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을 보는 것 같다. 박남희 시인의 시가 대개 그렇듯 이 시 역시 허투로 내놓은 작품이 아니다. 한 땀 한 땀 언어의 세공업자의 손끝에서 태어난 시들은 그 보법조차 단정하고 깔끔하다. 시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고 치밀하여 완벽주의자의 호흡을 느끼게 한다. 시인이 설계한 언어의 도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교통사고 후 몸에 나타난 통증이 화두로 등장한다. ‘통증’은 화자의 손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거덜 날 일만 남았다. 화자는 허공을 불러들여 한 자리에 앉혀 놓고 살피던 끝에 통증의 발원지가 허공임을 밝힌다. 무수히 많은 통증을 끌어안고 사는 허공은 어느 날 사고의 현장에서 통증의 일부를 “딱딱한 몸”에 옮겨 심는다. 그러고 보면 ‘딱딱함’은 곧 죽음과 근친인 것. 도무지 ‘부드러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극인 것. 여기서 화자는 말한다. “부드러움을 잃는다는 것이 사실은 통증”이라고. 노자 할배를 다시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발언은 귀에 익숙하다. 그러나 화자는 익숙한 내용을 익숙하지 않게 보여줄 줄 아는 프로이다. 아마추어라면 이 부분에 비점을 찍고 호들갑을 떨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시인은 눙치고 돌아서는 비법을 안다. 통증이 “이전의 누군가의 상처와 이별하느라고 /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라고 능청을 부린다. 그러한 통증을 몸에 모시고 화자는 곰곰 살펴본다. 대충 보아 넘기거나 어설프게 되작거리다가 죄인(?)을 그냥 놓아줄 시인이 아니다. 통증을 관통하고 그 실체를 일목요연하게 펼쳐보는 것이다. 화자는 적극적으로 통증을 끌어안고 친해지려고 노력하면서 현상과 존재의 이면을 탐색한다. 서서히 통증이 몸 안에서 놀기 시작한다. 태동이다. 가만히 귀를 대고 들어보면 신생의 뜨거운 기운이 살아 꿈틀댄다. 화자는 마침내 통증을 시로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손은 떨리고, 심장은 뜨거워진다. 그것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희열인 것이어서 시의 고압전류에 감전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시를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시는 통증을 옮기는 작업이다. 그러한 일이 권력도 명예도 되지 않는 검불같이 무용한 것이지만 시인은 만상의 미세한 움직임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우주의 비의에 전율하면서 운명처럼 시를 쓰고, 시를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