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4~36쪽.
10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4~36쪽.
10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4~36쪽.
10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4~36쪽.
10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9~60쪽.
10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7쪽.
11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6~17쪽.
11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3쪽.
11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23~24쪽.
113)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5쪽.
114)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16쪽.
115)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쪽.
116)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3쪽.
117)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32쪽.
118)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56쪽.
119)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8쪽.
120)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4쪽.
121)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1~42쪽.
122) 『병인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 : 1899~1900년도』 이건하,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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