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신라시대까지는 동물적 감각에 의하여 음양택을 선정하였고 이론을 배경으로 한 토지 선정은 없었다. 신라말 唐나라로부터 학술적 풍수설이 도입되어 널리 전파되었고 도선국사가 도입의 길목에 있었으나 중국학설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 풍수관을 전개하였으며 무학대사가 이를 승계한 풍수가 한국의 자생풍수이다.”
최창조가 언급한 위의 내용으로 인하여 중국 풍수의 우리나라 유입이 도선국사(827-898)를 기점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특히 그 근거를 명시하는 논문과 같은 공적인 글에서도 인용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풍수학자들마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인 역시 그렇게 받아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불교 성지를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필자는 현장 경험적 견해를 집약하여 위의 도선국사 중심의 견해와 다른 주장으로 잠시 여러분을 설득해가고자 한다.
소위 자장율사의 ‘5대 적멸보궁’이 그 좋은 예이다. 자장율사가 입지를 선정한 오대・사자・함백・설악산의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 안장지는 용맥 상에 자리하여 음택(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는 양기(陽基: 양택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풍수의 혈이 양택에서 시작되어 내세 사상으로 음택까지 적용되듯이 적멸보궁도 양택터인 통토사를 기점으로 음택터에 해당하는 설악산-오대산-사자산-함백산에 분산되어 안장하게 된다.
5대 적멸보궁은 어떻게 풍수 음・양택의 전형을 보여 줄 수 있었을까? 자장율사는 당 태종(627-649 즉위) 때 당나라를 유학(638-643)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이순풍(602-670), 원천강(573—645) 등에 의해 천문-관상-풍수가 성행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어떻게 얼마나 풍수를 접했는지는 관련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5대 적멸보궁의 입지를 통해 보면 자장율사가 그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수를 상당히 심도 있게 공부하여 적멸보궁의 입지를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사찰에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현존한다(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무량수전: 국보 18호). 두 사찰의 창건은 의상대사(625-702)와 무관하지 않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가 봉정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스님이 의상대사가 생존할 때(672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는 화엄십찰(華嚴十刹)인 부석사, 미리사(美里寺), 화엄사(華嚴寺), 해인사(海印寺), 보원사(普願寺), 갑사(甲寺), 화산사(華山寺), 범어사(梵魚寺), 옥천사(玉泉寺), 국신사(國神寺)를 비롯하여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대흥사(大興寺), 불영사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모든 사찰이 모두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믿을 수는 없지만 의상대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자장율사보다는 약 20여 년 후에 약 10년(661-670)간 당나라에 머물렀다. 개인적으로 의상대사와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사찰 중에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옥천사, 대흥사, 불영사, 국신사(귀신사)를 답사해보았다. 그 결과, 현존하는 대부분 사찰의 주법당이 혈처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밖에도 수많은 대당 유학 스님이 있어 그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수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사찰을 중심으로 입지 선정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신라 시대의 능(陵)도 평지에서 산중 용맥 상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한 중국 풍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능이 바로 김유신(595-673) 묘이다. 시기적으로도 의상대사가 생존하던 때이다. 결론적으로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등 대당 유학 스님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수를 익혀 우리나라 사찰과 암자, 그리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자리를 선정할 때 적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도선을 기점(9세기 후반)으로 하는 중국 풍수의 우리나라 유입설에 재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참고로 도선국사는 고려 건국과 함께 국사로서 수많은 소위 비보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많은 사찰의 대부분은 사라지고 여기저기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혹은 그 제자들이 세운 사찰은 더 오랜 역사 속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최창조는 학자로서 서지적 연구에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현장 풍수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혈의 존재까지 긍정하지 못하는 연유는 서지적 연구를 통해 쌓은 지식을 중심으로 하면서 실전적 현장 경험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지리학자로서 풍수를 학문적 체계를 갖추도록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 풍수의 한국 유입은 자장율사와 의상대사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에 심증을 갖고 연구를 계획한 적이 있다. 아직은 나태로 인연이 닿지 않아 차일피일하고 있지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체계적 연구를 해갈 것이다.
**음・양택의 풍수적 입지에 관해서는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의문이 있는 분은 연락을 주면 개별적으로 설명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는 6개 사찰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치원(崔致遠, 857-900)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주(註)에는 10찰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6개 사찰은 ① 태백산의 부석사(浮石寺), ②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 ③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④ 비슬산의 옥천사(玉泉寺), ⑤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 ⑥ 남악(南岳)의 화엄사(華嚴寺) 등이다. 반면에 「법장화상전」에 실린 10개 사찰은 ① 중악공산(中岳公山)의 미리사(美理寺), ②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③ 북악 부석사, ④ 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 및 보광사(普光寺), ⑤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⑥ 계룡산 갑사(岬寺), ⑦ 낭주(良州) 금정산 범어사, ⑧ 비슬산 옥천사, ⑨ 전주 무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⑩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청담사(靑潭寺) 등이다.
****의상대사는 풍수를 깊이 공부하여 터득한 분으로 여겨진다. 그 증거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 대부분이 혈과 직접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련 사찰에 대한 풍수 글은 네이버 블로그 ‘소불생사문화연구소’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풍수명사 한분의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신문연재 요청이 있어서 처음으로 답산을 가게 되었다.'
책풍수 안방풍수, 수천번의 간산, 실전을 통해서도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기
힘들텐데 신문 연재라,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오시는것이 적격 아닌가요?
그냥 웃자고 한 말입니다..풍수를 그리 쉽게 보아서는....논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