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풍수원 성당
간략설명: 숨어 신앙을 유지한 산골에 세워진 강원도 첫 번째 성당
도로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1888년 6월 20일 본당이 설립되어 풍수원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벽돌 조적 건축물이자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고딕 ·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 조적 성당이다. 이런 이유로 성당 건물은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고,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 건립에 들어가 이듬해 완공하여 현재는 유물관으로 사용하는 구 사제관 또한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구 사제관은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 조적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인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식솔을 이끌고 혹은 혈혈단신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복자 신태보 베드로(申太甫, 1769?-1839년)는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유난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감히 다가들지 못하는 첩첩산중에서 이들 신앙 공동체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기도와 생활을 영위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때 풍수원에 정착한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었다.
이렇게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끼리 모인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우들은 처음 풍수원으로 찾아든 이래 무려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룬 채 믿음을 지켜 왔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그 이듬해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봐주기를 열망하였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민 대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이(李)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됐고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등 주위의 본당들은 모두 풍수원으로부터 분가되어 나온 것이다. 이처럼 강원 지역 전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풍수원 성당에는 오랜 세월 성숙된 신앙의 유산을 배우고 묵상하고자 지금도 많은 신자가 찾아오고 있다.
풍수원 성당은 개인이나 가정 또는 단체로 피정을 할 수 있는 피정의 집과 1997년 구 사제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1999년 5월 11일 유물관을 개관하였다. 유물관에는 초기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역대 본당 신부들이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등 다양한 역사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전시하였다.
풍수원 성당과 횡성군은 2000년부터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성당 일대에 유현 문화관광지(바이블 파크)를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성당 일대에 조성되는 유현 문화관광지는 성지를 방문하는 신자들을 위한 대형 광장과 진입로, 유물전시관, 피정의 집과 휴양촌, 지하성당과 가마터를 복원한 역사마을 등을 순차적으로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2002년부터 본격화된 유현 문화관광지 조성 사업의 하나로 그해 5월 23일 십자가의 길 축복식을 거행하고 진입로 확장 공사도 마쳤다. 2003년에는 금대리에 있는 유현 초등학교 금대 분교(2001년 폐교)를 임대하여 생명학교를 운영하며 귀농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인과 가정, 단체로 피정이 가능한 청소년 야영장도 마련하고,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산 정상에는 회개동산을 조성하였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사업이 지연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당 뒤편에 강론광장을 조성하고 그 옆에 신앙 선조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농기구와 민속품, 성물과 기도서 등을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여 2013년 4월 30일 축복식을 가졌다.
이로써 유현 문화관광지 1단계 조성 사업을 마친 원주교구와 횡성군은 2단계 사업 또한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성당 건축을 위해 벽돌을 구웠던 가마터와 말을 세워 놓고 쉬어 가던 원(院)터와 쉼터 등을 조성하였다. 2018년 6월 20일에는 본당 설립 130주년을 경축하며 유물관으로 사용하던 구 사제관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갖고 역사관으로 새로 개관했다.
풍수원 성당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 · 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 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 성당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29일)]
복자 신태보 베드로(1769?-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제2대 주임신부 정규하(鄭圭夏) 바오로(1863-1943년)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부(父)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모(母)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병인(丙寅) 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忠州)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 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강원도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 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 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초, 동학혁명의 실패와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산골인 풍수원에도 나타나곤 했는데 그들을 맞아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고 풍수원 본당 교우들 중에도 상당수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건평 120평의 연와조 성당을 건축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을 개설하고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삼위학교는 후일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42년 노환으로 보좌 김학용(金學用) 신부에게 풍수원 본당의 운영을 맡기고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 풍수원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